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받은 사람들 1 열린책들 세계문학 129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윤우섭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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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의 시작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상처받은 사람들‘을 다시 읽고

물리적인 면에서 이 작품은 분량이 만만치 않다. 단편, 중편, 장편을 나누는 기준이 저마다 다르겠지만, 지난 작품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이 짧은 장편이라고 할 때, 이 작품 '상처받은 사람들'은 긴 장편에 속한다. 분량이 두 배 가량이고, 도스토옙스키 초중기 작품 중 가장 길다 (열린책들 버전으로 600 페이지가 넘는다). 일견 벽돌을 떠올리게 하는 후기작인 5대 장편을 읽어내기 위한 중간단계, 혹은 연습용으로 적절하다는 생각이다. 

도스토옙스키 작품은 후기로 접어들수록 분량이 늘어나는 경향을 보인다. 도스토옙스키를 한 번도 읽어보지 않은 사람들도 제목 정도는 들어봤음직한 작품들이 모두 후기작에 속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도스토옙스키의 진면목은 단편보다는 장편에서 도드라진다고 해석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실제로도 그렇다. 도스토옙스키를 읽어보고 싶어 한두 작품 추천해 달라고 하면 나는 당연하다는 듯 '죄와 벌'이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고른다. 모두 후기작품들이다. 하지만 도스토옙스키 작품을 출간순으로 읽어나가는 독자가 있다면, 혹은 중기작품도 읽어보고자 하는 독자가 있다면, 나는 이 작품을 절대 놓치지 마라고 권하고 싶다. 물리적인 면에서나 내용적인 면에서 이 작품은 중기작을 대표한다고 평가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재독 하면서 이 작품을 사랑하게 되었다. 물리적인 면은 이미 얘기했으니 내용적인 면에서 왜 그러한지 아래에 조금 더 적어보겠다.

첫 번째는 물리적인 분량이 늘어남에 따라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출간 순으로 볼 때 이 작품에서 처음으로 주인공뿐만이 아닌 여러 다른 등장인물들에 대한 설정 및 묘사가 본격적으로 섬세하고 구체적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그들은 그들만의 캐릭터와 서사를 가진다. 그 결과 서사의 축이 주인공을 중심으로 한 축만이 아닌, 비록 규모는 작더라도, 주변 인물들을 중심으로 하는 두세 개의 축이 한 작품 안에 공존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들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서로 얽히고설키면서 조금 더 복잡하고 조금 더 방대한 이야기 숲을 이루게 된다. 바로 이것이 물리적인 분량을 제외하고 내가 이 작품을 도스토옙스키의 공식적인 첫 장편소설이라고 분류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다. 

서사의 축들은 도스토옙스키의 타고난 통찰력 덕분에 한층 더 깊어진다. 도스토옙스키는 그가 창조해 낸 인물들의 내면 깊숙한 곳까지 침투하여 그들의 숨겨진 심리까지도 발려내고 독자들로부터 경탄을 자아내게 만든다. 게다가 도스토옙스키만의 고유한 주사현미경은 주인공만 집중하지 않고 여러 인물들의 심리까지도 들여다보기 때문에 독자의 경탄은 다중적일 수밖에 없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과 뭔가 다르다고 느끼는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이 다중성 때문이지 않을까 한다.  

‘분신’은 주인공 골랴드낀에 대한 서사의 축과 그의 심리 분석이 강하게 드러난 작품이다. 이에 반하여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의 경우는 아저씨 예고르와 식객 포마, 이 두 인물에 대한 서사와 분석이 대립되며 펼쳐진다. 분량이 증가함에 따라 인물 구도가 복잡해지고 깊어지는 것이다. 이 작품 ‘상처받은 사람들’ 역시 이 흐름이 그대로 반영된 결과로 보인다. 주인공인 알료샤와 나따샤는 물론 화자인 바냐, 얄료샤의 아버지인 발꼬프스키 공작, 나따샤의 아버지인 이흐메네프, 바냐의 친구이자 정보원인 마슬로보예프, 그리고 공작의 숨겨진 딸이자 학대받는 상황에서 태어나고 자라 고아가 되어버린 넬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물들의 서사의 축이 혼재하고, 그들의 캐릭터가 꽤 구체적이고 효과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런 것들이 위에서 언급한 다중성의 실체일 것이다. 

