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자녀들의 선교 - 온 세상을 품은 청소년을 위한 일상 선교 이야기
강남숙 외 엮음, 홍현민 감수, 크리스토퍼 라이트 원작 / IVP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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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여기에 있는가?'


크리스토퍼 라이트 저, 강남숙-박은정-상지영-이지성 고쳐 엮은 '하나님 자녀들의 선교'를 읽고


미천하지만, 여태껏 공부한 신학적 지식들은 두 신학자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크리스토퍼 라이트와 김근주 교수. 두 신학자의 글엔 공통점이 꽤 많다. 구약을 포함한 성경 전체와 하나님 나라와 예수의 복음에 대한 시선이 굉장히 흡사하다. 매일 같이 신학책과 성경을 읽으며 내적 갈증을 해소하려고 애쓰던 그때 나에게 이 두 신학자의 책들은 생수와도 같았다. 그중 딱 한 권만 추천하라고 하면 나는 망설임 없이 크리스토퍼 라이트의 '하나님 백성의 선교'를 고른다. 지금은 절판된 '구약의 빛 아래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라는 책을 읽은 직후에 읽고 또 읽었던 책이다. 그렇게 치열하게 읽던 그 시절을 떠올리면 지금도 눈물이 날 것 같고 그때 받았던 큰 은혜에 감사와 찬송을 하나님께 드릴 마음으로 금세 충만해진다. 가장 갈급하고 곤고했던 시기에 가장 큰 은혜와 사랑을 받았다. 그때 나와 함께 했던 책 중 하나가 바로 '하나님 백성의 선교'였다. 아직도 나에겐 이 책이 던지는 커다란 질문, 즉 '우리는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여기에 있는가?'가 가슴을 뜨겁게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사명에 대해 심사숙고하게 되기 때문이다. 


IVP에서 몇 달 전 이 책에 대한 청소년 버전을 출간했다. '하나님 자녀들의 선교'라는 제목인데, '백성' 대신 '자녀들'을 썼다. 의미는 같으나 뉘앙스가 다르게 느껴지는데 청소년을 향한 책이라는 게 잘 느껴져서 잘 잡은 제목으로 보인다. 


그동안 여러 사람에게 '하나님 백성의 선교'를 추천하곤 했는데, 솔직히 읽기가 쉬운 책은 아니라서 (분량이나 난이도 면에서) 추천받은 분들이 실제로 읽은 경우는 본 적이 없다. 조금 쉬운 버전으로 나오면 좋겠다 싶은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마침 이렇게 청소년 버전으로 책이 출간된 것이다. 내가 먼저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고 이틀 만에 다 읽어버렸다. 


원작으로부터 내가 받은 감동이 남달라서 그런지, 너무 쉽게 풀어써서 그런지, 혹은 나에게 더 이상 새로운 내용이 아니라서 그런지 '하나님 자녀들의 선교'는 내겐 기대 이상으로 평이하게 다가왔다. 크리스토퍼 라이트의 매력적인 글쓰기가 너무 희석된 느낌이랄까. 신학책이 공과공부책으로 변해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원작을 옆에 두고 비교해서 살펴보니 내용적인 면에선 요약을 잘한 편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단지 크리스토퍼 라이트의 냄새가 빠졌다고 하는 게 적절한 표현 같다는 생각이다. 


요즘에도 가족과 9시-10시 사이에 성경을 서너 장씩 매일 읽어나가고 있다. 벌써 4년째인데 3독을 완료하고 이제는 읽고 싶은 성경만 골라서 읽어나가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하나님 자녀들의 선교'는 총 13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 장을 소리 내어 읽으면 5분 정도 걸릴 것 같다. 성경 읽는 시간을 조금 떼내어 이 책을 함께 읽어나가도 좋겠다는 생각이다. 아내와 아들의 반응이 어떨지 기대가 된다.


#IVP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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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야 외 열린책들 세계문학 126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석영중 외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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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의 해학이 녹아있는 작품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남의 아내와 침대 밑 남편’을 읽고


‘참 나, 어이가 없군. 이게 뭐래?’ 이 작품을 읽은 후 나의 첫 반응이다. 아니, 사실 읽는 중에도 그랬다. 이렇게 감상문을 쓰고 있는 지금도 어안이 벙벙하다. ‘도스토옙스키’라는 장르 (내가 정의한 새로운 장르)에 충분히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허를 찔린 기분이다. 아무래도 단편소설이라 그런지 이렇게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더 강렬한 것 같다. 입을 쩍 벌리면서 읽다가 (뭥미?) 미처 다물지 못한 채 작품이 끝나버렸다. 뒤늦게 입을 다물고 머리를 긁적이며 겸연쩍어하는 내 모습이 우습기만 하다.


