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원을 말해줘
이경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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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을 말해줘>의 원래 제목은 '롱롱'이었다."

책의 끝부분 '작가의 말'에 실린 첫 문장이다.

재밌고 슬프고 특이하고 서글픈 그런 SF 소설이 하나 나왔다.

허물이라는 희귀병 바이러스가 퍼진 가상의 도시에서 D동에 격리된 사람들과 병에 걸린 주인공의 모험이야기이자 병상일기이자 제약회사와 싸우는 극 현실적인 소설.

그 중 도시괴담이랄까 전설의 이야기가 하나 있는데 엄청나게 큰 뱀 '롱롱'이 허물을 벗는 날, 세상 사람들 모두가 허물을 벗을 수 있다는 것이다.

'롱롱'은 세상의 허물을 벗기는 전설 속의 뱀이다.

그때까진 허물을 쓴 사람들은 숨어서, 그리고 나라에서 운영하는 방역 센터에서 잠시 임시 치료를 받고 나오고 받고 나오고를 반복하며 근근히 살아가고 있다.

주인공은 파충류 사육사인데 어느 날 엄청나게 큰 뱀이 사설 동물원을 탈출해서 다시 생포하지 못한 그날의 기억을 안고 살고 있다.

물론 허물도 있다. 점점 심해지고 있다. 그래서 정상적인 일이나 생활도 할 수 없고 공원에서 노숙을 하며 지내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동병상련을 겪는 병리 센터 사람들과 만나며, 그리고 엄청나게 큰 뱀 (이것이 롱롱인지 아닌지는 말할 수 없다)을 만나게 되고

사람들의 희망과 좌절을 동시에 안겨주며 세상과 병과 시스템과 대적하는 치열한 삶이 그려져 있었다.

허물이라는 가상의 설정에서 '허물' 글자만 빼고 다른 병만 넣으면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에 걸려 격리조치하는 되는 사람들과 치료비와 약값이 없어서 죽거나 죽어가는 사람들,

그리고 제약 산업과 나라의 시스템과의 이길 수 없는 싸움을 벌이는 시민들의 모습이 참 안타깝고 슬펐다.

슬픈데 눈물이 펑펑나는 그런 슬픔이 아니라, 마치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같은 책을 읽었을 때 느끼는 먹먹함과 답답함으로 한동안 여운이 가시질 않을 것 같다.

우리의 롱롱이는 과연 세상 사람들의 허물을 벗겨줄지.

그 전에 우선 롱롱이를 만날 수 있을지, 프로틴으로 사람들의 병을 고칠 수 있을지는 끝까지 읽어봐야 한다.

허물

-그녀는 티셔츠와 브래지어를 한꺼번에 벗었다. 바지와 팬티도 벗어 화장실 칸막이에 걸쳤다. 배낭에서 비누를 꺼내 재빨리 거품을 내며 입구를 틈틈이 돌아봤다. 공원 관리인에게 들키면 귀찮아진다. 세금을 내는 시민만이 공중화장실을 이용할 자격이 있다는 것이 그 꽉 막힌 남자의 신념인 듯했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시 당국은 허물의 확산을 막기 위해 방역 센터를 운영하고 있었다. 방역 센터에서는 약물을 주입해 허물을 벗겨냈다. 그녀는 허물을 벗기 위해 몸부림치고 싶지 않았다. 고통스러운 치료 과정을 거쳐 허물을 벗은 사람들은 방역 센터에서 나와 직업도, 이웃도 없는 삶과 마주해야 했다. 결국엔 벌거벗은 기분으로 공원에서 잠을 자다 다시 허물 속으로 숨어들기 마련이었다.

 

 

 

프로틴

-"뱀은 언젠가 허물을 벗을 거야. 만일 뱀이 허물을 벗고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롱롱이 아니라면, 뱀은 어떻게 되는 거지?"

기도를 배반함 뱀은 처참하게 버려질 것이다.