초독 때에도 느꼈지만, 이번에도 나는 발꼬프스키 공작의 말과 행동을 보면서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아버지 표도르 카라마조프를 떠올렸다. 표도르의 파렴치함과 거침없는 부도덕함, 그리고 탐욕스러움과 방탕함은 약 20년 전에 쓰인 이 작품 ‘상처받은 사람들’ 속 발꼬프스키 공작의 모습으로 이미 형상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요컨대 발꼬프스키는 표도르 카라마조프의 전신인 셈이다. 그런데 비록 추잡한 캐릭터지만, 발꼬프스키는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표도르가 살해되는 것처럼 이 작품에서 살해되지는 않는다. 살해는커녕 그 어떤 위협도 받지 않는, 압도적으로 우월한 위치를 처음부터 끝까지 유지하는데, 그가 이렇게 활개를 칠 수 있었던 이유가 나는 이 작품 속에 스메르쟈꼬프가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런 면에서 이 작품은 비뚤어질 대로 비뚤어진 악의 화신이 등장하지 않는 얌전한 소설이라고 해석해도 될 것 같다. 흥미롭게도, 남을 해치는 악인과 그 악인이 저지르는 살인은 후기작에 등장하는 단골소재 중 하나다. 도스토옙스키는 초기작에서는 정신병원에 보내는 정도로 문제적인 인물들을 처리했다면, 후기작에서는 그들에게 죽음을 부여하거나 (자살) 남을 죽이게 만드는 (살인) 역할을 부여하게 되는 것이다. 중기 대표작이라고 평가하는 이 작품은 이러한 도스토옙스키 변화의 중간단계를 볼 수 있는 의의도 가진다. 자살도 살인도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지만, 죽음이라는 소재가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하고, 그 죽음은 마치 발꼬프스키 공작을 간접적인 살인자라고 비난이라도 하려는 듯한 형태로 넬리와 넬리 엄마와 넬리 할아버지에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강자는 끝까지 강자로 남고, 약자도 끝까지 약자로 남는다는 메시지로도 이 작품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작품을 읽다가 전세 역전을 기대했건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상처받은 사람들은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에 해당될진대 유독 죽음은 약자에게만 불어닥친다. 이런 면에서 이 작품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이 작품은 '바냐'라는 이름의 한 작가가 일인칭 화자로 등장한다. 작품 속에서 그는 현실 속 도스토옙스키와 동일하게 첫 소설 '가난한 사람들'을 출간하고 화려한 데뷔를 했으며 생계형 작가로 살아가고 있다. 도스토옙스키의 경험이 그대로 담겨 있는 작품인 것이다. 그러므로 바냐는 도스토옙스키의 자서전적 분신이라고 해석할 수 있겠다. 그는 사건에 직접 개입하기도 하고, 이미 다 지난 일들을 종합하여 회고록 형식으로 들려주기도 한다. 하지만 바냐는 화자일 뿐 주인공은 따로 있다. 알료샤와 나따샤가 바로 그들이다. 나는 이 작품을 재독 하면서 특별히 이 두 주인공의 캐릭터에 집중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내가 이 작품을 중기 대표작이라고 평가하는 두 번째 이유와 관련이 깊다. 

첫 번째 이유가 양적인 측면을 말한다면 두 번째 이유는 질적인 측면에 대해서다. 도스토옙스키는 인물 설정과 묘사에 있어서, 특히 알료샤와 나따샤의 관계를 선악의 대립 혹은 단순한 연인으로 설정하지 않는다. 대신 두 사람을 도스토옙스키의 이전 작품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았던 새로운 인물로 만들어 선보인다.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에서 예고르와 포마의 대립 구도는 선악의 이분법으로 어느 정도 해석이 가능했다. 나는 예고르를 백치 (유로지비)의 원형으로 보았고, 포마를 골랴드낀의 변주로 해석했다. 그러나 알료샤와 나따샤의 관계는 독특하다고 말할 수 있는데, 재독 하면서 내 눈에 띈 구도는 선악이나 남녀의 이분법이 아닌 각각 천진난만함과 성숙함으로 표현할 수 있는 그 무엇이었다.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알료샤는 아이 같은 천진난만함 혹은 순수함을 대변하는 인물로, 나따샤는 아이와 반대되는 속성이라고 할 수 있는 어른의 성숙함 혹은 어른스러움을 대변하는 인물로 등장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는 서로를 배우자로 믿고 함께 할 만한 교집합이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알료샤에게는 성숙함이, 나따샤에게는 천진난만함이 부재한 것처럼 보였다. 둘은 서로를 위해 죽을 수도 있을 것처럼 사랑한다고 고백하지만, 그들이 고백하는 사랑은 동경이라고 해야 할 그 어떤 감정에 가까운 것으로 보였다. 서로에게서 서로에게 없는 여집합을 발견하고 추앙하는 마음이 들 수는 있으나 그것만으로 부부가 되기에는 함께 지난한 일상을 헤쳐나갈 동력이 터무니없이 부족했을 것이란 생각이다. 알료샤는 나따샤와 함께 있을 때면 지루함을 느낀다고 나오며, 나따샤 역시 알료샤와 함께 있을 땐 알료샤의 그런 모습을 안타깝게 여기고는 그 결핍을 자기가 채워줄 수 없다는 사실로 인해 마음 아파한다. 어쩌면 두 사람 사이의 사랑은 작품 마지막 페이지에 나따샤가 언급하듯 한 여름밤의 꿈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서로가 스스로 깨닫게 되는 과정이 이 작품의 중심 서사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비록 이 작품이 물리적인 면에서나 내용적인 면에서 본격적인 장편소설로 형태를 갖추는 시초라는 의의를 갖지만, 후기작품과 비교할 때 아무래도 엉성하고 석연찮은 부분이 눈에 띈다. 먼저는 화자 바냐의 존재감이다. 작품을 이루는 여러 서사의 축에 모두 관여하는 위치에 놓인 주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존재감은 결코 강하다고 할 수 없다. 더욱이 바냐는 작품 초반부터 나따샤와 연인으로 발전할 수 있는 적임자로 등장한다. 나따샤가 바냐가 아닌 알료샤를 택하고 바냐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장면들은 솔직히 21세기 대한민국에 사는 나로서는 공감하기가 쉽지 않았다. 바냐는 성인군자인가, 하는 의문을 좀처럼 제거할 수 없었다. 만약 이 작품의 후속작이 존재했다면 그가 나따샤의 남편으로 등장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물론 여기에도 도스토옙스키의 숨은 의도가 있다고 상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바냐는 가난한 청년이었고 관직과 상관없는 생계형 작가였는데, 도스토옙스키는 자신의 자서전적 분신인 바냐로부터 연민을 느끼는 동시에 그에게 생계형 작가의 현실적 삶을 그대로 투영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또 다른 아쉬운 부분은 도스토옙스키가 발꼬프스키 공작에게 고삐를 좀 더 풀었으면 좋았겠다는 점이다. 빌런이 빌런다워야 영화나 이야기가 더 재미있는 법이고, 어둠이 더 어두워야 한 줄기 빛의 존재와 의미가 더 소중하고 가치 있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미흡한 점들마저도 나는 좋기만 하다. 이렇게 출간순으로 도스토옙스키 전작을 읽어나가는 경험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럽고, 초독 때 몰랐던 여러 부분들을 재독 하면서 알아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이 가진 불완전함이야말로 이 작품이 중기 대표작이라고 할 만한 가장 중요한 이유일지도 모른다.

