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 연습
수잔 최 지음, 공경희 옮김 / 왼쪽주머니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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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과 기억, 진실과 거짓, 권력과 동의에 관한 이야기"

이미 한국에 번역되기 전부터 올해의 책, 수상 타이틀, 오바마 추천 등으로 유명한 <신뢰 연습>.

특히 한국계 최초 2019 전미도서상을 수상하여 책과 저자 모두 새롭게 알게 되었다.

약 400여쪽 분량의 장편소설인데 2~3일 정도 몰입해서 다 읽은 것 같다.

총 3개의 챕터로 나뉘어져 있지만 제목은 따로 없다. 모두 '신뢰 연습'이다. 하지만 화자가 다르다. 각 화자마다, 상황마다, 시간마다 느끼는 신뢰 연습과 신뢰 연습 그 후 이야기들이 계속 읽게 만드는데 스포를 싫어하는 나라서 이 글 또한 최대한 스포일러를 배제하고 쓴다.

<신뢰 연습>의 배경은 1980년대 미국 남부 예술고등학교이다.

흔히 우리가 말하는 특목고인데 예술 각 분야마다 인재를 뽑아 양성하는 고등학교인데, 주인공 '세라'와 '데이비드' 또한 바로 이곳, '시립 공연 예술 아카데미', 줄여서 CAPA에서 만나고 사귀게 된다.

 

 

"연기 수업인 '신뢰 연습'에서, 그들이 배운 모든 것은 예술과 연관되도록 강조되었다. '신뢰 연습'은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된다. 어떤 수업은 말하기와 집단 치료의 형식이었다. 또 침묵하기, 눈 가리기, 탁자나 사다리에서 뒤로 자빠지면 학급 친구들이 받아내기 같은 것도 했다. 거의 매일 학생들은 차가운 타일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있었는데, 나중에 세라는 그것이 요가의 시체 자세(사바사나)임을 알았다. 담당 교사인 킹슬리는 앞코가 날렵한 부드러운 가죽 슬리퍼를 신고 고양이처럼 교실을 누비면서, 근육의 움직임을 느끼게 하는 주문을 "

'신뢰 연습'은 연극 수업 중 하나로 연기 교사인 '킹슬리' 선생님이 주도하는데 다양한 수업 방식을 통해 진행되며 특히 어둠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시각 외로 느끼며 더듬더듬 발견해내는 수업을 통해 세라와 데이비드는 감정을 느낀다.

하지만 <신뢰 연습>의 주요 이야기는 아름다운 사랑이 아니다. 불완전하고 예민한 10대 청소년이 느끼는 아슬아슬한 인생 이야기이자 선생님, 그리고 그 밖에 어른들의 개입으로 꽤 충격적인 일들이 벌어지는 공간이다.

주요 인물인 '킹슬리' 선생님 또한 평범한 사람은 아니다. 마치 <죽은 시인들의 사회>처럼 학생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얻고 친근하게 다가가며 흥겨운 파티도 개최해주고 필요할 때는 마약도 슬쩍 눈감아준다.

그리고 연극을 'THEATRE'('연극'의 영국식 철자') 임을 강조하며 아이들에게 진짜 연극에 대해 열정적으로 가르쳐준다.

"이렇게 써야 합니다. 이 단어의 끝을 'ER'로 표기한 과제물은 통과되지 않을 거예요."

그가 게이 성향임은 책을 따라 읽다보면 그와 함께 동거하는 팀의 존재와 함께 알 수 있는데 아이들에게도 열린 시각과 연극적인 마인드를 심어주었다. 하지만 어른이 보고 느끼는 세계와 아이들이 느끼는 세계는 엄연히 다르다. 그가 좋은 의도를 가지고 학생들의 예술적 자질을 키우기위해 노력했으나 세라와 데이비드를 비롯한 콜린, 엔지, 패미 등 저마다 겪는 성장통 아픈 이야기가 숨겨져 있었다.

 

 

 

-"사라, 너한테 알려주고 싶은 게 있어. 네게 도움이 될 거야. 너 같은 젊은 친구들은 우리 같은 어른들보다 고통을 더 강렬하게 경험해. 감정의 고통을 말하는 거야. 네 고통은 기간과 강도가 더 크지. 견디기가 더 어려워. 이건 은유가 아니야. 사실이지, 생리적으로. 심리학적으로도. 네 감수성은 부모나 교사들보다 우월해. 그래서 인생의 이 시기가...... 열다섯 살, 열여섯 살, 열일곱 살이 그리도 힘들지만 중요하지. 그런 이유로 이 나이에 재능을 키우는 게 아주 중요해. 이 극대화된 감정적 고통은 선물이야. 고달픈 선물."