제목만 보면 이 작품이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 전혀 와닿지 않을 것이다. 나도 그랬다. 그러나 작품을 다 읽은 후 다시 제목을 보고 어떤 숨겨진 의미나 특별한 의도가 전혀 없다는 걸 알았다. 놀라우면서도 한편으론 허탈했다. 너무나 평범해서 오히려 더 특별하게 여겨질 때가 있지 않은가. 제목은 어쩌다 우스꽝스러운 상황에 처한 우리의 주인공 이반 안드레비치의 모습을 그저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뿐이었다. 제목은 아무 죄가 없었다. 줄거리가 범인이었다. 


그렇다면 어떤 줄거리인가? 한 마디로 의처증 남편의 코미디 같은 에피소드이다. 아니, 의처증이라고만 하면 모자라다. 의처증이면서 자존감은 바닥인 데다 자존심은 높아 횡설수설하고 경박하게 굴면서도 고상한 척하는 인간이라고 해야 할까. 여기에 한 가지만 덧붙이자면, 작품 속에서도 강조되는 한 단어 ‘질투’가 많은 인간이라고 하면 주인공을 얼추 잘 소개하지 않았을까 싶다. 참고로, 도스토옙스키는 이 작품 속에서 질투를 ‘가장 큰 열정’, ‘용서할 수 없는 열정’, 그리고 ‘불행’이라고 묘사한다.


이 작품은 두 파트로 구성된다. 두 파트의 주인공은 동일 인물이지만 독립적으로 읽어도 아무 문제가 없다. 제목이 묘사하는 장면은 두 번째 파트에 등장한다 (여기선 두 번째 파트에 대해서만 다루기로 한다). 의처증에 빠진 이반 안드레비치는 아내의 뒤꽁무니를 쫓는다. 음악 공연이 열리는 이탈리아 오페라 극장까지 쫓아간 그가 앉은 자리는 하필 아내의 좌석 바로 아래였다. 도저히 아내를 관찰할 수 없는 자리였던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벗겨진 머리 위로 무언가가 떨어진다. 꼬깃꼬깃 접힌 편지였다. 뭐의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했던가. 우리의 주인공은 그 편지가 사랑, 그러니까 불륜의 내용을 담고 있으리라 확신했다. 그는 운명을 느꼈다 (여기서 도스토옙스키는 ‘총알이 스스로 죄인을 찾는다’는 표현을 쓴다. 기가 막힌 표현이다). 홀 밖으로 뛰쳐나와 불빛 아래 서서 편지를 읽었다. “오늘, 공연이 끝난 뒤에, G 거리 ** 골목에 있는 건물 3층, 계단 오른쪽 집으로 와주세요. 문은 1층 입구 쪽에 있습니다. 제발 실수 없이 와주세요.” 의심할 여지없이 불륜의 현장이었다. 


이반 안드레비치는 딱 여기에서 멈췄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도스토옙스키가 창조해 낸 인물 아닌가. 이반은 멈추지 않고 ‘설마’ 하는 독자의 염려의 한계를 사뿐히 넘어 버린다. 그는 그 불륜의 현장으로 직접 찾아간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이반 안드레비치가 들이닥친 방은 3층이 아니라 2층이었다. 끔찍한 실수를 범한 것이다. 아니, 이를 실수라고 할 수 있을까? 편지에 쓰인 대로 3층으로 찾아갔다면 그건 실수가 아니었을까? 자기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현장으로 무작정 찾아간 그 자체가 실수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이반 안드레비치가 들이닥친 2층집 침실에는 한 여자가 있었다. 갑자기 침실로 침입한 전혀 모르는 남자를 맞이한 여자의 표정이 어떨지 떠올려보라. 그 여자는 너무 놀란 나머지 할 말을 잃었다. 그런데 마침 그 순간 남편이 들어오는 발소리가 들린다. 이반이 고작 발휘할 수 있는 재치라고는 침대 밑에 숨는 것이었다. 제목이 묘사하는 장면은 바로 이 장면이다. 


