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의 언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8
에밀리 브론테 지음, 김종길 옮김 / 민음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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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클리프: 폭풍의 근원지


에밀리 브론테 저, '폭풍의 언덕'을 읽고


일주일 남짓 나는 거의 매일 한 시간 가까이 책이라는 타임머신을 타고 19세기 초 영국 요크셔에 위치한 '워더링 하이츠'와 그로부터 4마일 정도 떨어진 '드러시크로스 그레인지'에 다녀왔다. '워더링 (Wuthering)'은 '바람이 거세게 부는'이라는 뜻을 가진 영어 방언이고, '하이츠 (Heights)'는 '높은 곳'이라는 뜻을 가지지만 그 뜻과는 별 상관없이 어떤 장소를 지칭할 때 흔하게 사용되는 단어다 (참고로 내가 거주한 첫 미국은 오하이오주에 위치한 쉐이커 하이츠 (Shaker Heights)였고, 캘리포니아에 살 때 옆 동네는 아시엔다 하이츠 (Hacienda Heights), 라 하브라 하이츠 (La Habra Heights), 롤랜드 하이츠 (Rowland Heights)였다). 둘을 합친 '워더링 하이츠 (Wuthering Heights)'는 자연스레 '바람이 거세게 부는 높은 곳'으로 해석할 수 있고 이 작품의 원제가 되었다. 


한국어판 제목 '폭풍의 언덕'은 적절치 않은 의역의 결과다,라고 나는 생각한다. 작품을 다 읽고 나니 한국어판 제목도 원제를 그대로 살렸다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폭풍의 언덕'은 폭풍이 부는 그 어떤 언덕이라도 될 수 있지만, 그래서 낭만성과 막연함을 동시에 불러일으키지만, '워더링 하이츠'는 작품의 주 배경이자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저택으로써 구체성과 고유성을 갖기 때문이다. 내 머리와 가슴에 남은 잔상도 '폭풍의 언덕'이 아닌 '워더링 하이츠’이고, 막연한 풍경이 아닌 그곳의 구체적인 사람들의 이야기다.


굳이 폭풍이라는 단어에 의미를 둘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그래도 그렇게 해석을 시도한다면, 그곳은 폭풍이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분다 (이 점만 고려하더라도 ‘폭풍의 언덕’은 적절치 않은 제목이다. ‘폭풍의 언덕’에서는 폭풍이 외부에서 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작품 속 폭풍의 근원은 자연이 아닌 한 사람이다). 그 폭풍은 '사랑'보다는 '증오' 또는 '복수'에 가깝고, '선'보다는 '악'이, '낭만'보다는 '욕망'이 도드라진 실체로써 인간의 어떤 내면이나 특정한 감정을 나타내는 한 단어로 정의할 수 없는 이름을 가진다. 그 이름은 '히스클리프’. 폭풍의 근원이자 모든 불행과 악행의 시작인 사람. 이 작품의 시작과 끝은 히스클리프의 등장과 죽음으로 그려진다. '워더링 하이츠'의 본체는 곧 '히스클리프'라고 해석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고 원제를 ‘히스클리프’라고 했다면 작품을 모두 담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히스클리프는 마치 증오하고 복수할 대상이 존재할 때만 생기가 도는 사람처럼 묘사되는데, 그 대상(들)이 존재했던 주요 장소 중 하나가 바로 워더링 하이츠이기도 하고, 그가 살면서 유일하게 사랑을 느낄 만큼 깊은 관계를 가졌던 캐서린 언쇼를 처음 만난 장소이자, 그가 기록된 삶을 살기 시작하고 마침내 죽음을 맞이했던 장소 역시 워더링 하이츠이기에, 이 모두를 담아낼 수 있는 제목으로는 아무래도 워더링 하이츠가 가장 적절했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겠다. 


작품을 읽기 전에 짐작했던 막연한 인상은 낭만적인 사랑 이야기였다. ‘폭풍의 언덕’이라는 제목도 바로 이 강렬한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었으리라고 짐작했었다. 그러나 작품을 절반 정도 읽었을 때 나는 내가 보기 좋게 틀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 작품은 낭만과는 무관한, 오히려 광기어린 한 사람의 지독한 이기심 내지는 복수심에 불타오르는 한 사람의 냉혹한 분노로 읽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물론 그 한 사람은 히스클리프이다. 


