악령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57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박혜경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간의 한계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악령‘를 다시 읽고


5년 만에 다시 '악령'을 읽으며 나는 이번에도 이 작품을 관통하는 렌즈로써 제사로 쓰인 누가복음 8장 32-36절을 의지하게 된다. 한 사람 안에 들어가 있던 악령들이 예수의 허락으로 인해 돼지 속으로 옮겨갔고, 그 돼지떼는 비탈을 내리 달려 모두 호수에 빠져 죽은 일화가 소개된 성경본문이다. 


초독 때 나는 이 본문에서 악령들이 처음 거하던 한 사람을 스쩨빤 뜨로피모비치 베르호벤스키로, 돼지떼를 스쩨빤의 아들 표뜨르 스쩨빠노비치 베르호벤스끼를 필두로 한 5인조로 보았다. 뚜르게네프의 소설 ‘아버지와 아들’의 핵심 구도를 따라 아버지 세대로부터 아들 세대로, 마치 악령이 한 사람으로부터 돼지떼로 옮겨가듯, 사상과 이념이 전달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 작품의 또 다른 축인 스따브로긴을 악령의 영향력을 강조하고자 설정된 인물로 보았다. 제사에 비춰볼 때 스따브로긴은 악령이 깃든 한 사람도 아니고, 악령이 옮겨간 돼지떼에 속하지도 않는 독립된 존재이지만, 두 존재 모두와 연결되고 그들보다 압도적으로 우위를 점하고 있는 듯한 초월적인 인물로서 마치 악령이 인간의 몸을 입고 나타난 존재인 듯한 뉘앙스를 풍긴다. 재독을 하고 나서도 초독 때와 그리 다르지 않은 반응이지만 이 글에서는 그때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 세 명의 인물 위주로 나눠 볼까 한다. 


1. 스따브로긴

먼저 '악령'이 '백치' 다음에 쓰였다는 점이 눈에 밟혔다. '백치'의 미쉬낀 공작은 도스토옙스키가 그리스도를 형상화한 인물이다. 신이 사람의 몸을 입고 나타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신'은 선과 악의 이분법에서 선에 해당되는 영적 존재다. 이번에 '악령'을 재독 하면서 미쉬낀 공작의 대척점에 위치한 인물이 바로 스따브로긴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악마가 인간의 몸을 입고 나타난 경우랄까? 도스토옙스키가 실제로 그랬을 거라는 정보는 없지만 (적어도 나는 가지고 있지 않다), 그가 스따브로긴을 묘사한 부분을 살펴보면 충분히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다. 


스따브로긴은 5인조의 우두머리 격인 표뜨르가 유일하게 인정하고 무릎을 꿇는 우월한 이미지의 소유자로서 사상과 이념은 물론이며 자신을 낳은 어머니인 바르바라를 포함한 주위 모든 사람들에게 압도적인 영향력 (제다이 식 표현으로는 다크 포스라고 할까?)을 끼친다. 영적이고 정신적인 면만이 아니다. 그는 신체적으로도 알파 메일 (Alpha male)처럼 덩치도 클 뿐 아니라 완력도 보통 남자들보다 세다. 게다가 외모도 수려하여 군중 속에 있으면 결코 묻힐 인물로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여러 여자들과 관계를 갖는 걸로 나오는데, 단 한 경우도 그가 따라다닌 적이 없었다. 마치 그는 모든 여자들에게도 압도적인 매력을 발산하여 원하기만 하면 관계를 가질 수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스따브로긴은 금수저이기도 하다. 평생 아무것도 안 해도 충분히 먹고살 돈이 어머니인 바르바라로부터 공급된다. 이런 여러 가지 특징들은 그를 결코 평범하게 볼 수 없게 만드는데, 내 눈엔 도스토옙스키가 스따브로긴에게 남자로서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매력과 지도자로서 가질 수 있는 최고의 힘을 모두 몰아준 것처럼 보였다. 물론 여기까지만 보면 인간계에서 가장 강한 인물 정도로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부록이자 마지막 장인 '찌혼의 암자에서'에서 찌혼 신부와 대화하는 장면을 살펴보면, 스따브로긴은 밤마다 일종의 환각 증상을 겪는다고 고백하는데, 가끔씩 자기 옆에서 조소를 보내는 이성적인 사악한 존재를 보고 느끼고 있으며, 그것들은 여러 가지 얼굴과 여러 가지 인격을 띠고 있지만 결국 같은 것으로 그를 언제나 화나게 만든다고 말한다. 그는 실제로 악령 같은 어떤 형상을 보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이 부분에서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 등장하는 둘째 아들 이반 카라마조프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 역시 무신론을 설파하고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신념에 사로잡혀 스메르쟈꼬프에게 살인을 종용한 혐의를 띠고 마지막에 가서 악령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스따브로긴이 인간의 몸 안에 갇힌 악마가 아니라면, 적어도 주위 그 누구보다도 그 악령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인물이라고 볼 수 있겠다.


