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킨케어 바이블 - 원인 없는 트러블은 없다
안잘리 마토 지음, 신예용 옮김 / 윌북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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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새로이 깨달은 것이 있다. 나이에서 숫자 앞자리가 바뀌는 것만큼, 나이의 뒷자리 숫자가 바뀌는 것도 상당히 타격이 크다는 것. 노화가 내 등 뒤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가, 나이 하나 먹기를 기다렸다가 보란 듯이 내 앞에 얼굴을 들이민다. 좀, 가라. 가라고. ㅠㅅㅠ 나를 슬프게 하는 노화.


2~3년 전만 해도 어디 자기소개하는 자리가 있으면, 은근히 내 차례가 되길 기다렸다. 내 차례가 되면 이름 말하고 이것저것 말하고 뜸 들이다, 적당한 순간 내 나이를 말하는데 이때 보통 사람들이 놀라며 정말 어려 보인다고 한 마디씩 해주셨다. 겉으로는 웃으며 '헤헤, 아니에요~ 제가 키도 작고, 머리 스타일 때문에 그래 보여요.' 라며 짐짓 빼지만, 속으로는 '이 순간만 기다렸다!'고 되뇌며 즐겼다. 밋밋한 일상에서 이런 순간들이 짜릿했고, 나의 소박한 낙으로 삼았다.


그런데 이것도 옛이야기가 돼버렸다. 1~2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급격히 노화한 얼굴. 점점 푸석해지는 얼굴에, 시나브로 늘어나는 실주름들이 내 소박한 낙을 앗아가고 있다. 이제는 자기소개 시간이 싫다. 나이를 말해도, 깜짝 놀라지 않는 사람들. 이제는 내 나이보다 많이 볼까 봐 걱정되고, 의기소침해진다. 가급적 나이를 밝히지 않는다. 나이를 말 안 하려 해도 꼭 얘기하라는 분이 있어 속상함. ㅠㅅㅠ


노화의 이유는, 실제로 나이를 먹고 있다는 게 첫 번째 이유고 두 번째는 피부에 대한 무관심 때문일 것으로 본다. 사실 2년 전부터인가, 기초는 '아이크림-알로에겔-수분크림' 이렇게만 바르고 있다. 남들 다 바르는 스킨, 로션은 바르지 않는다. 그래도 피부는 좋아 보였고 오히려, 피부가 좋아졌다는 소릴 들어서 이런 루틴을 지속했던 것.


하지만 이렇게 노화가 역습해 올지는 몰랐다. 역시나 나이에 맞는 스킨케어를 했어야 하는데... 그동안 안이했던 나를 반성합니다.




그러던 중 이 책을 읽었다.


이 책은 어릴 때 여드름 때문에 상처받고, 고민했던 저자가 결국 피부과 전문의가 된 사람이 쓴 책이다(닥터 안잘리 마토 씨!). 저자는 십 대 때 여드름 흉터 때문에 스트레스가 많았다고 한다. 이 병원 저 병원을 다니다, 어느 날 한 피부과에 갔는데 그 의사 선생이 대화를 오로지 저자의 어머니와 했단다. 상담이 끝나고(물론 저자는 말도 못 했고) 밖으로 나가기 직전 저자는 간신히 용기를 내어 의사에게 물었단다.


"(여드름) 흉터가 나아질까요?"


의사가 마침내 날 쳐다보더니 한 단어로 대답했다.


"아니."


이 대목에서 내가 눈물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대화는 끝이 났다.


안잘리 마토, 『스킨케어 바이블』, 윌북, 2019 (- 112쪽)


와, 나도 화가 난다. 의사의 무례한 태도에!! 나도 십 대 때 피부 트러블이 있었던 사람으로서 저자의 마음이 십분 이해가 된다. 내 같았어도 그 자리에서 울음을 터트렸을 것이다. 십 대 때는 자기가 아는 협소한 세상이 다인 줄 알고, 자기 경험만이 다인 줄 할고, 자기가 만나는 사람만이 다인 줄 알기 쉬운 나이인데, 너무 대못을 박는 태도에 상처를 주는 말을 하다니! 나쁘다!!! (그러니 마흔이 다 되어 가는 나이이지만 이 기억은 잊히지 않는 것이다. 저자가 나이를 많이 먹어도 이 기억은 잊히지 않겠지) 어쨌든, 그런 경험이 전화위복이 되었고 저자는 피부 전문의가 되었다. 이제는 자기 어린 시절처럼, 피부 때문에 고민하고, 스트레스받는 사람을 위해 진료를 하고 이렇게 책도 냈다. (저자의 여드름 흉터는 성인이 되어 의학 공부 겸 캐나다에 가서 레이저 치료를 받았고 현재 아주 약간의 흔적만 있는 상태란다. 이 흔적도 레이저로 없앨 수 있지만 신경 안 쓰이는 정도라 가만히 놔뒀단다. 일단, 잠정적으로. 나중에 마음 변하면 없앨 수 있다고!)


