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인송
켄트 하루프 지음, 한기찬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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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되는 삶


켄트 하루프 저, '플레인송'을 읽고


이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플레인송'은 '초기 기독교 교회에서 사용한 단선율로 작곡된 성가로, 모든 곡이 꾸밈없고 단순한 선율과 곡조를 특징으로 한다'라고 책 서두에 설명되어 있다. 몇 달 전 읽었던 작품 '축복'에서와 마찬가지로 '플레인송' 역시 작가가 창조한 홀트라는 가상의 공간을 주무대로 한다. 그곳은 허구의 공간이면서도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축소판이기도 하다. 그곳에는 갑질을 해대는 천박한 인간들이 있고, 사적인 앙갚음으로 자신의 권력과 부를 이용하여 자신만의 정의를 지키려는 불의하고 비열한 인간들도 있다. 또한 그곳에는 소소하고 빛바랜 일상이 작고 따뜻한 의미를 가지는 일종의 축복이라는 깨달음을 주는 사람들도 존재하고, 가진 건 별로 없지만 기꺼이 어려운 이웃을 돕는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선과 악이 모두 존재하는 공간. 정의와 불의가 공존하는 그곳. 홀트는 작품 속 인물들만 사는 곳이 아니라 이 작품을 읽는 모든 인간 독자들이 거주하는 시공간과 다름없는 것이다. 허구이지만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기도 하고, 상상이지만 실제 상황보다 더 우리의 주목을 이끌어낸다. 그래서 현실에서 우리도 모르게 감고 있던 눈을 비로소 뜨게 만드는 역할까지 충실하게 해내는 것이다. 홀트의 힘은 곧 문학의 힘으로 생각할 수 있으며 이것은 우리가 소설을 읽고 또 읽어야만 하는 이유라고 나는 믿는다.


제목에서 느낄 수 있는 첫인상이 작품 처음부터 끝까지 지속된다. 독자들은 유독 시간이 느리게 가는 듯한 착각 속에 빠진 채 홀트에 거주하는 등장인물들을 차례로 만나게 된다. 거스리라는 남편과 엘라라는 아내, 그리고 그 부부의 두 아들 아이크와 보비. 거스리는 고등학교 선생이고 아내와의 관계는 소원하다. 엘라는 어디가 아픈지 독자로 하여금 걱정을 하게 만드는데, 아픈 곳이 몸이 아닌 마음이라는 데에 나처럼 결론을 내리게 될 즈음이면 신비감을 사라지고 저자 켄트 하루프의 부부생활 혹은 그가 바라본 부부들의 생활을 과장 없이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된다. 엘라는 점점 거스리와 두 아들과 멀어지게 되는데, 엘라는 남편이 지긋지긋하다는 말을 하지만 그 말은 힘이 없다는 것도 독자들은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온종일 침대와 거실을 오가며 병자처럼 지낸다. 처음엔 같은 집 한 방 안에서, 다음엔 차를 타고 가야 하는 거리를 둔 어떤 집에 혼자서, 그리고 나중엔 언니가 혼자 사는 덴버의 아파트에서 엘라는 자기 안에 잠식된 삶을 살아간다. 이를 바라보는 거스리의 시선과 마음, 그리고 아직 아홉 살, 열 살밖에 되지 않아 아무것도 잘 모르는 두 아들의 시선과 마음의 변화를 조용히 따라가다 보면 대부분의 부부 생활이 이런 게 아닌가 싶은 마음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감성에 빠져 딱히 뭐라 할 수 없는 미묘한 불편함과 어쩔 수 없음의 강 위에 부유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게 된다. 거스리와 엘라의 문제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지만, 아마도 저자는 문제가 무엇이든 상관없이 함께 일상을 공유하는 그 어떤 남편과 아내 사이에도 생길 수 있는 오해, 편견, 권태, 무기력함을 독자들이 느끼도록 의도하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어지는 생각. 켄트 하루프는 과연 아내와 평안한 일상을 보냈을까.