작품 후반에 히스클리프 스스로도 고백하듯 그는 자신의 모든 분노, 증오, 복수의 행동에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다. 자기 때문에 불행을 넘어 파멸에 이른 사람이 한둘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치 자기가 해야 할 일들을 한 것처럼 당당했다. 비록 그가 어린 시절 고아이자 이방인으로 캐서린을 제외한 모두에게 푸대접을 받는 등 차별을 견뎌내야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워더링 하이츠와 드러시크로스 그레인지에 속한 모든 사람을 불행으로 밀어 넣을 필요까진 없었다. 어린 시절 아이들의 순수한 표현들은 종종 서로에게 깊은 상처를 주기도 하지 않는가. 그리고 19세기 초라는 시대도 감안해야 하지 않겠는가. 무엇보다 그는 그 시절 그 공간 덕분에 캐서린이라는 한 사람을 영혼 깊숙이 사랑할 수 있지 않았던가. 그러나 히스클리프는 성숙하지 못했고 더욱 비뚤어져갔다. 캐서린의 본심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해한 채 수년간 타지로 떠나버리고 만다. 


어느 날 다시 돌아온 히스클리프는 이미 결혼해 거주지를 드러시크로스로 옮긴 캐서린에게 여전히 마음을 놓지 못한다. 그는 어린 시절 그를 가장 학대했던 힌들리가 여전히 거주하고 있는 워더링 하이츠로 다시 돌아가 살기 시작한다. 그가 그곳으로 간 목적은 오직 한 가지였다. 복수. 피를 부르는 폭력은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힌들리와 도박을 해서 야금야금 그로부터 돈을 긁어모으기 시작했고, 마침내 그를 빚더미에 앉게 만드는 데 성공한다. 힌들리는 정신쇠약까지 걸리며 점점 자멸하게 되고, 히스클리프는 드디어 워더링 하이츠의 실제 주인으로 등극하게 된다. 그가 계획한 복수가 가시적인 열매를 맺은 첫 번째 사례였다. 


히스클리프가 증오한 대상은 두 저택의 모든 어른들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마치 복수를 위해 사는 사람 같았고, 늘 자신을 피해자로 여겼던 듯하다. 그의 과도한, 인정할 수 없지만 스스로는 절제하고 있는 듯한, 분노는 결국 그가 유일하게 사랑했던 캐서린까지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나는 이 시기가 리스클리프에겐 자신의 악행을 뉘우치고 새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유일한 기회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그는 보란듯이 정반대의 길로 향한다. 더욱 비뚤어져간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마치 막다른 길에 이르러 남은 거라곤 더욱 망가지는 길밖에 없는 사람처럼 말이다. 히스클리프는 그 이후 어른들만이 아니라 그들이 낳은 자녀들까지도 모두 파멸시키기로 작정한 듯한 사람으로 변모해 간다. 


이 작품을 히스클리프를 중심으로 보면 그의 복수극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렇게 단순하지도 않을뿐더러 다른 장점도 많이 가진다. 물론 히스클리프를 제외하면 모든 등장인물들이 빛을 잃어버리게 된다. 하지만 총 세 세대에 걸친 여러 다른 인물들 사이의 사랑과 일상 이야기는 이 작품을 충분히 매력적이게 한다. 특별히 캐서린 언쇼가 죽는 날 태어났던 그녀의 딸 캐서린과 힌들리가 남기고 간 아들 헤어튼, 그리고 괴기스럽게 느껴지기도 하는 워더링 하이츠의 하인 조셉의 캐릭터를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이 작품을 충분히 즐길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 작품 역시 결국 사람 사는 이야기다. 상이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보편적이고 변하지 않는 인간의 내면을 잘 그리고 있다. 도스토옙스키와는 달리 에밀리 브론테는 이 작품에서 서사와 대화 위주의 전개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그러나 두 작가의 공통점이 더 중요하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다.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의 내면을 도스토옙스키는 자신만의 독특한 관찰과 분석과 통찰로써, 에밀리 브론테는 인물들의 말과 행동을 보여줌으로써 조명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내면을 탐구하면서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지속적인 흥미를 느끼며 책장을 넘기고 싶은 독자라면 나는 이 작품을 자신 있게 권하고 싶다. 