나 역시 어느 부분에서는 상처받은 사람일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길 여전히 꿈꾼다. 자기 객관화를 끊임없이 지향하고 어른다운 성숙함을 보이면서도 아이 같은 천진난만함을 소유하고 있는 자. 눈이 깊으면서도 탁하지 않고 맑은 자. 곧 나따샤와 알료샤로 분리되지 않고 둘이 한 몸으로 이루어진 인격체가 되어가길 소망한다. 

*도스토옙스키 다시 읽기
1. 가난한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690
2. 분신: https://rtmodel.tistory.com/1696
3.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739
4. 상처받은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744

* 도스토옙스키 처음 읽기
1. 죄와 벌: https://rtmodel.tistory.com/811
2. 백치: https://rtmodel.tistory.com/815
3. 악령: https://rtmodel.tistory.com/879
4. 미성년: https://rtmodel.tistory.com/928
5.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https://rtmodel.tistory.com/1068
6. 죽음의 집의 기록: https://rtmodel.tistory.com/1087
7. 가난한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153
8. 분신: https://rtmodel.tistory.com/1159
9. 지하로부터의 수기: https://rtmodel.tistory.com/1171
10. 노름꾼: https://rtmodel.tistory.com/1174
11. 도스토옙스키 (by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 https://rtmodel.tistory.com/1077
12.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177
13.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by 이병훈): https://rtmodel.tistory.com/1194
14. 매핑 도스토옙스키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358
15. 도스토옙스키의 명장면 200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362
16. 난데없이 도스토옙스키 (by 도제희): https://rtmodel.tistory.com/1388
17.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396
18. 상처받은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429
19. 악몽 같은 이야기: https://rtmodel.tistory.com/1435
20. 악어: https://rtmodel.tistory.com/1436
21. 인간 만세!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488
22. 도스토옙스키를 쓰다 (by 슈테판 츠바이크): https://rtmodel.tistory.com/1625
23. 도스토옙스키가 사랑한 그림들 (by 조주관): https://rtmodel.tistory.com/1644
24. 백야: https://rtmodel.tistory.com/1659
25. 뽈준꼬프: https://rtmodel.tistory.com/1702
26. 정직한 도둑: https://rtmodel.tistory.com/1703
27. 크리스마스 트리와 결혼식: https://rtmodel.tistory.com/1704
28. 꼬마 영웅: https://rtmodel.tistory.com/1706
29. 약한 마음: https://rtmodel.tistory.com/1707
30. 남의 아내와 침대 밑 남편: https://rtmodel.tistory.com/1711
31. 농부 마레이: https://rtmodel.tistory.com/1717
32. 보보끄: https://rtmodel.tistory.com/1719
33. 백 살의 노파: https://rtmodel.tistory.com/1721
34. 우스운 사람의 꿈: https://rtmodel.tistory.com/1722
35. 온순한 여자: https://rtmodel.tistory.com/1723
36. 예수의 크리스마스 트리에 초대된 아이: https://rtmodel.tistory.com/1724

#열린책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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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삶 - 타인의 눈으로 새로운 세계를 보는 독서의 즐거움
C. S. 루이스 지음, 윤종석 옮김 / 두란노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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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힘 그리고 읽고 쓰는 삶


C. S. 루이스 저, '책 읽는 삶'을 읽고


가방에 넣고 다니기에 아무런 불편함이 없을 정도로 아담한 사이즈의 이 책은 루이스의 여러 저작으로부터 독서에 관련된 문장들을 선별하여 엮은 것이다. 루이스의 작품을 두루 섭렵한 독자라면 굳이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 책의 제목이나 프롤로그 격의 '엮은이의 글'을 읽으면 곧장 이 책이 읽고 싶어질 것이다. 내가 그랬듯이 말이다. 루이스를 꽤 읽은 나로선 사실 정독할 만한 책은 아니었다. 조금은 낚였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낚여보는 것도 괜찮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었다. 꽤 유쾌한 일이었다. 버스를 타고 출퇴근하는 길에서 며칠간 십여 분 정도씩 읽어나가기엔 더할 나위 없이 적당한 책이었다. 


루이스가 책, 특히 문학에 대해 어떠한 입장을 가졌는지에 대해서는 여기에 따로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가 얼마나 뛰어난지에 대해서도 별다른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꼭 알고 넘어가면 좋은 것은 이 책의 제목 '책 읽는 삶'은 루이스가 실제로 살았던 삶이라는 사실이다. 조금 더 자세히 묘사하자면 '책 읽고 쓰는 삶'이라 할 수 있을 테고, 이를 좀 더 일반화시키면 '읽고 쓰는 삶'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는 정말 24시간 활자의 바다에서 산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범상치 않은 저작들의 출처를 그가 타고난 작가라는 이유에서만 찾는 것은 무례한 처사다. 그가 읽기와 쓰기에 들였던 시간은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루이스가 문학에 대해, 독서에 대해, 독서모임에 대해, 글쓰기에 대해 가졌던 생각들이 내겐 낯설지 않고 반가웠다. 나는 루이스의 변증서보다 소설을 좋아한다. 아마 루이스 역시 그러지 않았을까, 혹은 독자가 그러길 원하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그에게 있어 책과 글이란 상상력이 전제된 열매였다. 상상력은 곧 책과 글의 생명력과도 같았다. 루이스는 어린아이에게 신화를 읽히고 동화를 읽혀서 거인과 용과 난쟁이와 괴물로 인해 무서움을 느끼도록 허락하는 편이 강도나 도둑이나 강간범이나 살인자로 인해 공포를 느끼게 하는 것보다 안전하다는 식으로 말한다. 또한 허구가 현실을 능가하고, 허구가 현실보다 우월할 수 있으며, 허구 덕분에 현실을 등지는 게 아니라 허구 덕분에 오히려 현실을 더욱 견뎌내고 극복하며 살아낼 수 있다고 말한다. 나는 이 부분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루이스가 현실주의자가 아니라서 정말 다행이란 생각이다. 루이스가 말했듯 나도 인간은 오히려 허구가 전제된 문학을 통해 현실을 더욱 잘 분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문학의 힘을 믿는다. 문학만이 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믿는다. 지식 전달 위주로 쓰인 비문학보다 흥미를 전제로 하고 상상력과 허구로 옷을 입고 그 안에서 깊은 통찰을 깨닫게 해 주는 문학을 내가 더 사랑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루이스 발톱의 때도 되지 못하겠지만, 루이스와 이런 부분에서 같은 방향이라서, 이 또한 다행이라 생각한다. 