사실 요즘 피부 케어에 대한 정보는 넘쳐난다. SNS에 접속해도, 모바일로 네이버에 접속해도, 티비를 틀어도, 잡지를 펼쳐도 피부 이야기가 많다. 또 요즘엔 피부과나 피부관리실에 정기적으로 가는 사람도 많고, 한 달 화장품 구입에 어마어마한 돈을 쓰는 사람도 많다. 화장품 종류는 어찌나 많은지. 단지 하나의 브랜드만 살펴봐도 다 기억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게 많은 라인이 나와있다. 그래서 일반인들도 피부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고, 화장품 후기 글에는 꼭 '무슨 무슨 성분이 포함되어 있네요. 매우 유해한 성분인데, 어떻게 이런 성분을 넣을 수가 있나요? 양심이 있나요, 없나요? 안 삽니다! 다른 분들도 사지 마세요!'라는 글이 있다. 일반인들도 피부, 화장품에 대해서라면 이제는 전문가 뺨을 친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데. >ㅁ<


어쩌면 그런 분께는 이 책이 새로울 게 없을 수 있겠지만 읽어 본 바, 이 책의 강점은 바로 신뢰성이 아닐까 싶다. 일단, 일반인들이 뷰티업계의 상술에 넘어가는 걸 염려스러워하고, 본인이 중립적이고 전문적인 피부과 의사라는 점에서 신뢰할 수 있다. 무엇보다 본인이 십 대 때 피부 트러블로 가슴앓이 했던 사람으로서, 그런 독자를 상정하고 쓴 책이라 무해하다. 그러니 신뢰가 간다.


노화가 걱정되어 읽었지만, 다른 피부 트러블에 대해서도 잘 읽었다. 평소 고민거리이기도 했던 '민감성 피부'에 대해서도 좀 더 잘 알 수 있었던 기회였다. 또 인상적인 부분은 바로 '수면'이었는데, 누구나 피부 건강에 수면의 질과 양이 중요하다는 건 다 안다. 나도 아는데 그게 참 잘 안된다. 이 책에 보니 이런 내용이 있다.


체내의 수많은 과정에는 일주기 리듬이 있다. 그러나 2000년 이후, 뇌에 있는 가장 상위의 시계 외에 피부 조직에도 자체 내부 시계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놀라운 연구가 소개되었다. 많은 세포 조직 유형에 자체 내부 시계가 있다. 콜라겐을 만드는 세포(섬유 모세포)와 색소를 만드는 세포(멜라닌 세포). 더불어 줄기세포까지. 이 세포들은 두뇌는 물론이고 서로 상호작용을 하여 피부의 리듬 변화를 생성한다. 


피부의 일주기 리듬은 피부의 거의 모든 기능에 영향을 미친다. 여기에는 수분 공급과 수분 손실, 지방 피지 생성과 혈류 피부 세포 분할과 장벽 기능이 포함된다. 이 과정은 낮 동안 같은 비율로 진행되지 않으며 활동의 정점과 저점을 보인다. 일주기 리듬을 이해하는 것은 다음 두 가지 주요 원인 때문에 대단히 중요하다. (...) 결국 수면을 충분히 취하지 못하면 피부의 장벽 기능이 축소되고 피부 노화의 징후가 급속도로 진행되는 것이다. 

안잘리 마토, 『스킨케어 바이블』, 윌북, 2019 (157-158쪽)


한 사람에게 필요한 수면의 양은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고 각기 다르다. 수면 필요 시간 역시 나이에 따라 달라지는데, 어린아이는 어른보다 훨씬 더 많이 자야 한다. 전문가들은 신체가 휴식을 취하고 효율적으로 기능하기 위해 성인에게는 평균 7시간에서 9시간 사이의 방해 없는 양질의 수면이 필요하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피부에 영향을 끼치는 라이프스타일 요인을 해결하고 싶다면 바람직한 수면 습관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 

안잘리 마토, 『스킨케어 바이블』, 월북, 2019 (159쪽)


아, 내 피부의 노화의 원인은 나이 탓도 있겠지만 수면 부족이 아니었을까... 싶다. 급 반성. ;ㅅ; 더 늦기 전에 충분한 수면을 습관화해야겠다. 앞으로 내게 남은 일은, 나이 먹는 일밖에 없지만 그래도 좀 동안으로, 건강하게 늙고 싶다. 어떤 큰 즐거움은 없더라도, 내 나이를 말할 때 사람들이 깜짝 놀라는 모습을 소소한 낙으로 즐기고 싶다. 암튼, 지금도 늦은 시각이지만, 어서 잠자리에 들어야지. 뿅!



피부 관련 온갖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지만, 피부에 관한 양질의 정확한 정보를 얻고 싶은 분께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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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랑콜리 해피엔딩
강화길 외 지음 / 작가정신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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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작가의 콩트집, 『나의 아름다운 이웃』 개정판 출간 기념으로 우리 문단의 신진, 중견 작가들이 박완서 작가님의 작품을 오마주한 짧은 글들이 실려있다. 모르는 작가분도 있었지만, 대체로 인지도 있는 작가분들이다.


그래서 작가님의 개정판과 더불어 출판된 것이 기쁜데 그러면서도 이 책을 읽을 때 여러 감정이 교차했다. 박완서 작가님의 글을 먼저 읽고 읽었던 터라 작품의 질 차가 현격히 느껴졌다. 글의 내용, 문장, 어휘 등 이런 건 둘째치고 기본적으로 퇴고도 안 한 듯한 작품이 하나 눈에 들어왔다. 그 글을 쓴 작가가 진심 퇴고도 안 하고 출판사에 보냈는지 나로선 알 수 없지만 어쨌건 읽다가 너무 충격을 받았다. 일단 기본적으로 문장이 너무 길고, 작가가 일부러 의도한 것인지 주어와 술어의 호응이 안 맞다. 뭐가 뭐의 주어이고, 뭐가 뭐의 술어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나의 독서 인생에서 이런 문장은 어디에서도 보기 힘들었고 오직 글쓰기 관련 책에서 '잘못된 글쓰기의 사례'로 드는 글 수준이라 아직까지 충격에서 못 빠져나오는 중이다. 사실 내가 난독증이 되게 심한데, 나의 난독증 때문일까 싶어 재독을 해보았다. 그런데 재독을 해도 읽기가 영 힘들었다. 사실 작가와 독자의 문장 호흡이 잘 맞아야 한다. 이번에 읽을 때 단순히 그 작가와 나의 호흡이 안 맞아서 그랬던 건지, 아니면 원래 이상한 문장으로 쓰였던 건지 잘 모르겠다. 아리송. 이 책의 제목처럼 멜랑꼴리해졌다. 슬프기도 하고, 불쾌하기도 하고. 웬만한 책 읽고도 이런 이야기는 서평에 잘 안 쓰는데 그 정도가 심하기에 쓴다. 암튼, 박완서 작가님 글 읽고 정말 기쁘고 설레고 좋았었는데 그 좋은 기운을 비문 투성이의 글을 읽고 푹 꺾인 게 씁쓸하다. 이 책이 청출어람의 파티이길 바랐는데...