세라는 자기도 모르게 귀담아듣는다. 한참 후 가까스로 입을 연다.

"그러니까 앞으로, 더 나이 들면 마음의 아픔이 덜하다는 뜻이에요?"

"맞아, 정확해. 하지만 사라, 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어. 고통을 외면하지 말아. 더 나이 들면, 그래, 넌 더 단단해질 거야. 그건 축복이자 저주야."

로조 선생은 문을 열라고 채근하지 않고, 그것만으로도 세는 마음을 연다. 두 사람은 한참 그렇게 있고, 화장실 문을 사이에 두고 시간이 얼마나 흐르는지 세라는 모른다. 그러다가 속삭이듯 말한다.

"감사합니다."

"시간을 갖고 천천히 나오렴."

로조 선생이 떠나면서 말한다.

로조 선생님은 댄서 겸 다분야 공연가로 이 학교에서 동작교사로 부임했다. 어른인 그녀와 청소년인 그녀가 이야기를 나누는 대목.

이 시기가 얼마나 연약하고 슬프고 의지할 사람 하나 없는 외로운 시기였을지, 그리고 그런 시기였는지 다시금 감정을 떠올릴 수 있었다.

심한 표현이지만 죽고 싶은 힘든 마음이 들면서 '세라'는 분장실 뒤편 거의 사람들이 모르는 화장실에 숨죽여 울고 있다. 그리고 이 마음을 알아주는 '로조' 선생님이 그런 그녀를 달래준다. 강제로 나오라고 하거나 억지로 화해시키고 껴안거나 하는 행위가 아니라 그저 묵묵히 들어주고 그 나이에는 그럴 수 있다는, 어찌보면 시간이 해결해준다는 현실적인 조언들로 세라의 마음을 연다.

<신뢰 연습>을 읽다보면 이 책은 어른의 입장이 아니라 세라와 데이비드 같은 고등학생의 입장에서 쓰고 읽힌다. 물론 화자가 어른이 되어 이 시기를 돌아보며 쓰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돌아보는 그 순간은 어른이 아닌 청소년의 눈과 마음이다.

세라는 그리 부유하지 않다. 그렇다고 굶거나 엄청 가난한 건 아니지만 운전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 자신만의 차를 갖기 위해 새벽부터 일어나서 빵집에서 알바를 하는 부지런하고 성실한 아이이다. 그런 그녀가 앞으로 어떻게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지, 슬프게도 밝고 긍정적인 미래만이 아니라 꽤나 어둡고 충격적인 일들도 얽히고 설켜있는지 계속 읽게 만든다.

앞으로 세라가 겪게 되는 남자 문제들과 누군가에 대해 세라가 전한 말들은 그 사람의 인생을 바꾸게 만드는데 겉으로 보면 분명 잘못된 행동이고 화가 나지만 세라의 마음에서 돌아보면 충분히 이해가 되면서 곁에서 위로하고 싶어졌다. 세라는 아직 학생이다. 불완전하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리고 충분히 이 고통에서 빠져나올 힘도 있다. 세라에게 화를 내면서, 그리고 세라를 응원하면서 장을 넘기게 되었다.

"'캐런'은 로스앤젤레스의 스카이라이트 서점 밖에 서서 작가인 옛 친구를 기다렸다. 고등학교 동창인 작가를. '친구'라고 하면 너무 나간 걸까? 스스로 '캐런'이라고 부르면 너무 수용적인 걸까? '캐런'은 '캐런'의 실명이 아니지만, '캐런'이라는 이름을 보고 그게 누구를 뜻하는지 알았다.

<신뢰 연습> 1부가 세라와 데이비드, 그리고 그 주변 인물들에 관한 이야기였다면, <신뢰 연습> 2부는 '캐런'의 입장에서 보고 듣는 과거이다.

캐런은 세라의 친구이기도 하고 친구가 아니기도 한데 꽤 중요한 일들을 함께 겪기 때문에 세라만큼 마음을 들여다봐야하는 아이이다.

-"넌 내가 이걸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난 네가 이걸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니까?"

"난 네가 이걸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대체 무슨 일입니까?" 조연출자가 외쳤다.

"시끄러워, 저스틴! 나는 네가 이걸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넌 내가 이걸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전에 킹슬리 선생은 말했다. '반복의 목적은 맥락을 통제하는 거지. 사람들은 울고 소리치고, 서로의 사타구니를 움켜잡고 옷을 찢어...... 같은 문구를 반복하면서......"