#민음사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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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이하의 것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호영 옮김 / 녹색광선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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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것들을 기꺼이 껴안는 삶

조르주 페렉 저, ‘보통 이하의 것들’을 읽고

처음 읽는 조르주 페렉. 그에게 ‘일상의 글쓰기’라는 타이틀은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다. 오히려 그 자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 책에 소개된, 다분히 실험적이고 집요하여 당황스럽기조차 한 그의 글들은 넌지시, 그러나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고, 말을 건네는 것 같았다. 익숙한 것들, 대부분의 일상을 이루지만 익숙하다는 바로 그 이유로 어느새 일상에서 탈락되고 배제되어 버린 그 소중한 것들을 다시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라고 말이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내게 주어진 인생의 후반전이 빛날 수 있는 길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 같다고. 그래서일까. 오늘 아침에 집을 나서며 내 눈에 들어오는 건물들, 장소들, 공간들이 다르게 보였다. 

페렉의 글이 내가 예전에 썼던 문장들을 기억나게 해서 여기 소환해 본다. 프레드릭 비크너 (뷰크너)의 ‘주목할 만한 일상‘을 읽고 쓴 감상문의 앞부분이다. 일상에 눈을 돌린 작가들의 글은 한결같이 조용히 마음 깊은 곳을 터치하는 것 같다.

“프레드릭 비크너 (뷰크너)는 일상이 주목할 만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주목하라고 외친다. 멈추고, 바라보고, 귀 기울이라고 요청한다. 우리들의 삶이 있고 우리들의 이야기가 있는 곳, 우리들의 현재가 살아 숨쉬는 곳, ‘지금, 여기’의 무대, 즉 우리들의 일상을 알아채고 느끼고 누리라고 말한다. 버젓이 존재하지만 좀처럼 인식되지 않는 존재들의 향연. 뒤돌아보면 또 놓쳐버린 아쉬움으로 가득 찬 기억들. 아침에 해가 뜨고 저녁에 해가 지듯 매일 우리들을 찾아오지만, 마치 투명인간처럼 우리들을 그냥 스쳐 지나가버리는 그 소중한 시간들. 늘 높고 빛나는 특별함만을 찾는 이들에게는 언제나 무시나 희생을 당하지만, 성숙한 어른이 되어 한층 낮은 자세로 두 번째 인생을 시작하고 마치 자신의 인생을 재방문하듯 평범함 가운데 비범함을 발견한 소수의 무리들에게는 항상 만족과 행복의 근원이 되어주는 삶의 터전. 비록 누구에게나 주어졌지만, 아무나 볼 수 없고, 또 아무나 들을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한 삶의 조각들. 이는 곧 신비, 그리고 그것의 다른 이름은 바로 우리들의 일상일 것이다.” 

문득 어른으로 성숙해졌다는 지표가 무엇일까 궁금해졌다. 눈이 깊은 자의 시선은 어디를 향할까. 무대 위가 아닌 무대 아래, 낯선 영화 같은 찰나가 아닌 묵직하게 삶을 차지하고 있는, 빛바랜 일상이 아닐까. 그래야만 하지 않을까. 페렉의 낯선 글쓰기 덕분에 평범하고 익숙했던 내 삶을 낯설게, 하지만 더욱 애정 어린 눈으로 다시 바라보게 된다. 미지의 보물을 찾아내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미 내 손에 쥐어진 보석을 재발견하기 위해서다. 

페렉이 말한 대로 최소한의 경험과 적극성을 갖고 작은 행운에 자신을 내맡기며 살아가고 싶다는 바람이 생겼다. 한가로이 산책을 하며,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로부터 배제되었던 익숙한 것들의 이름을 다시 불러보며 보듬는 삶을 살아가고 싶다. 저 높고 빛나는 곳을 향한 눈을 낮추어 겸손하고 경건한 자의 마음으로 내 소소한 일상을 기꺼이 껴안는 삶을 살고 싶다. 페렉이 지적한 것처럼, 그것들을 결코 제대로 알 수는 없더라도 적어도 그것들과 친분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거면 충분하다.

