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제 싫다고 말하기로 했다 -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아는 사람들에게
김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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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절을 잘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뿐 아니라 내 삶에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고 찾아가는 과정이다. (- 12쪽)

 영화 <리틀 맨하탄> 주인공 부모는 이혼할 생각이지만, 주(州) 법이 이혼 판결이 있기 전까지 별거는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함께 살고 있다. 아내는 이미 남자친구까지 만들었다. 데이트를 위해 남자친구가 찾아오면, 남편이 문을 열어주고 아내가 나올 때까지 '남편'과 '아내의 남자친구'가 함께 서 있는 진풍경을 보인다. 밤에는, 아내는 방에서 자고 남편은 거실 소파에 혼자 찌그러진 채 잠을 잔다. 10살인 아들 게이브는 부모님의 그런 기이한 모습을 최대한 담담히 받아들이지만, 마음이 편할 리는 없다. 


게이브의 부모님도 처음부터 이러진 않았다. 결혼해서 행복하게 사는 중에, 너무나 사소해서 말하기가 꺼려지는 문제들을 마음에 하나, 둘씩 쌓아두다 보니 그것이 너무나 쌓이고 쌓여서 결혼 생활이 파탄에 이른 것이다.


비단, 영화 속 부모님만의 문제는 아니고 우리 모두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직장에서도, 거래처 사람과도 이런 문제는 비일비재하며 가족과 친구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제일 스트레스받는 건 직장 상사와의 관계가 아닐까 싶다. 분명 내 일이 아닌데, 혹은 내 일이 맞긴 하지만 상사가 과도한 요구를 할 때 등등. 분명 상사의 요구에 부당함을 느끼나, 대놓고 상사에게 '저는 이 일 못하겠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라는 말을 할 수 없다. 중치가 콱! 막힌 것처럼 하고 싶은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그 대신 "예, 예,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하게 되는데 乙인 우리가 이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행동은 "예, 예, 알겠습니다"라는 이 말을 당황한 듯한 얼굴과 쥐 죽은 목소리로 표현해 최소한의 반항을 할 수 있을 뿐이다. 乙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이랄까. 그런데 이것도 좀 여유 있는 사람이나 할 수 있고, 완벽히 갑과 을인 입장에서는 이런 뉘앙스도 내비칠 수 없다. 




이 책은 거절을 잘 하지 못하던 저자가 대오 각성하고, 거절에 대한 노력과 노력을 하면서 겪은 경험담, 연구 자료, 관련 책, 인터뷰 등을 잘 엮어 집필한 책이다. 그런데 이 책은 '거절을 잘 하는 법'에 대해 말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본인이 원하는 삶을 사는 법'에 대한 책이다. 거절을 잘 못하는 것은, 타인이 주도하는 대로 끌려다니는 것을 의미하니까.


핵심은 자기 합리화가 아닌 내 마음속의 진실을 주변에 알리는 것이다. 나는 이런 것이 불편하다고, 나는 이런 상황이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된다고.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라고. (- 38쪽)

세련된 거절이란 결국 나의 뜻을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방식에 변화를 주어 결국은 거절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다. (- 45쪽)

이 책을 읽으면서 제일 인상 깊었던 부분은 바로 <권위에의 복종>에 대한 글이었다. 익히 알고 있는 '스탠퍼드 감옥 실험'과 '스탠리 밀그램 실험'도 적혀 있고, 몰랐던 이야기도 있었다. 충격적이었던 건 실제 있었던 일로, 맥도널드 매장 이야기였다. 어느 날 맥도널드 매장에 전화가 걸려 왔다. 매장 직원 중 한 명이 심각한 범죄 사건에 연루되어 있고 경찰이 그곳에 도착하기 전까지 경찰에게 협조해 달라는 전화였다. 전화를 받은 직원은 경찰이 시키는 대로 했다. 여의치 않을 땐 다른 직원에게 부탁해서 경찰이 하라는 대로 했다. 경찰의 전화를 받은 직원들은 용의자로 지목된 직원을 사무실로 데리고 가 속옷까지 모두 탈의시킨 채 온갖 모멸적인 행동들(나체로 체조를 시킨다거나 또.. 뭐... 충격적이라 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을 시킨다. 결국 한 직원의 의심으로, 전화를 건 사람이 경찰이 아님이 밝혀졌다. 하지만 3시간 30분이 지나서야 밝혀졌다. 이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10년 동안 미국에서 70개의 유사 사건이 있었음이 드러났다. 정말 충격적! <권위에의 복종> 다음에 나오는 <학습된 무기력>의 글도 인상 깊었다. 충분히 스스로 변화시킬 수 있는 상황임에도 이를 인지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고통과 부당함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태도. 


아니다 싶으면 당당하게 NO라고 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NO라고 하는 게 힘들지. 그래도 해야만 한다. 저자는 거절을 잘하기 위해서는, 거절 받는 경험을 많이 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거절의 근육을 키우려면 우선 '싫어요'라는 말을 들어도 그리 상처받지 않는 경험을 해야 한다. (- 69쪽)

어차피 우리가 하는 부탁의 8할은 거절 받을 운명이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고 싶다면 거절에 대한 맷집을 키우는 방향으로 생존 전략을 짜야 한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거절이 두려워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삶에서 거절은 디폴트 모드다. 거절이 당연하고 기본적이며 승낙을 받으면 좋은 것이다. (- 20쪽)

거절을 디폴트, 즉 삶의 기본 조건으로 정해 놓고 거절에 대한 맷집을 키우는 것은 단순히 좀 더 적극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내 삶의 행복과 성공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을 꼭 기억하자. (- 81쪽)

민주주의와 개인주의에서 '거절'은 반드시 실천이 필요한 덕목이다. 그러니 다른 사람이 아닌 나를 위해서, 한 인간으로서 나의 존재감을 확인하고, 내 안에 있는 목소리를 경청하고 전달하기 위해서 우리는 삶 속에서부터, 그리고 작은 것에서부터 거절을 실천해야 한다. (-224쪽)

이 책에서도 언급하지만 거절이라는 것은 무조건 큰소리치고, 뻗대고, 싫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책에서 말하는 거절이란, 본인의 진심과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아는 것이고, 이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진솔하게 전달하는 것을 의미한다. 