캐런과 데이비드는 서로의 사타구니를 움켜잡거나 옷을 찢지 않았다. 점점 목소리가 고조되었다. 캐런은 조금 울었다. 고향에 돌아와 딱 한 번이었다.

... 행동, 사건, 반복된 다른 일, 이미 한 말을 되풀이하기. '넌 내가 이걸 할 수 있다고 생각 하지 않아'를 반복하는 것은 '내가 다시 하고 싶은 일들이 있어'를 뜻하기도 한다.

<신뢰 연습> 2부의 시간은 꽤나 많이 흘러서 이제 모두 어른이 되었다. 마치 뉴스기사나 보도자료를 읽듯이 감정없는 문장들로 저자는 이 예술학교 학생들이 얼마나 평범해질 수 있는지, 또는 그 일을 계속할 수 있는지 간단하게 흘려보낸다. 어른이 된 '캐런'과 '데이비드'는 다시 만나는데 그가 연출하는 작은 연극에 이제는 다른 업을 하는 캐런도 출연하기 위해 서로 형식상 오디션을 보는 장면이다. 누가 보면 웃기겠지만 당사자들에게는 세상 심각한 장면이기도 하다. 킹슬리 선생님의 연기 수업 '신뢰 연습'을 몇 십년만에 온 진심을 담아 보여주는 둘. 어쩌면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의 반대는 '나는 이걸 할 수 있어'라는 말을 자신과 타인의 입에서 진심으로 듣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이 책의 제목 <신뢰 연습>에는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공연예술학교에서 배우는 '신뢰 연습' 연기 과목이기도 하지만 이 수업과 시간을 통해 서로의 신뢰를 연습하기도 하고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을만큼 신뢰할 수도 없고 신뢰해서도 안되니까 말이다.

이제는 나이가 지긋한 데이비드와 그의 작은 작품에 출연하는 캐런. 그냥 고등학교 있는 이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고 살았다면 어땠을까. 아니 애초에 그런 사람들과 엮이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이 이야기 앞뒤에는 캐런만의 이야기가 숨겨져 있었다.

아동기와 청소년기의 기억과 경험은 성인이 되서도 많은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어른이 된 사람들은 그 사슬을 끊기위해 무던히 노력하거나 아픔을 감추어 살아간다. <신뢰 연습> 속 어른이 된 아이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이 겪은 아픔과 충격은 시간이 지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어떤 트리거를 통해 저마다의 '신뢰 연습'을 연습이 아닌 실제 상황으로 풀어나간다.

보통의 책이 크게 남녀 주인공의 이야기를 보여준다면 <신뢰 연습>은 너무나 다르다.

'세라와 '데이비드'의 사랑이야기를 생각하며 이 책을 펼친다면 둘이 무릎을 맞대고 꽁냥대는 부분 하나만으로 족해야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것보다 더 많은 일들과 함께 어른들과 권력의 공포 속에서 그래도 삶을 계속 살아가야하는 인물들의 모습을 책의 다채로운 구성을 통해 볼 수 있었다.

<신뢰 연습> 속 3개의 챕터마다 중심이 되는 인물이 달라지는 것도 이 책의 중요한 장치이다.

로런 그로프 작가의 <운명과 분노> 책을 보면 1부는 남자 주인공 '로토'의 입장에서 쓰여진 이야기이고, 2부는 여자주인공 '마틸드'입장에서 쓰여진 이야기라 서로의 팽팽하고 알 수 없는 긴장감, 그리고 누굴 믿어야할지 어떤 게 진실이고 어떤게 허구인지 독자는 혼란스러우면서도 그 재미에 빠진다.

<신뢰 연습>도 챕터마다 인물이 달라진다는 점은 같지만 그저 남/녀 두 주인공의 이야기로 그려질거라고 생각한다면 절대 아니다.

말할 수 없는 제 3의 인물도 마지막 3번째 챕터 '신뢰 연습'을 읽다보면 나오니까 꼭 끝까지 정독하시길!

주인공들의 아픔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성장 소설, <신뢰 연습>.

요즘 뉴스와 기사를 통해 보이는 화가 나는 일들과 미투운동 등이 소설 속 배경 1980년대와 지금 2020년도 겹쳐져 보이면서 화가 나기도 하고 통쾌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

'신뢰 연습'을 배우며 연극의 꿈을 키워나가지만 그 누구도 믿을 수 없고 믿어서는 안되는 아픔을 겪는 인물들이 지금은 좀더 편안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올바른 길을 걷게 되길 응원하면서 과거와 미래, 진실과 거짓, 옳음과 그릇을 분별하는 지혜를 얻게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

*이 글은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도서만을 제공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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