*녹색광선 읽기
1. 감정의 혼란 (by 슈테판 츠바이크): https://rtmodel.tistory.com/1608
2. 결혼, 여름 (by 알베르 카뮈): https://rtmodel.tistory.com/1646
3. 미지의 걸작 (by 오노레 드 발자크): https://rtmodel.tistory.com/1650
4. 눈보라 (by 알렉산드르 푸시킨): https://rtmodel.tistory.com/1682
5. 보통 이하의 것들 (by 조르주 페렉): https://rtmodel.tistory.com/1735

#녹색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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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의 피아노 - 철학자 김진영의 애도 일기
김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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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퍼하지 말고 더 사랑하기


김진영 저, '아침의 피아노'를 읽고


"김진영 선생님은 임종 3일 전 섬망이 오기 직전까지 병상에 앉아 메모장에 '아침의 피아노'의 글들을 쓰셨다." 

이 책의 첫 문장이다. 한 장을 더 넘기면 차례가 나온다. 2017년 7월부터 2018년 8월까지의 시간이 덩그러니 적혀있다. 1952년생인 저자 김진영은 2017년 7월 암 선고를 받는다. 그리고 2018년 8월 향년 66세로 세상을 떠난다. 암 선고를 받았을 때 그의 간은 이미 암덩어리가 장악하고 있었다. 병원에서 공식적인 진단을 받았던 그날 그는 암 환자가 되었다. 그 후, 1년 하고도 1개월. 비록 건조한 문자로 적혀 있지만, 이 책의 차례는 저자가 암 환자가 되고 암에게 육체를 내어주기 직전까지 그의 숨과 그의 정신을 오롯이 담아내고 있다.


"내 마음은 편안하다." 

'작가의 말'을 제외한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이다. 읽고 나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잠시, 마음이 다시 무너졌다. 나는 죽기 3일 전에 과연 이런 문장을 쓸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는 생각에 마음이 더 무거워진다. 


암 환자로 지낸 1년 1개월간 저자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책은 롤랑 바르트의 '애도 일기'였던 것 같다. 총 234편의 짧은 일기 가운데 수 차례 언급되기도 했고, 이 책의 부제도 같은 제목이기 때문이다. 아직 바르트의 '애도 일기'를 읽어보지 않은 나로선 면밀한 비교가 불가능하겠지만, 저자가 스스로 바르트와 비교한 바에 따르면, 바르트의 일기는 어머니의 죽음을 애도하며 쓴 글인 반면, 저자의 일기는 자신의 죽음을 애도하며 쓴 글이다. 즉, 바르트는 '사랑하는 대상'을 잃어버린 상황을 애도한 반면, 저자는 '사랑하는 주체'를 잃어가는 상황을 애도한 것이다. 요컨대, 사랑의 객체와 주체의 차이. 저자는 부끄러움과 괴로움을 느끼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신은 바르트보다 지극히 행복한 처지라고. 자신은 죽어가고 있지만, 사랑의 대상들은 생생하게 현존하기 때문이라고. 그것들을 사랑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라고. 


아, 이런 사유라니! 죽음을 앞둔 철학자의 사유를 따라가다 보면, 감정은 벅찬 가슴을 무너뜨리고, 이성은 맑은 상태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타자의 상실을 저울에 올려놓을 수는 없겠지만, 사랑하는 주체의 상실보다 사랑받는 객체의 상실이 내게도 더 묵직하게 다가온다. 나는 나를 잃어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기는 싫은 마음. 공감이 된다. 특히 한 여자의 남편이자 한 아이의 아빠라는 존재자로서 나는 이 마음을 더 공감하게 된다. 죽음이라는 존재론적 불안의 근원 앞에 단독자로 서게 되면 사람은 이타적이 되는 걸까. 