'원하는 것', '필요한 것'과 '원하지 않는 것', '필요하지 않는 것'을 잘 구분할 수 있어야 진정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다. 우선은 타성(학습된 무기력)에서 벗어나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고, 그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법을 익혀야 한다. 수월하게 되지 않더라도, 가치 있는 삶과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싫은 건 당당하게 '싫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Let's get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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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친절한 문학 교과서 작품 읽기 : 고대 가요.향가.고려 가요 편 이토록 친절한 문학 교과서 작품 읽기
하태준 지음 / 다산에듀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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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저. 재밌다. 웃으며 읽었다. 내 개그(?!) 코드와 너무나도 딱 맞는 책. 책 제목이 『이토록 친절한 문학 교과서 작품 읽기』라서 노트와 펜을 꺼내 진지하게 필사하고 메모해야 할 것 같지만, 꼭 그럴 필요 있을까 싶다. 공부는 재밌게 해야 한다. 문학 작품이라는 게 그렇다. 꼭 진지할 필요가 없다. 뭐, 진지하게 궁리하고 생각해야 할 땐 그렇게 해야 하지만, 고대 작품은 그 작품을 쓴 사람과 현대인은 생각도 다르고, 믿음도 다르기에 무조건 진지할 필요는 없다. (물론 이 책의 저술 의도는 이런 나의 생각과 다를 가능성이 아주 높지만)





중학생 때가 기억난다. 중학교 1학년 때도 참말 재밌게 학교 다녔지만, 2학년 때랑 3학년 때가 학교 다닐 맛이 났었다. 공부가 재미있었을 리는 없었고, 그냥저냥 보통이었다. 그런데 내 단짝이랑 2년간 짝지를 했었다. 짝지는 나랑 개그 코드가 똑같아서 등교했을 때부터 수업시간, 하교 때까지 어느 순간도 즐겁지 않았던 때가 없었다. 둘이 생각하고, 상상하는 코드가 비슷했고 잘 통했다. 친구는 당시 미술 학원을 다녔다. 커서 대학도 미대(도예 전공)로 진학한 만큼 이미지로 상상하는 걸 좋아했다. 나 역시 문자보다는 이미지에 강하다. 둘 다 진지한 문학소녀는 아니었던 것. 교과서를 펼치면 글보다는 그림이 눈에 띄고, 글을 읽어도 재미난 상상을 했다. 교과서 바로 우리의 놀이터였고, 우리에게 상상의 도화지였다. 


우리는 학교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많은 능력을 키우지만, 반대로 학교 교육 때문에 우리가 갖고 있던 소중한 능력들을 잃기도 한다. 나는 ‘주입식 교육 때문에~’, ‘대학 입시 교육 미명 아래~’ 뭐 이런 흔하디흔한 비판을 싫어한다. 하지만 가만히 앉아서 진지하게 받는 교육은, 어린 시절 갖고 있던 훌륭한 스토리텔링 능력과 상상력을 감퇴시킨다. 


어떻게 보면 누군가에게는 실없어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친구와 나에게는 교과서 그림이나, 문구들이 하나같이 재밌어 보였다. 아마 혼자 봤더라면 시시했겠지. 나와 그 친구의 실없는 상상과 이야기가 서로 코드가 맞았기에 진심으로 웃었고, 상대방이 진심으로 웃는다는 것에 고무되어 더 즐겁고 재미났는지도 모르겠다. 교과서에 실린 그림 하나하나가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낸 소재였다. 교과서 속 여러 요소들을 비틀고, 연결하고, 끊어버리고. 재밌고 웃겼다. 그것이 진정한 예술과 닮은, 창조 행위였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읽으니까, 이제는 정말 옛날이 된 그때 그 시절이 떠올랐다. 교과서 실린 그림 하나하나가 다 재미난 이야깃거리였고, 상상의 소재가 되었던 그때가...  그 친구와 이 책을 그 시절 그 모습 그대로 함께 읽는다면 또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아마도 또 재미난 이야기겠지. 유쾌하고 많이 즐거웠다. 이 책은 중학생 그때로 데려다준 프루스트의 마들렌 같은 책이었다. 



책은 고전문학 작품의 배경이 된 전설이나, 설화가 쉽게 풀어 적혀 있고, 그 옆에 세밀화 삽화가 실려 있다. 대략, 이런 그림. 음, 옛날 교과서 그림도 물씬 느껴지고, 민속촌이나 박물관에 곁들여진 그림 같기도 하다. 박물관의 밀랍 인형 같기도 하고. 그래서 재밌다. 음, 진지해서 웃기달까. 웃긴데 진지해서 더 웃기달까. 





/ 유리왕, 「황조가」


유리왕, 부들부들


동명왕의 아들, 고구려의 두 번째 왕! 유리왕이 지은 황조가! 대단하신 왕이지만, 부인들 간의 싸움에는 한없이 약하디약한 남자다. 유리왕에는 고구려 출신 부인 '화희'와 한나라 출신 '치희'라는 두 명의 부인이 있었다. 유리왕이 사냥 간 사이에 둘은 싸웠고, 그길로 치희는 강을 건너 한나라로 돌아간다(뭐 거의 아침드라마 수준). 유리왕은 치희를 바로 좇아가지만 이미 치희는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 중이었고 강을 건너면 아무리 고구려 왕이라 해도 치희를 데려올 수 없다. 배를 타고 떠나는 치희만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궁으로 돌아온다(고구려 왕의... 좋게 말하면 인간적인 모습...). 유리왕은 궁으로 돌아오다가 암수 정답게 노니는 꾀꼬리를 보고, 감정이 복받친 유리왕은 본인의 신세를 한탄하는 노래를 부른다. 


황조가


훨훨 나는 저 꾀꼬리

암수 서로 정다운데

외로워라 이 내 몸은 

뉘와 함께 돌아갈까


제아무리 고구려의 왕이라 해도, 떠나가는 여인 앞에서는 속수무책인 것을. 그 마음을 꾀꼬리에 투사하여 한 곡조 뽑아 부르는데 이것이 2천 년 전 여자에게 버림받아 슬픈 남자의 행동이다. 비록 왕이긴 하나 여자에겐 약한 남자랍니다♩ 자신의 슬픔 마음을 노래로 승화하는 모습, 놀랍다. 남편이 물에 빠져 죽는 걸 보고, 노래 한 곡 짓고, 남편의 뒤를 이어  강물로 들어간 백수 광부의 아내도 마찬가지다. 뭐랄까, 다른 나라의 옛사람들도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일상의 모든 것(이별, 죽음 모든 것)을 노래로 만들어 부르는 우리 정서. 나는 놀랍고,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재밌게도 느껴지고.  





