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의 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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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밀한 서사에 깃든 지독한 인간의 심리


정유정 저, ‘7년의 밤’을 읽고.

간결한 단문으로 휘몰아치는 정유정의 필력은 치밀한 서사와 정제된 묘사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그렇게 살아난 텍스트의 모든 여백이 긴장과 스릴로 가득 채워졌다. 나는 단숨에 빨려 들어갔고, 금세 압도되었다. 500 페이지가 넘는 작품을 함께 하던 약 다섯 시간 동안 나는 마치 오랜 여행이라도 다녀온 기분이다. 다섯 시간이 아니라 닷새가 지난 것 같다. 너무 깊게 몰입한 나머지 일으킨 착각일 것이다.

작가가 창조해낸 가상의 공간, 세령호. 나는 책을 덮고도 한참 동안 쿵쾅거리는 심장을 느꼈다. 작품 속에 빠져든 나는 잠시 동안 작가의 창조물 중 하나가 된 것 같았다. 눈을 감으면 세령호의 안개가 나를 감싸는 것 같고, 연민과 공포를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세령의 모습이 눈 앞에 아른거리는 것만 같았다. 크고 검은 눈, 허리까지 닿을 만큼 길게 풀어헤친 머리, 엄마 화장품으로 아무렇게나 칠한 조그맣고 하얀 얼굴, 구석구석 멍든 몸, 흰 팬티 차림의 작고 여린 아이, 이제는 스스로 눈을 감을 수 없는 아이, 오세령. 세령은 공포에 질린 채 도망치고 있었다. 강도나 괴한이 아닌 아빠로부터. 제기랄. 이것이 캄캄한 밤, 인적이 드문 어두운 안개 길을 그 조그만 발로 거침없이 달려야만 했던 이유다.

부와 명예를 등에 업은 사이코패스, 아빠 오영제로부터 폭력과 수치와 모멸을 견뎌내며 간신히 살아오던 열두 살의 초등학생. 엄마 하영은 남편에게 맞아 죽지 않기 위해 미리 도망쳤다. 으리으리하지만 텅 빈 그 집에 세령은 늘 교정을 해준답시고 손찌검을 해대는 아빠 오영제와 단둘이 살고 있었다. 세령이 죽던 날은 마침 세령의 생일이었다. 생일날, 그러니까 세령의 마지막 날이었던 그날에도 세령은 오영제에게 손찌검을 당했다. 오영제에게 있어서는 교정, 세령에게는 공포이자 폭력이었다. 세령은 활활 타는 초가 꽂힌 병을 오영제에게 던지고 기회를 틈타 창을 넘어 도망쳤다. 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녀는 살지 못했다. 그녀의 마지막 도망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 도망은 죽음으로 끝나버린 세령의 마지막 외출이었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 마지막 발걸음이었다. 아아, 아빠의 공포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그 길이 이렇게 끔찍한 사건의 전야가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가슴 깊은 곳에서 분노가 치밀었다. 오영제를 죽여버리고 싶었다. 이런 게 인간이란 탈을 쓰고 있다니! 내 심장은 쉬지 않고 벌컥댔다. 대동맥으로부터 피가 용솟음치는 게 느껴질 만큼. 그런데 작가 정유정은 여기에 오영제 가족뿐만이 아닌 최현수 가족을 연결시킨다. 세령의 허망한 죽음이 연결고리였다. 세령을 죽인 건 오영제가 아닌 최현수이기 때문이다. 세령은 오영제로부터 도망치던 중, 마침 그곳을 처음 방문한 최현수의 차에 들이 받힌다. 아, 이런 기막히고 비극적인 운명! 물론 최현수가 세령을 차로 친 건 사고였다. 악의가 전혀 없는 순수한 사고였다. 문제는 세령의 사인이 교통사고에 의한 다발성 장기 부전이나 과다출혈이 아닌 질식이었다는 데에 있다. 그렇다. 차에 부딪혀 죽은 줄로만 알았던 여자 아이가 살아있었다. 놀란 나머지 최현수는 운전석에서 나와 아이에게 갔다. 아이는 정신을 잃어가는 상태에서 “아빠”라고 읊조렸다. 마음이 무너졌다. 그때 최현수는 아이를 들고 곧장 병원으로 갔어야 했다. 그런데 그러지 않았다. 대신, 솥뚜껑 같은 왼손으로 입을 막아 생사를 오가는 아이의 마저 남은 숨통을 끊었고, 사체를 유기하기 위해 세령호에 던져버렸다.

최현수는 음주운전으로 면허정지를 당한 상태였다. 조금만 기다리면 면허가 갱신될 참이었다. 불법으로 운전을 해서 곧 살게 될 사택을 확인하러 밤늦게 세령호에 다다른 것이었다. 오는 도중에 술 한 잔 걸쳤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최현수는 잘 나가던 야구 선수였다. 한때 팀의 전성기를 이끌던 포수였다. 어느 날 예기치 않은 사고를 당하고 왼팔이 마비되는 증세가 잦아지면서 주전에서 밀려나야 했다. 2군에서 뛰다가 결국엔 야구를 그만둬야 했다. 제대로 배우지 못한 채, 191센티미터, 110킬로그램의 거구를 장점으로 활용하여 할 수 있는 일은 보안업체 경비직이었다. 그렇게 최현수는 자존감을 잃어갔고 술에 절어 살게 되었다. 어쩌다가 만난 아내 은주와의 결혼은 그를 더 깊은 나락으로 이끌었다. 그에게 유일하게 지키고 싶은 존재는 아들 서원이었다. 서원이만은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키고 싶었다. 