고등학생 빅토리아 루비도는 어느 날 댄스파티에 참석한 이후 머저리 같은 한 남자와 눈이 맞아 덜컥 임신까지 하게 된다. 빅토리아의 아버지는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고, 어머니는 임신 사실을 알자마자 집에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 가장 보호해주어야 할 존재가 가장 핍박하는 존재로 등극할 때의 그 기분은 어떤 것일까. 빅토리아는 체념의 강을 넘어 학교 선생님인 매기 존스의 집을 향한다. 매기는 치매 초기에 놓인 듯한 아버지와 둘이 사는데 빅토리아의 사정을 안타까워하면서도 자기 집에서 살 수 있도록 도와주고 병원에도 같이 가고 아기를 낳을지 말지에 대한 현실적인 조언까지 마다하지 않는다. 부모에게서도 버려진 빅토리아에게 매기의 존재는 구원의 문이 되지 않았을까. 비록 매기의 아버지의 정신 문제로 위협을 느낀 빅토리아는 얼마 살지 않고 맥퍼린 형제 집으로 맡겨지지만 말이다. 


맥퍼린 형제는 홀트에서도 17마일이나 떨어진 외딴 시골에서 소를 키우고 팔며 단 둘이 살고 있다. 어릴 때 부모를 여의고 다니던 학교까지 그만두고 연애도 결혼도 경험하지 못한 채 단순한 농장 일을 하며 평생을 살고 있다. 매기는 빅토리아가 거주할 공간으로 맥퍼린 형제의 외딴집을 생각해 낸다. 빅토리아에게는 맥퍼린 형제의 심성을 이미 잘 알고 있는 매기가 내린 신의 한 수였지 않았나 싶다. 결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맥퍼린 형제와 빅토리아의 동거는 빅토리아에게는 안전을 보장해 주었고, 맥퍼린 형제에게는 소가 아닌 누군가를 보살피고 걱정하고 챙겨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선사했던 것이다. 이 역시 일상에서 벌어지는 재미있고도 유쾌한, 있을 법하지 않을 것 같지만 실재하는 기묘한 운명적인 만남이 아닐까. 


불쑥 빅토리아 배 속에 든 아이의 생물학적 아빠가 찾아오고, 빅토리아는 본능적으로 그를 따라 덴버로 떠난다. 아무런 말도 없이 떠난 빅토리아를 맥퍼린 형제는 물론 매기까지도 불안에 떨며 걱정하게 된다. 그러나 수개월 이후 빅토리아는 다시 제 발로 홀트를 찾아와 맥퍼린 형제 집으로 다시 들어가게 된다. 아이의 생물학적 아빠이고 결혼하면 장차 남편이 될 남자였지만, 그의 삶은 본능적이고 즉흥적이었으며 무엇보다 빅토리아를 인격적으로 사랑하지 않았다. 그의 삶에 빅토리아는 하나의 노리개이자 부속품일 뿐이었던 것이다. 빅토리아는 결심을 하고 홀로 버스를 타고 하루 종일을 걸려 홀트로 돌아온다. 그녀는 덴버가 아닌 맥퍼린 형제의 집에서 안정감을 찾을 수 있었고, 미혼모로 보낼 자신의 미래를 불안해하지 않고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던 것이다. 앞으로도 그가 다시 홀트를 찾아와 빅토리아를 힘들게 만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자는 그 이상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한다. 그저 묵묵히 삶의 단편을 보여줄 뿐이다. 해피 엔딩 혹은 새드 엔딩 같은 것은 없다. 그저 삶은 지속될 뿐이다. 이게 바로 저자 켄트 하루프의 메시지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켄트 하루프의 고전문학의 냄새가 나는 문체, 특히 묘사와 절제된 문장들에 나는 매료되었다. 덤덤하게 서술하고 있지만, 그렇게 남아 이 작품의 텍스트가 되어 버린 문장들은 정제된 땀의 열매이지 않을까 싶다. 무관심한 듯 보이는 문체 속에서 나는 저자의 애정을 느꼈다. 고전문학 같은 현대문학을 지향하는 나에게 켄트 하루프의 책은 어디를 이사 가든 꼭 옆에 둘 선물이다.