/ 작자 미상, 「구지가」


짠!! 


구지가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라

내놓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


가야 지역이 아직 국가가 아닌 부족 형태로 있던 어느 날, 하늘에서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다. 구지봉에 올라, 지금 가르쳐 주는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라고, 그러면 왕을 맞게 될 것이라고. 하늘이 왜 이런 노래를 불러라 했을지, 직접 가사까지 지어 불러라 일어준 것도 웃긴데. 마지막에 거북이를 협박하는 말은 귀염귀염하다(거북이에겐 공포겠지만). 어쨌거나 옛날 사람들은 하늘의 말이라고 하면 말 잘 들으니까, 진짜 가르쳐 준 가사를 노래로 부르며 춤추는데, 이때 하늘에서 자주색 줄이 내려온다. 가까이 가 보니, 금빛 상자가 있어 그 상자를 열어 보니 여섯 황금알이 있다!! (위 그림) 


아악! 눈부셔!!!


고상가옥에서 알을 깨고 나온 6명의 가야 왕들. 


옛날 사람의 정신 속엔 성적(性的)인 것과 연관되어 있다. 고대는 물론이고, 조선시대까지 마을 입구의 장승이나, 남근석도 그 연장선이다. 거북이의 머리도... 그렇다고 알고 있다. 사실 학교 문학 시간에 배우는 고대 작품들이 결코 아이들을 위해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곰곰이 생각하면, 수위가 꽤 높다. 





/ 작자 미상, 「정읍사」


내가 좋아하는 「정읍사」!!! 현존하는 유일한 백제 가요다. 


정읍사


달님이시어, 높이높이 돋으시어

멀리멀리 비춰 주시옵소서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장터에 가 계신가요?

진 곳을 밟을까 두렵습니다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어디에든 내려놓고 계시면 좋겠습니다

님 가는 곳 저물까 두렵습니다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집 나가면 이런 꼴


정읍사의 핵심 어휘는 '진 곳' , '저물까' 뜻이다. 상당히 다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어휘인데, 그 뜻을 세밀화가 자세히 설명해 준다. ① 짐 지고 가고 있는데 넘어짐 ② 주막에서 여자에게 꼬심(?)을 당하고 있음 ③ 깡패한테 잘못 걸려서 니킥 맞고 있음 ④ 길거리에서 죽어가는 모습 클로즈업! (이런 그림들이 참, 정읍사를 지은 여인에겐 슬프고, 한 맺히겠지만 그림 보는 나는 뭔가... 뭔가... 웃기... 다... 음, 음...)


시험 문제에 정읍사 문제 풀 때 위의 그림만 떠올려도 '진 곳', '저물까'의 뜻을 맞추지 않을까. 





/ 월명사, 「도천가」


신라 시대, 어느 날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떴다. 놀란 임금은 향가를 잘 짓는 월명사(스님 이름)에게 향가를 지어 달라 부탁을 하고, 월명사는 향가를 짓는데 향가에 감동받은 미륵부처가 두 개의 해를 하나로 합쳐준다는 아주 기적 같은 이야기. 


미륵불 曰 : 산화공덕 땡큐


'산화 공덕'이라는 건 꽃을 뿌려 공덕을 기린다는 뜻인데, 월명사가 꽃을 한 움큼 쥐고 공중에 꽃잎을 뿌리니 꽃잎이 중력을 거스르고 월명사 주위를 맴돌았다는 전설이... (위의 그림은 월명사가 뿌린 꽃잎이 떨어지지 않고 계속 월명사 주위를 맴도는 모습이다. 미륵불의 든든한 배경)



이 외에도 중/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에 실린 고전 문학들이 거의 빠짐없이 들어 있다.


잣가지 높은 곳, 서리 모르는 화랑 기파랑


요 그림은 「찬기파랑가」에 삽입된 세밀화다. 


아아, 잣가지 높아

서리 모르시올 화랑의 우두머리시여.


정말로 향가 내용대로, 그림 속 기파랑은 서리 모르도록 잣나무 위에 있다. 그윽한 기파랑님의 눈빛.... 





/ 처용, 「처용가」


얼씨구, 에헤라디야♩


이 그림 보고 진짜 많이 웃었는데, 처용이 지은 처용가에 삽입된 세밀화다. 


보름달이 휘영청 밝게 뜬 밤, 처용은 밤늦게까지 술을 먹고 집에 왔다. 부인이 혼자 자고 있을 방으로 가려는데, 이게 웬걸! 방 댓돌에 아내의 신발과 외간 남자의 신발이 나란히 놓여 있다! 처용은 능력은 신통방통했기에, 방 문을 열어 보지 않고 방 안이 어떤 상황인지 다 알아챈다. 방의 벽을 밖에서 투시해서, 방 안의 이불 밖으로 살짝 삐져 나온 발 4개가 보이는 것. 2개는 나의 부인 것인데, 나머지 2개는 어떤 사내의 발이다. 처용은 이 낯선 남자의 발이 역신(역병의 신) 임을 알고, 그 자리에서 바로 춤을 추고 노래하기 시작한다.


처용가


서라벌 밝은 달에

밤늦게 노니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로다

둘은 내 것인데

둘은 누구의 것인가

본디 내 것이다만

빼앗긴 걸 어찌하리


아 쫌, 집을 비운 사이 부인의 방에 이상한 놈 들어올 수 있으니까 일찍 일찍 다니라고요, 처용님!! 일찍 집에 왔으면 이렇게 춤추고 노래할 일도 없었을 것을. 어쨌든, 대단한 정신력을 가진 처용! 그에 못지않은 역신! 역신은 처용의 대단한 배포(?)에 감명을 받고, 곧바로 방 밖으로 나와 처용에게 사과한다. 현대인으로서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사내들의 배포! 사진을 안 찍었지만, 다음 페이지에 역신이 처용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절을 하고, 처용님은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다.


이후로 사람들은 역병이 돌 때마다 처용의 그림을 그려 집 대문에 붙이고 천연두를 경계했다는 그런 전설이 내려오고 있답니다.... 현대인의 사고방식과 많이 다르죠?! 





/ 작자 미상, 「청산별곡」


아얏!


어디에다 던지던 돌인가?

누구를 맞히려던 돌인가?

