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의 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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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밀한 서사에 깃든 지독한 인간의 심리


정유정 저, ‘7년의 밤’을 읽고.

간결한 단문으로 휘몰아치는 정유정의 필력은 치밀한 서사와 정제된 묘사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그렇게 살아난 텍스트의 모든 여백이 긴장과 스릴로 가득 채워졌다. 나는 단숨에 빨려 들어갔고, 금세 압도되었다. 500 페이지가 넘는 작품을 함께 하던 약 다섯 시간 동안 나는 마치 오랜 여행이라도 다녀온 기분이다. 다섯 시간이 아니라 닷새가 지난 것 같다. 너무 깊게 몰입한 나머지 일으킨 착각일 것이다.

작가가 창조해낸 가상의 공간, 세령호. 나는 책을 덮고도 한참 동안 쿵쾅거리는 심장을 느꼈다. 작품 속에 빠져든 나는 잠시 동안 작가의 창조물 중 하나가 된 것 같았다. 눈을 감으면 세령호의 안개가 나를 감싸는 것 같고, 연민과 공포를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세령의 모습이 눈 앞에 아른거리는 것만 같았다. 크고 검은 눈, 허리까지 닿을 만큼 길게 풀어헤친 머리, 엄마 화장품으로 아무렇게나 칠한 조그맣고 하얀 얼굴, 구석구석 멍든 몸, 흰 팬티 차림의 작고 여린 아이, 이제는 스스로 눈을 감을 수 없는 아이, 오세령. 세령은 공포에 질린 채 도망치고 있었다. 강도나 괴한이 아닌 아빠로부터. 제기랄. 이것이 캄캄한 밤, 인적이 드문 어두운 안개 길을 그 조그만 발로 거침없이 달려야만 했던 이유다.

부와 명예를 등에 업은 사이코패스, 아빠 오영제로부터 폭력과 수치와 모멸을 견뎌내며 간신히 살아오던 열두 살의 초등학생. 엄마 하영은 남편에게 맞아 죽지 않기 위해 미리 도망쳤다. 으리으리하지만 텅 빈 그 집에 세령은 늘 교정을 해준답시고 손찌검을 해대는 아빠 오영제와 단둘이 살고 있었다. 세령이 죽던 날은 마침 세령의 생일이었다. 생일날, 그러니까 세령의 마지막 날이었던 그날에도 세령은 오영제에게 손찌검을 당했다. 오영제에게 있어서는 교정, 세령에게는 공포이자 폭력이었다. 세령은 활활 타는 초가 꽂힌 병을 오영제에게 던지고 기회를 틈타 창을 넘어 도망쳤다. 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녀는 살지 못했다. 그녀의 마지막 도망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 도망은 죽음으로 끝나버린 세령의 마지막 외출이었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 마지막 발걸음이었다. 아아, 아빠의 공포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그 길이 이렇게 끔찍한 사건의 전야가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가슴 깊은 곳에서 분노가 치밀었다. 오영제를 죽여버리고 싶었다. 이런 게 인간이란 탈을 쓰고 있다니! 내 심장은 쉬지 않고 벌컥댔다. 대동맥으로부터 피가 용솟음치는 게 느껴질 만큼. 그런데 작가 정유정은 여기에 오영제 가족뿐만이 아닌 최현수 가족을 연결시킨다. 세령의 허망한 죽음이 연결고리였다. 세령을 죽인 건 오영제가 아닌 최현수이기 때문이다. 세령은 오영제로부터 도망치던 중, 마침 그곳을 처음 방문한 최현수의 차에 들이 받힌다. 아, 이런 기막히고 비극적인 운명! 물론 최현수가 세령을 차로 친 건 사고였다. 악의가 전혀 없는 순수한 사고였다. 문제는 세령의 사인이 교통사고에 의한 다발성 장기 부전이나 과다출혈이 아닌 질식이었다는 데에 있다. 그렇다. 차에 부딪혀 죽은 줄로만 알았던 여자 아이가 살아있었다. 놀란 나머지 최현수는 운전석에서 나와 아이에게 갔다. 아이는 정신을 잃어가는 상태에서 “아빠”라고 읊조렸다. 마음이 무너졌다. 그때 최현수는 아이를 들고 곧장 병원으로 갔어야 했다. 그런데 그러지 않았다. 대신, 솥뚜껑 같은 왼손으로 입을 막아 생사를 오가는 아이의 마저 남은 숨통을 끊었고, 사체를 유기하기 위해 세령호에 던져버렸다.

최현수는 음주운전으로 면허정지를 당한 상태였다. 조금만 기다리면 면허가 갱신될 참이었다. 불법으로 운전을 해서 곧 살게 될 사택을 확인하러 밤늦게 세령호에 다다른 것이었다. 오는 도중에 술 한 잔 걸쳤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최현수는 잘 나가던 야구 선수였다. 한때 팀의 전성기를 이끌던 포수였다. 어느 날 예기치 않은 사고를 당하고 왼팔이 마비되는 증세가 잦아지면서 주전에서 밀려나야 했다. 2군에서 뛰다가 결국엔 야구를 그만둬야 했다. 제대로 배우지 못한 채, 191센티미터, 110킬로그램의 거구를 장점으로 활용하여 할 수 있는 일은 보안업체 경비직이었다. 그렇게 최현수는 자존감을 잃어갔고 술에 절어 살게 되었다. 어쩌다가 만난 아내 은주와의 결혼은 그를 더 깊은 나락으로 이끌었다. 그에게 유일하게 지키고 싶은 존재는 아들 서원이었다. 서원이만은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키고 싶었다. 