* 루이스 읽기

1. 예기치 않은 기쁨: https://rtmodel.tistory.com/682

2. 고통의 문제: https://rtmodel.tistory.com/695

3. 헤아려 본 슬픔: https://rtmodel.tistory.com/699

4.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 https://rtmodel.tistory.com/822

5. 천국과 지옥의 이혼: https://rtmodel.tistory.com/852

6. 순전한 기독교: https://rtmodel.tistory.com/911

7. 시편 사색: https://rtmodel.tistory.com/942

8. 순례자의 귀향: https://rtmodel.tistory.com/1164

9. 순전한 그리스도인 (by 김진혁): https://rtmodel.tistory.com/1176

10. 세상의 마지막 밤: https://rtmodel.tistory.com/1629

11. 침묵의 행성 밖에서: https://rtmodel.tistory.com/1633      

12. 루이스가 메리에게: https://rtmodel.tistory.com/1635

13. 페렐란드라: https://rtmodel.tistory.com/1637   

14. 개인기도: https://rtmodel.tistory.com/1653

15.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https://rtmodel.tistory.com/1658

16. 인간 폐지: https://rtmodel.tistory.com/1662

17. 책 읽는 삶: https://rtmodel.tistory.com/1742


#두란노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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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지음, 홍한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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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하지만 대단한 선택


클레어 키건 저,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읽고


클레어 키건의 문장들은 일견 건조하게 느껴진다. 따로 떼어내서 보면 실제로 그래 보인다. 그러나 그 문장들이 한데 모여 단락을 이루고, 그 단락들이 모여 한 편의 글이 되면 놀랍게도 아름다운 작품으로 탄생한다. 태연하고 무심하게 보이지만 알고 보니 누구보다 섬세하고 애정 어린 사람의 손길임을 문득 깨달았을 때와 같은 느낌일까. 그러므로 건조하게 느껴진 건 선입견으로 가득한 내 첫인상의 극히 일면일 뿐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나의 애정 없음일 뿐 저자의 애정 없음이 아니었다. 오히려 화려한 수사 없이도 이야기를 충분히 이끌고 갈 수 있는 저자의 저력이라 이해하는 편이 옳다는 생각이다. 또한 중첩되는 문장도 불필요한 문장도 찾아볼 수 없이 모든 문장이 유기적으로 짜인, 지극히 경제적이고 효율이 극대화된 글이 바로 키건의 글이 아닌가 한다. 신형철이 말한 '정확한' 글쓰기의 실례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키건의 작품엔 노트에 옮겨두고픈 명문도 많다. 무엇보다 압축적이고 함축적인 문장의 힘을 제대로 맛볼 수 있다. 아, 살면서 동시대에 이런 작가의 글을 읽을 수 있다는 건 큰 행운이리라.


그래서일까. ’맡겨진 소녀’에 이어 나는 책장에 일 년 넘게 터줏대감처럼 자리 잡고 있는 책들도 무시하고 최근에 책장에 꽂힌, 작년 출판계를 뜨겁게 달구었던 이 책 ’이토록 사소한 것들‘을 어젯밤 나도 모르게 손에 들고 읽고 있었다. 


‘맡겨진 소녀’가 사소한 일상의 조각을 한 폭의 감성적인 수채화로 담아냈다면, ‘이토록 사소한 것들’은 제목과 달리 결코 사소하지 않은 것들을 다룬다. 내용 면에서 나는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를 떠올렸다. 모두 수치스럽고 가슴 아픈 인간 역사의 단면을 중심 소재로 삼아 작가의 상상력을 입혀 소설화시킨 작품이기 때문이다. ‘소년이 온다’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다뤘다면, ‘작별하지 않는다’는 제주 4.3 사건을, 그리고 ’이토록 사소한 것들‘은 18-20세기 아일랜드에서 벌어졌던, 정부와 가톨릭교회가 합세하여 ‘타락한 여성들’이라는 명분으로 미혼모를 포함한 이런저런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사회적 약자층 여성들을 집단 수용하여 강제 노동시키고 학대했던 ‘막달레나 세탁소’의 현장으로 독자들을 데리고 간다. 


막달레나 세탁소는 공교롭게도 수녀원이었다. 성스러워야 할 장소는 인권유린의 현장이 되었다. 수녀들은 그들을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그들을 학대했다. 그곳에서 태어난 아기들은 흔적도 기록도 없이 어머니를 잃어야 했다. 아마 가톨릭에서 말하는 '죄'라는 명목을 들이대어 그들을 정죄하고 판단한 결과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정죄와 판단은 더 큰 죄악이 되었다. 한 사람을 보호하고 교화시키려다가 수많은 사람들을 집단 살인한 결과와 한치도 다르지 않은, 지울 수 없는 피의 열매를 맺었기 때문이다. 