미워할 이도 사랑할 이도 없이 맞아서 우노라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진짜 돌에 맞에 이마에서 피가 남. 옆 페이지에서는 돌 3개가 막 날아오고 있고, 청산별곡 작자 미상 님은 날아오는 돌멩이와 맞서 싸울 것 같은 자세로 서 있다! (... 나 이 그림... 왜 이렇게 웃기지?! ;ㅅ;) 


장대 위에 올라 해금 켜는 사슴 ㅋㅋㅋㅋ 다소곳이 모은 뒷발 봐 >ㅁ< 귀욤


가다가 가다가 듣노라, 부엌에 가다가 듣노라

사슴이 장대에 올라가서 해금을 켜는 것을 듣노라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악, 진짜 「청산별곡」의 이 부분을 이렇게 그림으로 그려낼 줄 꿈에도 몰랐다. 사슴이 화자를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며 해금을 켜고 있다. 그 뒤로 노란 꽃잎이 아름답게 휘날리고~ 


청산에 살고 싶다선 남편이 술독에 빠짐


술독에 빠졌다 나온 남편을 보고 아내가 전전긍긍하는 모습...  쫌~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속세를 떠나온 당신께, 곁에 있어 줄 사람은 아내 한 명밖에 없는데 아내한테 좀 잘합시다. 아내 걱정 시키지 말라고요! 술독과 이별하세요.





이 책에 삽입된 세밀화를, 일러스트레이터 분들이 어떤 의도로 그리셨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 개인적으로는 정말로 재밌고 흥미롭게 잘 봤다. 고대 시가들과 잘 연결되어서 기억에도 오래 남을 것 같다. 공부는 재미있어야 한다. 재미있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고 오래도록 기억할 수 있다. (우리 학생들 머리에, 수능 시험일까지 꼭 기억하게 해주소서♩) 


고대 시가들은 꼭 학생들만 공부하고 외워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누구에게라도 시간을 뛰어넘어 재미있고 흥미로운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이 되어줄 수도 있다. 왜 이런 작품들을 선조들이 짓고, 그 후대들에게도 오래도록 전승되어 왔을까. 우리는 학창시절 너무 진지하다가, 소중하고 재미있는 것을 잃고 잊은 건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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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는 안는 것
오야마 준코 지음, 정경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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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도쿄 변두리에 별로 크지 않은 강이 하나 있다. 100년 전 이곳 사람들은 강의 물길을 이용해 짐을 날랐다. 작은 강이라서 배도 자그마한 재래식 나무배였다. 강변에는 흙벽으로 지은 창고가 있었고, 창고는 쥐들의 세상이었다. 들끓는 쥐를 잡기 위해 창고 주인들은 고양이를 키웠다. 세상은 점점 살기 좋아졌다. 돈벌이가 괜찮은 창고 주인들은 흙벽 창고를 허물고 서양식 창고를 짓기 시작했다. 서양식 창고는 쥐가 살기 힘들다. 쥐가 없어지니 자연히 고양이가 필요 없게 되었다. 상인들은 고양이를 버리기 시작했다. 당시 장사가 잘된다는 의미로 ‘네코스테(描捨)’ 즉 고양이를 버린다는 말을 썼다. “그 집 아저씨, 올해는 네코스테인가?” “아니요, 그 정도까지는 아니에요.” 라는 식의 은어인 것이다.(8쪽) 강 위로 이쪽과 저쪽을 이을 다리가 필요해졌다. 창고 주인들은 합심해 다리를 놓았다. 다리 이름은, 사업 번창을 기원해서 ‘네코스테’라는 붙였다.  

그때쯤 일이다. 이 강엔 센키치라는 젊은 뱃사공이 있었다. 어느 날 센키치가 네코스테 다리 밑을 지나고 있을 때 다리 위에서 하얗고 자그만 것이 떨어졌다. 하얀 털의 새끼 고양이었다. 센키치는 다행히 고양이를 받았다. 다리 위에는 치요라는 아가씨가 있었다. 동네에서 제일 가는 상인의 딸이었다. 고양이의 눈은 한쪽 파랬고, 한쪽 노랬다. 치요 아가씨는 고양이를 구해준 센키치의 이름을 따서 고양이에게 ‘센’이라고 이름 지어줬다. 어느 날 센키치는 그를 질투한 동료 때문에 3년간 복역을 하게 되었고, 센은 센키치의 배에서 오지 않는 센키치를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러다가 센도 센키치를 질투했던 동료에게 심하게 맞아 파란색 눈을 잃고, 강에 빠져 떠내려갔다. 마을 사람들은 센이 죽었다고 믿었다. 그 넋을 기리기 위해 센의 한쪽 눈이 푸르렀던 데서 이 강의 이름을 아오메(靑目) 강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죽은 줄 알았던 센은 죽지 않았다. 기어코 센키치를 만나기 위해 마을로 돌아왔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다. 센은 파란색 눈은 잃고, 노란색 눈만 있었다. 하얗고 윤기 흐르던 털은 꾀죄죄하고 푸석푸석해져 있었다. 센은 옛날처럼 다시 센키치를 기다렸다. 앙상하게 비쩍 마른 채 센키치의 배에서 기다렸고, 시간이 흐르고 흘러 마침내 그들은 만난다. 




센키치, 그리고 그의 부인과 행복하게 살았던 센은 어떻게 되었을까. 100년 전에 살았던 고양이이니 센은 죽었다. 하지만 고양이는 환생을 거듭하고, 아주 소수의 고양이들은 전생을 기억한다. 센은 전생의 기억을 간직한 채 환생을 거듭했다. 그러는 동안 열일곱 개의 이름을 갖게 되었다. 이름이 없는 때도 있었다. 열일곱 개의 이름 중 센에게 제일 중요한 이름은 센이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정중하게 말해요? 
좀 으스대도 되지 않나요?"
"살면 살수록 나 자신이 미약하다는 걸 느낍니다. 
알면 알수록 겸허해지지요. 
머지않아 소년도 이 마음을 이해하게 될 겁니다."
흰 고양이는 그렇게 말한 뒤 후우 하고 크게 한숨을 쉬었다. 
아기 고양이는 흰 고양이의 눈을 가만히 보았다.
"이제 더 이상 다시 태어나지 않기로 결심했죠?"
대답은 없다. 회색 눈은 빛을 잃고 먼 곳을 응시했다. 
"그래서 최후에 가장 최초의 모습, 
아오메 강의 센으로 태어나 여기에 있는 거죠?"
흰 고양이는 눈을 감았다.
"아니면 또 환생해요?"
흰 고양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기 고양이는 흰 고양이를 향해 소리쳐 불렀다.
"센!"
그 순간 회양목 덤불숲은 좋은 향기로 가득 찼다. 
그리고 회양목 줄기가 보였다. 
흰 고양이는 사라져버렸다.
(- 276쪽)

 이 소설은 아오메 강과 네코스테 다리에서 일어나는 고양이와 인간들의 이야기다. 옴니버스 식 구성으로, 각기 모두 독립된 이야기이지만 모두 연결되어 있다. 강이 땅의 이쪽과 저쪽을 단절시키지만 다리가 놓이면 이쪽과 저쪽이 연결되는 것처럼, 이 소설집의 소설들은 각기 독립된 이야기이지만 아오메 강과 네코스테 다리로 이어지는 것이다. 