가방에 텀블러와 같이 넣어다니다가 표지가 찍혔다. 내 심장도 찍힌 듯 많이 아프다. ㅠㅅㅠ


어쨌든 여러 작가가 참여한 작품집이니, 실망한 글도 있었지만 재미나게 읽은 글도 있었다. 그중 두 개 소개한다.


│김종광, 「쌀 배달」


세상에는 수많은 여왕이 있지만, 아내는 어떤 여왕의 타이틀도 갖지 못했다. 그래서 어느 날 여왕의 타이틀을 달게 되는데, (그것도 자진해서) 어떤 여왕이었냐 하면 바로 '무능력의 여왕'이다. 무능력의 여왕은, 무능력의 왕인 남편이 즉흥적으로 저지르게 된(?), 아니 가입하게 된 자원봉사 활동에 따라가게 되었고 먹고살기 힘든 사람들이 모여있는 동네에 쌀 배달이를 시작한다(여왕의 남편은 중간에 봉사활동에서 은근슬쩍 빠짐). 그 동네에서 무능력의 여왕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자원봉사를 싫어하면서도 맡은 바 아니 맡기지도 않은 일도 열심히 한다. 드디어 무료 봉사활동이 끝나고, 돈을 내며 봉사활동을 하게 된 때에 그만둔다. 그리고 이때 무능력의 여왕은 하나의 깨달음을 얻는다.


진정 봉사하고 사시는 분들이 얼마나 훌륭하신 분들인지 깨달았어. 우리 같은 범인은 범접 못 할 성인들이셔.- 75쪽


나도 동의- ㅋㅋ

김종광 작가님의 위트와 해학이 잘 묻어있는 콩트였다. 달동네에 사는 분들의 이야기 때문에 마냥 재미난 콩트라곤 할 순 없지만, 웃음 지어진 글이었다.




백수린, 「언제나 해피엔딩」


꿈 많았던 소녀는 꿈이 꺾이고 꺾이며 흐르고 흘러 모 대학 철학과 계약직 행정 조교로 일하게 된다. 이름은 민주. 어느 날 학교 축제 때문에 모든 강의가 휴강되었다. 그런데 박 선생님이라는 분은 그것도 모르고 무거운 백팩을 메고 강의하러 출근했다. 갑자기 시간이 비게 된 박 선생님과 사무실에서 차를 마시게 된 민주. 둘은 잠깐 대화를 하게 된다. 대화는, 전혀 현실적이지 않아 보이는 박 선생이 젊을 때 영화관에서 알바했다는 이야기가 나왔고 그 선생이 그 알바를 할 때 제일 좋았던 점을 말하는 데서 정점을 찍는다.


"공짜 영화를 볼 수 있었나요?"


장점이 무엇인지 크게 관심은 없었지만 민주는 대화를 이어나가기 위해 질문했다. 그러자 박 선생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것도 그렇지만 모든 영화의 결말을 미리 본다는 점이었어요. 영화가 끝나면 문을 열고 손님들에게 출구를 안내해야 하니까 끝나기 직전에 상영관 안에 들어가 있어야 했거든요."


"결말을 알아버리면 나쁜 거 아니에요?"


민주가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 시절에는 뭐가 그렇게 인생에 불안한 게 많았던지. 영화만이라도 결말을 미리 알고 싶더라고요. 그러면 나는 해피엔딩인 영화만 골라 볼 수 있잖아요." (119-120쪽)


이후 박 선생은 과 사무실을 떠나고, 홀로 남은 민주는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남자친구에 대한 걱정과 고민은 접고 온전히 그 시간, 그 순간에 집중하게 된다.


전형적인 콩트(혹은 단편소설) 형식으로 쓰였고, 잘 쓴 작품이었다.


이 외에도 박완서 작가님의 글을 오마주한 글들이 많이 실려 있다. 작가마다 다른 내용으로, 다른 느낌으로, 다른 흐름으로. 확실히 시대 변화에 따라 등단한 작가들의 문투, 어휘도 달라지며 시대 인식도 다른 게 확 느껴진다. 우리 문학사로도 의미 있는 작업과 출판이었다 본다. 다만, 박완서 작가님의 글을 뛰어넘는 글을 만나지 못한 게 못내 아쉽다.


