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려 놓고는 진득하게 읽을 짬이 도저히 나질 않아 찔끔찔끔 읽다보니 무려 대출기한을 넘겨 버렸다… 마치 코엔 형제의 블러드 심플을 열두번에 나누어 본 느낌. 뭐랄까 스토리는 전혀 파악되지 않으나 시퀀스 시퀀스들은 좋았다. 생물학과 과학철학의 마냥 가볍지만은 않은 개론적인 내용이 매우 쉽고 또한 꼬장꼬장하게 쓰여 있어서 입담 좋은 노교수의 강의를 듣는 기분이었다. 노교수의 입담이란 통상 학생들을 수면상태에 빠트리거나 혹은 수업 중 쓸데 없는 얘기하느라 막판에 진도를 빼기 위해 쉬는 시간까지 잡아먹는데 사용된다는 점을 가만해 볼 때 이 책의 그것은 굉장한 미덕이 아닌가 싶다. 개인적으로 반가웠던 점은 현시점에서의 인류의 진화와 관련해 궁금했던 몇가지 의문이 있었는데 마침 이 책에 대답이 나와있어 손들고 질문한 것에 대한 답을 들은 느낌이었다는 거.
우주 자체에 지대한 관심이 있는데 또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천체 물리학이나 실험 물리학 보다는 입자물리학 쪽이 좀 더 흥미로운 것 같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대중과학 서적의 일개 독자이기 때문이지 학문으로서의 물리는 또 전혀 다른 차원이겠지. 여튼 그래서 리사 랜들의 전작 ‘숨겨진 우주`를 매우 재밌게 읽었기 때문에 아무런 망설임 없이, 사전 정보 없이 이 책을 집어들었다. 우선 과학의 방법론에 대해 포퍼와 쿤 같은 과학철학자들이 뭐라든 간에 현재 필드에 있는 입자물리학자로써 i don’t give a shit이란 태도가 엿보여 왠지 멋졌다. 철학자들이란 늘 세상을 정합적인 것으로 해석하려 하지만 어째 실상은 꼭 그렇게 돌아가지만은 않는 모양이다. 쌤통이랄까ㅎㅎ 그러나 한편 이 책은 내 기대와는 달리 공학과 과학 정책에 대한 이야기가 꽤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 전체적으론 다소 따분했다는…
이론 물리학자가 뇌과학 분야의 책을 냈다고 했을 때 어쩐지 미심쩍어 뒤로 미뤄두긴 했다. 아니나 다를까. 미치오 카쿠의 전작들 중 ‘평행우주`를 읽을 때도 느꼈지만 이분, sf에 지나치게 경도되어 있으신 듯. 어떻게 보면 재야 물리학자로 오인할 정도로 학문과의 경계가 너무 아슬아슬해서 읽는 내가 다 불안하다. `평행우주`에서도 워낙 초끈이론과 우주의 여분차원이 나오는 대목이 좀 황당한 내용이긴 하지만 아예 한 술 더 뜨시길래 김이 좀 빠졌는데 이 책은 아예 맘먹고 쓰신듯. 엄밀한 뇌과학 서적이라 보긴 힘들고 뇌과학에 관한 공상과학에 가까운 장밋빛 미래를 그리고 계시다. 소재가 소재니 만큼 일단 재미는 있는데 각 잡고 앉았다가 이내 점점 비스듬히 뒤로 눕게 된다.
보르헤스의 이 바벨의 도서관 시리즈는 약간 마이너한 콜렉터의 감성이 느껴져서 꾸준히 사 모으고 있는데, 정작 읽고 있을 때 보다 읽고 한참 뒤에 떠올려 보면 마치 꿈결에서 본 듯, 뭐에 홀린 듯한 잔상만이 아른거리곤 한다. 아실런지 모르겠지만 마치 고전 티비 시리즈 환상특급이나 어메이징 스토리처럼! 그게 매력이랄까. 이 책 역시 그 시리즈 중 하나로 보르헤스가 선정한 카프카의 단편(과 엽편) 소설 모음집이다. 뚜렷한 내러티브가 없는 소설을 당최 재밌게 읽은 기억이 없는데 대체로 내가 읽었던 독일 소설들은 한 술 더 떠 관념적이기까지 해서 독일 소설이라고 하면 읽기도 전에 일단 뭔가 지루하단 인상이 반은 먹고 들어간다. (같은 이유로 배수아의 소설도 그닥… ) 그런데다 이 책은 짧고 압축적이라 한 편이 끝날 때 마다 느낀 감상은 대체로, 그래서… 뭐… 어쩌란 거지… 이런 식. 오오 심오하고 심오하도다.
얼마전 중력파 검출에 성공해 무려 백년전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이 예측했던 중력파를 실증한 바 있는데 안타깝게도 생물학 쪽은 그런 식(수학적 예측과 실험적 검증)으로 작동하진 않는 거 같다. 귀납적 방법의 당연한 귀결일지 모르겠지만 어떤 굳건한 한가지 패러다임이 학계를 평정하고 있는 게 아니라 진화론을 바라보는 여러 시각들이 논쟁을 거듭하고 있는 중인듯 하다. 이 책은 사회생물학, 인간행동생태학, 진화심리학, 문화진화론, 유전자-문화 공진화론 이렇게 진화론을 각기 해석하는 5가지의 입장을 비교 / 소개하고 있는 일종의 교과서 같은 책이다. 각각의 개념과 논쟁이 되는 부분, 비판적 평가까지 공정하고 일목요연하게 설명하고 있어서 뒤죽박죽 된 머릿속을 정돈하는데 매우 도움이 됐다. 학계와 출판시장의 괴리에서 오는 왜곡도 교정하게 된 건 덤이다. 특히 도킨스의 밈 개념이 학계에서 차지하는 영향력은 실제론 미미하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