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언 반스의 아주 사적인 미술 산책
줄리언 반스 지음, 공진호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정말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명, 줄리언 반스.

2011년 맨부커상을 수상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작품으로 처음 알게 되었는데 치밀한 심리 묘사와 독특한 반전까지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리고 <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법>,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에세이도 줄리언 반스만의 웃긴 포인트와 시니컬함이 가득해서 진짜 좋아한다.

드디어 이번에는 그림 컬렉션이자 미술 에세이로 돌아왔다!

역시 이 책에도 줄리언 반스만의 매력이 가득하다.

예술에 대한 박학다식함은 물론이고 고전 작가들에 대해 일침을 놓는 자신만의 감상평, 그러면서도 겸손하고 웃긴 섬세함까지.

역시 글 잘쓰는 사람은 그림도 잘 본다. 촉수가 예민해서 그런가?

줄리언 반스가 가진 인사이트를 나누고 싶은 마음으로 아주 사적인 미술 산책을 같이 걷는다.

목차

1. 제리코 : 재난을 미술로

2. 들라크루아 : 얼마나 낭만적인가

3. 쿠르베 : 그렇다기보다는 이렇다

4. 마네 : 글로 보기

5. 팡탱-라투르 : 정렬한 사람들

6. 세잔 : 사과가 움직여?

7. 드가 : 그리고 여자

8. 르동 : 위로, 위로!

9. 보나르 : 마르트, 마르트, 마르트, 마르트

10. 뷔야르 : 에두아르라고 불러주세요

11. 발로통 : 나비파의 이방인

12. 브라크 :회화의 심장부

13. 마그리트 : 새 대신 새알

14. 올든버그 : 물렁한 것의 유쾌한 재미

15. 이것은 예술인가?

16. 프로이트 : 일화주의자

17. 호지킨 : H.H.에게 말이란

 

 

 

 

"미술은 단순히 흥분을, 삶의 전율을 포착해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미술은 바로 그 전율이다."

 

 

-1964년 여름,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에 진학하기 전 파리에서 몇 주를 보내면서 비로소 나는 내 자유의지로 그림을 보기 시작했다. 루브르 박물관에도 분명히 가봤을 테지만, 정작 내게 가장 깊은 인상을 준 곳은 크고, 어둡고, 인기 없는 어떤 다른 미술관이었다. 아마 거기엔 관람객이 나뿐이라, 특정한 방식으로 반응하게 하는 모방 압력이 없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곳은 생라자르역 근방의 귀스타브 모로 미술관이었다.

-어두운 조명 아래 바닥부터 천장까지 그림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고, 서랍장들의 납작한 서랍들 속에 보관된 수백 장의 스케치를 관람객이 직접 열람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나는 그 전까지 한 번도 모로의 그림을 의식적으로 본 적이 없었고, 그에 관하여 아는 것도 전혀 없었다 (그러니 플로베르의 전적인 찬탄을 받은 당대 유일의 화가였다는 사실을 알 리도 만무했다). 이국적이고, 보석투성이에, 음침하게 화려하고, 내가 해독할 수 없는 개인적 상징과 일반적 상징의 기묘한 혼합이 담긴 그런 작품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나는 알지 못했다. 바로 그 신비성이 나의 마음을 끌었는지 모르겠다. 누가 시킨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만큼 더 모로를 찬탄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확실한 것은, 내가 기억하는 한 바로 거기서 생전 처음으로, 내가 그림 앞에 소극적이고 순종적으로 서 있지 않고, 그것을 의식적으로 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내가 모로를 좋아한 또 한 가지 이유는 그의 기묘함 때문이다. 그림을 의식적으로 보기 시작한 초기에는 변화의 힘이 있는 작품일수록 더 내 마음을 끌었다. 그뿐 아니라 나는 미술 작품이란 바로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물을 취해 천부의 재능으로 신비스러운 어떤 더 강렬하고, 되도록이면 더 이상한 다른 무언가로 변질시키는 것.

-'의식적인 보기'의 과정

-어린 시절 우리 집에 걸려 있던 그 누드화의 밋밋함에 대해 내가 느꼈던 바가 옳았다면, 미술의 엄숙함에 대한 나의 추론은 틀렸다. 미술은 단순히 흥분을, 삶의 전율을 포착해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미술은 가끔 더 큰 기능을 한다. 미술은 바로 그 전율이다.

세상에. 서론도 이렇게 좋다니.

혹시 서론을 스킵하고 바로 책의 1장부터 들어가는 사람이 있다면 붙잡아놓고 서론부터 함께 읽고 싶다.