글 쓰는 '펜'과 시대를 읽는 '정신'을 날카롭게 벼리고, 박완서 작가님의 작품처럼 영면에 든 후에도 계속 읽힐 수 있는 완성도 있는 작품으로 만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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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름다운 이웃 - 박완서 짧은 소설
박완서 지음 / 작가정신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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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박완서 작가님의 짧은 소설(콩트)를 모은 『나의 아름다운 이웃』 


작가님이 70년 대에 쓰신 작품들인데, 어휘에서 시대에서 그 시절 그 느낌이 나지만, 지금 읽어도 재밌고 가슴에 와닿는 바 큽니다. 본디 이 책에 실린 콩트는 작가님이 등단하고 10년이 채 안 됐을 때 쓰신 글들입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글들을 모아 1981년 『이민 가는 맷돌』이라는 제목을 달고 한데 묶여 책의 형태로 태어났습니다. 이후 절판되었다가 1991년 출판사 작가정신에서 현재의 제목과 같은 『나의 아름다운 이웃』으로 출판되었고, 세월이 흘러 이번에 개정판으로 세상에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그러는 동안, 박완서 작가님은 돌아가셨습니다. 뉴스로 박완서 작가님의 부고를 들은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8년이란 시간이 흘러버렸군요. 육신은 유한하나, 글은 무한할 테지요. 시간이 흐르고, 글을 쓴 작가님은 돌아가셨지만 그럼에도 남기신 글을 지금도 언제고 다시 읽을 수 있어 반갑기도 하고, 기쁘기도 합니다.




70년 대를 배경으로 한, 70년 대 소설. 세월이 읽히지만 지금 읽어도 여전히 손색 없이 지금 이 시대의 모습이 읽힙니다.  글쎄, 지금의 어린이와 십 대, 이십 대는 어떨지 잘 모르겠네요. 저의 경우, 어린 시절에 1919년, 그 삼일운동이 있었던 해에 태어나신 친할머니와 오랜 시간 동안 같이 살았고, 1970년을 다 털어내지 못하고 1970년 대의 중산층을 흠모하고 흉내 내던 1980년 대 2층 양옥집 동네에서 자랐던 지라 이 책 속에 실린 모든 글들이 잘 이해되고 좋았습니다. 젊은 남녀의 연애관, 결혼관, 어머니의 삶, 할머니의 삶, 그 시대 시대상. 이 책을 관통하는 모든 걸 저도 보고 느끼고 그 속에서 자랐기 때문입니다. 


이 책에 실린 콩트는 가벼운 글도 있고, 가벼운 겉피를 둘러쓰고 있지만 그 속에는 묵직한 감정선이 흐르는 글도 있습니다.  변해가는 세상을 안타까워하기도 하고, 좋아하기도 하며, 그러면서도 소중한 뭔가를 영영 잃어버린 듯 애처로운 글도 있습니다. 눈물이 나는 글도 있었고요. 


눈물이 났던 글로는 <어머니>를 꼽을 수 있습니다. 


올해 팔십이 된 노모를 사는 딸이, 점점 작아지고 기가 눌린 채 살아가는 어머니를 모시고 절에 간 이야기입니다. 딸은 절에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절에서의 천태만상을 보고 기가 막혀 합니다. 가정 형편에 따라 제각각인 기간으로 자식 대학 합격을 비는 인등불을 비롯해, 칠성당에 이름을 새기면 화를 면하고 복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에 사람들이 앞다투어 많은 돈을 시주하는 모습, 아기 명줄이 짧을까 봐 명다리라고 하는 무명필을 사람 키보다도 높이 단 모습, 장수와 재수, 관운 등 5복을 비는 칠성당은 절에서 제일 인기가 많아 엄청난 인파가 몰렸고 그곳에서 절하는 보살님의 얼굴은 시장 바닥에서도, 노름판에서도 본 적 없는 세속적이고 물욕으로 가득한 얼굴을 띠고 있습니다. 딸은 불쾌했습니다. 그러나 욕망으로 번들거리는 사람들 사이에 아름다운 한 분이 계십니다.


나의 이런 혼란과는 상관없이 어머니는 여러 신도들 사이에 끼어서 어떤 신도와도 닮지 않은 담담하고 평화롭고 행복한 얼굴을 하고 예배도 하고 염불도 외우시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딴 신도들과 너무도 달라 보였다. 


나는 진흙탕 속에서 홀연히 피어난 연꽃을 지켜보듯이 이런 어머니를 맑은 기쁨과 감동으로 지켜봤다. (...) 나는 속이 뒤집히는 것처럼 부글댔으나 어머니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가 겸손하게 그러나 기품과 긍지를 조금도 잃지 않은 당당한 모습으로 꼭 주먹만 한 음식 뭉치를 받아 가지시는 것이었다. 


박완서, 『나의 아름다운 이웃』, 작가정신, 2019 (188쪽)


나는 S사가 절은 무슨 절이냐, 무당집이지 하면서 S사 경내에서 내가 본 칠성당이니 신중당이니 명다리니 하는 미신적인 걸 예로 들어가며 S사를 비방했다. 어머니는 다 들으시곤 고즈넉이 웃으시더니, "넌 잠깐 동안에 별의별 걸 다 봤구나. 나는 십 년을 넘어 다녔어도 부처님 한 분 우러르기도 벅찼는데" 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이 말씀에 홀연 부끄러움을 느꼈다. 내 눈엔 미신만 보인 건 내 속에 미신하는 마음이, 잡스러운 상념만이 차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하고 같은 장소에 같은 동안 있었으면서도 어머니는 그동안을 부처님 마음을 생각하고 부처님 마음을 가지는 지복의 동안으로 만드셨는데 나는 그동안 추한 것만 골라 보고 그걸 미워하고 헐뜯는 시간으로 삼았던 것이다. 어찌 부끄럽지 않으랴.