이 작품은 서원의 일인칭 시점과 전지적 작가 시점이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써졌다. 7년 전 사건, 그러니까 세령의 사고, 최현수의 살인, 오영제의 복수극이 빚어낸 재앙이었던 세령 댐 수문 방출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던 그날로부터 7년이 지난 이후, 승환과 함께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쫓겨다니다시피 살다가 그나마 정착한 등대마을에서 서원은 자기에게 배달된 운동화, 승환이 썼음이 분명한 세령호 사건에 대한 소설, 그리고 하영과 승환 사이에 오갔던 편지 다발과 승환이 남긴 컴퓨터 파일들을 훑어본다. 그날은 승환이 갑자기 사라진 날이었고, 서원이 전보 한 통을 받은 날이었다. 전보는 아버지인 최현수의 사형 집행이 치러졌으니 시신을 수습하라고 알리고 있었다. 서원은 이러한 자료들을 기반으로 사실일 수밖에 없는 추리를 해내고 전율과 함께 깨닫는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오영제가 실제로 살아있고, 여태껏 끈질기게 기다리다가 7년 전 못다 한 복수를 최현수의 사형 집행일에 맞춰서 완성하리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동안 전학에 전학을 마다하며 도망치다시피 살아온 나날들도 모두 오영제의 작품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형 전 오영제의 행동을 노련한 포수의 육감으로 정확하게 예측한 최현수와 승환, 그리고 두 형사의 도움으로 승환과 서원은 죽을뻔한 위기를 모면하고, 오영제의 복수극, 아니 미친 살인극을 가까스로 저지하게 된다. 7년의 밤이 비로소 끝을 맺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소설은 결말에 이른다.

작품 읽으면서 독자가 아닌 소설 지망생으로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이 있다. 작가는 각 인물의 내면으로 거침없이 들어가 그 사람의 생각과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고 그들의 심리를 분석한다. 작가는 한 사람이지만 동시에 각 등장인물이 되어 그 고유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던 것이다. 그로 인해 얻은 생동감 넘치는 입체감은 작품에 현실성을 부여했고 독자의 몰입을 유도했다. 등장인물들 서로가 서로를 어떻게 오해하게 되는지, 서로가 서로에게 드러내지 않는 비밀스러운 부분을 어떻게 추리해나가는지, 그리고 그렇게 감추거나 드러낸, 혹은 감춰지거나 드러나게 된 심리를 어떻게 분석하고 대처해나가는지, 정말이지 정유정 작가는 보편적인 인간의 본성을 철저하게 분석한 뒤 등장인물들에게 투영하고 그들만의 목소리를 들려줌으로써 놀랍도록 입체적이고도 현실적인 작품을 만들어낸 것이다. 앞에서 자세하게 언급하지 않은 하영 (오영제의 아내), 은주 (최현수의 아내)를 비롯하여 조연이라 할 수 있는 여러 등장인물들에 대한 묘사와 그들의 고유한 서사도 소설 전체의 흐름과 완벽하게 맞물린다. 각 인물들이 가진 상처에는 한국인으로서 공감할 수밖에 없는 정서가 깊이 녹아있다. 허투루 버릴 게 하나 없는 치밀한 작품이다.

과거와 현재, 환상과 사실을 오가는 서술 기법. 한시도 긴장을 늦추지 않는 단문의 화려한 연타. 탄탄한 서사와 인간 본성의 심연을 깊숙이 파고들지만 결코 직접적이지 않은 묘사들. 나는 독자로서 그리고 소설 지망생으로서 연신 침을 삼키며 이 작품을 읽어냈다. 프로의 맛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경험이었다. 처음 읽는 정유정 작가. 여태껏 왜 몰랐을까! 그동안 고전소설을 읽는답시고 현대소설을 게을리했던 것, 서양 고전을 탐독한답시고 한국소설을 등한시했던 것에 대한 후회가 밀려왔다. 만약 내가 소설을 쓴다 하더라도 한국 현대소설일 텐데 한국 현대소설을 많이 읽지 않았다는 사실이 부끄럽기까지 했다. 책을 다 읽고 가장 먼저 한 일은 정유정 작가를 비롯한 한국 현대소설 작가들의 작품들을 구매하는 것이었다. 마침 스무 권이 넘는 소설이 중고로 구입이 가능했다.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구매 버튼을 눌렀다. 이번 기회로 인해 한글로 써지고 한국 정서가 녹아있는 한국 현대소설의 세계로 본격적인 진입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아마도 나에겐 큰 흐름의 이정표가 될 만한 작품으로 자리매김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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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이라는 세계
이종태 지음 / 복있는사람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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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의 재료를 아는 사람이 아닌 별의 노래를 듣는 사람이길


이종태 저, '경이라는 세계'를 읽고


철학, 신학, 문학, 과학 등의 모든 학문, 그리고 모든 지식과 깨달음의 문을 열고 정직하게 걸어가다 보면 반드시 마주하게 되고, 또 마주해야만 하는 것. 앎이라는 과정의 동반자이자 길잡이, 나아가 그 과정 자체의 의미를 돌아보게 하고, 그것으로 한 걸음 다가간 대상과의 거리를 줄이기는커녕 더 확대시켜 결코 다가설 수 없다는 인정을 마음 중심으로부터 기쁘게 받아 내고야 마는 것. '경이'일 것이다. 


