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뻬쩨르부르그 연대기 외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128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이항재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6월
평점 :
차라리 골랴드낀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쁘로하르친 씨‘를 읽고
이 작품은 제목 그대로 담백하게 세묜 이바노비치 쁘로하르친이라는 한 남자의 삶의 잠시 보여주며 그의 숨겨진 정체를 밝히는 데 초점을 맞춘 단편소설이다. 단순할뿐더러 작품 구성이나 묘사와 서사 모두에서 내가 알고 사랑하는 도스토옙스키다운 면모를 찾아보기 힘들어 읽는 내내 어리둥절했다. 나름 반전이라고 주인공의 정체가 거지가 아닌 알부자였다는 결말 역시 내겐 놀랍기는커녕 진부하게 느껴졌다. 내가 지금까지 읽은 도스토옙스키 작품들과 비교할 때 눈에 띄게 미성숙한 글, 혹은 완성도가 떨어지는 작품이라는 나의 인상은 그리 과장되진 않을 것이다.
작품 속 주인공인 쁘로하르친은 아무나 상대하기 힘들 만큼 독특한 성격의 소유자이자 구두쇠이기도 하다. 세상과 담을 쌓고 지내는 사람이어서 그런지 사람들의 일상적인 거짓과 가식들을 유머로 받아쳐낼 마음의 여유가 그에겐 없었다. 그는 허름한 집 여주인의 방구석에 자리를 잡고 수십 년을 살았는데, 도무지 그가 하루 종일 뭐 하고 지내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조용한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는 인생의 지혜를 깨우쳐 입이 무거운 것도 아니었다. 한 번 입을 열면 상스러운 말투와 제한된 단어를 사용하여 비난과 욕지거리를 해대곤 했다. 식사도 남들보다 절반 이하로만 했으며 의식주 모든 것에서 찌질할 만큼 돈을 쓰지 않았다. 사람들은 당연히 그가 돈이 없어서 그런 줄 알았다.
그가 죽고 나자 그의 침대 요 안에서 수천 루블의 돈이 발견되었다. 사람들은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모두 가난한 사람들이라 갑작스러운 큰돈 앞에서 놀라기도 했겠지만, 아마도 그것보다는 왜 쁘로하르친은 죽기 전까지 그렇게나 궁상맞게 살았는가 하는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도대체 종 잡을 수 없던, 신비하면서도 혐오스럽고, 다가가기 쉬울 것 같았지만 어느 술주정뱅이 말고는 친한 사람이 아무도 없던, 게다가 순수하다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무식했던,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할 것 같지 않던, 묘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작품은 그의 죽음과 더불어 남게 된 수천 루블의 돈으로 끝이 나는데, 도스토옙스키가 무슨 의도를 가지고 이 작품을 썼는지조차 이런저런 해석을 해 보려 했지만 적어도 내가 가진 배경지식으로는 딱히 집히는 게 없었다.
작품 해설을 보니 이 단편소설은 도스토옙스키가 ‘분신’을 쓰고 면박을 당한 직후에 썼다고 한다. 도스토옙스키 스스로는 걸작이라고 믿었던 '분신'이 현실에서는 처참한 실패를 가져왔다는 사실을 나는 이미 잘 알고 있다. 그래서일까? 다급해진 도스토옙스키의 그 당시 심정이 이 작품에 그대로 담긴 것일까? 쁘로하르친을 창조해 냄으로써 골랴드낀의 실패를 극복하고자 했던 것일까? 그렇다면 어떤 시도를 했단 말인가? 이 작품은 그러한 선상에 있는 연습작 정도의 의미만을 지니는 것일까? 나는 알 수 없었다. 골랴드낀의 변주인 것 같은 느낌도 들긴 했지만 무언가 이가 빠진 듯한 느낌이 강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쁘로하르친은 골랴드낀처럼 정신분열증 환자는 아닌 듯했다. 하지만 인물의 매력도에 있어서 나는 차라리 골랴드낀에게 더 끌린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스토옙스키가 자주 사용한 인물의 배경 (이를테면, 가난한 하급관리, 미혼, 고립된 성격의 소유자 등등)이 유지되어 여전히 도스토옙스키 작품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는 것 같다. 어쩌면 이 짧은 소설이 어떤 큰 장편의 일부라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주인공이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기에는 터무니없이 분량이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장편이라면 여러 정황 속에 주인공을 배치함으로써 좀 더 입체적으로 인물 상을 보여줄 수 있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이 단편 역시 도스토옙스키 전작 읽기를 시도하지 않는 한 굳이 읽을 필요가 없는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도스토옙스키의 초기 단편을 읽으며 ‘도스토옙스키도 이렇게 작품을 엉성하게 쓸 때도 있었구나’하는 생각도 하게 되어 뜻밖의 위로를 받게 된다. 좋아하는 한 작가의 전작을 읽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기쁨 중 하나일 것이다. 이 작품으로부터 유작인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이 쓰이기까지 약 30년의 시간이 더 필요한데, 나는 그 시간이 얼마나 도스토옙스키를 변화시켰는지 잘 아는 사람 중 하나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 실망마저도 하나의 작은 즐거움이 된다.
#열린책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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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https://rtmodel.tistory.com/1068
6. 죽음의 집의 기록: https://rtmodel.tistory.com/10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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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스토옙스키 다시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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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상처받은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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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죄와 벌: https://rtmodel.tistory.com/1807
8. 노름꾼: https://rtmodel.tistory.com/1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