박완서, 『나의 아름다운 이웃』, 작가정신, 2019 (189쪽)


왜인지 이 부분을 읽을 때 울컥했습니다. 나 개인적으로 이런 경험을 했고, 그때 그분의 얼굴이... 정말 온화하고 세상 것 아닌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을 봤기 때문입니다. 콩트 속 화자의 어머니처럼 작은 체구에 어딘가 세상에 할 말 못 하고 사는 그런 분처럼 봐온 분이었는데, 어떤 순간 보통 사람과 다른 분이라는 걸 깨친 순간이 있었거든요. 그때도 눈물이 났는데, 이 글을 읽을 때도 역시나 눈물이 났습니다. 내 마음속 뭔가를 쿡쿡 쑤시는 느낌이 들어, 말로 표현은 잘 못하겠지만 어떤 특별한 울컥함이 있습니다.


책은 이런 내용만 실려 있지 않습니다. 가벼운 내용에서부터, 시대나 부조리한 세상에 일침을 놓는 글도 많습니다. 대체로 앞부분에 실린 콩트가 가볍고 재밌으면서도 누구나 공감할 남녀의 연애, 결혼관을 실어놓았고 후반부로 갈수록 조금씩 무거워집니다. 박완서 작가님의 예지랄까, 예측이 잘 맞아떨어진 부분도 있고요. 70년 대에 쓰인 소설이니 50년 앞을 내다보았다 할 수 있겠네요. 무릇 작가라면 시대를 꿰뚫어보고, 과거는 물론이고 미래까지 내다봐야겠죠.


박완서 작가님의 『나의 아름다운 이웃』을 읽는 동안 정말 좋았습니다. 작품의 수준도 높고, 문장도 정말 좋습니다. 요즘 작가들의 글에서 보기 드문, 그 시절 혹은 박완서 작가님 특유의 리듬이 살아있습니다. 작가님의 리듬에 따라 제가 춤을 추며 글을 읽은 것 같은데요, 읽는 내내 정말 기뻤어요(물론 글에 따라 눈물도 났지만). 작가님의 문장이 정말 좋아서 이 책을 필사할까 합니다. 콩트라 길이도 짧으니, 필사하기 딱 좋을 것 같아요. 벌써 기대되고 두근두근 합니다.


박완서 작가님은 이미 고인이 되셨지만, 그럼에도 작가님의 글을 계속 읽을 수 있는 데에 감사하며 기쁩니다.


박완서 작가님의 장편도 좋고, 콩트는 콩트대로 정말 좋으니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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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하는 세계사 - 12개 나라 여권이 포착한 결정적 순간들
이청훈 지음 / 웨일북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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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개 나라의 여권을 뽑아, 그 여권에 담긴 각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는 교양서적이다. 국제노선 항공기에 탑승한 사람은 누가 됐든 간에 필히 여권을 소지하므로 제목을 『비행하는 세계사』로 뽑은 것 같다. 하지만 내 느낌에 책 제목과 책 내용의 핀트가 조금 안 맞는 것 같다. '여권으로 보는/읽는 각 나라의 역사와 문화'가 더 적절한 것 같은데.... 그렇지만 이런 제목은 너무 임팩트 없고, 시시한 제목이겠죠. >ㅁ< 어쨌든.

여권은 주권을 가진 각 나라들이 해외로 나가는 자국 국민에게 발급하는 '국제 신분증'이다. 이 책에서 설명하듯, '가장 사적인 증명서'이며, 어느 나라에서나 통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무언가가 담겨 있다.

여권 발급은 자국 정부가 하지만, 여권을 사용하는 곳은 자국이 아닌 타국이다. 민감한 개인 정보가 담겼고, 분실 시 외국에서 본인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으므로 함부로 다른 사람에게 여권을 주거나 보여줄 수 없다. 여권은 출입국사무소 직원이나 필요시 외국 공무원들만 볼 따름이지만, 여권은 각 나라의 얼굴이므로 각 정부는 고심에 고심을 해서 여권을 만든다.

그 나라만의 무언가를 담아야 한다. 그리하여 자연스레 그 나라만의 '역사와 문화', 그중에서 손꼽을 만한 것들만 선별해 담는다. 그래서 여권만 봐도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 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일반인인 우리가 외국 사람의 여권을 보긴 힘듦. >ㅁ<)




이 책은 우리나라를 포함해 총 12개 국가의 여권을 다루고 있다.

캐나다 / 미국 / 뉴질랜드 / 일본 / 한국 / 중국 / 영국 / 프랑스 / 독일 / 그리스 / 태국 / 인도

각 나라는 대부분 자국의 역사적, 문화적으로 중요한 것을 뽑아 여권 삽입 이미지로 사용한다. 흥미로운 것은 역사가 오래된 나라와 신생국들이 사용하는 이미지가 다르다는 것. 우리는 우리 문화의 정수이자 세종대왕의 위대한 업적인 '훈민정음', 실학의 대표적 유물이라 할 수 있는 '수원 화성'의 이미지 등등이 여권에 실려 있다.

반면에 이민자의 나라이자, 신생 국가라 할 수 있는 미국과 캐나다는 모두 각국 여권에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대륙횡단철도' 완공 사진을 여권에 삽입했다. 미국이나 캐나다나 '대륙횡단철도' 완공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나 보다. 지금은 조금 심드렁한 감이 있지만, 19세기만 해도 철도를 연결할 때만 해도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많았고, 위험한 전투도 많이 있었다고 안다. 그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완공했으므로 남다른 의미를 갖고 있을 테지. 또한 당시 철도 기술은, 발달하던 철강 기술과 관련 제반 기술의 정점이었으니 개척과 도전정신, 발달한 기술 등 여러모로 상징하는 바가 상당히 클 듯하다. '연결', '이어짐', '국토확장' 이미지도 빼놓을 수 없다.