인간은 저마다의 모습으로 앎이라는 과정을 겪게 된다. 모름과 앎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며 변증법적인 발전을 해나간다. 그래서 앎은 앎으로 끝나지 않고 다시 모름으로, 그 모름은 다시 앎으로 변모해 나간다. 특히 인간은 눈앞에 있는 어떤 것 하나를 더 알았음에도 그것으로 인한 '플러스 원'만 보는 게 아니라 그것으로도 채우지 못한 채 더 넓어지기만 하는 '무한대'의 영역도 보게 되는 존재자다. 이런 면에서 나는 파스칼과 같은 생각이다. 인간 내면의 심연에는 신의 흔적이, 신 외에는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공간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앎과 모름의 변증법은 의식하든 못하든 예기치 못한 순간에 우리로 하여금 어떤 상황을 맞이하게 하는데 그것이 나는 바로 '경이라는 세계'이지 않을까 한다. 이 책의 제목 말이다.


공부하면서 종종 느끼는 깊은 전율은 눈에 선명하게 보이는 '플러스 원'을 장착했을 때이기보다는 여태껏 보이지 않았던 '무한대'의 텅 빈 공간이 그제야 눈앞에 드러났을 때에 찾아온다. 하나의 앎은 무한의 모름을 가리키고 나는 그렇게 다시금 출발점에 서게 되는 것이다. 다시 출발점에 선 나는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진정한 앎의 과정은 좁은 탑 꼭대기로 올라가는 여정이 아니라 황량할 만큼 더 넓은 대지로 이끌리는 여정이라 믿는다. 지경이 넓어진 자의 숙명, 그리고 이런 무한반복이야말로 겸손의 통로일 것이다.


인간은 짐승과는 달리 언제나 저 너머를 묻는 존재자다. 표면이 아닌 이면을 궁금해하고, 표층이 아닌 심층을 보고 싶어 한다. 이렇게 인간만이 가진 특징의 기원을 기독교 하나님의 창조를 믿고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석할지 잘 모르겠지만, 나는 이 점이야말로 '경이라는 세계'가 발아하는 근원이지 않을까 한다. 신비를 소멸하고 경이감과 경외감을 거세시키는 무수한 노력들, 이를테면 기계주의나 과학주의 등의 경도된 사상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여전히 소수의 사람들 안에서, 공동체 안에서, 신앙과 믿음 안에서 살아 역사하는 그 무엇.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표현을 떠올리게 만들고, 나아가 하나님이 없다 말하는 사람들까지 그 내면에 동일한 것이 심겨 있다는 사실을 믿게 만든다. '인간스러움'이 아닌 '인간다움'의 근원도 여기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루이스를 비롯한 믿음의 선진들이 모두 경험했던 경이의 순간들. 신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끈을 느끼게 하는 순간들. 저자의 말마따나 경이의 눈은 단순한 호기심 차원을 넘어 신비를 풀려고 하기보다 사랑으로 가만히 응시하는 눈일 것이다. 과학과 문명이 발달하고 무수히 많은 틈새의 신이 사라진 이 시대, 별의 재료를 파악했다고 별이 무엇인지 다 아는 것처럼 여기는 이 시대. 신비 앞에 서서 경이감과 경외감에 잠식되어 조용히 머리를 숙이고 입을 닫고 신을 벗고 두 팔을 든 사람들 중에 내가 있기를. 그 경이의 세계를 언제나 감지하려고 또 그 세계와 함께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사람들 중에 내가 있기를. 별의 노래를 듣는 사람들 중에 내가 있기를. 사람다운 사람, 경건한 사람, 겸손한 사람들 중에 내가 있기를. 


#복있는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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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해 부근에서 다시 읽고 싶은 명작 6
엔도 슈사쿠 지음, 이석봉 옮김 / 바오로딸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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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이 아닌 사랑


엔도 슈사쿠 저, '사해 부근에서'를 읽고


묵직한 한 방을 제대로 맞았다. 날카로운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먹먹한 가슴이 되었다. 꽤 오래갈 것 같은 예감이다. 아, 이렇게 또 엔도 슈사쿠를 만났다.


명쾌한 답이 아닌 질문을 던지는 책. 의심을 사라지게 하는 대신 자명하게 여겼던 것들까지도 반추하게 만드는 책. 내가 알던 지식과 내가 믿던 믿음이 건강한지, 치우치진 않았는지 다시 묻게 만드는 책. 책은 도끼이기도 하지만 안개 자욱한 숲으로 인도하는 안내자이기도 하다. 나는 찍히고 깨달으면서도 동시에 불안과 의심의 깊은 숲을 홀로 통과하게 된다. 확신의 죄에서 해방받는 유일한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또한 나는 책을 읽는, 아니 읽어야만 하는 이유를 다시 발견하게 된다. 


여섯 번째로 만난 엔도 슈사쿠의 작품 ‘사해 부근에서’가 내게 선물한 먹먹함은 엔도 슈사쿠의 인생에 흐르는 깊은 강과 내 안에 꿈틀대는 실개천이 만나 일어난 필연적인 화학반응의 결과일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던 확신의 정체가 순수함의 옷을 입고 있지만 사실은 미성숙하고 게으른 자아에 의해 쉽게 선택된 신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불편한 진실을 나는 이 작품을 읽으며 맞닥뜨려야 했다. 나는 작아지고 잠시 공허해졌다. 작품을 다 읽은 후에도 여전히 안갯속을 걷는 기분이다. 하지만 이게 현실이고 내가 머무르던 과거는 누군가의 치우친 해석으로만 지어진 온실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꽤 급진적인 생각도 하게 된다. 작은 우물 안이 안전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거기에서 성장과 성숙을 기대할 수는 없다. 성장과 성숙은 겹겹의 우물을 나온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단 열매이기 때문이다. 우물 안의 피터팬이 되기보다는 사는 동안 끊임없이 만나게 될 우물들을 탈출하면서 점점 더 깊어지는 지혜의 노인이 되고 싶다. 