작품 속 주인공 이름은 빌 펄롱, 때는 그 어느 겨울보다 추웠던 크리스마스 시즌이다. 빌 펄롱은 석탄을 보관하고 배달한다. 한파가 몰아쳐 그 어느 때보다 바쁜 일과를 보내고 있다. 그래봤자 아내와 다섯 딸로 이뤄진 한 가족의 끼니를 거르지 않고, 또 큰 빚을 지지 않을 정도로 삶을 겨우 지탱해나가고 있을 뿐이다. 그에겐 여유로운 것이 없었다. 하지만 부족한 것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매일 반복된 일상을 살아가며 그는 요즈음 뭔지 모를 공허를 느낀다. 


빌의 어머니는 일찍 죽었다. 사인은 뇌출혈이었다. 빌은 뒤늦게 어머니에게 자신이 미처 물어보지 못한 게 있다는 걸 알았다. 아버지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빌은 미혼모의 아들이다. 비록 어머니는 하녀 신세로 살아가는 저소득층에 속했고, 아버지는 본 적도 만져본 적도 없지만, 빌은 어머니와의 어린 시절 기억을 평생 가지고 있다. 그리고 어머니를 끝까지 보호해 주고 사회적으로 아무런 문제 없이 살 수 있게 해 준 미시즈 윌슨을 은인으로 여긴다. 미시즈 윌슨은 빌의 어머니가 뜻하지 않게 임신을 했을 때에도 그녀를 내치지 않고 계속 그 자리에서 일하게 해 주었다. 그건 은혜였다. 특히 가족들 모두가 그녀를 버렸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빌은 그렇게 자라고 결혼도 해서 딸을 다섯이나 낳았다. 


하지만 빌은 미시즈 윌슨이 아니었다면 흔적도 없이, 아무런 어머니에 대한 기억도 없이, 어디론가 이슬처럼 사라져 버릴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빌의 어머니도 미시즈 윌슨이 아니었다면 아일랜드 정부의 손아귀에 잡혀 수녀원의 탈을 쓴 막달레나 세탁소에 수용되어 학대를 당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미시즈 윌슨은 조용히 그녀가 해야 할 일을 했다. 어쩌면 해야만 한다고 믿었던 일을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대단한 선택이었지만, 결코 큰 일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녀에겐 사소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선택이 가능했던 이유는 미시즈 윌슨이 독실한 가톨릭 신자가 아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덕분에 빌의 어머니도 빌도 비극적인 운명에 놓이지 않을 수 있었다. 미시즈 윌슨의 선택이 그녀 자신에겐 사소했을지 모르지만, 빌의 어머니와 빌에게는 인생 전체였다. 


빌이 느끼는 공허가 어쩌면 부채감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석탄 배달을 하러 수녀원을 찾았다가 우연히 발견한 한 소녀를 보고 난 이후 그것은 눈덩이처럼 커졌을 것이다. 석탄 창고에 갇혀 밤새 추위에 떨다가 빌에게 우연찮게 발견된 그 소녀는 학대받는 아이였다. 막달레나 세탁소에 잡혀 아무런 이유도 모른 채 강제 노동에 시달리던 아이였다. 그리고 그 소녀는 평행우주 속 빌의 어머니였을지도 모른다. 빌은 마음이 복잡해졌다. 이 정도면 살 만하다고 여기며 감사하게 살고 있었지만, 그 소녀를 본 순간 자신의 평안한 삶이 결코 평안해선 안 되는 것처럼 여기기 시작했던 듯하다. 빌은 크리스마스의 즐거움도 잊은 채 깊은 고민에 빠졌다가 몰래 수녀원을 다시 찾아 그 소녀를 집으로 데리고 가는, 사소하지만 대단한, 결단을 내리고 실행에 옮긴다.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가는 길에 동네 주민들을 마주친다. 빌은 잠시 자신의 행동이 맞는 것인지 갈등하고 망설이기도 한다. 앞으로의 일들이 그려져 염려되기도 한다. 하지만 꿋꿋이 아이의 손을 잡고 앞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그는 마음 저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오르는 희열을 느낀다. 공허가 사라짐을 느낀다. 비로소 은혜로 비롯된 삶의 향방을 발견한 것이었다. 


막달레나 세탁소는 두 세기 동안 유지되었다. 아일랜드 정부와 가톨릭교회의 합작이었지만 그렇게 긴 시간 동안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는 주민들의 암묵적 묵인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빌은 몰랐지만, 그의 아내 아일린은 동네 주민들처럼 수녀원의 은밀한 정체를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자기 딸 다섯이 그곳의 아이들과 다르다는 사실로 만족해했다. 그들은 그들 사정이고, 내 딸은 내 소관이라는 식으로 보이지 않는 선을 긋고 살아가고 있었다. 아일린은 빌을 제외한 많은 주민들을 대표하는 이름이지 않을까, 하고 나는 해석해 본다. 작품에는 더 이상 이야기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빌이 그 소녀와 함께 집에 들어섰을 때 아일린의 표정과 반응이 궁금하다. 그리고 조용히 나는 나 자신에게 묻는다. 나는 과연 빌일 수 있는지, 혹시 아일린이나 동네 주민에 머물고 있진 않은지.


불의를 묵인하는 건 사소하다. 정의를 지키기 위한 작은 선택을 하는 것 또한 사소하다. 그러나 두 가지 모두 대단한 일이다. 큰 파급효과를 낸다. 불의를 묵인한 자는 불의 앞에서 눈을 돌리고 정의 앞에서도 눈을 돌리게 된다. 눈을 둘 데가 없어 그저 허공이나 바닥만 쳐다보게 된다. 방어적이고 사적이게 된다. 하지만 정의를 지키기 위해 작은 선택을 한 자는 불의 앞에서 눈물을 흘릴 수 있고 자신의 희생을 감내하더라도 타자를 살려내는 일에 몸을 던진다. 그것이 지극히 사소한 일이라도 상관없다. 살리는 일이면 된다. 은혜를 갚는다는 마음이라도 좋다. 살릴 수 있다. 나의 사소한 선택은 대단한 선택이 될 수 있다. 