뿐만이 아니다. 스따브로긴은 '찌혼의 암자에서'에 나오는 격문 같은 글 (일종의 고백록)을 기록하면서 여러 번 강조하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그가 자신의 주인이라는 점이다. 그는 선한 행위에서도 만족을 느끼고, 악한 행동에서도 만족을 느낀다. 또한 지극히 수치스럽고 극도로 굴욕적이며 비열하고 무엇보다 우스꽝스러운 상황에서 그는 극단적인 분노와 더불어 믿기 어려울 정도의 쾌감을 느끼는데, 범죄의 순간에도, 목숨에 위험을 느끼는 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결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강조했던 자기가 자신의 주인이라는 말의 의미는 그가 저지른 모든 행위는 어떤 감정에 정복당해 수동적으로 실행한 게 아니라 완벽하게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는 단 한 번도 자기 자신에게 져 본 적이 없는 인물로 자신을 여기고 있었다. 이 무시무시한 논리는 그가 자신의 범죄를 고백하는 부분에서 혹시라도 받을 수 있는 선처 (범행동기를 어떤 특별한 환경이나 병에서 찾게 되면 형량이 감해지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를 미리 차단해 버리는 효과까지 낸다. 


흥미로운 점은 찌혼 신부가 스따브로긴의 글을 읽고 나서 그의 이면에 감춰진 의도를 알아채는 부분이다. 그는 스따브로긴이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것은 부끄러워하지 않으면서 참회는 부끄러워한다는 점을 짚어낸다. 그리고 스따브로긴이 자신의 심리에 도취되어 있다는 점도, 스스로 죄인이라고 하면서도 여전히 오만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점도 정확히 짚어낸다. 스따브로긴이 자신의 범죄행위를 솔직하게 고백하며 자기희생을 했지만, 그러면서까지 그는 자신의 그 염원에 짓눌려 여전히 회개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꿰뚫어 본 것이었다. 게다가 찌혼은 그런 모습의 스따브로긴이 여전히 악령에게 조종을 당하고 있음을, 악령에게 굴복당한 노예라는 사실을 정확히 알려주기도 하고, 그가 곧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되리라는 것을 예견하는 듯한 말까지 하게 되는데, 나는 이 부분에서 스따브로긴도 한낱 인간일 뿐이구나, 그렇게나 완벽한 조건을 두루 갖춘 존재였건만 결국 그도 악령에게 잡힌 자였구나,라는 사실을 목도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 사실이 스따브로긴의 자살로 그 실체를 드러내게 되었다고 보았다. 악령은 가장 악령 같았던 인물조차 말끔히 제거해 버린 것이었다. 악령의 궁극적 승리로 볼 수도 있겠다. 