"이 뱀이 진짜 롱롱인지, 아니면 그저 거대한 뱀에 지나지 않는지, 그건 중요치 않습니다. 중요한 건, 사람들이 그렇게 믿는 겁니다. 진실을 밝히는 것은 뱀의 몫이 아니라 사람의 몫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참 무섭다. 특히 이렇게 대중들의 마음 속에 생각을 심고 믿게 만드는 건 더욱 무섭다.

전쟁이나 정치에 관한 역사 책을 보면 프로파간다, 또는 선전선동이라는 말로 보이지 않는 장벽과 무기들을 마구 쳐서 사람들의 마음을 만드는 기술도 나온다.

믿음을 가진 개개인이 모여 하나의 사회를 이루고 그 사회가 돌아가거나 멈추거나 성장하거나 망하거나 할 것이다.

중요한건 지금 당장 결핍된 그 무언가를 해결하기 위해 사람들은 믿고 싶고 믿어야만하는 해결책으로 목숨건다는 것이다.

<소원을 말해줘>에서는 허물을 벗고 정상적인 사람처럼 사는 것이 꿈일 사람들에게 허물을 벗는 일 하나만이 전부다.

 

 

 

롱롱프로틴

-그녀는 척이 사력을 다해 외치는 걸 올려다봤다. 척은 상상이 무너진 뒤 롱롱의 진짜 힘을 보게 될 거라 했다. 현실은 정반대였다. 시민들은 상상이 무너지자 현실을 깨달은 것 같았다. 모두가 영원히 허물을 벗을거라는 약속은 거짓 환상에 지나지 않았다. 롱롱을 구하려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눈앞의 처참한 패배는 롱롱을 한낱 거대한 파충류로 돌려놨다. 아무도 상상과 현실을 잇는 다리를 건너려 하지 않았다. 이곳이 바로 상상의 끝이자 세계의 끝이었다.

 

 

 

-공 박사는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다. 머릿속 설계도엔 아직 읽어야 할 내용이 남아 있었다.

"공포란 인간의 욕망과 여러모로 비슷하지. 공포가 공포를 낳는 것처럼 욕망이 욕망을 낳는다네. 내가 공포를 이용했다면 자네는 욕망을 이용한 거야. 허물을 벗고자 하는 욕망. 그게 죄라면, 자네와 내가 저지른 죄의 무게는 비슷한 걸세."

스포는 아니고 책의 목차만 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주인공들은 엄청나게 큰 뱀을 만나고 사람들은 롱롱이라고 믿고 싶고 그 롱롱은 프로틴을 먹고 만든다.

마지막 챕터의 제목이 조금 특이한데 "뱀"이다.

'롱롱'이라는 전설 속 이름, 고유명사ㄹ에서 그저 하나의 흔한 파충류 단어에 지나지 않는 '뱀'으로 돌아온 것이다.

허물을 벗고자 하는 욕망이 주인공과 그 주변 사람들에게 '롱롱프로틴'이라는 새로운 제품을 만들 힘을 주었고 이번에는 모든 걸을 잃는다고 해도

우리 롱롱이(진짜 롱롱이인지는 직접 책을 통해) 큰 뱀을 구하려고 뛰어든다.

어딘가 부족하고 모자르고 평범한 사람들이 모여서 만들어가는 소설을 참 좋아한다.

바로 이 <소원을 말해줘>도 그런 책 중 하나인데 결국 소원이라는 것은 D동 사람들에게 단 하나의 희망이다.

가만히 가만히 있던 사람들이 한번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 겉잡을 수 없다.

약을 먹고 기운을 못차리고 가만히 있던 '롱롱'이도 갑자기 변하게 되는 모습도 그렇다.

변하고 싶을 때, 다른 삶을 살고 싶다고 느껴질 때 이 책을 만난다면 우린 모두 소원을 빌고 변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래서 허물과 롱롱이와 주인공들은 과연 소원을 이룰 수 있을까.

악역을 맡고 있는 공 박사는 신약 개발에 성공했을까.

이길 수 없는 싸움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삶이 여기 있다.

*이 글은 다산북스로부터 도서만을 제공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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