클레어 키건의 두 작품을 내리읽으며 그녀의 문장들 속에서 사흘을 보냈다. 아름답다는 생각을 한다. 글만이 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걸 다시 깨닫게 된다. 문학의 힘을 다시금 믿게 된다. 


책을 다 읽고 책 앞부분에 적힌 헌사와 그 뒤에 따라오는 아일랜드 공화국 선언문을 발췌한 몇 문장도 다시 읽었다. 읽히지 않았던 것들이 읽혔고, 깨닫지 못했던 것들이 깨달아졌다. 행간이 이해가 되고 왜 그 글이 거기에 쓰여있는지 이해가 되었다. 작품의 시간적 배경이 왜 크리스마스 시즌인지, 왜 그해 12월엔 까마귀의 달이 되어야만 했는지도 덩달아 이해가 되는 것 같다. 그리고 다시 한번 클레어 키건이라는 작가를 경이에 찬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클레어 키건 읽기

1. 맡겨진 소녀: https://rtmodel.tistory.com/1740

2. 이토록 사소한 것들: https://rtmodel.tistory.com/1741


#다산북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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맡겨진 소녀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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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뎌진 칼의 예리함

클레어 키건 저, '맡겨진 소녀'를 읽고

여백이 많은 글은 독자가 개입할 여지를 남겨 두는 저자의 배려이자 독자가 그 여백으로부터 숨은 의도를 찾아낼 것이라 믿는 저자의 믿음이다. 단문으로 이루어진 글은 속도감을 내기에 적당하지만 그것보다는 간결함과 명료함으로 독자에게 선명한 인상을 남길뿐더러 글의 여백을 강화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

단문으로 가득하면서 여백이 많은 글을 만났다. 보리스 빅토르비치 사빈코프의 ‘창백한 말’ 이후 처음 느끼는 이 압도되는 기분. 나의 내면은 고요해지고 청명하게 깨어난다. 마치 이제껏 잠들어 있었던 것처럼. 마침내 현실로 돌아온 나는 클레어 키건의 작품들을 검색한다. 이미 가지고 있는 단 두 작품만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음을 확인한다. 아쉽지만 기다리기로 한다. 그리고 전작 읽기 작가 명단에 조용히 한 명 더 추가한다.

'아이를 맡아 기르다'라는 뜻을 가진 영어 원제는 'foster'이다. 한국어 제목은 '맡겨진 소녀'로 되어 있다. 실제로 작품은 한 소녀가 잠시 친척 집에 맡겨져 짧은 여름을 보내다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이야기다. 동사 한 단어를 한국어 제목으로, 그것도 직역하기에는 어려웠을 것이다. 작품은 소녀의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쓰이긴 했다. 그런데 한국어 제목은 '맡아 기르다'라는 원제가 나타내는 의미보다 그 동사가 실행한 대상인 '소녀'에 집중되는 효과를 낸다. 마치 소녀에게 어떤 대단한 일이 벌어지거나, 그 소녀가 어떤 특별한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불필요한 추측을 하게 만들기도 한다. 안타깝지만 이건 번역이란 행위 자체의 한계일 것이다. 

한국어 제목이 자아내는 추측과는 달리 이 작품은 서민 가정에서 태어난 평범한 한 소녀의 짧은 일상을 한 폭의 수채화처럼 담아낸다. 특별한 사건도 특별한 인물도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무 일이 벌어지지 않아 기발함이 강조되는 현대소설이나 웹소설에 길들여진 독자라면 이 작품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없을 정도다. 어쩌면 뻔한, 식상하고 상투적인 일상을 그저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저자 클레어 키건은 이토록 평범한 일상의 이야기로부터 보편적인 인간의 깊은 감성을 터치한다. 함축적이지만 화려하지 않고 간결하지만 가볍지 않은 문장들은 섬세한 관찰자의 시선으로 놓치기 쉽고 쉬이 무시되곤 하는 한 가닥의 감정선을 놀랍도록 정확하게 잡아낸다. 세월에 무뎌진 과도가 잘 벼려진 칼도 해내지 못한 폐부를 깊숙이 찔러 쪼개는 느낌이랄까. 그저 한 끝 더 나아갔을 뿐인데, 여전히 사소한 것들을 건드릴뿐인데 나는 이런 문장들 앞에서 붕괴될 수밖에 없었다. 아, 이런 무너짐이라니. 나는 다시 겸손하고 정갈한 마음으로 예배자가 되어 읽기와 쓰기의 신성함 앞에 무릎을 꿇는다. 

도스토옙스키를 재독하고 클레어 키건을 초독하는 이런 일상. 나의 ‘동수’를 살찌우는 밑거름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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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 열린책들 세계문학 114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변현태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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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적 자만심의 실체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을 다시 읽고


재독이 주는 유익은 깊이와 풍성함에서 찾을 수 있다. 초독과 재독 사이에 바뀌는 건 오로지 나 자신일 뿐 책은 그대로다. 그러나 재독 할 때마다 나는 책의 동일함보다는 상이함을 더 크게 느낀다. 예전에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고 (풍성함), 이미 보았던 것들은 재해석되어 (깊이) 새롭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같은 책을 다시 읽는 데에서 경험하는 익숙함과 반가움, 그리고 이전에 알지 못했던 것들을 새로이 알게 되는 낯섦과의 뜻밖의 조우. 이 모든 것들을 동시에 맛볼 수 있는 놀이가 바로 재독, 곧 깊이와 풍성함의 향연이다. 