여기서 도스토옙스키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역시 도스토옙스키답다. 놀랍게도 침대 밑에는 다른 남자가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 역시 3층인 줄 알고 실수로 잘못 침실을 찾은 것이었다. 이럴 수가! 여자의 늙은 남편은 아무것도 모른 채 아내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잘 준비를 하는데 침대 밑에서 두 남자가 티격태격 대는 소리를 어렴풋이 듣고 무슨 소리인가 싶어 의아해한다. 그때 그 집에서 기르는 개가 등장하고, 그 개는 외부인의 냄새를 맡고 본능적으로 침대 밑을 습격한다. 하필 이반 안드레비치 코를 문 그 개는 이반의 방어 본능에 의하여 질식사를 하게 된다. 침대 위의 남의 아내는 경악하고 남편에게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자 이반을 힐문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우리의 주인공 이반 안드레비치는 자기가 도둑이 아님을, 오히려 존경받을 만한 고상한 사람이지만 어쩌다 실수로 이렇게 된 것뿐이라고 변명하기 시작하는데, 그렇게 말하는 게 우스웠는지 주인집 부부는 이반이 도둑이라는 의심을 거두게 된다. 자초지종을 듣고 얼른 3층올 가보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이반은 일촉즉발의 위기를 모면하고 곧장 집으로 돌아오는데, 집엔 아내가 의사의 진찰을 받고 이미 쉬고 있었다. 


이반은 과연 무엇을 기대했던 것일까? 그는 아내의 불륜을 막으려고 했던 걸까? 불륜의 현장을 덮치려고 했던 걸까? 혹시 아내의 불륜을 바라는 건 아니었을까? 도스토옙스키 작품을 읽을 때마다 드는 생각이지만, 이 작품 역시 별의별 생각이 다 드는 이야기이지 않을 수 없다. 해학으로 보이지만 단순히 해학으로만 읽어서는 왠지 안 될 것 같은 기분. 기발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지만 현대문학에서 보이는 기발함과는 차원이 다른 기발함에 나는 다시 도스토옙스키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작품을 읽으며 즐거웠다. 


* 도스토옙스키 읽기

1. 죄와 벌: https://rtmodel.tistory.com/811

2. 백치: https://rtmodel.tistory.com/815

3. 악령: https://rtmodel.tistory.com/879

4. 미성년: https://rtmodel.tistory.com/928

5.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https://rtmodel.tistory.com/1068

6. 죽음의 집의 기록: https://rtmodel.tistory.com/1087

7. 가난한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153

8. 분신: https://rtmodel.tistory.com/1159

9. 지하로부터의 수기: https://rtmodel.tistory.com/1171

10. 노름꾼: https://rtmodel.tistory.com/1174

11. 도스토옙스키 (by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 https://rtmodel.tistory.com/1077

12.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177

13.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by 이병훈): https://rtmodel.tistory.com/1194

14. 매핑 도스토옙스키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358

15. 도스토옙스키의 명장면 200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362

16. 난데없이 도스토옙스키 (by 도제희): https://rtmodel.tistory.com/1388

17.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396

18. 상처받은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429

19. 악몽 같은 이야기: https://rtmodel.tistory.com/1435

20. 악어: https://rtmodel.tistory.com/1436

21. 인간 만세!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488

22. 도스토옙스키를 쓰다 (by 슈테판 츠바이크): https://rtmodel.tistory.com/1625

23. 도스토옙스키가 사랑한 그림들 (by 조주관): https://rtmodel.tistory.com/1644

24. 백야: https://rtmodel.tistory.com/1659

25. 뽈준꼬프: https://rtmodel.tistory.com/1702

26. 정직한 도둑: https://rtmodel.tistory.com/1703

27. 크리스마스 트리와 결혼식: https://rtmodel.tistory.com/1704

28. 꼬마 영웅: https://rtmodel.tistory.com/1706

29. 약한 마음: https://rtmodel.tistory.com/1707

30. 남의 아내와 침대 밑 남편: https://rtmodel.tistory.com/1711


*도스토옙스키 다시 읽기

1. 가난한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690

2. 분신: https://rtmodel.tistory.com/1696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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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야 외 열린책들 세계문학 126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석영중 외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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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함의 진화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약한 마음’을 읽고

