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야 외 열린책들 세계문학 126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석영중 외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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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함의 진화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약한 마음’을 읽고

도스토옙스키를 읽어나갈 때 꼭 필요한 단어 하나를 뒤늦게 수확한 기분이다. ‘악한 evil’ 마음이 아닌 ‘약한 weak’ 마음. 지금까지 읽어온 많은 작품 속 등장인물들의 기이하리 만큼 이해할 수 없는 생각과 말과 행동들이 바로 이 단어, ‘약한’ 마음으로 재해석이 가능하다는 생각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약함과 악함 사이의 상관관계. 때론 나의 ‘약함’이 타자에겐 ‘악함’으로 비칠 수 있다는 것. 그렇게 타자의 눈에 비친 ‘악함’을 인지하게 된 나의 ‘약함’은 비로소 ’악함’으로 변모할 기회를 맞이하고 종종 발현하기도 한다는 것. 약함과 악함 사이의 상관관계는 약함의 변질로 진화할 수 있다는 것. 

이 작품 속 약한 마음은 관청에서 정서를 담당하는 가난한 하급관리 바샤 슘꼬프다. 소설은 바샤가 같은 아파트에 동거하는 아르까지 이바노비치에게 자신이 결혼 약속을 받아낸 사실을 기쁘고 들뜬 마음으로 전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그 결혼은 파혼으로 치닫고 바샤는 정신병원에 실려 가며 소설은 끝을 맺는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약혼과 파혼 사이 바샤의 붕괴과정을 보여준다고 해석할 수 있겠다. 약한 마음 바샤는 그 누구에게도 악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누구도 바샤에게 악한 일을 저지르지 않는다. 그러나 바샤에게는 그런 열매가 맺히게 된다. 약함은 수동태 형식을 띨 뿐 악함과 같은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며, 그 결과의 방향은 자기 자신을 향하는 것이다. 게으름, 태만, 우유부단함, 착한 사람 콤플렉스 등의 겉모습을 띠는 약함은 자기 파괴를 불러오는 것이다. 파괴를 위한 파괴. 이를 악하다고 하지 않으면 무어라 하겠는가.

바샤만의 문제로 읽으면 곤란하다. 개별적인 사건에서 보편적인 깨달음을 이끌어내는 독법은 이런 소설에서 특히 유용하다. 관찰에서 성찰로, 성찰에서 통찰로 나아가는 정석이다. 내 안에도 바샤가 있다. 바샤는 곧 약한 마음이다. 나태한 마음, 쉽게 흥분하고 들뜨고, 나아가 몽상에 사로잡힌 채 현실을 저버리고 싶은 마음. 이런 마음은 이상적이며 선한 양상을 띠기도 하지만 아무것도 해내지 못하는 무능력의 상징이 되기 쉽다. 스스로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극심한 괴리를 느끼며, 심하게는 작품 속 바샤처럼 착란과 분열, 불안 등의 표현형을 나타내며 붕괴되기도 하는 것이다. 약함의 발전 양상은 꽤나 파괴적이고 때론 치명적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인간 내면에 대한 관찰과 분석을 따라가며 이해하기 위해 빠질 수 없는 개념이야말로 인간의 ‘약함’, 약한 마음이 아닐까 싶다.

흥미로운 점은 바샤의 붕괴처럼 인생의 커다란 불행도 그 시작은 아주 작은 일이었다는 것이다. 바샤에게 있어 그 일은 정서를 하는 일이었다. 그는 정서를 하는 일이 직업이었고, 그가 기한 내에 해야만 했던 서류가 남들보다 더 많았던 것도 더 급했던 것도 아니었다. 게으르지만 않았다면, 미루지만 않았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나는 바로 이 지점에 도스토옙스키의 의도가 숨어있다고 생각한다. 약함의 최대치를 보여주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자기 파괴의 임팩트기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약함이 약함으로 끝나지 않고 악함이 초래하는 결과와 같은 결과를 낼 수 있다는 걸 명징하게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바샤의 붕괴과정을 찬찬히 살펴보길 추천한다. 아르까지의 추임새와 바샤 스스로 만들어내는 허상과 그것으로 인한 공포와 불안을 주의깊게 관찰해보길 추천한다. 언제나 그렇듯, 낯설기만 한 제삼자였던 바샤가 나의 분신으로 느껴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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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스토옙스키 다시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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