현재 나에게 그 대상은 도스토옙스키이고, 나는 가능한 멀리 보면서 한 걸음씩 천천히 나아가고 있다. 평생 도스토옙스키 전작을 두 번 읽은 사람으로 기억되는 것도 꽤 의미가 있어 보인다. 아, 그 끝에 서면 어떤 기분일까. 나에게 선물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반드시 기념을 할 테다. 그러나 지금은 느리지만 부지런히 가능한 많은 것들을 글로 남기는 일에 매진해야 한다. 함께 읽어나가는 독서모임 가족들 덕분에 나는 재독의 즐거움과 '함께 읽기'의 기쁨을 한꺼번에 누리고 있다. 나중에 지금을 돌아보면, 살면서 아주 드물게 찾아오는 소중한 나날들로 기억하게 되리라.


초독 때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나는 이 작품을 빠르게 읽어낼 수 있었다. 재독 프로젝트의 첫 번째 작품, '가난한 사람들'이나 두 번째 작품, '분신'보다 분량은 증가했으나 페이지 당 머무는 시간은 오히려 더 짧았다. 읽기도 훨씬 수월했다. 이 작품이 도스토옙스키가 시베리아 유형을 다녀온 이후 작가로 재기하기 위해 출간한 소설이라는 점, 그래서 중기 작품으로 구분된다는 점,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로 일약 스타가 되었다가 '분신'으로 다시 나락으로 떨어졌던 그의 극적인 과거 이력을 감안할 때, 이것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 


하나는 대중적이고 기본적인 코드를 많이 활용했다는 점이다. 그래서인지 '가난한 사람들'이나 '분신'에서보다 서사가 돋보인다. '놀랍게도' 이 소설에는 뚜렷한 줄거리가 존재한다 (초기작들이 그렇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것은 놀라운 일이고 어쩌면 진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로 이어지는 소설의 기본적인 구성이 보인다. 문제가 주어지고 갈등과 위기가 닥치지만 마침내 해소가 되고 결국 문제도 해결되고 마는 소설의 전형을 선보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그 당시 재기를 노리고 있는 도스토옙스키의 마음가짐을 짐작해 본다. 그에게는 아마도 '타협'이라 부를 수도 있는 그 무엇을 고려한 결단이지 않았을까. 그의 초상화를 보니 그의 얼굴에서 왠지 초조함이 느껴지는 듯하다). 


다른 하나는 앞선 특징 때문에 부득이하게 맞이한 열매라고 할 수 있다. 대중성이 고려된 작품은 예술성 측면에서는 긴장이 풀어질 수밖에 없다. 도스토옙스키의 대표적인 특징 중 하나는 인간의 본성과 심리를 당황스러울 정도로 날 것 그대로 해부하여 독자들의 눈앞에 펼쳐놓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의 제부쉬낀이나 '분신'의 골랴드낀의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그 당황스러움의 정도가 약하다. 마치 등장인물들이 해부를 덜 마친 채로 수술대 위에 올라온 것 같은 느낌이다. 인간 본성과 심리에 대한 도스토옙스키의 치밀한 분석과 통찰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자주 코믹한 상황이나 돌발적인 상황으로 인해 가려지는 듯한 느낌도 든다. 이것은 아마도 '분신'의 골랴드낀이 도스토옙스키에게 남긴 상처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추측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충분히 도스토옙스키적인 소설이다. 주절주절 장광설을 늘어놓으며 도스토옙스키만이 창조해 낼 수 있는 광대 같은 인물, 그리고 그를 통해 도스토옙스키만이 보여줄 수 있는, 조소가 깃들고 뼈가 심긴 독특한 유머는 '가난한 사람들'이나 '분신'에서처럼 입체적으로 훌륭하게 그려져 있다. 또한 입을 쩍 벌리게 만드는 어찌할 수 없는 난처한 상황의 전개와 수습, 그리고 그 이면에 흐르는 인물들 내면의 변화 역시 지극히 도스토옙스키적인 명불허전의 터치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이 작품 속에서 가장 도스토옙스키다운 면이 도드라지는 부분은 포마 포비치라는 인물의 캐릭터 설정에서 찾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다. 포마 포비치는 작품 속에서 가시적인 문제의 핵심으로 소개된다. 일인칭 관찰자 시점의 이 소설 화자인 '나'는 성인이 되어 어릴 적 자랐던, 쓰쩨빤치꼬보 마을에 위치한 아저씨의 집을 갑작스레 방문하게 되는데, 그 이유가 포마 포비치라는 식객으로 인해 아저씨와 아저씨의 집이 곤란한 상황을 겪고 있었고, 난데없이 아저씨가 자기 가정교사교사와 결혼을 하라고 제안했기 때문이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게 확실했고 '나'는 직접 그곳으로 가서 문제를 확인하고 포마 포비치의 실체를 알아낸 후 쫓아버리는 방식을 써서라도 아저씨를 구하고 싶었다. 아저씨가 말한 가정교사라는 여자가 어떤지도 확인하고 싶었고, 갑작스러운 결혼 제안의 배경을 이해하고 싶었다. 이 작품은 이렇게 '나'가 아저씨 집을 다시 방문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도스토옙스키가 표현한 대로, 포마 포비치는 '기형적인 자만심'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다,라고 소개하면 아마도 그를 가장 정확하게 설명하지 않았을까 싶다. 초독 땐 이 작품의 두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아저씨와 포마 사이의 대립구도를 중심으로 책을 읽었던 것 같다. 재독 땐 포마의 캐릭터에 좀 더 집중하게 되었다. 포마에게서 ‘분신’의 골랴드낀의 냄새를 맡았기 때문이다. 


‘분신’은 도스토옙스키가 ‘가난한 사람들’로 단번에 얻은 대중적 명성을 다 갉아먹은 장본인이지만, 향후 거의 모든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정신병적인 인물들의 원형이 탄생한 작품이기도 하다. 이런 이유로 도스토옙스키를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가난한 사람들’보다는 ‘분신’이 더 중요한 위치를 선점한 것으로 보인다. 베스트셀러가 아니지만 도스토옙스키 문학사에서 근원적인 가치를 지니는 작품인 것이다. 내가 이 작품을 읽으며 포마에게서 골랴드낀을 본 것은 우연이 아닌 필연이라고 나는 믿는다.


