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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의 기술 - 나쁜 감정을 용기로 바꾸는 힘
크리스틴 울머 지음, 한정훈 옮김 / 예문아카이브 / 2018년 5월
평점 :
절판
두려움은 나에게 공기와도 같아서 언제나 나를 감싸고 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지금도 기억이 난다. 아마 내가 4살 때였을 거다. 오빠가 6살 때부터 유치원을 다니기 시작했으니 4살이 맞을 거다. 오빠가 좋은 옷을 입고, 매일매일 엄마 손잡고 유치원에 가는 게 부러웠다. 나도 가고 싶은데, 왜 내가 다니는 유치원은 없냐며 투정을 부렸다. 세상에는 말만 해서는 통하지 않는다는 걸 그때 알았다. 행동으로 옮겼다. 내 마음대로 내가 다니는 유치원을 만들어 냈고, 유치원 이름까지 그럴싸하게 만들었다. '샛별 유치원' 그러곤 나도 외출복(그렇다, 어릴 땐 내가 가진 제일 좋은 옷이 외출복이었다)을 입고, 노란 크로스백을 메고는 엄마, 할머니께 90도로 인사한 후 '샛별유치원에 다녀오겠습니다."라고 말하고 밖으로 나왔다. 당연히 엄마, 할머니는 웃으셨다.
혼자 낑낑대며 1층으로 내려와 대문을 여는 순간, 모든 게 막막하고 무섭고 두려웠다. 왼쪽으로 가야 할지, 오른쪽으로 가야 할지 그리고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당황스러웠다. 골목길이 그렇게 넓어 보이기도 처음이었다. 내 기억에 남은 최초의 두려움이다. 샛별유치원에 가겠다고 대문 밖으로 나오면 모든 게 다 내 마음대로 될 줄 알았다. 내가 가야 할 정해진 길이 있고, 그 길을 내가 이미 알고 있고, 그 길 끝엔 유치원이 있을 줄 알았는데 막상 대문을 열고 보니 내가 가야 할 정해진 길도 없고, 내가 가야 할 유치원은 더더욱 없었다. 샛별유치원을 내 마음대로 만들어냈지만, 그럼에도 나는 정말 있을 거라고 확실하게 믿었다. 그 순간은, 믿음에 배반 당한 순간이었던 것이다(물론 나 스스로 만든 믿음이지만). 믿음이 부서지면 두려움이 엄습한다는 걸 그때 처음 알게 된 것이다. 물론 그땐 이런 단어들로 생각하진 않았지만 말이다. 두려움은 생생했다. 그때 이후로 내가 상상한 그 무엇이 대문 밖에 있을 거란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행동보다는 생각을 많이 하는 아이가 되었다. 여행에 별 취미가 없고, 낯선 곳을 좋아하지 않는 것도 바로 이때의 기억, 경험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서 말하는 '도마뱀의 뇌'에 큰 충격을 준 사건이어서 그런 걸까나. 그 이후로는 쭈뼛쭈뼛 낯선 사람을 어려워하고 대인관계가 어려웠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물론 친구도 있고, 그럭저럭 대인관계를 원만히 맺고 있긴 하지만 자연스럽게, 시원시원하게 사람을 만나지는 못한다. 아마도 앞으로도 그러하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나는 나의 두려움에만 집중했지 다른 사람의 두려움엔 관심이 없었고, 타인의 두려움이 나에게 미칠 수도 있는 심각한 문제에 대해선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오로지 나만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의 복병을 만났으니, 바로 부모님의 두려움이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그리고 소위 '갱년기'를 격하게 겪으신 후 우리 부모님은 두려움이 많아지셨다. 어렸을 땐 그렇게 아는 게 많고, 거침없으셨던 분들이 이제는 근심 걱정으로 꽉 찬 하루를 보내고, 아주 작고 사소한 도전에도 겁을 내고 혹여나 실수할까 봐 나부터 부르신다. 옛날에는 내가 '엄마~'하고 부르는 일이 많았는데, 이제는 부모님이 내 이름을 부르는 일이 더 많아졌다.
어느 감정이든 전염성이 없겠냐 만은, 여러 감정 중 '두려움'이 제일 강력하고 지독한 전염성을 갖고 있다. 같이 있는 사람 중 누가 한 명 두려워하기 시작하면, 다른 사람들은 말로는 '아니다, 괜찮다'라고 해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함께 두려움에 떠는 것이다. 그냥 그런 것이다. 말로는 쉽게 설득되지 않는다. 다만, 내가 마음을 편히 갖고 말할 때, 내 말의 내용보다 내 말에서 느껴지는 안정감과 차분함이 전해져야만 두려움이 차차 가라앉는다. 말했지만, 이건 그냥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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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틴 울머가 쓴 『두려움의 기술』이란 책도 실상 내가 겪고 깨달은 바와 일맥상통한다. 두려움은 극복하려고 애쓰는 게 아니라는 것. 그냥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 아등바등 벗어나려고 해봤자, 5억 년 전부터 늘 있어왔던 두려움을, 고작 몇 백만 년도 살지 않은 신생아 수준의 인간이 이성으로 극복할 수는 없다. 극복하려 해봤자 더 심각한 정신적 후유증이 남거나 저자 자신처럼 너덜너덜해진 무릎과 사고 혹은 사망의 위험에 처할 수 있다고 말이다. 그냥 받아들여야지 어떻게 하겠어요. 하지만 이 받아들임에도 기술(art)이 있으니, 이 책은 그 기술을 439쪽에 걸쳐 서술한다.