‘침묵’과 ‘침묵의 소리’, 그리고 ‘깊은 강’에서 동일하게 흐르는 감정은 내겐 불안이었다. 그 불안이 이 작품 ‘사해 부근에서’에서도 그대로 흐른다. 어쩌면 이 작품이 내겐 불안의 정점을 찍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된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그리스도를 소설에서 직접 등장시켜서일까. 이 작품은 흔히 알려진 '신성'이라는 속성이 철저히 거세된 그리스도 예수의 모습을 총 일곱 명의 화자를 통하여, 마치 증언처럼, 직간접적으로 들려준다. 물론 소설 속 증언이다. 어디까지나 엔도 슈사쿠의 상상력의 산물이라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주춤했고 망설였으며 진지하게 며칠을 생각했다. 그 생각들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 질문들로 압축할 수 있다. 


“예수의 기적이 의미하는 본질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예수가 기적을 행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나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을 수 있는가?”, 

“나는 예수의 기적을 원하는가, 아니면 예수의 사랑을 원하는가, 나는 어떤 예수를 원하고 믿는가?”, 

“기적이 사랑일 수 있는가, 반대로 사랑은 기적일 수 있는가?” 


완전한 신성과 완전한 인성을 동시에 가지신 분. 하나님이자 인간이셨던 예수. 보수적인 기독교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했던 나에게 예수의 신성은 절대적이었고, 인성은 늘 축소되곤 했다. 그게 당연했고, 그래야만 좋은(?) 믿음을 가진 것처럼 여겨졌다. 예수의 인성을 강조하다 보면 자칫하다간 이단 소리를 듣기 십상이었고 신성모독이라도 한 것 같은 분위기에 쉽게 사로잡히곤 했다. 인간 예수를 말하는 건 좌파들이 지껄이는 구호 정도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신성과 인성을 결코 분리할 수는 없다. 인간을 영과 육의 이분법으로 분리하는 어리석은 짓과 다름없을 것이다. 건강한 신앙과 건강한 믿음은 한쪽으로 치우치면 불가능하다. 예수의 인성 말하기를 주저하고 무속적인 판단으로 신성 말하기에만 주력한다면 건강한 신앙이나 믿음은 차치하고서라도 예수가 누구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조차 답하기가 어려워질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장편소설 ‘최후의 유혹‘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최후의 유혹’ 역시 예수의 생애를 다룬다. 특히 고뇌하고 투쟁하는 인간 예수가 그 책의 중심이다. 반면, '사해 부근에서'에서의 예수는 기적을 행하지 않는 (못하는?) 대신 그 기적이 필요한 사람과 함께 있어 주고 수발을 들어주며 함께 울고 함께 아파하는, 사랑의 인간 예수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와 엔도 슈사쿠의 접점은 묘하게도 예수의 신성이 아닌 인성에 맞춰지고 있는 것이다. 


두 작품 모두 소설이라는 장치를 동원하여 허구 속에서 마음껏 예수의 인성을 다루지만, 정작 작품을 읽는 내 안에는 허구적 상상력을 넘어 지워지지 않을 강력한 신학적인 흔적을 남겼다. 고뇌하는 예수, 투쟁하는 예수, 그리고 사랑의 예수. 삼위일체의 하나님으로만 예수를 이해하는 협소한 지경이 확장되면서 나는 예수를 조금은 더 깊고 조금은 더 풍성하게, 그리고 조금은 더 친근하게 알게 된 기분이다. 사랑이라는 한 단어조차 나는 여전히 이론적으로밖에 모르고 있다는 반성을 하게 된다. 


앞서 언급한 질문들에 대한 나의 답은 여전히 뾰족하지 않다. 사복음서에 쓰인 예수의 기적이 실제로 벌어진 사건인지 아닌지는 과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 확인 및 증명할 방도가 없다. 그리고 이런 류의 문제는 늘 역사적으로 반복되었다. 역사적 사건이든 아니든 증명할 수 없는 문제라면 예수를 그리스도로, 나의 구원자요 주님으로 믿는 믿음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물론 어떤 사건이 역사적으로 밝혀진다 하더라도 그에 따라 해석을 하면 된다는 생각이다). 나는 '역사적 예수'를 믿거나 그 예수가 역사적으로 일으킨 기적 때문에 예수를 믿는 게 아니다. 나는 성경에 나온 예수를 믿는다. 그러므로 이 작품에서처럼 예수가 기적을 행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나의 믿음은 변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작품을 통해 기적을 일으키지 못하는 예수의 모습을 보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이 무엇인지 더욱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약한 자와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들과 함께 하고 그들을 돕고 그들과 동등한 자리에서 하나가 되는 것. 나는 앞의 여러 질문들을 내려놓고 이젠 나에게 묻는다. 기적을 행할 수 없다는 조건은 작품 속 예수가 했던 일들이 우리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임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나는 작품 속 예수처럼 사랑을 행하고 있는가?" 


문득 어딘가 숨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부끄러움을 느낀다. 차라리 기적을 행하는 예수를 믿는 게 나의 이기적인 자아로서는 훨씬 쉬운 것 같다. 사랑 없는 기적이 아닌 기적 없는 사랑. 이것이 예수의 인성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게 아닐까.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기적 없는 사랑이 인성에만 속한다고 말할 수도 없을 것 같다. 그 사랑이야말로 진정한 신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인성과 신성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지점인 것이다. 사랑을 행하는 것은 인성과 신성의 조화가 만들어내는 가장 아름다운 열매가 아닐까 싶고, 이 작품 속에 숨겨둔 엔도 슈사쿠의 메시지가 아닐까 싶다.