도스토옙스키를 읽어나갈 때 꼭 필요한 단어 하나를 뒤늦게 수확한 기분이다. ‘악한 evil’ 마음이 아닌 ‘약한 weak’ 마음. 지금까지 읽어온 많은 작품 속 등장인물들의 기이하리 만큼 이해할 수 없는 생각과 말과 행동들이 바로 이 단어, ‘약한’ 마음으로 재해석이 가능하다는 생각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약함과 악함 사이의 상관관계. 때론 나의 ‘약함’이 타자에겐 ‘악함’으로 비칠 수 있다는 것. 그렇게 타자의 눈에 비친 ‘악함’을 인지하게 된 나의 ‘약함’은 비로소 ’악함’으로 변모할 기회를 맞이하고 종종 발현하기도 한다는 것. 약함과 악함 사이의 상관관계는 약함의 변질로 진화할 수 있다는 것. 

이 작품 속 약한 마음은 관청에서 정서를 담당하는 가난한 하급관리 바샤 슘꼬프다. 소설은 바샤가 같은 아파트에 동거하는 아르까지 이바노비치에게 자신이 결혼 약속을 받아낸 사실을 기쁘고 들뜬 마음으로 전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그 결혼은 파혼으로 치닫고 바샤는 정신병원에 실려 가며 소설은 끝을 맺는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약혼과 파혼 사이 바샤의 붕괴과정을 보여준다고 해석할 수 있겠다. 약한 마음 바샤는 그 누구에게도 악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누구도 바샤에게 악한 일을 저지르지 않는다. 그러나 바샤에게는 그런 열매가 맺히게 된다. 약함은 수동태 형식을 띨 뿐 악함과 같은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며, 그 결과의 방향은 자기 자신을 향하는 것이다. 게으름, 태만, 우유부단함, 착한 사람 콤플렉스 등의 겉모습을 띠는 약함은 자기 파괴를 불러오는 것이다. 파괴를 위한 파괴. 이를 악하다고 하지 않으면 무어라 하겠는가.

바샤만의 문제로 읽으면 곤란하다. 개별적인 사건에서 보편적인 깨달음을 이끌어내는 독법은 이런 소설에서 특히 유용하다. 관찰에서 성찰로, 성찰에서 통찰로 나아가는 정석이다. 내 안에도 바샤가 있다. 바샤는 곧 약한 마음이다. 나태한 마음, 쉽게 흥분하고 들뜨고, 나아가 몽상에 사로잡힌 채 현실을 저버리고 싶은 마음. 이런 마음은 이상적이며 선한 양상을 띠기도 하지만 아무것도 해내지 못하는 무능력의 상징이 되기 쉽다. 스스로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극심한 괴리를 느끼며, 심하게는 작품 속 바샤처럼 착란과 분열, 불안 등의 표현형을 나타내며 붕괴되기도 하는 것이다. 약함의 발전 양상은 꽤나 파괴적이고 때론 치명적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인간 내면에 대한 관찰과 분석을 따라가며 이해하기 위해 빠질 수 없는 개념이야말로 인간의 ‘약함’, 약한 마음이 아닐까 싶다.

흥미로운 점은 바샤의 붕괴처럼 인생의 커다란 불행도 그 시작은 아주 작은 일이었다는 것이다. 바샤에게 있어 그 일은 정서를 하는 일이었다. 그는 정서를 하는 일이 직업이었고, 그가 기한 내에 해야만 했던 서류가 남들보다 더 많았던 것도 더 급했던 것도 아니었다. 게으르지만 않았다면, 미루지만 않았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나는 바로 이 지점에 도스토옙스키의 의도가 숨어있다고 생각한다. 약함의 최대치를 보여주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자기 파괴의 임팩트기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약함이 약함으로 끝나지 않고 악함이 초래하는 결과와 같은 결과를 낼 수 있다는 걸 명징하게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바샤의 붕괴과정을 찬찬히 살펴보길 추천한다. 아르까지의 추임새와 바샤 스스로 만들어내는 허상과 그것으로 인한 공포와 불안을 주의깊게 관찰해보길 추천한다. 언제나 그렇듯, 낯설기만 한 제삼자였던 바샤가 나의 분신으로 느껴지게 될 것이다. 