사람과 고양이의 관계도 이와 비슷하다. 사람과 고양이는 함께 살아도, 둘은 단절되고 각자의 세계가 있다. 강처럼 넘을 수 없는 무언가가 있는 것이다. 존재 자체가 달라서 일지. 그러다가도 가끔, 아주 가끔, 인간과 고양이 사이에 다리가 놓인 듯 서로 교감하고, 믿고, 의지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다리를 건너, 저쪽의 존재와 만나는 것처럼 이 책에서는 인간과 고양이 사이에 다리 역할을 하는 것은 바로 '이름'이다. 


요시오, 키이로, (철학자- 철학자는 고양이가 아니에요), 센, 그리고 르누아르. 


“그럼 인간과 살지 않았던 적도 있었던 거네요?”

“그렇습니다.”

“어느 쪽이 행복해요?”

흰 고양이는 침묵했다.

“어느 쪽이 행복해요?”

“비교는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인간에게 이름을 얻으면 그 인간에게 지배되어버립니다.”

“지배? 명령받는 거요?”

“아니요, 명령 따위 하지 않는 인간이라도 

이름을 얻는 순간 관계성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거기서 자유로워질 수는 없습니다. 

아마 키이로 님도 고흐 님에게 얽매여 살아가고 있을 겁니다.”

(-274쪽)

 



“자유는 좋은 거예요?”

“자유는 좋은 것이기는 합니다만…….”

흰 고양이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했다.

“모든 것에 있어서 자유가 우선이냐고 묻는다면, 

꼭 그렇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속박이라는 것은 풍요로운 것이기도 하니까요.”

흰 고양이는 거기서 말을 끝내고 아기 고양이를 바라보았다. 

‘여기서부터는 스스로 생각하십시오’ 하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기 고양이는 생각했다. 

자유와 속박에 대해.

좋은 향기에 감싸인 회양목 덤불 속에서 

흰 고양이의 시선을 느끼며 생각했다. 

이윽고 깨달았다.

자신은 이름을 갖고 싶은 것이 아니라, 

속박을 원하는 것이 아닐까?

부러운 것은 키이로의 이름이 아니다. 

고흐와의 관계가 부러운 것이다.

센이 센키치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애처롭다. 

하지만 처음부터 만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아기 고양이는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얽매이는 삶을 동경했다. 

그것이 설령 슬픈 결말을 맞았다고 할지라도.

(-275쪽)

 강을 사이에 두고 이쪽과 저쪽에 인간과 고양이가 있다. 인간이 고양이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순간 '다리'가 생긴다. 새로운 관계성이 기는 것이다. 이 관계는 속박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속박이 싫지 않다. 그동안 누리고 살던 자유의 한 부분을 포기하더라도 충분히 가치 있는 속박이기 때문이다. 새끼 고양이(나중에 '르누아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될)는 처음엔 잘 인지하지 못했었지만 결국 자신이 속박을 원했다는 걸 깨닫는다. 새끼 고양이는 이름을 원했고(그래서 엄마에게 묻고, 고양이의 신에게도 이름에 대해 묻고), 머지않아 자신에게 '르누아르'라는 이름을 지어줄 나쓰미를 만나게 된다. 새끼 고양이에게 '르누아르'란 이름은 행복한 속박이었을 것이다. 




이 책에서 고양이는 안는 것이라고 말한 사람은 '고흐'라는 화가다. 어떻게 보면 실패한 화가라고 해야 할까, 필생의 역작을 남기고 죽은 행복한 화가라고 해야 할까. 고흐의 죽음이 슬프지만, 원했던 색을 사용해, 원했던 그림을 그리고 죽었으니 불행했던 화가는 아닐 것이다. 이 고흐라는 사람의 친구가 고흐에게 고양이를 그리라고 한다. 모델비가 들지 않는다고. 그때 고흐는 미소를 짓고 조용히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말한다. 


"고양이는 그리는 것이 아니라 안는 거야."

(-95쪽)

 아마도 고흐가 이 말을 할 때 르누아르의 '고양이를 안고 있는 아이"를 생각하지 않았을까. 고양이는 인간에게 이름이 지어지면서, 인간은 고양이를 안음으로써 관계가 형성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오메 강은 흐르고, 네코스테 다리 위에서 고양이들의 집회가 열리고, 고양이가 다리가 되어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이름이 다리가 되어 고양이는 인간에게 기분 좋은 속박을 받으고, 인간은 고양이를 안으며 치유되고 행복해진다. 이 책은 이런 이야기다. 소소하지만 서로 이어진, 그래서 기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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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다는 말은 차마 못했어도 슬로북 Slow Book 3
함정임 지음 / 작가정신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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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파수꾼』 주인공 홀든은 정말 좋은 책은, 저자에게 언제라도 전화를 걸어 친구에게 말하듯 자기 감상을 말할 수 있는 책이라고 했다. 나는 홀든과 다르게 좋은 책은 나의 생각을 건드리거나 옛 기억을 불러일으켜  내 생각에 몰두토록 하는 책이다. 좋은 글은 자생력을 가지고 꿈틀거리고, 약동하여 나의 생각을 추동질한다. 나의 생각이 어디로 튈지 모른다. 물을 주면 자라는 식물처럼 그냥 흐름에 맡기고 생각을 이어나가고 만들어 간다. 나의 생각과 회상은 책 속 글로부터 이어져 나왔고 그 연장선 어디쯤에 내가 있다.  



함정임 작가의 책을 읽는 동안 많은 생각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가, 밀려나갔다. 저자의 글 속에 자주 언급되는 고유명사들과 내 머릿속에 있는 고유명사들의 이미지가 중첩되어서 많은 것들이 떠올랐다. 중첩되는 고유명사, 세 개. 부산, 달맞이고개, 프랑스 문학.  