2014년에 타개한 켄트 하루프의 세 작품을 읽었다. 한국어로 번역된 전부다. 총 여섯 편을 썼다고 하는데, 남은 세 편은 아직 번역이 되지 않은 것이다. 이 작품을 다 읽고 나는 나머지 세 편도 궁금해졌다. 원서로 읽어도 되겠지만, 한국어 번역을 기다려보기로 한다. 


* 켄트 하루프 읽기

1. 밤에 우리 영혼은: https://rtmodel.tistory.com/1478

2. 축복: https://rtmodel.tistory.com/1671

3. 플레인송: https://rtmodel.tistory.com/1832


#문학동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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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리맨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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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져가는 불꽃 앞에서


필립 로스 저, ‘에브리맨’을 읽고.

“현실은 소설 같기도 하고 개연성이 없어도 되지만, 소설은 그러면 안 된다. 소설은 현실적이어야 한다.”

언젠가 누군가가 내게 해 준 말이다. 어렸던 난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나름대로 인생의 높은 점과 낮은 점을 모두 지나보고, 한 여자의 남편으로 15년 이상 살아도 보고, 한 아이의 아빠로서 10년 이상 아이의 성장과정을 옆에서 모두 지켜보기도 하며, 절망의 늪에 오래 빠져 있는 대신 소망의 가느다란 끈을 잡으려고 여전히 애쓰며 빠듯한 삶을 살아가는, 이제 나이 마흔 중반에 접어든 나는 그 말이 지니는 의미를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활활 타오르던 불꽃도 꺼져가는 즈음에서야 비로소 자신의 숙명을 깨닫게 되는 법이다. 허구임이 분명하지만, 때론 너무 현실 같은 소설, 나는 이 작품을 통해 한 인간의 인생에 대하여, 아니 모든 사람(에브리맨)의 인생에 대하여 조용히 곱씹어볼 수 있었다.

이렇게 현실적인, 지극히 현실적인 소설을 만날 때마다 나는 내 인생을 이루고 있는 모든 것들, 심지어 은밀하게 숨겨진 것들까지도 모두 발려져 공개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때 느껴지는 수치심과 두려움이란 마치 고백성사를 해야 할 것만 같은 당혹스러운 심정까지도 들게 만들고, 실제 현실에선 미처 느끼지 못했던 인생의 무게를 더욱 실감하게 만든다. 침묵 이외에는 모든 게 경박스러워 보일 정도의 그 무게. 가끔 아이의 어린 시절 사진을 훑어보며 애잔한 감정에 빠지곤 할 때 문득 느껴지는 시간의 무게 또한 함께 찾아와 나를 짓누른다. 시간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지만, 방향이 세로여서 이전 것들은 사라지지 않고 켜켜이 쌓여가는 것이다. 그 인생과 시간이라는 깊은 우물로부터 물을 길어 마실 때면 언제나 나는 모든 개별적인 사람(에브리맨)에 대해 경건한 마음을 갖게 된다.

비록 물리적으로는 하룻밤이라는 아주 짧은 찰나에 불과했지만, 나는 이 책을 통해 한 사람의 인생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녀온 기분이다. 그래서 아주 긴 여행을 하고 온 것만 같은 기분은 물론 여독을 풀어야만 할 것 같은 기분까지 들 정도다 (한 인생을 하룻밤에 여행했으니 오죽하랴). 오후부터 시작해서 새벽이 되어서야 마지막 장에 다다를 수 있었고, 나는 너무 피로한 나머지 곤하게 잠이 들어버렸다. 그러나 주인공과는 달리 나는 다시 아침의 햇살을 받으며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는 영원한 잠들었지만, 나는 그저 매일 본능적으로 그것을 연습하는 것에 그치고는, 오히려 그 연습 때문에 재충전되어 오늘이라는 현재로 다시 돌아와 이렇게 글을 남긴다. 조금은 지혜로워진 것 같은 느낌으로 말이다.

