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안는 것
오야마 준코 지음, 정경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8년 6월
평점 :
절판


도쿄 변두리에 별로 크지 않은 강이 하나 있다. 100년 전 이곳 사람들은 강의 물길을 이용해 짐을 날랐다. 작은 강이라서 배도 자그마한 재래식 나무배였다. 강변에는 흙벽으로 지은 창고가 있었고, 창고는 쥐들의 세상이었다. 들끓는 쥐를 잡기 위해 창고 주인들은 고양이를 키웠다. 세상은 점점 살기 좋아졌다. 돈벌이가 괜찮은 창고 주인들은 흙벽 창고를 허물고 서양식 창고를 짓기 시작했다. 서양식 창고는 쥐가 살기 힘들다. 쥐가 없어지니 자연히 고양이가 필요 없게 되었다. 상인들은 고양이를 버리기 시작했다. 당시 장사가 잘된다는 의미로 ‘네코스테(描捨)’ 즉 고양이를 버린다는 말을 썼다. “그 집 아저씨, 올해는 네코스테인가?” “아니요, 그 정도까지는 아니에요.” 라는 식의 은어인 것이다.(8쪽) 강 위로 이쪽과 저쪽을 이을 다리가 필요해졌다. 창고 주인들은 합심해 다리를 놓았다. 다리 이름은, 사업 번창을 기원해서 ‘네코스테’라는 붙였다.  

그때쯤 일이다. 이 강엔 센키치라는 젊은 뱃사공이 있었다. 어느 날 센키치가 네코스테 다리 밑을 지나고 있을 때 다리 위에서 하얗고 자그만 것이 떨어졌다. 하얀 털의 새끼 고양이었다. 센키치는 다행히 고양이를 받았다. 다리 위에는 치요라는 아가씨가 있었다. 동네에서 제일 가는 상인의 딸이었다. 고양이의 눈은 한쪽 파랬고, 한쪽 노랬다. 치요 아가씨는 고양이를 구해준 센키치의 이름을 따서 고양이에게 ‘센’이라고 이름 지어줬다. 어느 날 센키치는 그를 질투한 동료 때문에 3년간 복역을 하게 되었고, 센은 센키치의 배에서 오지 않는 센키치를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러다가 센도 센키치를 질투했던 동료에게 심하게 맞아 파란색 눈을 잃고, 강에 빠져 떠내려갔다. 마을 사람들은 센이 죽었다고 믿었다. 그 넋을 기리기 위해 센의 한쪽 눈이 푸르렀던 데서 이 강의 이름을 아오메(靑目) 강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죽은 줄 알았던 센은 죽지 않았다. 기어코 센키치를 만나기 위해 마을로 돌아왔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다. 센은 파란색 눈은 잃고, 노란색 눈만 있었다. 하얗고 윤기 흐르던 털은 꾀죄죄하고 푸석푸석해져 있었다. 센은 옛날처럼 다시 센키치를 기다렸다. 앙상하게 비쩍 마른 채 센키치의 배에서 기다렸고, 시간이 흐르고 흘러 마침내 그들은 만난다. 




센키치, 그리고 그의 부인과 행복하게 살았던 센은 어떻게 되었을까. 100년 전에 살았던 고양이이니 센은 죽었다. 하지만 고양이는 환생을 거듭하고, 아주 소수의 고양이들은 전생을 기억한다. 센은 전생의 기억을 간직한 채 환생을 거듭했다. 그러는 동안 열일곱 개의 이름을 갖게 되었다. 이름이 없는 때도 있었다. 열일곱 개의 이름 중 센에게 제일 중요한 이름은 센이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정중하게 말해요? 
좀 으스대도 되지 않나요?"
"살면 살수록 나 자신이 미약하다는 걸 느낍니다. 
알면 알수록 겸허해지지요. 
머지않아 소년도 이 마음을 이해하게 될 겁니다."
흰 고양이는 그렇게 말한 뒤 후우 하고 크게 한숨을 쉬었다. 
아기 고양이는 흰 고양이의 눈을 가만히 보았다.
"이제 더 이상 다시 태어나지 않기로 결심했죠?"
대답은 없다. 회색 눈은 빛을 잃고 먼 곳을 응시했다. 
"그래서 최후에 가장 최초의 모습, 
아오메 강의 센으로 태어나 여기에 있는 거죠?"
흰 고양이는 눈을 감았다.
"아니면 또 환생해요?"
흰 고양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기 고양이는 흰 고양이를 향해 소리쳐 불렀다.
"센!"
그 순간 회양목 덤불숲은 좋은 향기로 가득 찼다. 
그리고 회양목 줄기가 보였다. 
흰 고양이는 사라져버렸다.
(- 276쪽)

 이 소설은 아오메 강과 네코스테 다리에서 일어나는 고양이와 인간들의 이야기다. 옴니버스 식 구성으로, 각기 모두 독립된 이야기이지만 모두 연결되어 있다. 강이 땅의 이쪽과 저쪽을 단절시키지만 다리가 놓이면 이쪽과 저쪽이 연결되는 것처럼, 이 소설집의 소설들은 각기 독립된 이야기이지만 아오메 강과 네코스테 다리로 이어지는 것이다. 