│부산│

부산은 내가 나고 자란 곳이고 지금도 살고 있다. 단 한 번도 타지 생활을 해본 적 없다. 이 책에 묘사된 부산 속 지명은 보기만 해도 자동적으로 연상되는 나만의 이미지가 있다. 부산역이라 하면 그곳에서 바라보는 부산항 전경이, 황령산이라 하면 내가 황령산에서 바라본 풍경이, 범어사라고 하면 빽빽이 연등 달린 범어사의 모습이, 7km의 광안대교라 하면 길고 긴 광안대교를 관통하던 그때의 모습들이 떠오른다. 누구와 함께 그곳에 있었는지, 그때 나의 감정은 어땠는지 당시 기억들이 톡톡톡 튀어나왔고,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던 많은 것들이 떠올랐다. 


│달맞이 고개│

그중에서 현재 함정임 작가가 살고 있는 달맞이 고개. 해운대 달맞이 고개는 현재 이모네 가족이 살고 있는 곳으로 이모네 베란다에서 밖을 내다보면 앞집에 가려진 모퉁이 끝으로 해운대 바다가 보인다. 앞집 지붕 때문에 탁 트인 느낌은 없지만 모퉁이로 보이는 망망대해의 공간 깊이가 느껴진다. 이상하게 아무리 날이 좋아도 이모집에서 바라보는 해운대는 푸르기 보다, 잿빛이다. 현재 이모는 노환(여든둘)으로 몸 여기저기가 자주 편찮으시다. 병원에 실려 가신 적도 여러 번.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그곳에서 바라보는 세상이 잿빛일지도 모르겠다. 오랜만에 이모집에 갔을 때, 거실 끝에서 저쪽 끝으로 걷기 힘들어하시던 이모가 전에 없이 기운이 좋았던 날. 함께 장생포까지 걸어갔던 적이 있다. 하늘은 청명하고 맑았다(집에서 바라보는 것과 밖에서 바라보는 것은 이렇게나 다르다). 문탠 로드를 따라 걷다가 장생포 쪽으로 내려가 방파제 위를 걷고, 다시 언덕을 올라 폐철길의 자갈 위를 조금 걸었다. 이모가 힘들다 하셔서 집으로 돌아왔는데, 폐철길을 걸을 때 처음으로 이모와 엄마의 뒷모습을 사진에 함께 담았다(생각해 보니 나는 이모의 사진을 찍은 적이 이전엔 한 번도 없었다). 스물한 살의 터울, 21년의 터울을 두고 그 모습을 좇아 늙어가고 계셨다. 이모는 돌아가신 외할머니를, 엄마는 21살 위인 이모를. 그리고 나는 엄마를. 만약 누군가 내 뒤를 따라 걸은 이가 있었다면 우리 3명의 뒷모습이 닮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집으로 가는 길, 잠깐 슈퍼마켓 맞은편 간이의자에 앉아 21년, 25년 터울로 닮은 세 사람이 나란히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프랑스 문학│

그리고 마지막으로 프랑스 문학. 함정임 작가는 대학에서 불어불문학을 전공하고, 신춘문예로 등단하셨다. 이 책에는 알베르 카뮈, 플로베르, 롤랑 바르트, 로맹 가리, 사뮈엘 베케트, 사르트르가 자주 언급되고, 파리, 니스, 코트다쥐르 등 프랑스의 여러 지명이 나온다. 나는 몇 해 전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을 죽기 전에 기필코 원서로 직접 읽어보겠다는 생각으로 불어를 열심히 공부했다. (화자가 어린이였기에 쉬울 줄 알았지만 『자기 앞의 생』은 생각보다 너무 어려워 기절하는 줄 알았다) 잠깐이나마 프랑스인 친구도 사귀고, 프랑스 원서도 몇 권 읽고, 신문기사도 독해하며 내 생에 몇 안 되는 치열한 시기를 보냈다. 구글 지도로 프랑스 여러 지역을 검색했다. 보지도 않던 프랑스 영화도 보고, 음악도 들었다. 개인적으로 여행을 안 좋아해서 열심히 불어를 공부했는데도 단 한 번도 프랑스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 없다. 다만, 프랑스어를 접하며 프랑스 문학, 프랑스 문호와 예술가들, 프랑스 유명 지역들에 대한 나만의 느낌을 갖게 되었다. 몸은 여기, 대한민국 부산에 있으면서도 여행을 하는 듯한 느낌으로 프랑스와 만났다. 실제 그곳의 느낌과 내가 이곳에서 만들어낸 나만의 느낌은 분명 다를 테지만, 난 나만의 프랑스가 있고 나만의 프랑스가 좋았다. 이 책을 읽고서 불어를 손놓은 동안 잊고 있던 프랑스라는 나라가 다시 생생히 되살아났다. 



몽타주란 '조립하다' 또는 '편집하다'라는 뜻의 프랑스어 'monter'에서 파생된 용어이다. 조립과 편집의 몽타주 기술은 20세기 초 아방가르드 영화와 모더니즘 소설들에서 나타나기 시작해, 다양한 분야의 실험을 거쳐 예술사의 중요한 미학으로 자리 잡았다.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에서 시간 몽타주는 대상이 공간 속에서 고정된 상태에 머물러 있고, 의식이 시간 속을 움직이는 것을 말한다. 이와 반대로 공간 몽타주는 시간이 고정되고 공간 요소가 변하는 것을 의미한다. 주인공 클러리사가 저녁의 파티를 준비하기 위해 꽃을 사러 집을 나서서 런던의 거리와 공원을 가로질러가는 동안 보고, 만나고, 이야기 나누고, 꽃을 사고, 집으로 돌아오기까지의 의식의 흐름 속에 30년 전의 추억과 현재 상황이 교차하며 움직이는 것이 시간 몽타주다. 반면, 런던 북쪽 리젠트 공원에서 셉티머스가 공포스러운 환각증으로 헛것을 보며 시달리고 있을 때, 하늘에 제트기가 광고 문구를 뿌리며 날아가는 장면을 그곳과 다른 장소인 런던 남쪽 빅 벤 근처의 집 현관에서 클러리사가 바라보는 것이 공간 몽타주이다.