2. 샤또프

이 작품에서 가장 불쌍하고 비극적인 인물로 나는 샤또프를 꼽는다. 단지 그가 표뜨르를 비롯한 5인조에게 살해당했기 때문도, 3년 만에 돌아온 아내가 스따브로긴의 아이를 출산했지만 그 새 생명을 경이롭게, 자신의 아들로 여기며 새로운 삶을 출발하려던 바로 그날 비극적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도 아니다. 그는 끼릴로프와 함께 스따브로긴으로부터 사상과 이념을 전수받은 '순수한 영혼'이었는데, 그 사상과 이념의 노예가 되어 마치 악령에 잡힌 듯 나머지 삶을 모조리 어둠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샤또프로부터 도스토옙스키의 자전적인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알다시피 도스토옙스키는 시베리아 유형 가기 전에는 공상적 사회주의 서클에 가입할 정도로 나름 진보적인 지식인에 속했다. 그러나 사형을 면하고 시베리아 유형 중 그는 신약성경을 반복해서 읽으며 기독교의 영향 아래 슬라브주의자로, 즉 보수적인 입장으로 전향하게 되었다. 샤또프 역시 스따브로긴 및 표뜨르와 함께 하다가 그들의 사상과 이념으로부터 탈퇴한 인물로 그려진다. 도스토옙스키의 전처를 비슷하게 밟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도스토옙스키는 샤또프를 죽이기로 했을까? 왜 자신의 모습이 투영된 그를 희생양으로 삼게 놔두었을까? 혹시 도스토옙스키 자신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였지만 샤또프는 끝까지 무신론을 고수했기 때문은 아닐까? 샤또프 역시 전향을 했지만 그 전향이 인생의 답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은 길은 결코 답이 될 수 없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3. 끼릴로프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하며 신이 되고자 했던, 그러나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해하기 가장 어려운 인물 중 하나였던 끼릴로프가 '악령'을 다시 읽으며 측은하게 여겨졌다. 그가 아이와 함께 공 가지고 노는 장면, 공으로 운동을 하며 건강을 챙기는 장면, 돌아온 아내 때문에 마실 것과 먹을 것이 필요해서 자기를 찾아온 샤또프에게 모든 것을 다 흔쾌히 내어주는 장면, 그리고 샤또프에게 건네는 따스한 말에서 나는 이상하리만큼 끼릴로프의 죽음이 안타까웠다. 그가 신봉하는 인신 사상은 도저히 내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 사상만 아니라면 끼릴로프가 참 괜찮은 인격의 소유자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이 작품에 등장한 인물 중 가장 너그럽고 지혜 있는 듯한 사람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도스토옙스키는 왜 끼릴로프에게 이런 인격을 심어 놓았을까? 자살로 생을 마감할 것을 온 천하에 알린 사람에게 왜 이런 인격을 허락했던 걸까? 아무리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이라도 특정 사상과 이념에 잡히게 되면 엉뚱한 짓을 저지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던 건 아닐까? 인간이 신이 되고자 하는 인신 사상은 신이 인간이 된 신인 사상과 정반대 되는 개념이다. 그가 '악령' 이전에 '백치'를 썼다는 점에 비춰 보아도 인신 사상은 조롱받아 마땅한 사상이었을 것이다. 끼릴로프가 자살로 이룬 건 신이 아니라 피와 뇌수가 난자한 비참한 인간의 사체일 뿐이었다는 점은 이를 극명하게 대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인간은 그 어떤 이유로도 신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세 명의 인물을 조금 자세하게 들여다보며 재독 감상문을 마치려 한다. 세 명의 공통점은 모두가 인간의 한계를 절묘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것에서 우월해 보이는 스따브로긴도, 사상과 이념의 전향을 스스로 이뤄낸 샤또프도, 누구보다 훌륭한 인격을 가진 것으로 보이는 끼릴로프도 결국 악령 같은 그 무엇에 사로잡혀 스스로의 한계에 부딪힌 채 죽음을 맞이했다. 그들에게 구원은 존재하지 않았고 끝까지 무신론 및 허무주의를 신봉했다. 그들에게도 라스꼴리니꼬프의 소냐와 같은 구원의 한 줄기 빛이 임했다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그들에게도 도스토옙스키가 그랬던 것처럼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으로 거듭나는 기회가 주어졌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든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지 않으면 인간은 악령 같은 사상이나 이념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는 존재론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메시지로도 이 작품을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다른 인물들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지만, 지면이 모자란 관계로 독서모임에서 풍성하게 나누는 것으로 대체하려 한다. 함께 읽고 나눈 것을 정리해서 남기도록 하겠다. 요즘 같은 시대에 이런 문학 작품으로 깊은 나눔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유독 소중하게 느껴진다. 