* 슈사쿠 읽기

1. 침묵: https://rtmodel.tistory.com/383

2. 침묵의 소리: https://rtmodel.tistory.com/390

3. 깊은 강: https://rtmodel.tistory.com/1378

4. 나를 사랑하는 법: https://rtmodel.tistory.com/1656

5. 바다와 독약: https://rtmodel.tistory.com/1681

6. 사해 부근에서: https://rtmodel.tistory.com/1770


* 카잔차키스 읽기

1. 그리스인 조르바: https://rtmodel.tistory.com/686

2. 영혼의 자서전: https://rtmodel.tistory.com/1152

3. 최후의 유혹: https://rtmodel.tistory.com/1191


#바오로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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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의 포도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4
존 스타인벡 지음, 김승욱 옮김 / 민음사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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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의 기계성 뒤에 숨은 인간의 이기성, 그리고 그것에 저항하는 인간다움


존 스타인벡 저, ‘분노의 포도’를 읽고

독서란 일차적으로 유희이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단순히 유희가 목적인 독서는 그것이 닿을 수 있는 깊이의 반의 반도 이르지 못한 채 제자리에서 맴돌 가능성이 크다. 무엇을 하든 그것을 충분히 즐기면서 지속하기 위해서는 재미만이 아닌 깊이와 풍성함을 지향할 필요가 있다고 믿는 나는 가끔 독서에도 비장한 마음으로 임하게 된다. 이때 독서는 단순한 ‘읽기’가 아닌 ‘이겨내기’의 의미를 띠고, 책은 ‘노는 장난감’이 아닌 ‘극복할 대상’이 된다.

언젠가부터 휴가를 맞이할 때면 평소엔 엄두를 못 내던 장편소설을 손에 든다. 이른바 ‘벽돌 깨기’다. 처음엔 백 퍼센트 도전정신으로 시작했다. 이런 기회가 아니면 언제 이 벽돌들을 깰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반은 부채감, 반은 의무감에 찬 비장하고 전투적인 마음이었다. 그에 따라 하는 수 없이 나는 편한 옷을 입고 소파 위에 올라타 기지개나 켜고 있는 고양이가 아닌 갑옷을 입고 창과 칼을 든 용사가 되어야만 했다.

몇 년 전 헤세의 마지막 작품 ‘유리알 유희’로 시작했던 이 단기 전투는 해를 거듭하며 나의 즐거움이 되었고, 이젠 다음 휴가 땐 무슨 작품과 함께 할지 기대하는 마음이 생길 정도가 되었다. 이 전투의 상대는 알고 보니 벽돌 책이 아닌 나 자신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렇게 성장했고, 그 대가로 이전에 누리지 못했던 독서의 깊이와 풍성함을 맛보았으며, 그것을 더욱 즐길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이번에 일주일 채 안 되는 짧은 휴가 동안 읽었던 작품은 민음사 판본으로 천 페이지에 육박하는 두 권으로 된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였다. 유럽 고전 문학에 심취하여 그 깊은 우물 안의 물을 길어 먹던 나는 미국 문학에 대해서는 거의 문외한과 같았다. 최근 몇 작품들을 읽으며 유럽 문학과 비교되는 미국 문학만의 독특한 맛을 알게 되었고, 그만큼 나의 독서는 지경이 더 넓어지게 되었다. 11년째 미국에 거주하기 때문일까. 미국 작가의 작품을 읽을 때면 무언가 공감되는 면이 크다. 부분적으로는 미국 문화와 합법/불합법적으로 여전히 벌어지고 있는 다양한 차별 문제와 그 배후에 있는 견고한 자본주의의 힘을 나도 보고 듣고 겪었기 때문일 것이다.

존 스타인벡의 작품 ‘생쥐와 인간’을 몇 달 전에 읽었던 탓인지 ‘분노의 포도’는 도입부부터 분위기가 그것의 연장선에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친숙하게 다가왔다. ‘생쥐와 인간’을 읽으며 머릿속에 그려보던 이미지가 고스란히 이 작품에도 투영되었다. 그 이미지는 궁핍과 허무였다. 알고 보니 두 작품 모두 1930년대 경제 대공황 시대에 써졌고, ‘분노의 포도’는 ‘생쥐와 인간’ 출간 후 2년 뒤에 출간된 작품이다. 시대상이 그대로 반영된 작품인 것이다.

모든 물질적인 것들의 바닥을 뚫고 들어가면 정신적인 그 무엇에 닿을 수밖에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풍족할 땐 생각조차 못하던 어떤 것의 ‘의미’랄까 하는, 다소 철학적이고 인생/인간 저 깊숙한 부분에 관련된 것들을 궁핍에 처할 때에야 비로소 체감하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무언가의 의미를 묻고 그 이면을 궁금해하는 자는 언제나 그 무엇에 굶주린 사람이다. 배부른 돼지는 묻지 않는다. 필요 이상을 가진 자들의 유일한 걱정은 ‘어떡하면 뺏기지 않을까?’ 일뿐이다. 그들은 그 걱정거리를 해결하기 위해 가지지 못한 사람들을 악마화 시키고 차별, 배제, 혐오의 대상으로 둔갑시킨 뒤 공론화한다. 수십수백 명의 가난한 자들이 여러 날동안 먹고살 수 있는 돈의 몇 배에 해당하는 금액을 그들은 그들을 ‘합법적’으로 배제하기 위해 사용한다. 자본주의의 승자독식이 만들어낸 웃지 못할 ‘합리적’인 폭력의 현장이다.