저자는 어렸을 땐 자신이 정말 두려움이 없는 줄 알았단다. 실제로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고. 하지만 정말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을까. 저자는 나중에 알았지만 자신도 다른 사람처럼 두려움을 가졌지만 그걸 억압했기 때문에 미처 알지 못했다고 한다. 익스트림 스키계를 은퇴한 후 저자는 두려움을 느끼고 걱정할 때가 잦아졌다. 익스트림 스포츠를 하는 사람들은 사실 보통 사람들과 호르몬이 작용 기저가 좀 다르다. 어쨌든 은퇴한 후 보니, 저자는 다른 사람과 다를 바 없이 두렵고 두려운 마음을 느낀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그녀에게 상담해오는 사람들처럼, 그녀 역시 정신과 상담을 받고 정신과 약을 처방받아 복용한다. 읽어보니 불가, 도가 사상과 뉴에이지에도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저자는 흔히 접할 수 있는 '두려움'에 관한 책들과 다른 주장을 한다. 두려움은 극복하거나 무시해야 할 감정이 아니라고. 오히려 당당히 정면으로 대면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녀 자신이 그러한 것처럼. 그리고 두려움을 부정적인 감정이라고 치부할 게 아니라, 본인에게 에너지가 될 수 있는 긍정적 힘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그러기 위해 '두려움의 기술'을 쓴 것이다.
여전히 두려움은 내게 동기를 부여해준다. 내가 앞으로도 계속해서 고객들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다. 그 두려움이 요즘의 나를 이끄는 에너지다. 그 두려움이 바로 새로운 나의 존재 이유다. (385쪽) |
나도 살아보니, 두려움이라는 감정은 머리로는 어떻게 되지 않는다. 이성적으로 아무리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납득했다고 해도 뭔가 늘 찜찜함이 남고, 특정 상황에 처하면 어떤 기저가 작동해 두려움이 엄습한다. 이럴 때는 다른 방법은 없고, 사노 요코의 말처럼 배꼽 밑 단전이 따뜻해진 느낌으로 그냥 내가 바라던 게 이미 이뤄졌다고 믿고 생각하고 행동하면 된다. 늘 잘 되는 건 아니지만, 이 방법이 제일 확실한 것 같다. 너무 어렵지만, 너무나 쉽고 간편한 방법이다. 인생의 굽이굽이 돌이켜 보면 이런 느낌으로 매일 하루를 충만하게, 시크하게, 단순하게, 설레발 없이 살았던 때가 제일 두려움이 없었고 이 시기에 이룬 것도 많았다. 두려움을 극복해 보려는 심리로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분노로 일관하지 않고, 그냥 내 감정 묵묵히 받아들이고 차분하게, 자연스럽게 살던 그때가 말이다.
이 책에도 잠시 언급되지만, 우리의 일상과 습관도 중독적으로 움직인다. 두려움도 중독적이다. 트라우마와 연관된 특정 순간에 두려움은 아주 강력하게 발동된다. 두려움을 극복하려고 하거나 외면하려고 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5억 년 동안 생명체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 '두려움'을 얼마 살지도 않은 우리가 극복할 수 있을까. 그냥 받아들이자. 사실 이 책을 읽어보니, 독자보다는 저자 자신을 위해 쓴 느낌을 많이 받았다. 자신에게 자기의 생각을 납득시키고 있는 뉘앙스. 두려움의 기술에 대해 쓴 저자도 이렇게 두려움을 제대로 다루기가 이렇게 어렵습니다, 여러분! 어쨌건 두려움을 두려워만 하기보다는 두려워해도 좀 더 나은 방향으로, 긍정적 방향으로 이끄는 게 좋겠다. 나의 삶, 부모님의 삶, 내 주의의 많은 사람들... 함께 있으면 마음 편하고 좋아서 웃지만 모두 마음 한 편엔 근심 걱정과 고민, 두려움이 있다. 이런 감정들과도 함께 어울려 잘 살아갈 방법을 계속 강구해봐야겠다. 늙음과 마주한 순간부터, 두려움은 추상적 감정이 아니라 실체가 되어 우리를 압박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