* 도스토옙스키 읽기
1. 죄와 벌: https://rtmodel.tistory.com/811
2. 백치: https://rtmodel.tistory.com/815
3. 악령: https://rtmodel.tistory.com/879
4. 미성년: https://rtmodel.tistory.com/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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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죽음의 집의 기록: https://rtmodel.tistory.com/10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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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석영중 외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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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 이전의 도스토옙스키 맛보기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꼬마 영웅’을 읽고

단편소설이라 그런 걸까? 다시 푸시킨을 읽은 것 같은 기분이다. 역시 도스토옙스키는 장편으로 읽어야 그만의 독특한 매력을 최대한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이율배반적이고 모순적이고 분열적인 인간의 내면을 이야기로 풀어내기에는 아무래도 분량은 감수해야 하는가 보다. 그럼에도 나는 그것을 갈망한다. 벽돌이라도 좋다. 아직 목이 마르다. 

이 작품은 꽤나 서정적이고 낭만적이다. 도스토옙스키의 또 다른 면모를 볼 수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고, 도스토옙스키답지 못한 면모를 볼 수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으나, 그것보다는 도스토옙스키가 도스토옙스키로 되어가는 과정의 단면이라는 해석이 더 적절할 듯싶다. 

평면적인 사랑 이야기를 다루기에 도스토옙스키라는 칼은 너무 예리한 것 같다는 생각이다. 그 칼은 아무래도 무언가 비딱한 부분이 도드라져야 빛을 발한다. 파헤치고 드러내야 할 것이 존재해야 그 칼은 더 날이 선다. 

어쩌면 도스토옙스키가 시베리야 유형을 다녀오지 않았더라면 이 초기작들의 연장선 수준에 머문 채 훗날 대문호라 불리며 시공간을 초월하여 입지전적인 작품을 남기는 데엔 실패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해 본다. 누군가에겐 불행이자 트라우마적인 사건이 다른 누군가에겐 축복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시베리야 유형은 그의 작품을 사랑하는 나 같은 독자들에겐 소중한 변곡점 같은 지점이리라.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 작품은 열한 살 소년의 이야기이자 회고록이다. 약간의 도스토옙스키다운 부분이라고 한다면 이 소년의 심리와 행동을 묘사하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두 귀족 부인 사이에서 소년은 사랑을 느낀다. 그렇다. 부적절하다고 느껴지겠지만 사랑이라는 단어를 대체할 다른 단어가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사랑이 인간에게 하게 만드는 행위, 이를테면 질투, 수치, 허세, 배려, 연민, 분노 등의 감정이 고스란히 소년에게서 나타날 뿐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 눈 앞에서 사라진 후 혼자 있을 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들과 몸의 반응들이 소년의 경우에서도 모두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주인공은 자신이 꼬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것이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를 충분히 이해하고 또 그것을 역으로 이용해 먹기도 한다. 물론 그 한계 때문에 사랑이 생각과 마음에만 머문 채 가슴앓이를 해야 하지만 말이다. 물론 이 작품은 회고록 형식을 빌려오고 있고, 어른이 되고 난 이후의 관점이 과거를 해석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거르면서 읽는 편이 좋을 것이다. 

M 부인을 사모하는 우리의 꼬마 주인공은 어느 날 그녀가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인 N 청년과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둘 사이의 밀회를 목격하게 된다. 서둘러 자리를 비운 N 청년이나 황급히 누군가가 불러 자리를 이동한 M 부인은 N 청년으로부터 받은, 겉봉투에 아무것도 안 적힌 편지를 그만 땅에 떨어뜨린 채 잃어버리고 만다. 그 편지가 발각되면 큰일인 것이다. 바로 이때다. 우리의 꼬마 주인공이 꼬마 영웅으로 거듭나게 되는 시기가. 소년은 그 편지를 주웠고 은근슬쩍 자기가 밀회의 목격자라는 사실을 숨긴 채 M 부인에게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지 고심 끝에 행동으로 옮기게 된다. 꽃다발 안에 편지를 보이지 않게 숨겨두어 전달하는 것이었다. M 부인은 소년의 꽃다발을 받고 옆에 두기만 했는데, 마침 벌 한 마리가 날아오고 부인은 꽃다발로 벌을 쫓다가 그 안에 숨겨진 편지를 발견하게 된다. 그때 소년은 자는 척을 하고 있었다. 부인은 모든 것을 짐작했고, 구원을 받은 기쁨과 감동으로 우리의 꼬마 영웅에게 키스를 해준다. 