이어령 선생님은 88세로 세상을 떠나기 6개월 전에 사랑을 언급한다. 복막에서 시작된 암세포가 맹장과 대장, 간으로 전이되어 두 번째 수술을 받은 후 치료 중단을 선언하고 집에서 죽음을 맞이하면서 친필로 쓰신 글의 요지가 '사랑'이었다. 마지막까지 사랑할 수 있는 것들을 사랑하자고 했다. 김진영 선생님 역시 이 책에서 사랑을 언급한다. 이 세상을 마지막까지 사랑할 거라고, 그것만이 자기의 존재이고 진실이고 의무라고. 그런데 가만히 다시 보니, 이 다짐이 적힌 204번째 일기는 "병원에 다녀왔다. 결과가 안 좋다."로 시작한다. 그럼에도 그는 세상이 여전히 아름답다고 하면서 그 세상을 끝까지 사랑하겠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아, 나는 나의 미래의 죽음 앞에서 이렇게 사랑을 노래할 수 있을까.


이것 말고도 이 책에 담긴 문장들은 간결하고 함축적이며 깊다. 활자보다 여백이 더 많은 이 책의 바른 독법은 여백을 읽어내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시간이 더는 추상적인 의미가 아니라 구체적이고 체험적인 질량이고 무게이고 깊이로 다가간 순간들을 살아내는 저자의 일상도 활자가 아닌 여백에 더 많이 담겨있을 것이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힘든 나날 가운데 매일 같이 도래한 아침의 숭고함을 알고 그 하루를 정중하게 환대하는 저자의 몸과 마음도 활자로 쓰인 문장이 아닌 쓰이지 않은 문장들에 훨씬 더 많이 녹아있을 것이다. 책을 덮었지만 여운이 오래 남을 듯하다. 그러나 죽음을 깊은 묵상한 자로서 나는 다가오는 '오늘 하루'를 더 감사하며 더 소중하게 살아내리라. 슬퍼하지 말고 더 사랑하리라.


#한겨레출판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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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 성경을 읽다
이상환 지음 / 도서출판 학영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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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해석의 또 하나의 좋은 안내서


이상환 저, 'Re: 성경을 읽다'를 읽고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한 안내서로 나는 그동안 여러 번 더글라스 스튜어트와 고든 D. 피가 쓴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와 김근주 교수가 쓴 '나를 넘어서는 성경읽기'를 추천하곤 했다. 이제 한 권 더 늘었다. 바로 이 책, 이상환 목사가 쓴 'Re: 성경을 읽다'이다. 이 세 권을 읽고 본격적인 성경 읽기에 들어간다면 주문 외우듯 수십 번 성경만 통독한 어르신들이 닿지 못한 깊이까지 이해하고 건전하고 건강하게 하나님을 더 잘 알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가족과 함께 최근 4년간 성경을 세 번 통독하고 나니 올해부터는 약간의 갈증이 생겼었다. 내년부터는 조금 더 깊고 넓게 성경을 읽고 싶어서 최근에 나는 그 해결책으로써 스터디 바이블 하나를 구매했다. 가족과 함께 읽어나가는 성경 읽기도 지속하겠지만, 내년엔 혼자서 매일 스터디 바이블을 통해 하나님을 더 알아가려고 애써볼 작정이다. 이런 상황에 때마침 이 책을 읽게 되어 감사하다는 생각이다. 역시 하나님은 나의 시간표를 잘 아신다. 


이 책은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한 하나의 안내서다. 쉽고 간결하여 신학서적이라는 분류가 무색할 만큼 읽어나가기가 수월하다 (나는 3시간 채 걸리지 않아 다 읽어버렸다). 무엇보다 이 책의 장점은 해석학이라는 어려운 학문의 진입 장벽을 낮춰 쉽게 설명한다는 것이다. 나 역시 프로 생물학자라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전공 지식을 쉽고 재미있게 설명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안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의 진입 장벽이 낮다는 말은 결코 이 책이 가벼운 책이란 말이 아니다. 오히려 저자의 하나님 말씀에 대한 사랑과 열정과 오랜 연구가 만들어낸 열매일 것이다. 독자들은 그저 이 단 열매를 따먹으며 성경 해석에 대한 바르고 건전한 자세를 배우기만 하면 된다.