이 책은 한 인생의 서사를 조각조각 보여주며 독자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포함한 보편적인 인생을 관조할 수 있는 조용한 자리로 내몬다. 그래서 이 책은 조금이라도 나이가 든 이후에 읽으면 좀 더 풍성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책이기도 하다. 또한 이 책은 새벽이나 아침에 읽기보다는 밤에 읽어야 하는 책이다. 치열했던 삶의 해가 저물어 가는 풍경을 놀랍도록 잘 절제된 목소리로 조곤조곤 들려주는 책이기 때문이다. 영원한 잠에 들기 전의 이야기를 하루 정도 잠들기 전에 들어 보는 것도 해볼 만한 경험이지 않을까 한다. 어차피 모든 사람의 인생은 한 번 불이 붙었다면 점점 꺼져가는 불씨와 같아서, 두텁기만 하던 초의 높이가 갈수록 낮아져 가고, 등잔 아래를 가득 채우던 기름도 점점 사라져 가는, 한낱 유한한 육체에 갇힌 신세이니까 말이다. 하루쯤 궁극의 끝에 선 사람처럼,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톺아보는 시간은 아마도 살면서 좀처럼 쉽게 가질 수 없는 소중한 성찰의 시간이 되어주리라 믿는다.

책의 삼분의 일 쯤을 읽다가 섬광처럼 어떤 느낌이 내 기억의 저장고를 강타했다. 어딘가 흩어져있을 그 조각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나는 계속해서 그 조각을 찾으려는 시도와 함께 책을 읽어나갔다. 그 느낌. 그 애틋하면서도 쓰라린 느낌. 묵직하게 가슴 한복판을 치고 지나가, 휑한 심정으로 나를 덩그러니 외딴곳에 떨어뜨리는 그 느낌. 동시에, 지극히 평범해서, 인생을 살아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본능적으로 공감할 수밖에 없는 그 느낌. 그렇다. 바로 작년 여름, 제임스 설터의 ‘가벼운 나날’을 한 달가량 힘들게 읽어내며 매일 같이 느끼던 바로 그 느낌이었다.

이 책 ‘에브리맨’으로 내게 다가온 필립 로스의 문체는 ‘가벼운 나날’로 만났던 제임스 설터의 문체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느낌이었다. 말하자면, 조금 더 남성적이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에브리맨’의 주인공이 한 남자에 맞춰져 있는 반면, ‘가벼운 나날’에서의 주인공은 한 부부, 그중에서도 아내 네드라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렇게 서로 다른 문체에도 불구하고 제임스 설터와 필립 로스의 목소리는 마치 한 사람의 서로 다른 목소리인 것만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모두 비슷한 톤을 가지고 있었다. 흥분하여 격양되지도, 절망하여 허무해지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를 가감 없이, 때론 건조하게 느껴지기도 할 정도로 절제된 목소리로 일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간의 우물은 갈수록 깊어지지만, 인생의 우물은 언젠간 바닥이 난다. 깊어지다가 바닥에 이르는 기나긴 여정이 우리네 인생이지 않을까. 나는 언제쯤 성숙하고 눈이 깊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나는 언제쯤 그 끝을 예감한 지혜로운 사람으로 현재의 삶을 살아낼 수 있을까. 그리고 나는 그 끝에 섰을 때 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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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것들
앤드루 포터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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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 권태, 공허, 그리고 뜻밖의 위로