배부르고 영악한 돼지들은 이런 비가시적 폭력에 만족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부랑자로 내몰린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자들을 해충 쓸어내듯 눈앞에서 쫓아내고 싶어 한다.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는 그럴듯한 명목 하에 말이다. 그것도 자기들이 만든 나름대로의 합리적이고 합법적인 방법으로. 그래서 그들은 의도적으로 배후에서 유혈사태를 조장하기도 한다. 가난한 자들을 선동하여 그들이 봐도 불법적일 수밖에 없는 행위를 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이 덫과 같은 잔인한 계획이 성공할 때마다 그들은 가난한 자들에게 기다렸다는 듯 가시적인 폭력을 맘 놓고 휘두르고 그들의 운명을 심판한 뒤 생사를 좌우하기까지 한다. 마치 인간 위에 인간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마치 가진 자들이 가지지 못한 자들을 심판하는 게 당연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들은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는다. 필요 이상 가진 것들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아직 뺏기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미리 가난한 자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낙인찍고 응징한다는 이 모순 가득한 비극. 나는 이런 일련의 순서로 진행되는 비극적 과정을 이 작품 ‘분노의 포도’에서 똑똑히 지켜볼 수 있었다. 자본주의의 어두운 면을 보며 다시 한번 그것이 가진 잔인한 기계성에 섬뜩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인간의 인간다움이 사라진 이기성, 그리고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으로 대표되는 인간 본성에 이르는 답 없는 질문에 쌓인 채 나는 한동안 넋을 놓고 멍하니 텅 빈 눈으로 허공을 쳐다보며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은행과 트랙터로 상징되는 자본주의는 가난한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했다. 오클라호마에서 몇 대째 삶의 터전을 잡고 착실하게 살아가던 톰 조드 가족 일행도 이를 피할 수 없었다. 모든 마을 사람들에게 닥친 끔찍한 재앙이었다. 그들은 아무런 죄를 짓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돈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집도 땅도 모든 것을 빼앗긴 채 부랑자 신세가 되어 고향을 떠나야만 했다. 간신히 구한 고물 트럭에 생필품만을 싣고서 서부 캘리포니아를 향한 먼 길에 올랐다. 캘리포니아에 가면 과일이나 목화를 따는 일자리를 구할 수 있고, 그것으로 생계를 이어갈 수 있으며, 다시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을 거라는 부푼 희망에 찬 채로 말이다.

안타깝게도 그 희망은 헛된 것이었다. 어렵사리 캘리포니아에 도착했지만 (오는 길에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죽음을 맞이했다), 톰 조드 일행은 수요와 공급의 논리가 이처럼 명징하게 드러나는 시기가 또 있었을까 싶은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전단지에 적힌 수백 명의 일꾼을 구한다는 광고가 새빨간 거짓은 아니었지만, 수요에 비해 과공급된 (너무나 과잉 공급된) 동부로부터 몰려온 부랑자 신세의 사람들의 어마어마한 수를 그들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자기 땅에서 성실하게 땀 흘려 농사를 짓고, 그것을 팔아 돈을 벌고, 풍족하진 않지만 자기보다 더 어려운 이웃이 있으면 그들과 함께 나누며 살아가던 시대에 속했던 톰 조드 일행에겐 너무나 갑작스럽고 가혹한 전환이었다.

그러나 캘리포니아 농장 주인이나 지주들의 입장에게도 그들 나름대로의 합리적인 계산법이 있었다. 21세기가 시작된 지 20년 남짓된 지금의 시점으로 (이 작품이 출간된 지 거의 100년이 지난 현재) 보면 당연한 논리로 보일 수 있고 표면적으로는 흠잡을 곳이 별로 없는 계산법이었다. 예를 들어, 100명에게 시간당 1달러를 주며 일을 시킬 수 있는데, 예상외로 500명의 일꾼이 몰려들게 되면 그들에게 시간당 20센트만 주면 된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러면 100달러라는 동일한 금액의 돈이 들면서도 몇 배나 빠른 시간 내에 일을 끝낼 수 있기 때문에 농장 주인 입장에선 더 많은 일꾼을 고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동일한 상황을 500명의 일꾼들의 입장에서 바라보게 되면 완전히 달라진다. 여기에 하루 먹고살 수 있는 최소 금액이 시간당 50 센트라는 전제가 깔린다면, 시간당 20센트의 돈은 모욕적이고 치욕적인 금액인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이 대두되는, 어떤 한계치를 넘어서는 순간인 것이다.

저자 존 스타인벡은 자본주의의 병폐를 이렇게 작품 속에서 톰 조드 일행의 서부로의 반강제적 이동, 캘리포니아 입성, 노동력의 착취와 차별과 혐오의 현장을 통해 신랄하게 보여준다. 비록 어떤 해결책을 내놓지도 않고 조금은 낭만적으로 그려놓기도 하지만, 나는 이런 게 바로 소설만이 할 수 있는 힘이 아닌가 한다. 허구적 상상력을 통해 현실이 말하지 못하는 현실의 이면을 더 적나라하게 보여줄 수 있는 힘. 문학의 힘.