사람과 고양이의 관계도 이와 비슷하다. 사람과 고양이는 함께 살아도, 둘은 단절되고 각자의 세계가 있다. 강처럼 넘을 수 없는 무언가가 있는 것이다. 존재 자체가 달라서 일지. 그러다가도 가끔, 아주 가끔, 인간과 고양이 사이에 다리가 놓인 듯 서로 교감하고, 믿고, 의지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다리를 건너, 저쪽의 존재와 만나는 것처럼 이 책에서는 인간과 고양이 사이에 다리 역할을 하는 것은 바로 '이름'이다. 


요시오, 키이로, (철학자- 철학자는 고양이가 아니에요), 센, 그리고 르누아르. 


“그럼 인간과 살지 않았던 적도 있었던 거네요?”

“그렇습니다.”

“어느 쪽이 행복해요?”

흰 고양이는 침묵했다.

“어느 쪽이 행복해요?”

“비교는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인간에게 이름을 얻으면 그 인간에게 지배되어버립니다.”

“지배? 명령받는 거요?”

“아니요, 명령 따위 하지 않는 인간이라도 

이름을 얻는 순간 관계성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거기서 자유로워질 수는 없습니다. 

아마 키이로 님도 고흐 님에게 얽매여 살아가고 있을 겁니다.”

(-274쪽)

 



“자유는 좋은 거예요?”

“자유는 좋은 것이기는 합니다만…….”

흰 고양이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했다.

“모든 것에 있어서 자유가 우선이냐고 묻는다면, 

꼭 그렇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속박이라는 것은 풍요로운 것이기도 하니까요.”

흰 고양이는 거기서 말을 끝내고 아기 고양이를 바라보았다. 

‘여기서부터는 스스로 생각하십시오’ 하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기 고양이는 생각했다. 

자유와 속박에 대해.

좋은 향기에 감싸인 회양목 덤불 속에서 

흰 고양이의 시선을 느끼며 생각했다. 

이윽고 깨달았다.

자신은 이름을 갖고 싶은 것이 아니라, 

속박을 원하는 것이 아닐까?

부러운 것은 키이로의 이름이 아니다. 

고흐와의 관계가 부러운 것이다.

센이 센키치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애처롭다. 

하지만 처음부터 만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아기 고양이는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얽매이는 삶을 동경했다. 

그것이 설령 슬픈 결말을 맞았다고 할지라도.

(-275쪽)

 강을 사이에 두고 이쪽과 저쪽에 인간과 고양이가 있다. 인간이 고양이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순간 '다리'가 생긴다. 새로운 관계성이 기는 것이다. 이 관계는 속박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속박이 싫지 않다. 그동안 누리고 살던 자유의 한 부분을 포기하더라도 충분히 가치 있는 속박이기 때문이다. 새끼 고양이(나중에 '르누아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될)는 처음엔 잘 인지하지 못했었지만 결국 자신이 속박을 원했다는 걸 깨닫는다. 새끼 고양이는 이름을 원했고(그래서 엄마에게 묻고, 고양이의 신에게도 이름에 대해 묻고), 머지않아 자신에게 '르누아르'라는 이름을 지어줄 나쓰미를 만나게 된다. 새끼 고양이에게 '르누아르'란 이름은 행복한 속박이었을 것이다. 




이 책에서 고양이는 안는 것이라고 말한 사람은 '고흐'라는 화가다. 어떻게 보면 실패한 화가라고 해야 할까, 필생의 역작을 남기고 죽은 행복한 화가라고 해야 할까. 고흐의 죽음이 슬프지만, 원했던 색을 사용해, 원했던 그림을 그리고 죽었으니 불행했던 화가는 아닐 것이다. 이 고흐라는 사람의 친구가 고흐에게 고양이를 그리라고 한다. 모델비가 들지 않는다고. 그때 고흐는 미소를 짓고 조용히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말한다. 


"고양이는 그리는 것이 아니라 안는 거야."

(-95쪽)

 아마도 고흐가 이 말을 할 때 르누아르의 '고양이를 안고 있는 아이"를 생각하지 않았을까. 고양이는 인간에게 이름이 지어지면서, 인간은 고양이를 안음으로써 관계가 형성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오메 강은 흐르고, 네코스테 다리 위에서 고양이들의 집회가 열리고, 고양이가 다리가 되어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이름이 다리가 되어 고양이는 인간에게 기분 좋은 속박을 받으고, 인간은 고양이를 안으며 치유되고 행복해진다. 이 책은 이런 이야기다. 소소하지만 서로 이어진, 그래서 기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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