신이여, 철길이 두 대양을 연결하듯이 우리나라의 결속이 영원하게 하소서.

이청훈, 『비행하는 세계사』, 웨일북, 2019 (48쪽 - 인용문 재인용)

특기할 만한 것은, 우주항공분야에서 최고의 선진 기술을 가진 나라답게 미국 여권에 '달, 지구, 보이저호'의 이미지가 여권에 삽입되어 있는 게 흥미롭다. 우주는 인류의 미래 지향성과 발달한 과학을 상징하기도 하는데, 미국이 뽐뽐- 여권에 한껏 뽐을 내는 것 같기도 하다.

뉴질랜드의 경우 원주민인 마오리족에게 중요했던 '고사리'를 여권의 표지 디자인으로 사용한 게 흥미로웠다. 뉴질랜드에 서식하는 고사리는, 잎 뒷면이 은빛을 발한다고 한다. 그래서 먼 길 떠나거나, 밤에 돌아와야 하는 마오리족 사람들이 길을 걸으며 고사리를 뒷면으로 꺾어 오는 길에 고사리 은빛을 표식으로 삼아 마을로 돌아오곤 했다는 이야기. 그래서 뉴질랜드에서 고사리는 상징성 있는 식물이라고 한다. 캐나다가 유니언 잭이 그려진 국기를 1965년에 자국 상징인 단풍잎이 그려진 국기로 변경했듯, 뉴질랜드도 고사리가 그려진 국기로 변경하고자 했으나, 국민투표에서 아쉽게 과반을 얻지 못해 바꾸지 못했다고 한다.


이청훈, 『비행하는 세계사』, 웨일북, 2019 (60쪽) 
국기 우측에 그려진 별 4개는, 남반구에서만 보이는 '남십자성'이라고 한다

이외에도 흥미로운 이야기가 이 책이 많이 들어있다.

영국의 경우, 산업혁명이 시작된 나라답게 과학기술, 변혁을 상징하는 이미지들이 여권에 많이 삽입(육분의, 증기기관, 지하철 노선 등등) 되었고, 프랑스의 경우 시민혁명의 상징인 '마리안', 독일은 신성로마제국의 문장인 '독수리'를 문장으로 채택하고(신성로마제국 국호가 언급될 때마다 늘 인용되는 '볼테르'의 말이 이 책에도 나와 웃겼다, '신성하지도 않고, 로마도 아니며, 제국도 아니다'- 198쪽). 힌두교인이 압도적인 나라, 인도에서 왜 불교를 대표하는 왕인 아소카왕의 상징을 국가 문장으로 채택하고 여권 표지에 사용하고 있는지(인도 초대 총리인 '네루'의 영향) 등등 흥미롭고 재미난 사실을 많이 알 수 있었다.

여권이라는 소재로, 12개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알 수 있어 유익했다. 다만 아쉬웠던 것은, 각 나라마다 여권 표지와 삽입 이미지들이 글의 흐름에 맞게 배치되었더라면 하는 점이다. 소개하고 있는 이미지가 없거나, 너무 단편적으로 이미지로 실려 좀 아쉬웠다. (저작권 문제 때문이려나)

요즘에는 많은 사람들이 해외여행을 1년에 수 차례 가고 즐기지만, 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여권을 만들어 본 일이 없다. 여권이 없으니 해외는 아예 가본 적 없다. 여행에 흥미 없고(국내 여행도 거의 안 다닌다...), 돈도 없어서 그런 것인데 어쨌든 그런 내가 여권으로 읽는 여러 나라의 여권 이야기가 재밌었다. 나는 책과 함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여행하는 게 좋다. 여권 없이 다닐 수 있잖아. 어쨌든 『비행하는 세계사』는 여권 있는 사람이나 나처럼 여권 없는 사람이나 누구나 읽어도 재밌을 책이다. 이 책처럼 다양한 소재로, 다양한 각도로 다른 나라의 역사, 문화 톺아보기는 유익하다. 앞으로도 이런 책이 많이 출간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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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 불확실한 삶을 돌파하는 50가지 생각 도구
야마구치 슈 지음, 김윤경 옮김 / 다산초당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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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교양서를 꾸준히 읽기 때문에 선택한 책. 책을 받고 나니 표지를 보니 '비즈니스', '컨설턴트' 등등 어쩌고저쩌고라는 말이 있어서, 그냥 일반인이 쓴 취미 철학으로 공부하다가 쓴 책인가 의심에 의심을 했다. 철학 전공자가 아닌 그냥 취미나 필요에 의해 철학을 공부한 사람이 집필한 철학 교양서를 많이 읽었기 때문에 좀 색안경을 끼고 본 게 있었다. 그런데 처음에만 그랬다. 막상 보니, <들어가는 말>에서부터 내공이 심상치 않다. 정신이 번쩍 들고, 자세가 단정해진다. 저자의 약력을 살피니 역시나, 학사 전공이 철학이고 석사 전공이 미학이다. 최대한 선입견을 배제하기 위해 저자의 약력은 책을 읽고 난 후에 보는데 이번엔 도리어 역(逆)으로 책 표지와 간략한 설명만 보고 편견으로 독서를 시작한 것이었다. 반성. 저자의 전공과 현재 직업이 매끄럽게 연결되는 편이 아니라서 이런 실수를 범했네요. 저자에게도, 그리고 나에게도 죄송합니다- >ㅁ<

​/

저자는 비즈니스 컨설턴트로 일하고 있다. 이 책은 철학을 다루는 책이라, 저자의 업무나 직업에 대해 자세하게 다루진 않지만 암튼 책에 적힌 몇몇 조각들과 그의 직업을 조합해 생각해보면 저자는 의뢰가 들어오면 회사 운영이랄지, 인사 관련 컨설팅이나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일을 주로 하는 것 같다.