앤드루 포터 저, ‘사라진 것들’을 읽고


제임스 설터와 켄트 하루프를 섞어 놓은 느낌이랄까. 처음 읽는 앤드류 포터의 글은 덤덤한 일상을 기술하면서도 놓치기 쉬운 순간들을 세밀하게 포착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깊은 한숨을 쉬게 하고 먹먹한 가슴이 되게 만든다. 인생의 절반을 이미 살아낸, 마흔이 넘은 중년 남성이 매 단편의 주인공인데, 주인공과 비슷한 연배라면 아마도 나처럼 책 속의 문장들만이 아닌 행간까지도 자연스레 읽어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거기서 나는 설터의 '가벼운 나날'에서 맛보았던 반짝이는 권태와 공허를 느꼈고, 켄트 하루프의 '축복'에서 들을 수 있었던 일상의 소중함을 더욱 감사하며 소망하게 되었다. 


미국 생활을 11년간 해보아서 그런지 이 작품은 굉장히 미국적인 것 같았다. 남녀 관계가 다 그렇고 그렇지 않냐고, 사십 대 중년 남성이 겪는 권태감과 무력감은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는 게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아는 만큼 보이는 법. 남편과 아내의 일상적인 대화나, 일터에 다녀온 이후 가정에서 보내는 시간들은 한국에서는 좀처럼 공감할 수 없고 미국에서는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정서가 흐른다. 간단히 말하자면, 적어도 저녁이 있는 삶, 혹은 적어도 먹고살 만한 환경에 처한 사람만이 고민하고 갈등할 수 있는 여유(?)가 전제가 되어야 이 작품이 내뿜는 은은하면서도 자칫 중독될 수 있는, 고요한 허무감에 제대로 당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나이 들어간다는 것, 한때 그렇게나 열정적이었던 자신의 모습도 빛바랜 사진 한 장으로 추억된다는 것. 불쑥 찾아온 삶의 권태, 그 권태와 함께 조용히 스며드는 공허감.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가만히 바라보며 한숨 짓기도 하고,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욕망에 때때로 휩싸이기도 하며, 다 소용없다는 무기력함으로 오지도 않은 미래마저도 회색빛으로 물들여 버리는 건 아마도 욕망하고, 사유하고, 기억하는 인간만이 가진 공통된 속성일 것이다. 


우울할 수 있지만 아련한 기억이 만들어내는 잔잔한 우수에 잠겨보고 싶은 독자라면 이 책을 권한다. 의외로 위로를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참고로 이 소설집은 짧은 단편이 15편 수록되어 있는데, 순서는 상관이 없고 모든 단편을 다 읽지 않아도 되니 아무 데나 펼치거나 끌리는 제목의 글만 읽어도 무방하다. 마흔이 넘었다면, 조용히 혼자 있는 밤에 이 책을 삼십 분이라도 읽어보면 내 말이 무슨 의미인지 단번에 알 것이다.


#문학동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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뻬쩨르부르그 연대기 외 열린책들 세계문학 128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이항재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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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골랴드낀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쁘로하르친 씨‘를 읽고


이 작품은 제목 그대로 담백하게 세묜 이바노비치 쁘로하르친이라는 한 남자의 삶의 잠시 보여주며 그의 숨겨진 정체를 밝히는 데 초점을 맞춘 단편소설이다. 단순할뿐더러 작품 구성이나 묘사와 서사 모두에서 내가 알고 사랑하는 도스토옙스키다운 면모를 찾아보기 힘들어 읽는 내내 어리둥절했다. 나름 반전이라고 주인공의 정체가 거지가 아닌 알부자였다는 결말 역시 내겐 놀랍기는커녕 진부하게 느껴졌다. 내가 지금까지 읽은 도스토옙스키 작품들과 비교할 때 눈에 띄게 미성숙한 글, 혹은 완성도가 떨어지는 작품이라는 나의 인상은 그리 과장되진 않을 것이다.


