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름 예찬 - 숨 가쁜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품격 있는 휴식법
로버트 디세이 지음, 오숙은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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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긋하게 있을 때 우리는 가장 치열하고 유쾌하게 인간다울 수 있다."

 

게으르고 편안하고 내려놓고 자연스럽게 사는 삶의 예찬.

<게으름 예찬>은 아주 멋있는 로버트 디세이가 쓴 삶의 연륜이 느껴지는 책이다.

오스트레일리아의 러시아 문학 연구자, TV프로그램 진행자, 소설가, 에세이스트라는데 다양한 직업만큼이나 많은 경험을 한 작가라는 게 느껴진다.

제목만 보면 한없이 축 처져서 나무늘보처럼 살았을 것 같지만 천만의 말씀.

누구보다 치열하고 바쁘고 여유없이 산 저자는 이제서야 삶을 돌아보는 여유가 생겼다.

그래서 우리에게 게으름의 즐거움, 기쁨, 예찬을 함께 나눈다.

"느긋하게 있을 때 우리는 가장 치열하고 유쾌하게 인간다울 수 있다"는 말이 참 좋다.

느긋과 치열이라는 역설적인 두 개를 붙여놔서 새로운 관점으로 볼 수 있고

각각의 의미들을 곱씹어 볼 수 있었다.

너무 빠른 세상, 너무 바쁜 세상 사람들.

한 템포 쉬어가면서 <게으름 예찬>을 읽었는데 바쁜 지하철과 일정 속에서 가만히 여유를 느낄 수 있어 참 좋았다.

삶이 팍팍하고 숨 막힐 듯이 초 단위 업무들로 치일 때 오히려 여유를 가져야겠다고 다짐, 또 다짐!

나는 빈둥거리며 내 영혼을 초대한다.

나는 한가로이 기대이며 헤매이며 여름 풀의 이파리를 바라본다.

-윌트 휘트먼, <나 자신의 노래> (1855)

매일 아침 우리 앞에 열리는

시간이라는 거대한 방에 들어갈 방법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시간이 마치 아침 햇빛, 첫 새소리와 함께

들어와 말하는 것 같다.

이보게, 이 빈 바닥을 덮을 것을 찾게,

어떤 수를 쓰든 저쪽으로 건너가게.

-로리스 에드먼드, <타이밍의 문제> (1966), <북쪽으로 가기>

 

 

 

모든 사람은 게으름뱅이거나 게으름뱅이가 되기를 원한다

-식사 후에 그들이 하는 것, 우리가 하고, 당신이 하고, 내가 하는 그 모든 것이 바로 여가다. 이것을 라틴어로는 오티움(여가, 휴식)이라고 한다. 네고티움(일,활동)은 그 반대다. 인간은 모든 사냥과 채집 활동, 즉 네고티움을 인생의 중간에 몰아넣은 채로 빈둥거리고 깃들이고 재미있는 것, 즉 오티움을 즐기기 위한 시간은 고작 마지막 몇 년만 남겨두니 딱한 일이다. 반대로 개는 일은 전혀 하지 않으면서 끝없이 자고 짧은 시간 열정해서 노는 경향이 있다. 이 책은 그 균형을 찾아 보자고 호소하는 맑은 소리가 되고자 한다.

-내가 지금 이해하기로 여가란, 결코 물질적 이익을 바라지 않고 (설사 그것이 결국엔 우리는 물론 타인에게 실질적 도움이 된다고 해도) 순전히 그 즐거움을 위해서 자유로이 선택한 것, 빈둥거리고, 깃들이고, 단장하고, 취미 활동을 하는 등 광범위한 영역을 두루 아우를 때 쓰는 단어다. 여가를 누릴 때에는 가치보다는 기교가 훨씬 중요하다. 현명하게 선택한 여가는 아무리 짧은 삶에도 깊이를 준다. 느긋하게 있을 떄 우리는 가장 치열하고 유쾌하게 인간다울 수 있다.

무위도식에 바치는 찬사

-안개의 문제는 그것이 기분 좋게 느껴지려면 언제쯤 걷힌다는 전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저 안개에 완전히 에워싸여 있다. 그 두텁고 고요한 흐름 속을 응시한 나는, 오카쿠라 선생의 충고에 따라 안개의 초대를 받아들이고 저 너머에 있는 것을 상상해보려고 애써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 아름다움은 완벽함에서 발견되는 게 아니라 불완전함을 마주한 상상 놀이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아름다움은 완성이 아니라 완성의 행위 속에 있다.

나는 그 말뜻을 알 것 같지만, 그래도 안개가 걷히면 좋을 것 같다.

게으름은 무엇이고 여유는 무엇일까? 바쁨은 무엇이고 일은 무엇일까?

그저 시간이라는 관념 속에서 생각하는 게 아니라 내가 있는 위치, 상황, 마음을 돌이켜볼 수 있었다.

<게으름 예찬>을일고 지금은 슬라보예 지젝과 몇 명의 철학자가 함께 쓴 <매트릭스로 철학하기>를 읽고 있는데, 구부러진 건 숟가락이 아니라 내 마음이라는 표현이 참 와닿았다.