저자가 짚어 주듯이 성경은 양면성, 즉 역사성과 초월성을 가진다. 특정한 시대에 만들어진 역사적 문서이면서 동시에 그 시대에만 귀속될 수 없는 의미를 지니는 초월적 문서다. 초월적인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였지만, 유한한 인간을 통해 쓰였기 때문에 역사성을 띨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성경 해석을 위해서는 이 양면성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접근하려고 애써야 한다. 저자는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써 의사소통 모형을 소개한다. 이 책의 목적은 의사소통 모형을 통해 성경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방법을 쉽게 풀어내는 일이다. 


의사소통 모형은 전통적인 해석학의 세 가지 접근법인 (1) 저자 중심 (텍스트 뒤에서 해석), (2) 텍스트 중심 (텍스트 안에서 해석), (3) 청중 중심 (텍스트 앞에서 해석)을 절충한 모형이다. 저자 중심으로만 성경을 해석하면 텍스트와 청중이 배제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특히 저자가 미상인 경우엔 곤란을 겪을 수밖에 없다. 텍스트 중심으로만 성경을 해석하면 저자의 의도를 놓치거나 그것과 무관한 해석을 하는 위험이 커진다. 무엇보다 텍스트 안에 갇혀 콘텍스트를 놓치기 쉽다. 청중 중심으로만 성경을 해석하면 고정된 의미는 사라지고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의 해석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 얄팍한 상대주의로 흘러갈 위험이 커진다. 그러므로 건전하고 온전한 성경 해석을 위해서는 이러한 세 가지 접근법의 장단점을 고려하여 절충할 필요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저자가 소개하는 의사소통 모형인 것이다. 


다행히도 내가 수년 전부터 읽어온 성경 해석에 관련된 신학 서적들은 이미 이러한 의사소통 모형을 이용하여 집필된 것이다. 크리스토퍼 라이트나 김근주 교수, 톰 라이트나 스캇 맥나이트의 책들을 떠올려보면 저자나 텍스트나 청중 중심으로만 치우쳐 쓰인 책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의사소통 모형은 이미 많은 신학자들에 의해서 사용되고 있는 모형이라고 봐도 될 것 같다. 특별하다기보다는 너무나 합리적이고 너무나 당연한 성경 해석 접근법인 것이다. 


자주 들었던 말이지만 들을 때마다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성경은 우리를 위해 쓰였지 우리에게 쓰이지 않았다."는 문장은 성경 해석학이 필요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말해준다. 일차 독자와 이차 독자 사이의 간격, 즉 수천 년 전의 원청중 (일차 독자)과 현재 우리 같은 이차 독자의 사이에는 수많은 차이가 존재한다. 저자와 일차 독자 사이에서는 특별한 설명이 없어도 통하는 단어들이 시공간이 다른 이차 독자에게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올 수 있다. 타임머신을 타고 원청중 혹은 일차 독자에게 가서 저자가 쓴 단어의 의미와 맥락을 물어보면 쉽게 해결되는 문제일 수 있겠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차 독자인 우리들에게 완전한 성경 해석은 현실에서 구현할 수 없는 이상에 머물 수밖에 없다. 이 부분에서 저자는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완전한 성경 해석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성경 텍스트만 공부하는 바이블 스터디를 넘어 성경의 다층적 측면까지 살피는 비블리컬 스터디즈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그리고 절대적 확실성을 지양하고 합리적 확실성을 지향해야 한다고. 웨슬리안 사변형의 네 요소인 성경, 경험, 전통, 이성 중 으뜸이 성경이라는 사실을 놓치지 말라고. 마지막으로 목회자나 신학자가 아닌 모두가 평신도 신학자가 되길 요구하는 저자의 바람에 나는 아멘으로 화답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성경 공부와 신학 공부는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믿기 때문이다. 


#학영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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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란사자 2024-03-13 04: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리뷰 정말 좋네요. 리뷰 참 잘 쓰십니다. 감사합니다.
 
보통 이하의 것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호영 옮김 / 녹색광선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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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작가를 처음 만나는 문으로 녹색광선 책이 탁월하다는 생각입니다. 소장용으로라도 구매할 가치가 충분합니다. 읽고 감상문 남기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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