작품 속 주인공인 쁘로하르친은 아무나 상대하기 힘들 만큼 독특한 성격의 소유자이자 구두쇠이기도 하다. 세상과 담을 쌓고 지내는 사람이어서 그런지 사람들의 일상적인 거짓과 가식들을 유머로 받아쳐낼 마음의 여유가 그에겐 없었다. 그는 허름한 집 여주인의 방구석에 자리를 잡고 수십 년을 살았는데, 도무지 그가 하루 종일 뭐 하고 지내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조용한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는 인생의 지혜를 깨우쳐 입이 무거운 것도 아니었다. 한 번 입을 열면 상스러운 말투와 제한된 단어를 사용하여 비난과 욕지거리를 해대곤 했다. 식사도 남들보다 절반 이하로만 했으며 의식주 모든 것에서 찌질할 만큼 돈을 쓰지 않았다. 사람들은 당연히 그가 돈이 없어서 그런 줄 알았다.


그가 죽고 나자 그의 침대 요 안에서 수천 루블의 돈이 발견되었다. 사람들은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모두 가난한 사람들이라 갑작스러운 큰돈 앞에서 놀라기도 했겠지만, 아마도 그것보다는 왜 쁘로하르친은 죽기 전까지 그렇게나 궁상맞게 살았는가 하는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도대체 종 잡을 수 없던, 신비하면서도 혐오스럽고, 다가가기 쉬울 것 같았지만 어느 술주정뱅이 말고는 친한 사람이 아무도 없던, 게다가 순수하다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무식했던,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할 것 같지 않던, 묘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작품은 그의 죽음과 더불어 남게 된 수천 루블의 돈으로 끝이 나는데, 도스토옙스키가 무슨 의도를 가지고 이 작품을 썼는지조차 이런저런 해석을 해 보려 했지만 적어도 내가 가진 배경지식으로는 딱히 집히는 게 없었다.


작품 해설을 보니 이 단편소설은 도스토옙스키가 ‘분신’을 쓰고 면박을 당한 직후에 썼다고 한다. 도스토옙스키 스스로는 걸작이라고 믿었던 '분신'이 현실에서는 처참한 실패를 가져왔다는 사실을 나는 이미 잘 알고 있다. 그래서일까? 다급해진 도스토옙스키의 그 당시 심정이 이 작품에 그대로 담긴 것일까? 쁘로하르친을 창조해 냄으로써 골랴드낀의 실패를 극복하고자 했던 것일까? 그렇다면 어떤 시도를 했단 말인가? 이 작품은 그러한 선상에 있는 연습작 정도의 의미만을 지니는 것일까? 나는 알 수 없었다. 골랴드낀의 변주인 것 같은 느낌도 들긴 했지만 무언가 이가 빠진 듯한 느낌이 강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쁘로하르친은 골랴드낀처럼 정신분열증 환자는 아닌 듯했다. 하지만 인물의 매력도에 있어서 나는 차라리 골랴드낀에게 더 끌린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스토옙스키가 자주 사용한 인물의 배경 (이를테면, 가난한 하급관리, 미혼, 고립된 성격의 소유자 등등)이 유지되어 여전히 도스토옙스키 작품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는 것 같다. 어쩌면 이 짧은 소설이 어떤 큰 장편의 일부라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주인공이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기에는 터무니없이 분량이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장편이라면 여러 정황 속에 주인공을 배치함으로써 좀 더 입체적으로 인물 상을 보여줄 수 있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이 단편 역시 도스토옙스키 전작 읽기를 시도하지 않는 한 굳이 읽을 필요가 없는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도스토옙스키의 초기 단편을 읽으며 ‘도스토옙스키도 이렇게 작품을 엉성하게 쓸 때도 있었구나’하는 생각도 하게 되어 뜻밖의 위로를 받게 된다. 좋아하는 한 작가의 전작을 읽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기쁨 중 하나일 것이다. 이 작품으로부터 유작인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이 쓰이기까지 약 30년의 시간이 더 필요한데, 나는 그 시간이 얼마나 도스토옙스키를 변화시켰는지 잘 아는 사람 중 하나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 실망마저도 하나의 작은 즐거움이 된다.


