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해 부근에서 다시 읽고 싶은 명작 6
엔도 슈사쿠 지음, 이석봉 옮김 / 바오로딸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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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이 아닌 사랑


엔도 슈사쿠 저, '사해 부근에서'를 읽고


묵직한 한 방을 제대로 맞았다. 날카로운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먹먹한 가슴이 되었다. 꽤 오래갈 것 같은 예감이다. 아, 이렇게 또 엔도 슈사쿠를 만났다.


명쾌한 답이 아닌 질문을 던지는 책. 의심을 사라지게 하는 대신 자명하게 여겼던 것들까지도 반추하게 만드는 책. 내가 알던 지식과 내가 믿던 믿음이 건강한지, 치우치진 않았는지 다시 묻게 만드는 책. 책은 도끼이기도 하지만 안개 자욱한 숲으로 인도하는 안내자이기도 하다. 나는 찍히고 깨달으면서도 동시에 불안과 의심의 깊은 숲을 홀로 통과하게 된다. 확신의 죄에서 해방받는 유일한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또한 나는 책을 읽는, 아니 읽어야만 하는 이유를 다시 발견하게 된다. 


여섯 번째로 만난 엔도 슈사쿠의 작품 ‘사해 부근에서’가 내게 선물한 먹먹함은 엔도 슈사쿠의 인생에 흐르는 깊은 강과 내 안에 꿈틀대는 실개천이 만나 일어난 필연적인 화학반응의 결과일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던 확신의 정체가 순수함의 옷을 입고 있지만 사실은 미성숙하고 게으른 자아에 의해 쉽게 선택된 신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불편한 진실을 나는 이 작품을 읽으며 맞닥뜨려야 했다. 나는 작아지고 잠시 공허해졌다. 작품을 다 읽은 후에도 여전히 안갯속을 걷는 기분이다. 하지만 이게 현실이고 내가 머무르던 과거는 누군가의 치우친 해석으로만 지어진 온실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꽤 급진적인 생각도 하게 된다. 작은 우물 안이 안전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거기에서 성장과 성숙을 기대할 수는 없다. 성장과 성숙은 겹겹의 우물을 나온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단 열매이기 때문이다. 우물 안의 피터팬이 되기보다는 사는 동안 끊임없이 만나게 될 우물들을 탈출하면서 점점 더 깊어지는 지혜의 노인이 되고 싶다. 


‘침묵’과 ‘침묵의 소리’, 그리고 ‘깊은 강’에서 동일하게 흐르는 감정은 내겐 불안이었다. 그 불안이 이 작품 ‘사해 부근에서’에서도 그대로 흐른다. 어쩌면 이 작품이 내겐 불안의 정점을 찍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된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그리스도를 소설에서 직접 등장시켜서일까. 이 작품은 흔히 알려진 '신성'이라는 속성이 철저히 거세된 그리스도 예수의 모습을 총 일곱 명의 화자를 통하여, 마치 증언처럼, 직간접적으로 들려준다. 물론 소설 속 증언이다. 어디까지나 엔도 슈사쿠의 상상력의 산물이라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주춤했고 망설였으며 진지하게 며칠을 생각했다. 그 생각들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 질문들로 압축할 수 있다. 


“예수의 기적이 의미하는 본질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예수가 기적을 행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나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을 수 있는가?”, 

“나는 예수의 기적을 원하는가, 아니면 예수의 사랑을 원하는가, 나는 어떤 예수를 원하고 믿는가?”, 

“기적이 사랑일 수 있는가, 반대로 사랑은 기적일 수 있는가?” 


