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를 걷는 여자들 - 도시에서 거닐고 전복하고 창조한 여성 예술가들을 만나다
로런 엘킨 지음, 홍한별 옮김 / 반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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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아한 프랑스어 단어를 처음 만난 게 어디에서였을까?

... 프랑스어 동사 flaner에서 파생되었고 '정처 없이 돌아다니는 사람'을 뜻하는 플라뇌르라는 단어는 19세기 초반 유리와 강철로 덮인 파리의 파사주에서 탄생했다.

-플라뇌즈, 명사, 프랑스어에서 온 말, 보통 도시에서 발견되는 한량, 빈둥거리는 구경꾼을 가리키는 플라뇌르의 여성형.

이건 가상의 정의다. 플라뇌즈라는 단어가 등재된 프랑스어 사전은 찾아보기 힘들다. 1905년에 나온 <리트레> 사전에는 "산보하는 사람"으로 정의되었다. 그러나 <생생한 프랑스어 사전>에 따르면, 믿기지 않게도 플라뇌즈는 "안락의자의 일종"이라고 한다.

일종의 농담 같은 건가? 여자가 빈둥거리면서 할 수 있는 일은 드러눕는 것뿐이라는 말인가?

-도시를 돌아다니는 기쁨은 남자에게나 여자에게나 다를바 없다. 플라뇌르의 여성 버전은 있을 수가 없다고 말해버리면, 여자들이 도시와 상호작용해온 방식을 남성의 방식 안에 가두게 되고 만다. 사회적 관습이나 제약에 대해 말할 수는 있으나 여성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지워서는 안 된다. 대신 도시를 걷는다는 게 여성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이해하려고 애써야 한다. 여성을 남성적 개념에 맞추려 하는 대신 개념을 다시 정의한다면 그럴 수 있을지 모른다.

걷기를 좋아한다.

일단 아무생각없이 걸어도 좋고 이것저것 사색하면서 걸어도 좋고 건강에도 좋고 걷다보면 생각이 없어지기도, 더 생기기도해서 좋다.

자연스럽게 걷기와 관련된 책들은 꼭 읽어 보고 있는데

(걷기의 인문학, 걷기예찬, 걷기 명상,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등... 달리기도 살짝 끼얹어본다)

역시 이번 <도시를 걷는 여자들>도 정말 좋다.

아마 리베카 솔닛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로런 엘킨의 <도시를 걷는 여자들>도 분명히 잘 맞을거다.

<도시를 걷는 여자들> 책은 걷는 자를 지칭하는 용어로 시작된다.

일부 국가에서는 남성형/여성형 단어나 문체가 따로 있는데 프랑스에서는 '플라뇌르 (산보자)'라는 뜻의 남성형 단어가 있다.

하지만 걷는 여자를 지칭하는 단어는?

간단하게 말하면 없다. 있어도 마음에 안든다. (안락의자의 일종이라니?)

그래서 저자는 '플라뇌즈'라는 말을 새롭게 만들어서 '플라뇌르'를 여성형 명사로 바꿔버렸다!

'걷는다'는 것에는 참 많은 의미가 있는데 <도시를 걷는 여자들>로 인해 내 안의 걷기는 자유로 탈바꿈했다.

더군다나 19세기 거리를 자유롭게 걸을 수 조차 없는 여성들은 얼마나 답답했을까싶지만 하지만 이건 21세기에도 존재한다.

왜 여자에게만 엄격한 통금시간을 정하는가? 그리고 짧게 옷을 입건말건 그건 자기 마음인데 함부로 판단하고 빌미를 준다고 하는가?

마치 어린아이나 동물을 보듯 지나가는 여성을 아무렇지 않게 쳐다보는 행위는?

시선간강을 당하면 얼마나 기분이 엿같은지 아시는 분?

이건 위험하다거나 아무 생각없었다는 이유만으로는 절대 이해할 수 없고 이해받아서도 안 된다.

우선 남녀평등이라는 것 자체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데 걷는 행위 역시 남녀평등은 존재하지 않았다.

저자 로런 엘킨은 그런 우리에게 걷기의 의미를 다시 되살려주고 (특히 여성의 걷기) 재해석하고 수 당당하게 도시를 걸었던 수 많은 여성들과 함께 그 도시를 걸으며 변화할 수 있는 꺼리를 마구 제공해주는데 그 시작은 아주 간단하다.

"여성은 도시의 심장에 몸을 던지고 걸어선 안 되는 곳을 걷는다. 다른 사람(남성)은 아무 반응을 불러일으키지 않고 걷는 그 한복판을 걷는다. 위반의 행위다. 여자라면 고어텍스를 입고 쭈그려 앉지 않아도 전복적일 수 있다. 그냥 문 밖으로 나오기만 하면 된다."

그래, 그냥 문 밖으로 나오기만 하면 된다.

 

 

 

 

"런던, 블룸즈버리"

-이곳 그리고 이웃에 20세기 초반 동안 블룸즈버리 그룹 멤버들 여럿이 살았다. 버지니아 울프, 클라이브 벨, 스트레이치 부부 등

-여기에 로저 프라이, 존 메이너드, 케인스, E. M. 포스터 등이 들어가는 블룸즈버리 그룹은 격식 없는 모임이었고, 울프가 발견하는 데에 이 모임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몇 해 뒤에 메무아 클럽에서 버지니아는 이렇게 물었다. "블룸즈버리가 어디까지죠? 블룸즈버리가 뭘 가리키죠?" 울프에게 블룸즈버리는 지리적인 장소일 뿐 아니라 추상적인 존재였다. 창의성과 보헤미안의 삶과 자유에 대한 생각 그 자체였다.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가 블룸즈버리인가? 이렇게 많은 자유로 무얼 할 것인가? 그저 천으로 된 냅킨을 쓰지 않는 것에 그치고 말 것인가?