처음에는 철학을 전공한 사람이 비즈니스 컨설팅을 하는 게 의아했는데, 생각해 보니 최근 100년 정도만 빼면 우리 인류 역사상 군주(한 나라의 최고경영자│CEO)에게 조언을 하던 사람들 대부분 철학자, 학자가 아니었나 싶다. 동양 철학의 최고라 꼽을 수 있는 공자, 맹자만 해도 천하를 주유하며 자신을 써줄 군주를 찾아 헤맸다. 중국의 운영 골격을 만든 법가 사상도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 시대 유학자들에게 절대적 영향을 준 주희도 역시 철학자다.

중국의 옛 사상가들을 생각해 보니,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의 저자가 왜 철학을 전공하고 비즈니스 컨설팅을 하는지 어렴풋이 이해가 간다. 철학은 삶의 무기가 되고, 지침이 되고, 길이 되며, 기쁨과 영광이 될 수 있겠구나 싶다. 내가 철학에 대해 아는 건 하나도 없지만, 이 책의 제목처럼 우리에게 무기와 기쁨, 길이 돼 줄 수 있다는 건 안다.

그래, 제대로 읽어 보자.

 



책에는 정말 많은 철학자들이 다뤄진다. 짧게 짧게 소개되지만 글의 내용이 가볍지 않다. 그리고 이 책을 읽고 좋았던 건, 저자 본인이 공부한 것을 다른 책을 읽고 그냥 그대로 따라 쓰는 데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많은 철학 교양서가 누군가 쓴 글을 조사나 어미만 달리하여 복사한 글과 비슷하다. 그런데 이 책은 저자가 철학책이나 철학자들을 스스로 소화하고 쓴 게 느껴진다. 어떤 정성이랄지, 아니 이런 것보다 '읽을만하다'라는 생각이 든다. 많은 책들 중에는 읽을 만한 가치나 의미도 없는 책들이 많으니까. 글 쓰는 사람이, 본인이 쓰는 내용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쓴 글은 대부분 그러하다. 어쨌든 이 책은 괜찮다. 좋다. 모든 챕터들이 독자들 모두에게 가닿지 않을 순 있겠지만, 그중에 여러 글, 혹은 최소 몇 개라도 울림이 있을 것이다.


재밌게 읽은 내용 몇 개 뽑으면 이렇다.

- 불확실한 것에 매력을 느끼는 인간의 본성 -

'행동 강화'에 관한 실험으로, 행위는 그 행위로 인한 대가가 반드시 주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을 때보다도 대가가 불확실하게 주어질 때 더욱 효과적으로 강화되는 것을 밝히고 있다. 

야마구치 슈,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다산초당, 2019  (81쪽)

- 쥐에게 버튼을 누르면 먹이가 나오는 도구로 실험을 했는데 쥐는 버튼을 누르면 반드시 먹이가 나오는 도구보다, 버튼을 누르면 먹이가 나올 때도 있고 안 나올 때도 있는 도구에 더 집착을 하며 더 자주 버튼을 누른다고 한다. 확실한 것보다 불확실한 것에 끌리는 쥐. 쥐의 이런 행동을 토대로 도박 중독자들이 노동으로 확실하게 돈을 벌 수 있는 일보다, 잃을 수도 있고 벌 수도 있는 도박에 빠지는지 설명이 가능하다고 한단다. 햐, 놀랍지 않은가.

- 포로가 된 미군에게 '공산주의에도 좋은 점은 있다'라는 간단한 메모를 적게 하고 그 포상으로 담배나 과자 같은 아주 사소한 것을 주었다. 단지 이것만으로도 미군 포로는 착착 공산주의로 돌아섰다. (...) 실제로 받은 것은 담배와 과자 정도의 소소한 포상일 뿐이다. 이래서는 사상과 신조에 반하는 메모를 적었다는 심리적 압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인지부조화 발생) 그리하여 이 신조를 공산주의는 적이긴 하지만 몇 가지 좋은 점도 있다고 수정함으로써 자신의 행위와 신조 사이에서 발생하는 부조화의 강도를 낮추는 것이다. 

- 이 경우 대가가 고액이면 부조화는 작아진다. 싫은 일이라도 대가를 위해서 했을 뿐이라는 명분이 생겨서다. 하지만 대가가 작으면 거짓말을 정당화하기 어려워지므로 지루한 작업이었다는 인지를 바꾸려는 동기가 강해진다.

야마구치 슈,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다산초당, 2019 (111-112쪽 / 113쪽)

-한국전쟁 때 포로가 된 미군을 중국 공산당이 세뇌시킨 이야기. 중국 공산당은 미군을 고문하거나, 괴롭히거나, 힘든 노동을 시키지 않고 단지 '공산주의에도 좋은 점은 있다'라는 짧은 글만 적으면 담배나 과자 같은 소소한 것을 주었다. 소소한 행동과 소소한 보상이지만 너무나 소소해서 '공산주의는 나쁘다'라는 기존의 생각과 인지부조화가 생겨 공산주의에 세뇌되고 누구보다 과격한 공산주의자가 될 수 있단다. 흠.... 흥미롭다.

- 혁신은 새로운 시도가 아닌 과거와의 작별에서 시작한다.