건강하지 못한 자존심, 심각한 자존감의 결여, 지나친 열등감, 무기력한 패배감, 극단적인 자기 중심성, 등의 캐릭터를 가지고 있는 도스토옙스키 작품 속 모든 인물들의 원형이 골랴드낀이라 할 수 있는데, 나는 포마에게서도 이러한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 물론 골랴드낀과 포마는 다른 인물이다. 특히 주위 사람들로부터 받아들여지는 모습은 거의 정반대라고 할 수 있다. 골랴드낀은 어느 곳을 가나 무시당하고 비웃음을 사는 인물이지만, 포마는 오히려 사람들로부터 칭송과 환대 (어쩌면 경배라는 단어까지 동원해야 할 지도)를 받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러나 지나친 자기애와 지나친 자기 비하가 모두 자기중심적인 교만에서 기인한다는 통찰에 입각한다면, 골랴드낀과 포마 역시 겉으로 드러난 표현형은 반대일지 모르나 그 뿌리는 같다고 볼 수 있다. 그 핵심은 자기 객관화에 실패한 나 중심적인 옹졸하고 편협한 세계관이다. 


그렇다면 같은 뿌리를 가진 두 사람이 어떻게 서로 반대의 모습으로 진화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숙고가 필요하다. 나는 이에 대한 답을 ‘기생하려는 욕망’에서 찾는다. 포마와는 달리 골랴드낀은 비록 하급관리직이었지만 어엿한 직장을 가지고 있었다. 거주하는 아파트도 있었고 거기에 딸린 하인도 있었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진 않더라도 독립적인 삶을 영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반하여 포마는 식객일 뿐이었다. 직장은 물론 거주할 집조차 없어 남의 집에 빌붙어 살며 매 끼니를 얻어먹는 기생충 같은 존재였다. 기생할 필요가 없던 골랴드낀과 그래야만 했던 포마의 근본적인 차이는 경제적 독립의 유무라고 봐도 무방한 것이다. 


자존감이 결여되어 시종일관 모욕받는 순간을 살아가는 듯한 포마 포비치. 경제적으로 누군가에게 의지해야만 삶을 유지할 수 있는 무능력한 존재. 그는 기생할 숙주를 찾아야 했고, 장군 부인이라고 소개되는, 아저씨의 어머니에게 자신의 빨판을 들이대며 첫 번째 제물로 삼았다. 마침 이 장군 부인은 쓰쩨빤치꼬보 마을 지주인 아저씨를 근거 없이 미워하고 있었고, 마침 그렇게 미움받는 아저씨는 미련할 정도로 착했다. 아, 이 오묘한 조합이라니! 교활하고 영악한 포마에게는 최고의 먹잇감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그 후 포마는 광대 짓을 시작으로 조금씩 자기 세력을 구축해 나갔고, 기어코 숙주보다 더 비대해지기에 이르렀다. 그 집의 모든 하인들까지 그의 세력 아래 무릎 꿇었고 그를 찬양하게 되었다. 그는 마치 신적 지위에 오른 것 같은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객관적인 판단이 가능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작품 속 화자인 ‘나’를 포함하여 실제로 포마의 거짓된 실체를 파악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장군 부인의 무조건적이고 맹목적인 지지는 포마에겐 천군만마였기에 그 집의 주인인 아저씨를 포함하여 그 누구도 포마의 기만적인 횡포에 반기를 들 수 없었다. 포마는 이런 기형적인 힘의 위계질서를 십분 활용하여 점점 더 기형적인 군주의 모습으로 성장해 나갔던 것이다. 


이런 기생충의 박멸은 숙주의 전적인 의지에 달렸다. 포마는 식객일 뿐 그 어떤 법적인 권리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포마라는 기생충이 거대해진 이유는 오로지 아저씨가 용인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위기와 절정은 아저씨의 청혼과 맞물린 채 벌어지는 해프닝인데, 놀랍게도 아저씨의 분노와 무력으로 인해 쫓겨났던 포마가 다시 돌아오게 되면서 상황은 극적으로 전환된다. 모든 문제의 근원이었던 포마가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에 해결사가 되어 문제를 해결해 버린 것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이 놀라운 발상을 다시 보며 나는 이번에도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포마가 기만으로 구축했던 그 모든 힘이 모든 문제를 야기했었지만, 그 힘이 그대로 역이용되어 문제를 말끔히 해결해 버린 것이다. 물론 포마에겐 이 문제의 해결도 자기 자신을 위한 행동의 연장선에 있었을 것이다. 그는 실제로 이 사건 해결을 두고 자신의 복수라고 말한다. 


어쨌거나 문제는 해결되어 이 작품은 해피 엔딩을 맞이한다. 황당하고 엽기적인 상황의 전개 속에 빛나는 인간 내면의 변화를 쫓고 있노라면 나는 다시금 도스토옙스키의 통찰력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다. 비록 흥미 위주의 소설과는 여전히 거리가 있고, 대중적인 시도를 했다 하더라도 여전히 도스토옙스키라는 진한 향이 배어있지만, 나는 도스토옙스키 중기작의 문을 연 이 작품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도스토옙스키 다시 읽기

1. 가난한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690

2. 분신: https://rtmodel.tistory.com/1696

3.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739


* 도스토옙스키 읽기

1. 죄와 벌: https://rtmodel.tistory.com/811

2. 백치: https://rtmodel.tistory.com/815

3. 악령: https://rtmodel.tistory.com/879

4. 미성년: https://rtmodel.tistory.com/928

5.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https://rtmodel.tistory.com/10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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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가난한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153

8. 분신: https://rtmodel.tistory.com/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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