#열린책들 

#김영웅의책과일상 


* 도스토옙스키 처음 읽기

1. 죄와 벌: https://rtmodel.tistory.com/811

2. 백치: https://rtmodel.tistory.com/815

3. 악령: https://rtmodel.tistory.com/879

4. 미성년: https://rtmodel.tistory.com/928

5.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https://rtmodel.tistory.com/1068

6. 죽음의 집의 기록: https://rtmodel.tistory.com/1087

7. 가난한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153

8. 분신: https://rtmodel.tistory.com/1159

9. 지하로부터의 수기: https://rtmodel.tistory.com/1171

10. 노름꾼: https://rtmodel.tistory.com/1174

11. 도스토옙스키 (by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 https://rtmodel.tistory.com/1077

12.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177

13.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by 이병훈): https://rtmodel.tistory.com/1194

14. 매핑 도스토옙스키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358

15. 도스토옙스키의 명장면 200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362

16. 난데없이 도스토옙스키 (by 도제희): https://rtmodel.tistory.com/1388

17.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396

18. 상처받은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429

19. 악몽 같은 이야기: https://rtmodel.tistory.com/1435

20. 악어: https://rtmodel.tistory.com/1436

21. 인간 만세!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488

22. 도스토옙스키를 쓰다 (by 슈테판 츠바이크): https://rtmodel.tistory.com/1625

23. 도스토옙스키가 사랑한 그림들 (by 조주관): https://rtmodel.tistory.com/1644

24. 백야: https://rtmodel.tistory.com/1659

25. 뽈준꼬프: https://rtmodel.tistory.com/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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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크리스마스 트리와 결혼식: https://rtmodel.tistory.com/1704

28. 꼬마 영웅: https://rtmodel.tistory.com/1706

29. 약한 마음: https://rtmodel.tistory.com/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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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영원한 남편: https://rtmodel.tistory.com/1823

38. 아홉 통의 편지로 된 소설: https://rtmodel.tistory.com/1825

39. 쁘로하르친 씨: https://rtmodel.tistory.com/1827


* 도스토옙스키 다시 읽기

1. 가난한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690

2. 분신: https://rtmodel.tistory.com/1696

3.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739

4. 상처받은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744

5. 죽음의 집의 기록: https://rtmodel.tistory.com/1761

6. 지하로부터의 수기: https://rtmodel.tistory.com/1776

7. 죄와 벌: https://rtmodel.tistory.com/1807

8. 노름꾼: https://rtmodel.tistory.com/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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뻬쩨르부르그 연대기 외 열린책들 세계문학 128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이항재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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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음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아홉 통의 편지로 된 소설‘을 읽고


'가난한 사람들'과 '분신' 사이에 쓰인 이 작품은 별다른 설명 없이 뾰뜨르 이바니치와 이반 뻬뜨로비치 사이에 오고 간 아홉 통의 편지로 구성된 아주 짧은 소설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친했던 두 사람이 불과 며칠 만에 절교에 이르고 마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천연덕스럽게 펼쳐 보인다. 두 사람이 만나 직접 대화를 했더라면 아마도 일이 그렇게 불거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편지는 직접 대화보다 언어를 걸러서 정갈하게 담을 수 있다는 장점을 갖는 반면, 편지를 읽거나 쓸 때만큼은 일방적일 수밖에 없다는 치명적인 단점도 가진다. 아무리 답장이라도 모든 문장에 대해 응답할 수도 없을뿐더러 읽는 이와 쓰는 이의 관점의 차이 때문에 작은 오해가 큰 오해로 쉽게 커질 수 있는 가능성을 언제나 내포한다. 요즈음 시대에 이메일이나 채팅으로도 이러한 오해의 순간들을 해결하기가 쉽지 않은데, 펜으로 직접 종이 편지를 쓰고 배달하여 빠르면 그다음 날에나 읽어보고 답장을 쓸 수 있었던 19세기엔 그 오해가 얼마나 심각했겠는가. 이 작품에선 뾰뜨르가 다섯 번, 이반이 네 번 편지를 쓰게 된다. 서로가 번갈아 쓴 답장을 가만히 읽고 있노라면 두 사람 사이의 진정한 소통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서로의 입장만을 변명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서로에 대해 내세우는 칼날이 갈수록 점점 더 날카로워지는 과정도 볼 수 있다. 읽어 보면 알겠지만, 나 같은 경우 두 번 읽어도 가관이었다. 피식 헛웃음이 나올 만큼 말이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로 성공한 이후 '분신'의 골랴드낀을 준비하고 있던 도스토옙스키의 모습도 잠시 엿볼 수 있었다. 