이 작품을 읽게 된다면 크게 두 가지 관점에서 충분히 생각에 잠겨보라고 권하고 싶다. 하나는 톰 조드 일행의 관점으로, 다른 하나는 그들을 착취하는 캘리포니아 농장 주인의 관점으로. 물론 이 작품 속엔 톰 조드 일행과 같은 목적으로 캘리포니아로 이동한 수십 만의 이주민들이 등장한다. 요즘 말로 하면 모두 홈리스들인 셈이다. 그들은 천막을 짓고 물이 있는 곳에 둥지를 틀었다. 일자리를 구하는 데에 있어 그들 사이에 경쟁이 붙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다. 즉, 같은 부랑자 신세가 된 수많은 사람들 사이의 갈등 역시 저자는 놓치지 않고 충분한 개연성을 부여하여 그려놓는다. 그렇다면 첫 번째 관점을 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농장 주인들을 향한 눈, 다른 하나는 같은 동지들을 향한 눈. 천 페이지에 육박하는 이 작품을 이렇게 간단하게 정리한다는 게 어불성설이지만, 이런 관점들만 나열해놓고 봐도 이 작품은 시대와 문화는 우리와 달라도 똑같은 인간과 인생을 이야기하고 있음을 우린 금세 알아챌 수 있다. 참고로, 톰 조드 일행에겐 자기만 살려고 하는 부랑자들과도, 그들을 착취하며 자본주의의 앞잡이가 된 농장 주인이나 그들과 상부상조하며 캘리포니아를 지킨다는 명목 하에 캘리포니아 이주민들을 배제하는 정부 관련 인간들과도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은 인간다움이었다. 그들은 배고파도 더 어려운 이웃과 함께 나누는 등 끝까지 인간다움을 포기하지 않았다. 자본주의의 어두운 면과 상치되는 곳에 저자는 ‘인간다움의 존속’을 놓아두며, 그것이 희망의 씨앗임을 보여주고 싶었던 게 아닌가 싶다.

자본주의와 인간다움의 대립. 언뜻 보면 말도 안 되는 싸움인 것처럼 여겨지지만, 이것이야말로 바로 고전 문학이 보여줄 수 있는 힘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자본주의가 내재한 기계성과 그것을 무기로 삼고 부와 권력을 차지하려는 인간의 이기심. 그리고 그것들에 저항하여 인간이길 포기하지 않는 인간다움의 정신. 문학이 아니면 꿈꿀 수도 없는 이 기막힌 장면들의 묘사. 이런 것들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살아내는 현실을 다시 쳐다볼 수 있고 그 이면을 생각해볼 수 있으며 보다 나은 인간과 보다 나은 인생을 그려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작품은 여느 고전 문학처럼 개별적인 상황을 그리고는 있지만 개별성을 넘어 인간과 인생의 보편성에 이르는 통찰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저자인 존 스타인벡이 노벨상을 수상하는 데에 현격한 공을 세웠던 작품이기도 한 이 책 ‘분노의 포도’를 아직 읽지 않은 분들이 계시다면 일독을 권한다. 아무 죄 없이 차별당하는 굶주린 톰 조드 일행의 눈에 비친 잘 익은 캘리포니아 포도가 ‘분노의 포도’로 보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공감하며 나는 안타까워한다.

#민음사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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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실격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3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춘미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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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실격은 없다


다자이 오사무 저, ‘인간 실격’을 읽고.

세상을 탓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 사람들을 무조건 비난할 수는 없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은 그 자체가 비극이다. 그러나 그 비극적인 결말을 자살한 개인 탓으로 돌릴 수만은 없다. 그것은 죽은 자에 대한 폭력이다. 두 번 죽이는 일이다. 우리 중에는 실제로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더라도 그와 비슷한 심정으로 남모르는 마음고생을 경험한 사람들이 많은 줄 안다. 이성과 논리가 힘을 잃어버리는 영역에서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점진적으로 벌어지는 일이지만, 자살 충동의 유경험자는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을 탓하며 욕지거리를 해대는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공격하는 대상은 세상이나 남들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 말이다. 세상 혐오는 결국 자기혐오로 이어진다. 어쩌면 자살로 생을 마감한 사람들에게 자살은 자기혐오의 끝에 위치한 출구였을지도 모른다. 우리 주위에 누군가가 세상을 탓하며 술 한 잔 기울이고 있다면, 우린 차라리 안심해야 할지도 모른다. 아직 늦지 않았기 때문이다. 탓하는 대상이 서서히 자기 자신으로 바뀌고, 또 그 방향이 마치 유일한 길처럼 여겨진다면, 그땐 이미 늦은 것일지도 모른다. 파멸은 이미 도래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다만, 그 파멸이 자살이라는 가시적인 비극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비통한 마음으로 책을 마쳤다. 잠시지만, 살아있다는 것 자체에 대한 일종의 죄책감도 느꼈고, 그렇게 큰 고뇌 없이 명랑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에 대해 나 자신이 조금은 혐오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마지막에 생사가 묘연해진 주인공 요조의 삶, 그리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 이 책의 저자 다자이 오사무의 삶 앞에서 모처럼 나는 살아남은 자의 숙명적인 슬픔을 느낀다. 마치 무덤에 서 있는 기분이다. 입에선 쓴 내가 나는 것 같다.

주인공 요조는 저자 다자이 오사무의 분신이다. 동일하지는 않지만, 단순히 상상만으로 썼다고 보기에는 너무나 구체적이고 생생한 심리 묘사가 곳곳에 등장해서 요조와 다자이 오사무는 겹치는 부분이 의외로 많을 것 같다. 자살을 제삼자의 입장에서 그저 주워듣고 상상만 해본 사람과 실제로 진지하게 고민하고 실행에도 옮겨본 사람 간의 차이랄까. 이 짧은 소설을 읽는 내내 나는 자살 직전 혹은 이미 자살한 자의 일기를 읽는 듯한 기분이 들어 한기마저 느꼈다. 아니나 다를까. 책 뒤에 있는 짧은 해설을 읽다가 작가가 젊은 나이에 자살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내 느낌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소름이 끼쳤다. 