이 작품은 서원의 일인칭 시점과 전지적 작가 시점이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써졌다. 7년 전 사건, 그러니까 세령의 사고, 최현수의 살인, 오영제의 복수극이 빚어낸 재앙이었던 세령 댐 수문 방출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던 그날로부터 7년이 지난 이후, 승환과 함께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쫓겨다니다시피 살다가 그나마 정착한 등대마을에서 서원은 자기에게 배달된 운동화, 승환이 썼음이 분명한 세령호 사건에 대한 소설, 그리고 하영과 승환 사이에 오갔던 편지 다발과 승환이 남긴 컴퓨터 파일들을 훑어본다. 그날은 승환이 갑자기 사라진 날이었고, 서원이 전보 한 통을 받은 날이었다. 전보는 아버지인 최현수의 사형 집행이 치러졌으니 시신을 수습하라고 알리고 있었다. 서원은 이러한 자료들을 기반으로 사실일 수밖에 없는 추리를 해내고 전율과 함께 깨닫는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오영제가 실제로 살아있고, 여태껏 끈질기게 기다리다가 7년 전 못다 한 복수를 최현수의 사형 집행일에 맞춰서 완성하리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동안 전학에 전학을 마다하며 도망치다시피 살아온 나날들도 모두 오영제의 작품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형 전 오영제의 행동을 노련한 포수의 육감으로 정확하게 예측한 최현수와 승환, 그리고 두 형사의 도움으로 승환과 서원은 죽을뻔한 위기를 모면하고, 오영제의 복수극, 아니 미친 살인극을 가까스로 저지하게 된다. 7년의 밤이 비로소 끝을 맺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소설은 결말에 이른다.

작품 읽으면서 독자가 아닌 소설 지망생으로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이 있다. 작가는 각 인물의 내면으로 거침없이 들어가 그 사람의 생각과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고 그들의 심리를 분석한다. 작가는 한 사람이지만 동시에 각 등장인물이 되어 그 고유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던 것이다. 그로 인해 얻은 생동감 넘치는 입체감은 작품에 현실성을 부여했고 독자의 몰입을 유도했다. 등장인물들 서로가 서로를 어떻게 오해하게 되는지, 서로가 서로에게 드러내지 않는 비밀스러운 부분을 어떻게 추리해나가는지, 그리고 그렇게 감추거나 드러낸, 혹은 감춰지거나 드러나게 된 심리를 어떻게 분석하고 대처해나가는지, 정말이지 정유정 작가는 보편적인 인간의 본성을 철저하게 분석한 뒤 등장인물들에게 투영하고 그들만의 목소리를 들려줌으로써 놀랍도록 입체적이고도 현실적인 작품을 만들어낸 것이다. 앞에서 자세하게 언급하지 않은 하영 (오영제의 아내), 은주 (최현수의 아내)를 비롯하여 조연이라 할 수 있는 여러 등장인물들에 대한 묘사와 그들의 고유한 서사도 소설 전체의 흐름과 완벽하게 맞물린다. 각 인물들이 가진 상처에는 한국인으로서 공감할 수밖에 없는 정서가 깊이 녹아있다. 허투루 버릴 게 하나 없는 치밀한 작품이다.

과거와 현재, 환상과 사실을 오가는 서술 기법. 한시도 긴장을 늦추지 않는 단문의 화려한 연타. 탄탄한 서사와 인간 본성의 심연을 깊숙이 파고들지만 결코 직접적이지 않은 묘사들. 나는 독자로서 그리고 소설 지망생으로서 연신 침을 삼키며 이 작품을 읽어냈다. 프로의 맛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경험이었다. 처음 읽는 정유정 작가. 여태껏 왜 몰랐을까! 그동안 고전소설을 읽는답시고 현대소설을 게을리했던 것, 서양 고전을 탐독한답시고 한국소설을 등한시했던 것에 대한 후회가 밀려왔다. 만약 내가 소설을 쓴다 하더라도 한국 현대소설일 텐데 한국 현대소설을 많이 읽지 않았다는 사실이 부끄럽기까지 했다. 책을 다 읽고 가장 먼저 한 일은 정유정 작가를 비롯한 한국 현대소설 작가들의 작품들을 구매하는 것이었다. 마침 스무 권이 넘는 소설이 중고로 구입이 가능했다.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구매 버튼을 눌렀다. 이번 기회로 인해 한글로 써지고 한국 정서가 녹아있는 한국 현대소설의 세계로 본격적인 진입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아마도 나에겐 큰 흐름의 이정표가 될 만한 작품으로 자리매김할 것 같다.

#은행나무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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