* 도스토옙스키 다시 읽기

1. 가난한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690

2. 분신: https://rtmodel.tistory.com/1696

3.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739

4. 상처받은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744

5. 죽음의 집의 기록: https://rtmodel.tistory.com/1761

6. 지하로부터의 수기: https://rtmodel.tistory.com/1776

7. 죄와 벌: https://rtmodel.tistory.com/1807

8. 노름꾼: https://rtmodel.tistory.com/1819

9. 백치: https://rtmodel.tistory.com/1849

10. 악령: https://rtmodel.tistory.com/1882


* 도스토옙스키 처음 읽기

1. 죄와 벌: https://rtmodel.tistory.com/811

2. 백치: https://rtmodel.tistory.com/815

3. 악령: https://rtmodel.tistory.com/879

4. 미성년: https://rtmodel.tistory.com/928

5.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https://rtmodel.tistory.com/1068

6. 죽음의 집의 기록: https://rtmodel.tistory.com/1087

7. 가난한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153

8. 분신: https://rtmodel.tistory.com/1159

9. 지하로부터의 수기: https://rtmodel.tistory.com/1171

10. 노름꾼: https://rtmodel.tistory.com/1174

11. 도스토옙스키 (by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 https://rtmodel.tistory.com/1077

12.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177

13.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by 이병훈): https://rtmodel.tistory.com/1194

14. 매핑 도스토옙스키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358

15. 도스토옙스키의 명장면 200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362

16. 난데없이 도스토옙스키 (by 도제희): https://rtmodel.tistory.com/1388

17.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396

18. 상처받은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429

19. 악몽 같은 이야기: https://rtmodel.tistory.com/1435

20. 악어: https://rtmodel.tistory.com/1436

21. 인간 만세!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488

22. 도스토옙스키를 쓰다 (by 슈테판 츠바이크): https://rtmodel.tistory.com/1625

23. 도스토옙스키가 사랑한 그림들 (by 조주관): https://rtmodel.tistory.com/1644

24. 백야: https://rtmodel.tistory.com/1659

25. 뽈준꼬프: https://rtmodel.tistory.com/1702

26. 정직한 도둑: https://rtmodel.tistory.com/1703

27. 크리스마스 트리와 결혼식: https://rtmodel.tistory.com/1704

28. 꼬마 영웅: https://rtmodel.tistory.com/1706

29. 약한 마음: https://rtmodel.tistory.com/1707

30. 남의 아내와 침대 밑 남편: https://rtmodel.tistory.com/1711

31. 농부 마레이: https://rtmodel.tistory.com/1717

32. 보보끄: https://rtmodel.tistory.com/1719

33. 백 살의 노파: https://rtmodel.tistory.com/1721

34. 우스운 사람의 꿈: https://rtmodel.tistory.com/1722

35. 온순한 여자: https://rtmodel.tistory.com/1723

36. 예수의 크리스마스 트리에 초대된 아이: https://rtmodel.tistory.com/1724

37. 영원한 남편: https://rtmodel.tistory.com/1823

38. 아홉 통의 편지로 된 소설: https://rtmodel.tistory.com/1825

39. 쁘로하르친 씨: https://rtmodel.tistory.com/1827

40. 도스토옙스키의 철도, 칼, 그림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867


#열린책들 

#김영웅의책과일상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