사실 이 작품엔 추가적으로 두 통의 편지가 더 등장한다. 도스토옙스키는 발신인을 밝히지 않는데, 거기엔 어떤 의도가 있는 듯싶다. 두 통의 편지는 각자의 아내가 예브게니 니꼴라이치라는 한 남자와 저지른 불륜 혹은 그에 상응하는 행각을 담고 있다. 두 아내가 직접 예브게니에게 과거에 썼던 편지다. 유추해 보건대 뾰뜨르와 이반이 서로의 아내가 저지른 수치스러운 행각의 증거를 몰래 가지고 있다가 서로 절교를 선언하는 동시에 그 증거를 유출한 게 아닌가 싶다. 만약 이 유추가 사실이라면 이 작품은 정말 웃픈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서로의 약점을 쥐고 있다가 마지막에 그것을 빈 봉투에 담아 서로에게 가만히 보낸 행위 자체가 갖는 코미디 같으면서도 슬프기도 한 의미 때문이다. 


참고로 예브게니는 이반이 뾰뜨르에게 소개해준 청년이다. 그 소개 덕분에 예브게니가 뾰뜨르의 집에 눈치도 없이 너무 오래 거주하는 바람에 뾰뜨르가 이반에게 예브게니를 자기 집에서 나가게 말해달라고 부탁하는 편지가 두 사람 사이의 분쟁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추가적인 두 통의 편지의 발신인이 누구인지에 상관없이 뾰뜨르는 자기 집에 오래 거주하던 예브게니가 자기 아내와 불륜에 빠졌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고, 이반은 자기 아내가 결혼하기 전 예브게니와 사랑에 빠졌던 사람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뾰뜨르와 이반은 애초에 진정 친한 관계였을까? 서로의 흠집이나 잡고 언제나 골탕 먹이려고 작정한 관계에 지나지 않지 않았을까? 


어쨌거나 이 두 사람 사이에 편지로 오고 간 다툼은 무의미했던 것 같다. 먼저는 두 사람 모두 아무것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가까운 아내의 행각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또한 중간에 낀 예브게니만이 진정한 승자(?)로 자리매김했기 때문이다. 서로가 잘났다고 적절한 예의를 갖추며 떠들어대던 두 사람은 과연 얼마나 어리석었던가. 그런데 그 어리석음이 비단 이 두 사람의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나에게도 우리에게도 모두 적용되는, 숨기고 싶은 속성은 아닐까. 불필요한 다툼에 휘말려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는 어리석은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이 아닐까. 그리고 이 어리석음은 분열의 전 단계가 아닐까.


#열린책들 

#김영웅의책과일상 


* 도스토옙스키 처음 읽기

1. 죄와 벌: https://rtmodel.tistory.com/811

2. 백치: https://rtmodel.tistory.com/815

3. 악령: https://rtmodel.tistory.com/8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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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죽음의 집의 기록: https://rtmodel.tistory.com/1087

7. 가난한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153

8. 분신: https://rtmodel.tistory.com/1159

9. 지하로부터의 수기: https://rtmodel.tistory.com/1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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