우연한 계기로 우연한 그림 앞에 서게 되어 그 그림의 유명세나 작가의 배경 없이 오롯이 그림 자체만으로 경이로움을 느끼게 된 순간이다.

첫 순간. 그때부터 '의식적으로 보기' 시작했다는 말이 참 좋았다.

그림이나 책, 음악의 공통점이 있다면 언제 만났는지가 중요하다는 거다.

내 나이, 그 날의 날씨, 해가 뜨고 지는 시간, 내가 처한 상황, 누구와 함께 있었는지 등... 언제 만났는지가 그림에 대한 첫 인식을 만들어준다.

그리고 그 감상은 시간이 지나도 지속되고 기억 속에 낙인된다.

줄리언 반스는 그동안 미술관이나 전시회에 가서 그동안 큰 감흥을 못느끼다가 바로 이 의식적인 순간을 처음으로 만났다고 겸손하게 표현했는데,

그 '귀스타브 모로'의 작품을 만나기 전 아마 수 많은 안목들을 쌓았기에 가능했으리라.

그래서 나는 오늘도 좋은 인풋을 마구마구 넣는다! 줄리언 반스의 멋진 감상처럼.

그리고 미술은 삶의 전율을 포착해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미술은 바로 그 전율 자체라는 표현도 너무 좋다. 전율을 느낄만큼!

그림이 단순 묘사와 기교를 넘어 전율이 되기까지 내 인생에 얼마나 많은 작품, 많은 작가, 많은 사람들, 많은 일들이 있을까.

누가 아무리 좋고 유명하다고 말해도 결국 내 마음속에 꽂히는 단 하나의 작품은 나에게만이 걸작이다.

때론 이유가 너무 많아서 좋고, 때론 어떤 이유도 없이 그냥 좋기도 하다.

내 마음을 두근거리고 전율을 일으키는 것들을 많이 만나고 싶다.

 

 

 

 

 

 

마네: 블랙, 화이트

b) 적을수록 강력하다

-우리가 명화 한 편을 감상하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10초나 30초? 아니면 꼬박 2분? 중요한 화가의 전시회에는 300점을 거는 것이 표준이 되어 있는데, 그러면 그런 곳에서는 좋은 그림 한 점을 감상하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일까? 그림 한 점에 2분을 쓴다면 300점을 모두 보기까지 열 시간이 걸린다. 마티스나 마그리트나 드가의 전시회에 가서 열 시간 동안 그림을 본 사람 있으며 손 들어보세요. 나는 그런 적이 없다. 물론 우리는 골라 섞는다. 눈이 먼저 관심을 끄는 것(또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을 가려낸다.

-하지만 우리는 관람객이 적은 작은 전시회에서 더 큰 만족을 얻을 수 있으며, 종종 한 화가의 그림을 많이 보기보다는 적게 볼수록 그에 대해 더 잘 이해하게 된다는 증거가 꽤나 많다.

-지난 30년간 내가 본 전시회 가운데 가장 좋았던 것은 1993년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서 열린 것이었다. 이 전시회는 여섯 개의 전시실을 차지했지만 중요한 것은 단 한 점의 그림, 아니 그보다는 단 하나의 소재였다. 마네의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이 바로 그것이다. 특정한 시대의 분위기를 살린, 목적이 뚜렷한 이 전시회는 1883년 마네의 사후 처음으로 그가 그린 세 가지 다른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을 한데 모았다. 하나는 치밀하지 못한 붓질, 어두운 색, 챙 넓은 모자가 가득한 맨 처음 그림으로, 보스턴 미술관에서 가져온 것이다. 다른 하나는 조각난 그림으로 런던 내셔널 갤러리의 소장작이다. 마지막 하나는 가장 잘 알려진 그림, 만하임 미술관의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두 그림에서 이상한 힘이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 힘은 발에서부터 나온다. 고야의 <1808년 5월 3일>에서 총살 집행 부대의 자세는 중대한 요소다. 튼실한 발목, 고정된 무릎, 전문가 다운 올바른 각도로 몸을 지탱하고 있는 뒷다리 따위가 그 자세인데, 여기에는 나폴레옹의 군사훈련 방식이 반영되어 있다.

-둘째와 셋째 그림에서도 그는 똑같이 우리의 주의를 끌지만, 첫째 그림보다는 중심점이 훨씬 미묘하다. 하사관은 처형에 신경을 쓰는 것도 아니고 나 몰라라 하는 것도 아닌 모습으로, 총을 쏘는 부대원들과 90도 각도를 이룬 채 서 있다. 관객인 우리에게도 관심이 없다.