완전한 신성과 완전한 인성을 동시에 가지신 분. 하나님이자 인간이셨던 예수. 보수적인 기독교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했던 나에게 예수의 신성은 절대적이었고, 인성은 늘 축소되곤 했다. 그게 당연했고, 그래야만 좋은(?) 믿음을 가진 것처럼 여겨졌다. 예수의 인성을 강조하다 보면 자칫하다간 이단 소리를 듣기 십상이었고 신성모독이라도 한 것 같은 분위기에 쉽게 사로잡히곤 했다. 인간 예수를 말하는 건 좌파들이 지껄이는 구호 정도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신성과 인성을 결코 분리할 수는 없다. 인간을 영과 육의 이분법으로 분리하는 어리석은 짓과 다름없을 것이다. 건강한 신앙과 건강한 믿음은 한쪽으로 치우치면 불가능하다. 예수의 인성 말하기를 주저하고 무속적인 판단으로 신성 말하기에만 주력한다면 건강한 신앙이나 믿음은 차치하고서라도 예수가 누구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조차 답하기가 어려워질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장편소설 ‘최후의 유혹‘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최후의 유혹’ 역시 예수의 생애를 다룬다. 특히 고뇌하고 투쟁하는 인간 예수가 그 책의 중심이다. 반면, '사해 부근에서'에서의 예수는 기적을 행하지 않는 (못하는?) 대신 그 기적이 필요한 사람과 함께 있어 주고 수발을 들어주며 함께 울고 함께 아파하는, 사랑의 인간 예수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와 엔도 슈사쿠의 접점은 묘하게도 예수의 신성이 아닌 인성에 맞춰지고 있는 것이다. 


두 작품 모두 소설이라는 장치를 동원하여 허구 속에서 마음껏 예수의 인성을 다루지만, 정작 작품을 읽는 내 안에는 허구적 상상력을 넘어 지워지지 않을 강력한 신학적인 흔적을 남겼다. 고뇌하는 예수, 투쟁하는 예수, 그리고 사랑의 예수. 삼위일체의 하나님으로만 예수를 이해하는 협소한 지경이 확장되면서 나는 예수를 조금은 더 깊고 조금은 더 풍성하게, 그리고 조금은 더 친근하게 알게 된 기분이다. 사랑이라는 한 단어조차 나는 여전히 이론적으로밖에 모르고 있다는 반성을 하게 된다. 


앞서 언급한 질문들에 대한 나의 답은 여전히 뾰족하지 않다. 사복음서에 쓰인 예수의 기적이 실제로 벌어진 사건인지 아닌지는 과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 확인 및 증명할 방도가 없다. 그리고 이런 류의 문제는 늘 역사적으로 반복되었다. 역사적 사건이든 아니든 증명할 수 없는 문제라면 예수를 그리스도로, 나의 구원자요 주님으로 믿는 믿음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물론 어떤 사건이 역사적으로 밝혀진다 하더라도 그에 따라 해석을 하면 된다는 생각이다). 나는 '역사적 예수'를 믿거나 그 예수가 역사적으로 일으킨 기적 때문에 예수를 믿는 게 아니다. 나는 성경에 나온 예수를 믿는다. 그러므로 이 작품에서처럼 예수가 기적을 행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나의 믿음은 변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작품을 통해 기적을 일으키지 못하는 예수의 모습을 보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이 무엇인지 더욱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약한 자와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들과 함께 하고 그들을 돕고 그들과 동등한 자리에서 하나가 되는 것. 나는 앞의 여러 질문들을 내려놓고 이젠 나에게 묻는다. 기적을 행할 수 없다는 조건은 작품 속 예수가 했던 일들이 우리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임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나는 작품 속 예수처럼 사랑을 행하고 있는가?" 


문득 어딘가 숨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부끄러움을 느낀다. 차라리 기적을 행하는 예수를 믿는 게 나의 이기적인 자아로서는 훨씬 쉬운 것 같다. 사랑 없는 기적이 아닌 기적 없는 사랑. 이것이 예수의 인성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게 아닐까.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기적 없는 사랑이 인성에만 속한다고 말할 수도 없을 것 같다. 그 사랑이야말로 진정한 신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인성과 신성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지점인 것이다. 사랑을 행하는 것은 인성과 신성의 조화가 만들어내는 가장 아름다운 열매가 아닐까 싶고, 이 작품 속에 숨겨둔 엔도 슈사쿠의 메시지가 아닐까 싶다.


* 슈사쿠 읽기

1. 침묵: https://rtmodel.tistory.com/383

2. 침묵의 소리: https://rtmodel.tistory.com/390

3. 깊은 강: https://rtmodel.tistory.com/1378

4. 나를 사랑하는 법: https://rtmodel.tistory.com/1656

5. 바다와 독약: https://rtmodel.tistory.com/1681

6. 사해 부근에서: https://rtmodel.tistory.com/1770


* 카잔차키스 읽기

1. 그리스인 조르바: https://rtmodel.tistory.com/686

2. 영혼의 자서전: https://rtmodel.tistory.com/1152

3. 최후의 유혹: https://rtmodel.tistory.com/1191


#바오로딸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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