- 브리지스(윌리엄 브리지스)의 말에 의하면 경력이나 인생의 전환기는 무언가가 시작되는 시기가 아니라 오히려 어떤 일이 끝나는 시기다. 거꾸로 말하면 무언가가 끝남으로써 비로소 새로운 무언가가 시작된다는 것인데, 사람들은 대부분 후자의 '새로운 시작'에만 주목해 대체 무엇이 끝났는지, 무엇을 끝내야 하는지 '끝'에 관한 물음에 진지하게 맞서지 못한다. 수많은 조직의 혁신이 어중간한 상태에서 흐지부지 좌절되고 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야마구치 슈,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다산초당, 2019 (149쪽 / 152쪽)

- 사회 변화도 마찬가지다. 헤이세이(1989-현재) 시대에 관한 평가는 앞으로 세상에 쏟아져 나오겠지만, 나는 '쇼와(1926-1989) 시대를 끝내지 못한 시대'라고 말할 것이다. 

- 이 현상을 등산에 비유해 보면 고도 경제 성장기 이래 계속 올라간 산 정상에 이르는 과정이 쇼와 시대, 이후 30년에 걸쳐 같은 산을 계속 내려오고 있는 과정이 헤이세이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시대가 쇼와에서 헤이세이로 바뀌었지만 같은 산에서 '올라가기'와 '내려가기'만 하는 상황을 문제 삼고 있는데, 내가 말하고 싶은 핵심은 올라가고 내려가고의 문제가 아니다. 애초에 '같은 산'으로 만족해도 좋은가 하는 점이다. (...) 이 시기(쇼와 시대)를 정말로 '끝낸'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야마구치 슈,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다산초당, 2019 (152쪽 / 153쪽)

시작보다, 시작 이전의 '끝'에 주목해야 한다는 글이 이 책에서 제일 인상적이었다. 마침 새해의 첫 달, 1월에 이 책을 읽어서 그랬던지 와닿는 게 좀 달랐다. 나 개인적으로 2018년까지의 나의 삶 몇몇 부분을 정리하고 끝내고 2019년에 새로 시작하려는 것이 있다. 하지만 이 부분을 읽고, '과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여러 번 나의 만족스럽지 않은 부분을 끝내고 새로 시작하려고 노력했던 적이 많았는데, 잘 됐던 것도 있고 잘 안된 것고 있었다. 잘 안된 것들을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 이전의 나의 삶, 나의 태도를 제대로 끝내지 않고 섣부르기 '자, 새 출발 하자'라고만 결심하고 어설프게 짐직 새로운 걸 시작하지 않았던가 싶다. 그리하여, 새로 시작했던 것도 흐지부지 시도한 듯, 시도하지 않은 듯 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 시작에 앞서 먼저 끝을 내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또 내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본다. 현재 우리가 일본과 같다. 과거, 밝은 미래만 생각하면 됐던 시기가 있었다. 열심히 노력하면 됐던 시기가 있었다. 몇 번 어려운 고비를 맞이했지만 우리 사회는 용케도 극복했다. 한강의 기적! IMF 극복의 눈물 신화! 등등....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완전히 다른 시대가 도래했다. 그때는 힘든 일이 닥쳐도 일본이든 유럽이든 미국이든 소위 '선진국'이라는 나라를 따라 하면 됐다. 그 당시 카피 제품이 얼마나 넘쳐났는지. 하지만 지금은 카피할 게 거의 없다. 우린 우리나라가 경제 규모나 경제 체질이 달라 여전히 '선진국'을 따라잡아야 하는 '중진국'으로 느껴지지만 기술력, 사회 제반 산업을 이제 어느 나라를 보고 따라 할 수준은 지났다. 완전히 달라진 존재가 되어 가치를 스스로 창출해 내고, 새로운 물건, 새로운 서비스를 끊임없이 생산해 내야 하는 나라가 된 것이다. 지금까지 경제 발전을 이룩한 대로 여전히 정부가 나서서 이끌어 가려고 하고, 기업이 국민들도 정부의 규제엔 투덜거려도 항상 나라에 의존하며, 발전 지침을 제시하고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이끌어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언제까지?!란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뭔가 완전히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었는데 우리는 옛 시대를 끝내지 못하고 부여잡은 채 시간의 흐름에 떠밀리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된다. '4차 산업혁명', '새로운 세상, 새로운 원동력' 등등 말은 많아도 지금까지의 발전 시대를 제대로 회고, 정리하지 않으면 많은 선진국들이 그러했듯 우리도 고꾸라지거나 곤두박질치지 않을까 염려된다. 지금도 여전히 선진국이긴 하지만, 옛 영광에 비해 지금은 초라한 네덜란드, 포르투갈, 스페인, 영국, 프랑스를 보고 반면교사를 삼아야 한다고 본다. 왜 현재 이 나라들에 극우정당, 극우주의자들이 판을 치는지도 생각해 봐야 할 일. 화려했던 과거를 제대로 '끝'내지 못하고, 막연하게 그때의 그 시절이 지금도 계속되길 바라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그 과정 속에 역시 미국이 있고, 트럼프가 당선된 것도 이런 흐름으로 나온 것이다. 우리도 예외일 수가 없다.


/

위에 발췌한 내용, 나의 생각들만 봐도 좀 이 책 잘 읽은 것 같다. 아니, 참 잘 읽었다. 비즈니스 컨설팅을 하는 사람이 쓴, 짧고 간결하며 쉬운 철학 교양서지만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준다. 사람에 따라 저자가 말하는 내용이 각기 다르게 와닿겠지만, 지금 내가 하는 생각과 고민들에 여러모로 유익한 화두를 던져 주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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