(함정임, 『괜찮다는 말은 차마 못했어도』, 작가정신, 2018, 166쪽)


『댈러웨이 부인』의 클러리사처럼, 나는 함정임 작가의 『괜찮다는 말은 차마 못했어도』를 읽으며 시간 몽타주를 한 것이다. 내 기억 속에 켜켜이 쌓인 부산의 여러 지역들, 이모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애착을 가지고 있는 달맞이 고개, 그리고 프랑스 문학과 작가, 그 지역들을 오랜만에 상기하고 여행을 했다. (여행이란 말이 적절하다면)


많은 기억들이 절로 떠올랐고, 새로운 생각을 확장시켰다. 작가와 글에 나 자신에게 단절되지 않은 느낌, 이어진 느낌이 들어 좋았다. 에세이는 다른 문학 장르에 비해, 보다 독자 친화적이고 가깝게 느껴지지만 이 책에 자주 언급되는 고유명사들이 나도 좋아하는 것이기 때문일 거다. 얽힌 기억도, 사연도 많다. 뭔가 글이 내 마음에 착 와닿는, 외롭지 않은 느낌. 에세이의 묘미는 이런 게 아닐까 싶다. 


책에 실린 짧은 단편들엔 거의 빠짐없이 대중에게도 익숙한 작가들과 책이 언급된다. 또는 국내나 해외 어느 지역. 이미 잘 알고 있는 것인데도 함정임 작가의 글을 따라 읽으면 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책이면 읽었던 책이라도 다시 읽고 싶고, 지명이면 이미 알고 있는 곳인데도 다시 가고 싶다. 특히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 플로베르의 작품, 알베르 카뮈의 작품들... 다 다시 읽어야겠다. 시간의 몽타주처럼 예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달라졌어 테니 분명 예전과는 다른 느낌을 받을 것이다. 어떻게 내게 다가올까. 애가 달아진다. 


또 함정임 작가의 문장이 너무 좋아서 한 편, 한 편 필사하고 싶은 마음이 뽐뿌! 보통 오래 글 쓰신 분들은 고착된 문투, 고루한 옛날식 표현을 쓰기 쉬운데 함정임 작가의 문장은 전혀 그렇지 않다. 나이를 알 수 없다. 묘령(妙齡)하다. 문체가 어리다고 해야 할지, 정말로 묘하다고 해야 할지. 글이 차분하고, 젊음을 넘어서는 섹시함이 있다. (글에 성적인 내용은 전혀 없는데도 나는 왜 문체에서 섹시함을 느꼈을까. 왜지?!) 나도 나이를 알 수 없는 묘령의 문체를 구사하고 싶다. 



부산에 사는 작가의 글을 흔히 접할 수 없다. 한국전쟁 피난 시기에 쓰인 초창기 한국 문학이 다가 아닐까 싶다. 부산에 사시는 작가라 반가웠고, 달맞이 고개라 더 반가웠던 에세이.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프랑스 문호들과 예술가들(이 책에는 프랑스 뿐만 아니라 다른 유럽과 다른 지역 예술가들도 많이 언급된다)에 대한 글들이 어렵지 않게, 그렇다고 가볍지도 않아 참 좋았다. 각 글의 느낌이, 문화 예술을 심도 있게 다루는 토요 특별판 신문 칼럼이랄까. 매주 토요일이면 문화 칼럼을 빠트리지 않고 꼼꼼히 읽는데 이 책에 취향 저격 당했다. 어느 작가, 어느 지역이 마음에 떠오를 때마다 책장에서 꺼내 읽을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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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의 기술 - 나쁜 감정을 용기로 바꾸는 힘
크리스틴 울머 지음, 한정훈 옮김 / 예문아카이브 / 2018년 5월
평점 :
절판


두려움은 나에게 공기와도 같아서 언제나 나를 감싸고 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지금도 기억이 난다. 아마 내가 4살 때였을 거다. 오빠가 6살 때부터 유치원을 다니기 시작했으니 4살이 맞을 거다. 오빠가 좋은 옷을 입고, 매일매일 엄마 손잡고 유치원에 가는 게 부러웠다. 나도 가고 싶은데, 왜 내가 다니는 유치원은 없냐며 투정을 부렸다. 세상에는 말만 해서는 통하지 않는다는 걸 그때 알았다. 행동으로 옮겼다. 내 마음대로 내가 다니는 유치원을 만들어 냈고, 유치원 이름까지 그럴싸하게 만들었다. '샛별 유치원' 그러곤 나도 외출복(그렇다, 어릴 땐 내가 가진 제일 좋은 옷이 외출복이었다)을 입고, 노란 크로스백을 메고는 엄마, 할머니께 90도로 인사한 후 '샛별유치원에 다녀오겠습니다."라고 말하고 밖으로 나왔다. 당연히 엄마, 할머니는 웃으셨다. 

혼자 낑낑대며 1층으로 내려와 대문을 여는 순간, 모든 게 막막하고 무섭고 두려웠다. 왼쪽으로 가야 할지, 오른쪽으로 가야 할지 그리고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당황스러웠다. 골목길이 그렇게 넓어 보이기도 처음이었다. 내 기억에 남은 최초의 두려움이다. 샛별유치원에 가겠다고 대문 밖으로 나오면 모든 게 다 내 마음대로 될 줄 알았다. 내가 가야 할 정해진 길이 있고, 그 길을 내가 이미 알고 있고, 그 길 끝엔 유치원이 있을 줄 알았는데 막상 대문을 열고 보니 내가 가야 할 정해진 길도 없고, 내가 가야 할 유치원은 더더욱 없었다. 샛별유치원을 내 마음대로 만들어냈지만, 그럼에도 나는 정말 있을 거라고 확실하게 믿었다. 그 순간은, 믿음에 배반 당한 순간이었던 것이다(물론 나 스스로 만든 믿음이지만). 믿음이 부서지면 두려움이 엄습한다는 걸 그때 처음 알게 된 것이다. 물론 그땐 이런 단어들로 생각하진 않았지만 말이다. 두려움은 생생했다. 그때 이후로 내가 상상한 그 무엇이 대문 밖에 있을 거란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행동보다는 생각을 많이 하는 아이가 되었다. 여행에 별 취미가 없고, 낯선 곳을 좋아하지 않는 것도 바로 이때의 기억, 경험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서 말하는 '도마뱀의 뇌'에 큰 충격을 준 사건이어서 그런 걸까나. 그 이후로는 쭈뼛쭈뼛 낯선 사람을 어려워하고 대인관계가 어려웠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물론 친구도 있고, 그럭저럭 대인관계를 원만히 맺고 있긴 하지만 자연스럽게, 시원시원하게 사람을 만나지는 못한다. 아마도 앞으로도 그러하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나는 나의 두려움에만 집중했지 다른 사람의 두려움엔 관심이 없었고, 타인의 두려움이 나에게 미칠 수도 있는 심각한 문제에 대해선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오로지 나만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의 복병을 만났으니, 바로 부모님의 두려움이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그리고 소위 '갱년기'를 격하게 겪으신 후 우리 부모님은 두려움이 많아지셨다. 어렸을 땐 그렇게 아는 게 많고, 거침없으셨던 분들이 이제는 근심 걱정으로 꽉 찬 하루를 보내고, 아주 작고 사소한 도전에도 겁을 내고 혹여나 실수할까 봐 나부터 부르신다. 옛날에는 내가 '엄마~'하고 부르는 일이 많았는데, 이제는 부모님이 내 이름을 부르는 일이 더 많아졌다. 