누군가는 이 책을 ‘인생의 책’이라고 추천하기도 했고, 민음사 베스트셀러, 스테디셀러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는 작품인 데다가, 마침 알라딘 중고책으로 구매가 가능해서 얼마 전 다른 책들과 함께 이 책을 구입했다. 제목에서부터 밝고 긍정적인 이야기를 기대하기 힘들겠다는 확신을 가졌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음산함, 자기혐오, 파멸이라는 단어들의 의미를 이렇게 제대로 살려낸 소설은 처음이었다. 자살 이야기가 유독 많이 나오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이나 시바타 쇼의 ‘그래도 우리의 나날’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그 스산함이 아직도 잔상으로 남아 있다. 

일본 소설 특유의 느낌이 묻어 나는 작품이었지만, 섬이 된 한 인간의 심리 묘사에 있어서 나는 마치 도스토예프스키를 읽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아니, 도스토예프스키 작품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가는 것 같았다. 그것도 일본식으로 말이다.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은 그 내용이 아무리 처절해도 궁극적으로는 대부분 구원을 빛을 비추는 데 반하여, 이 작품에선 구원과 같은 반전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저 세상과 인간에 대해 공포를 느끼는 한 인간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서서히 술, 담배, 창녀, 마약의 힘에 눌려 파멸해 가는 이야기를 무덤덤하게 보여줄 뿐이다. 마지막에 자살로 마무리를 지을 것 같았는데 저자는 내 예상과는 달리 주인공 요조의 운명을 그렇게 처리하지 않았다. 이게 어쩌면 단 한 가지 요조에 대한 저자의 배려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저자 자신이 요조를 대신해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으니, 어쩌면 이 작품의 진짜 마무리는 저자의 삶 자체로 보여준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렇게 적고 보니 섬뜩하다.

주인공 요조는 사람이란 존재에 대해서 누구보다 예민했던 것 같다. 사람을 생각할 때면 불안과 공포에 짓눌렸다. 이웃과 거의 대화도 못 나누고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나 그렇게 살 수만은 없었기 때문에 그는 한 가지 묘안을 생각해 내고는 스스로 만족한 채 실행에 옮긴다. 인간을 극도로 두려워하면서도 인간을 단념할 수 없었던 그가 인간과 연결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은 바로 ‘익살’이었다. 겉으로는 늘 웃는 얼굴을 하지만 속으로는 전혀 그렇지가 않은, 생각해 보면 섬뜩하기만 한 이율배반성이 긴장 가운데 극도로 표출된 사람이 바로 요조였던 것이다. 서글프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나이가 들면서 흔히 타락이라는 단어를 사용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하는 습관에 길들여진다. 술과 담배와 여자, 그리고 나중엔 마약까지 손을 뻗친다. 그런데 요조가 이런 것들을 손댄 이유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는 그것들이 인간에 대한 공포를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상당히 괜찮은 수단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세상과 사람을 두려워하면서도 그 안에 속하고 싶어 하는 인간의 모순된 본능이 요조 안에서도 꿈틀대고 있었고, 그것을 달성하는 수단으로 그가 선택한 방법이 하필 타락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요조의 삶과 그가 토로하는 의식의 흐름을 쫓아가다 보면 타락이라는 것의 의미를 다시 한번 묻게 된다. 특히 그가 백치 아니면 미치광이 같은 창녀들한테서 마리아의 후광을 실제로 본 적도 있다는 표현 앞에선 더욱 그랬다. 경험해 본 적은 없지만 왠지 공감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비난의 화살을 요조가 아닌 세상으로 어느 정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왜 요조가 이렇게까지 됐을까, 하는 생각이 책을 읽는 내내 자꾸만 들었다. 

요조는 합법적인 일이 아닌 비합법적인 일을 할 때 마음이 편했다고 한다. 그는 스스로 자신이 양지가 아닌 음지의 존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마르크스주의에 잠시 빠져 지낸 것도 공산당 사상이 맘에 들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비합법적인 분위기가 맘에 들었기 때문이다. ‘익살’이라는 어설프고 서글프기까지 한 방법으로 세상과 사람과 연결되고자 했던 요조가 점점 더 섬이 되어 가면서 어두운 곳으로 은닉해서 위선과 음산함을 즐기게 되고 그 안에서 나름 편안함을 느끼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요조는 자살을 떠올리게 된다. 자조와 자기혐오에 이어 결국 파멸의 끝에 다다른 것이었다. 스스로 자신은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사람, 즉 인간으로서 실격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소설 중간중간에 요조가 바라보는 세상과 사람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이 등장하는데 나는 그 문장들을 읽으면서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세상 사람들의 불가사의한 허영과 체면 차리기를 꼬집는 요조, 어느 정도 가식과 위선이 일상이 되어야만 ‘원활하게’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걸 눈치챈 요조, 그것들이 흔히 처세술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간파한 요조. 어쩌면 요조는 가장 순수한 인간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그의 파멸은 그가 세상이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순수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나는 이 책을 덮으면서 자연스레 하게 된다. 그리고 나는 눈을 들어 내 주위를 살펴본다. 의도적 익살로 자신의 속마음을 감추고 있는 사람이 없는지, 음산한 속내를 감추고 명랑함으로 자신을 표현하고 있는 사람이 없는지, 세상 탓에서 자기 탓으로 방향을 전환하여 자살 직전의 징후를 보이고 있는 사람이 없는지. 모든 인간이 스스로가 평등한 인간임을 인지하고, 서로가 서로의 개성과 다양성을 존중하며, 처세술이라는 명목으로 가식과 위선으로 도배된 인간관계가 아닌 솔직함과 진정성이 투명하게 드러나서 모든 약자들도 마음 놓고 자신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 그리고 인간에게 실격이란 없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민음사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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