이제 막 청소년으로 접어드는 한 소년이 유부녀에게 사랑을 느끼게 되다니. 도스토옙스키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건 것일까. 혹시 스스로가 어린 시절 비슷한 경험을 했기 때문은 아닐까. 또래 아이들에 비해 정신적으로 성숙한 편이었다고 적혀 있는 글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그러므로 틀린 짐작만은 아닐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한편으론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시베리야 유형을 다녀오기 전까지 도스토옙스키가 좋아했던 여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궁금해진다.

* 도스토옙스키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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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스토옙스키 다시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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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야 외 열린책들 세계문학 126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석영중 외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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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시킨의 옷을 입은 도스토옙스키의 구전동화 같은 작품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크리스마스 트리와 결혼식’을 읽고


감상문 (특히 문학 작품에 대한)을 남길 때 나는 작품의 제목을 할 수 있는 한 이해해 보려고 노력한다. 저자 (혹은 출판사)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 대해서는 실패다. ‘결혼식’은 쉽게 이해가 되는데 작품을 다 읽어도 왜 크리스마스나 송년회가 아닌 ‘크리스마스 트리’인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별 뜻 없이 도스토옙스키는 연말이라는 시기에 대한 상징으로 사용했겠거니 하며 넘어가려 한다 (재독 하면 혹시 알게 될까? 내가 이 작품을 다시 읽긴 할까?).


내러티브에서는 도스토옙스키보다 푸시킨이 더 많이 느껴진다. 여태껏 읽어왔던 도스토옙스키 작품들에 비해 평면적이다. 구전동화 같은 느낌마저 든다. 이 짧지만 웃지 못할 이야기에서 유일하게 내가 아는 전형적인 도스토옙스키가 느껴지는 부분은 소설 초반 작중 화자의 캐릭터를 묘사할 때 (병적으로 외톨이인 듯한 캐릭터는 꽤나 익숙하다), 그리고 결혼식 신랑 율리안 마스따꼬비치의 5년 전 모습을 묘사할 때라고 할 수 있겠다. 나머지는 죄다 푸시킨인 것만 같다.


원하지 않는 결혼을 하게 되는 열여섯 살 소녀, 그리고 그녀의 부모가 가진 재력을 미리 알고 5년 전 한 어린이 무도회에서 열한 살이었던 그녀를 미리 점찍어 두고 결국 자기 신부로 만들어버리는 교활한 기회주의자 율리안 마스따꼬비치. 이 둘의 5년 전과 후의 모습을 모두 알고 우연히 어떤 교회 옆을 지나가다가 두 사람의 결혼식을 보게 되는 일인칭 관찰자 시점의 작중 화자. 이것이 이 작품의 전부인 것만 같은 이 기괴한 기분.


열린책들 판으로 14 페이지 밖에 안 되기 때문이리라. 무언가 도스토옙스키다운 면모를 보여주기에는 너무도 짧은 작품이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도스토옙스키의 초기작이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나는 꿋꿋하게 나머지 작품들도 읽어나가리라.


* 도스토옙스키 읽기

1. 죄와 벌: https://rtmodel.tistory.com/811

2. 백치: https://rtmodel.tistory.com/815

3. 악령: https://rtmodel.tistory.com/879

4. 미성년: https://rtmodel.tistory.com/928

5.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https://rtmodel.tistory.com/1068

6. 죽음의 집의 기록: https://rtmodel.tistory.com/1087

7. 가난한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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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도스토옙스키 (by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 https://rtmodel.tistory.com/1077

12.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177

13.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by 이병훈): https://rtmodel.tistory.com/1194

14. 매핑 도스토옙스키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358

15. 도스토옙스키의 명장면 200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362

16. 난데없이 도스토옙스키 (by 도제희): https://rtmodel.tistory.com/1388

17.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396

18. 상처받은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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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악어: https://rtmodel.tistory.com/1436

21. 인간 만세!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488

22. 도스토옙스키를 쓰다 (by 슈테판 츠바이크): https://rtmodel.tistory.com/1625

23. 도스토옙스키가 사랑한 그림들 (by 조주관): https://rtmodel.tistory.com/1644

24. 백야: https://rtmodel.tistory.com/1659

25. 뽈준꼬프: https://rtmodel.tistory.com/1702

26. 정직한 도둑: https://rtmodel.tistory.com/1703

27. 크리스마스 트리와 결혼식: https://rtmodel.tistory.com/1704


*도스토옙스키 다시 읽기

1. 가난한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690

2. 분신: https://rtmodel.tistory.com/16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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