어느 감정이든 전염성이 없겠냐 만은, 여러 감정 중 '두려움'이 제일 강력하고 지독한 전염성을 갖고 있다. 같이 있는 사람 중 누가 한 명 두려워하기 시작하면, 다른 사람들은 말로는 '아니다, 괜찮다'라고 해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함께 두려움에 떠는 것이다. 그냥 그런 것이다. 말로는 쉽게 설득되지 않는다. 다만, 내가 마음을 편히 갖고 말할 때, 내 말의 내용보다 내 말에서 느껴지는 안정감과 차분함이 전해져야만 두려움이 차차 가라앉는다. 말했지만, 이건 그냥 그런 것이다. 



크리스틴 울머가 쓴 『두려움의 기술』이란 책도 실상 내가 겪고 깨달은 바와 일맥상통한다. 두려움은 극복하려고 애쓰는 게 아니라는 것. 그냥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 아등바등 벗어나려고 해봤자, 5억 년 전부터 늘 있어왔던 두려움을, 고작 몇 백만 년도 살지 않은 신생아 수준의 인간이 이성으로 극복할 수는 없다. 극복하려 해봤자 더 심각한 정신적 후유증이 남거나 저자 자신처럼 너덜너덜해진 무릎과 사고 혹은 사망의 위험에 처할 수 있다고 말이다. 그냥 받아들여야지 어떻게 하겠어요. 하지만 이 받아들임에도 기술(art)이 있으니, 이 책은 그 기술을 439쪽에 걸쳐 서술한다. 

저자는 어렸을 땐 자신이 정말 두려움이 없는 줄 알았단다. 실제로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고. 하지만 정말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을까. 저자는 나중에 알았지만 자신도 다른 사람처럼 두려움을 가졌지만 그걸 억압했기 때문에 미처 알지 못했다고 한다. 익스트림 스키계를 은퇴한 후 저자는 두려움을 느끼고 걱정할 때가 잦아졌다. 익스트림 스포츠를 하는 사람들은 사실 보통 사람들과 호르몬이 작용 기저가 좀 다르다. 어쨌든 은퇴한 후 보니, 저자는 다른 사람과 다를 바 없이 두렵고 두려운 마음을 느낀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그녀에게 상담해오는 사람들처럼, 그녀 역시 정신과 상담을 받고 정신과 약을 처방받아 복용한다. 읽어보니 불가, 도가 사상과 뉴에이지에도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저자는 흔히 접할 수 있는 '두려움'에 관한 책들과 다른 주장을 한다. 두려움은 극복하거나 무시해야 할 감정이 아니라고. 오히려 당당히 정면으로 대면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녀 자신이 그러한 것처럼. 그리고 두려움을 부정적인 감정이라고 치부할 게 아니라, 본인에게 에너지가 될 수 있는 긍정적 힘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그러기 위해 '두려움의 기술'을 쓴 것이다. 

여전히 두려움은 내게 동기를 부여해준다. 내가 앞으로도 계속해서 고객들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다. 그 두려움이 요즘의 나를 이끄는 에너지다. 그 두려움이 바로 새로운 나의 존재 이유다. (385쪽)

나도 살아보니, 두려움이라는 감정은 머리로는 어떻게 되지 않는다. 이성적으로 아무리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납득했다고 해도 뭔가 늘 찜찜함이 남고, 특정 상황에 처하면 어떤 기저가 작동해 두려움이 엄습한다. 이럴 때는 다른 방법은 없고, 사노 요코의 말처럼 배꼽 밑 단전이 따뜻해진 느낌으로 그냥 내가 바라던 게 이미 이뤄졌다고 믿고 생각하고 행동하면 된다. 늘 잘 되는 건 아니지만, 이 방법이 제일 확실한 것 같다. 너무 어렵지만, 너무나 쉽고 간편한 방법이다. 인생의 굽이굽이 돌이켜 보면 이런 느낌으로 매일 하루를 충만하게, 시크하게, 단순하게, 설레발 없이 살았던 때가 제일 두려움이 없었고 이 시기에 이룬 것도 많았다. 두려움을 극복해 보려는 심리로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분노로 일관하지 않고, 그냥 내 감정 묵묵히 받아들이고 차분하게, 자연스럽게 살던 그때가 말이다. 


이 책에도 잠시 언급되지만, 우리의 일상과 습관도 중독적으로 움직인다. 두려움도 중독적이다. 트라우마와 연관된 특정 순간에 두려움은 아주 강력하게 발동된다. 두려움을 극복하려고 하거나 외면하려고 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5억 년 동안 생명체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 '두려움'을 얼마 살지도 않은 우리가 극복할 수 있을까. 그냥 받아들이자. 사실 이 책을 읽어보니, 독자보다는 저자 자신을 위해 쓴 느낌을 많이 받았다. 자신에게 자기의 생각을 납득시키고 있는 뉘앙스. 두려움의 기술에 대해 쓴 저자도 이렇게 두려움을 제대로 다루기가 이렇게 어렵습니다, 여러분! 어쨌건 두려움을 두려워만 하기보다는 두려워해도 좀 더 나은 방향으로, 긍정적 방향으로 이끄는 게 좋겠다. 나의 삶, 부모님의 삶, 내 주의의 많은 사람들... 함께 있으면 마음 편하고 좋아서 웃지만 모두 마음 한 편엔 근심 걱정과 고민, 두려움이 있다. 이런 감정들과도 함께 어울려 잘 살아갈 방법을 계속 강구해봐야겠다. 늙음과 마주한 순간부터, 두려움은 추상적 감정이 아니라 실체가 되어 우리를 압박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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