-발등과 발목을 덮는 각반이 보이지 않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관람객의 눈길이 발 때문에 산만해지면 안 된다는 뜻이다 (셋째 그림에서는 발 부분의 바탕색을 어둡게 해서 발이 두드러지지 않게 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하사관이 공이치기 당기는 일에 열중하듯 그림에 열중할 수 있다.

-되찾을 수 없는 진실이 무엇이든,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의 검열이 끼친 영향은 오늘날까지도 계속해서 작용하며 후대의 이해를 가로막는다. 문제는 그림만 억압을 받은 것이 아니라, 마네가 이 그림을 보여주려 했던 당대의 사람들, 이 그림을 어떻게 보는 게 가장 좋을지 우리에게 알려줄 수 있었을 그들의 반응도 억압당했다는 사실이다. 반응에 대한 자료가 부재하기에, 오늘의 관람객들에게 이 그림은 더욱 분명하지 않게 되었다. 보다시피, 검열은 언제나처럼 성공한 셈이다.

마네의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

이 작품은 고야의 <1808년 5월 3일>(1814)에 영감을 받아 그린 작품인데 줄리언 반스의 글을 읽기 전까지 3가지 버전과 시기의 작품이 있었는지 처음 알았다. 그리고 각각의 화풍과 변화가 어떻게 일어났는지도.

아마 마네의 <막시밀리언 황제의 처형>을 가지고 이렇게 다양한 관점과 몰입하는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줄리언 반스가 유일무이할꺼다.

덕분에 나도 마네의 몰랐던 작품을 사랑하게 되었다.

지나가면서 이 작품을 봐도 유명하다고만 기억하고 넘어갔을텐데, 이제 오늘부터 보게 되는 <막시밀리언 황제의 처형>은 어제까지 본 <막시밀리언 황제의 처형>과는 다르다.

그리고 작품 한 점을 정말 크게 쳐줘서 2분 씩 시간을 배정한다고 한다면 한 전시회에 가서 약 10시간이라는 어마어마한 시간을 보내야 한다고 친절하게 계산도 해줬다. ("그런 사람 있으면 손들어보세요.나는 그런 적이 없다." 라는 말도 너무 웃긴다)

어떤 미술사 책에서 작품을 진정으로 감상하려면 하루에 단 하나의 작품만 1분이고 10분이고 1시간이고 계속 보라는 글을 봤었다.

그럼 계속해서 보이는 게 달라지고 느낌이 달라지고 인식이 달라지 그림의 의미가 달라진다.

한 작품에 2분도 사실 꽤 긴 시간인데 하루에 10시간이라니.

그리고 아마 우리나라에서는 힘들 것 같다.

주말에 전시회에 가면 유명 작가의 내한 작품의 경우, 다같이 한 줄로 줄을 서서 차례차례 펭귄처럼 그 앞을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무리로 지나갈 수 밖에 없는 특이한 동선이 만들어지니까.

(앤디 워홀 전시회 마지막 날, 나는 여기가 진짜 롯데월드인줄 알았다.)

그래도 그게 책이든, 인터넷이든, 유튜브로 보든 한번 해봐야겠다.

그럼 줄리언 반스가 말한 1가지 소재의 3가지 그림에서 발견한 미묘하지만 거대한 차이처럼 나만의 감상법이 만들어지겠지.

이번 <줄리언 반스의 아주 사적인 미술 산책> 책 표지도 참 마음에 든다.

명화의 한 장면을 그림 프레임에 넣었는데, 책 표지를 벗기면 진짜 그림의 한 장면, 그것도 턱을 괴고 있는 남자를 중심으로 살짝 미소 짓고 있는 턱수염이 있는 남자, 마지막으로 어딘가를 응시하며 사색에 잠긴 남자가 나타난다,

맨 뒤에는?

내가 인상 깊게 밑줄 그은 구절이 하나의 메시지로 써있다.

"미술은 단순히 삶의 전율을 포착해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그 전율이다"

한 작가의 하나의 작품에서도 이렇게 말할 거리들이 많다.

그리고 줄리언 반스는 그림-작가-시대(현재와 미래 모두)-화풍 등 연관된 것들을 모으고 잇고 연결하면서 새로운 관점들을 계속해서 제시해준다.

나도 그림을 이렇게 보고 싶어졌다.

그림을 잘 모르지만, 미술을 잘 모르고 예술을 잘 모르지만 그것이 내게 전율이 될 때까지 해봐야겠다.

*이 글은 다산책방으로부터 도서만을 제공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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