1905년 겨울, 블룸즈버리의 지리적 경계를 따라 걸으면서 비지니아는 자유에 행태를 부여했다.

-"요즘 나는 종종 런던에 압도된다. 이 도시에서 걸었던 죽은 사람들도 생각한다. ...... 헝거퍼드 브리지에서 바라본 회백색 첨탑의 풍경이 그것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뭔지 아직 말할 수가 없다."

형태가 바뀌고 의미가 바뀌는 아직 말할 수 없는 무언가가 도시 산보자를 감싸고 안으로 스며들고 이해할 수 없는 계약으로 묶어놓는다. 울프에게는 그것을 표현하는 것이, 늘 알 수 없는 느낌에 알맞은 형태를 찾아내는 것이 평생의 과업이 될 것이었다.

"파리, 혁명의 아이들"

-상드의 자서전에서는 걷기가 반복되는 주제다. 심지어 자서전의 마지막 단어가 marcher(걷다)다. 자서전은 "모든 사람을 위한 자비"의 길을 향해 걷는다는 말이 난다. 혼자서, 자기 기상에 걸맞게 걸을 수 있다는 게 상드에게는 독립 선언의 기본 요건이었다. 상드가 사랑했던 할머니는 장례식 날을 제외하고는 절대로 밖에서 걸어 다니는 일이 없었다고 상드는 회상한다 "얘야, 너는 농사꾼처럼 걷는구나."라고 할머니가 상드에게 말한 적이 있다. 새 장수의 딸인 상드의 어머니를 저격하는 말이었다.

그래서 상드는 귀부인처럼 걷는 법을 배웠다. 그러고 난 다음에는 남자처럼 걷는 법을 배웠다.

-상드의 인물들은 남자처럼 옷을 입음으로써 다른 경험을 하고 다른 사고방식을 갖게 되고 성별 간의 불평등을 인지할 수 있게 된다. 상드가 종종 그렇게 했듯이 남자의 관점에서 글을 쓰는 것도 일종의 크로스드레싱이다. 그렇게 하면서 상드는 다른 삶의 방식을 엿볼 수 있었다.

<도시를 걷는 여자들>에서는 뉴욕, 파리, 런던, 베네치아, 도쿄 등 수많은 거리와 국가를 속속들이 함께 걷게 해주는데 이 책을 읽고나면 특히 거리라는 공간 뿐 아니라 버지니아 울프와 조르주 상드와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시대를 앞서간 여류작가라는 타이틀 외에도 <도시를 걷는 여자들>에 언급된 사람들은 마치 처음 걸어보는 것처럼 '걷기'를 새롭게 바라보게 해주고 걷는다는 것이 얼마나 경이롭고 소중한 것이 느끼게 해준다.

걸을 수 없는 길(이건 물리적인 공간과 함께 심리적, 사회적 공간을 의미한다)을 걷는 사람들의 외로움과 투쟁이 있었고 그 길 위에서 여전히 계속되는 역사도 있다.

버지니아 울프와 함께 블룸즈버리 그룹에 들어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걸을 수 없는 길, 입을 수 없는 옷 (크로스드레싱이 법적으로 불가능하다니?), 봐서는 안될 책이라는 규범 속에 또 다시 걷기의 자유로움을 느낀다.

할 수 없는 제약과 불편함, 이상함을 예민하게 느끼는 사람일수록 피곤하지만 나는 버지니아 울프, 조르주 상드, 진 리스, 소피칼, 아녜스 바르다 등 여기 나온 여성들과 함께 그 길을 걷고 싶다.

남녀의 젠더문제가 아니라 삶과 인생의 문제를 화두로 걷는 행위를 하고 싶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 걷고 싶다.

걸을 수 없는 거리를 걷고 싶고 또는 걸어야하는 거리를 내 의지로 걷지 않고 싶다.

마지막으로 로런 엘킨의 말과 함께 <도시를 걷는 여자들>을 처음부터 다시 걷는다.

-공간은 중립적이지 않다. 공간은 페미니즘의 이슈 가운데 하나다. 우리가 차지하는 공간, 여기 도시의 공간은 끝없이 다시 만들어지고 해체되고 구성되고 경탄의 대상이 된다. "공간은 의심이다."라고 조르주 펟렉이 말했다. "나는 끝없이 공간을 표시하고 표기해야 한다. 공간은 결코 내 것이 될 수 없고 나에게 주어지지도 않고 내가 정복해야만 한다."

-"도시 안의 보이지 않는 경계를 인식해야만 그것에 도전할 수 있다. 여성의 플라네리, 즉 플라뇌세리는 우리가 공간 안에서 움직이는 방식을 바꾸고 공간의 조직에도 개입한다. 우리는 우리 방식대로 공간의 평화를 흩뜨리고 공간을 관찰하고(혹은 관찰하지 않고) 차지하고(혹은 차지하지 않고) 조직할(혹은 조직을 와해할) 권리를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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