여유있고 바쁜 건 상황보다는 내 마음에 따라 달려있다.

그래도 힘들도 바쁜 건 여전하지만 조금 더 마인드컨트롤하면서 게으름을 예찬해봐야지.

벌써 유행한지 꽤 된 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욜로!

YOLO, You only live once!

아마 무한도전에 나와서 한참 유행했던 것 같은데 미드를 보다보면 아주 예전에 유행한 단어라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보다보면 욜로~ 참 많이 나온다.

인생은 한번뿐이니까 지금, 현재의 자신을 중시하는 태도와 소비 문화라는데 어느 순간 광고문안에 다 들어가면서 소비조장 풍토로 느껴지게 되었다.

지금, 현재를 중시하는 건 참 좋다. 나도 동감하고.

하지만 마치 내일이 없이 살자는 느낌보다는 <게으름 예찬>처럼 나중을 위해, 완벽할 때 미뤄두지 말고 지금의 여유와 행복을 갖자는 시선으로 바라보면 어떨까 느끼는 요즘이다.

 

 

 

 

 

꼼짝하지 않은 채 모험하기

-나는 내가 무감각을 떨쳐버리기 위한 오락거리로 책을 읽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책을 읽는 건 세상을 보는 방식에 어떤 참신함을 회복하기 위해서, 아마도 내 감수성을 갈고닦기 위해서지 단순히 무감각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요즘 아주 가끔은 내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해서, 타인의 눈으로 세상을 보거나 정신 고양을 위해서 책을 읽기도 한다.

-요즘 내가 독서를 하는 이유는 대체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다. 꼼짝도 하지 않은 채로 모험을 하기 위해서...

내가 독서를 하는 이유는 '많은 사람이 되어보기 위해서...' 라고 말할 생각이었지만, 아마도 '더 많은 측면에서 나 자신이 되기 위해서'라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 같다. 더 과감하고, 더 다채롭고, 더 솔직하고, 더 교활하고, 더 깊고 다면적인 나 자신 말이다.

-독서에는 영화를 보는 일보다 더 많은 것이 개입되는데, 훨씬 더 많은 상상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활짝 펼친 상상력은 하루를 천 년처럼 만드는 힘이다. 시인 키츠는 동생 조지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내 상상력이 강해질수록 내가 단지 이 세계가 아닌 천 개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날마다 새록새록 든다..."

-독서는 당신이라는 만화경을 흔드는 것과 같다. 그 안의 유리 조각들은 예의 똑같은 유리 조각이지만, 무언가가 그것들을 재배열해서 형태를 바꾼다. 당신은 새롭게 자신을 느끼며 자신이 재발견되었음을 깨닫는다. 일상의 자신이라는 감옥에서 해방되었다고 말이다. 결국 독서는 사실상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무언가를 하는 가장 멋진 방법이다.

맞다, 독서는 정말 그렇다!

독서는 꼼짝하지 않은 채 모험하는 거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무언가를 하는 가장 멋진 방법이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쓴 책에 대한 책을 좋아한다.

그리고 <게으름 예찬>에도 게으르게 살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도 멋진 독서를 말해주었다.

내가 책을 읽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다양한 삶을 살아보고 싶기 때문이다.

다양한 경험, 여러 명의 삶, 다른 사람의 관점을 배우고 싶고 그렇게 살고 싶은데 로버트 디세이 말처럼 결국 그건 '더 많은 측면에서 나 자신이 되기 위해서'일까?

너무나 다양한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그럴수록 격하게 내가 되는 건지 갑자기 문득 생각이 들었다.

치열하게 나를 파고드는 것도 괜찮겠지.

실존적인 질문까지 하게 만드는 '게으름'이다.

 

 

 

 

-페트라르카는 방투 산의 정상에 올라 고해신부에게 쓴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산꼭대기에 서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속의 충동에서 솟아나는 그 욕구들을 발밑으로 짓밟기 위해서 우리는 얼마나 진지하게 노력해야 할까요." 실제로 편지 뒷부분에서 그는 고해신부에게, 마당히 오래전에 이미 영혼 외에는 "훌륭한 것"이 없으며, 영혼은 "그 자체가 위대하다면 영혼 외의 어떤 것도 위대하지 않다"는 것을 배워야 했건만 여전히 세속의 것을 찬양하는 자신에게 화가 난다고 털어놓는다. 물론 그런 동기의 중심에는 기본적으로 여전히 즐거움이 있다. 자유로이 그 동기를 선택했다면 진지한 동기는 여가와 완벽하게 양립할 수 있다. 페트라르카는 여가를 탐닉하고 있었는지 몰라도, 거의 아무것도 안 하고 있던 건 아니었다. 그가 하고 있던 것이 무엇이든 간에, 빈둥거리기가 아니라는 건 확실하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나는 무슈 귀스타브가 로비 보이 제로에게 했던 말, 무엇을 하든 아무 소용이 없다던 말을 생각하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눈 깜짝할 사이에 전부 끝나거든... 그러고 나면 사후경직이 시작되지." 바쁜 남자가 할 법한 그런 말이다. 봄날의 말벌처럼 바빴던 무슈 귀스타브는 좀 더 빈둥거렸어야 했다. 그랬다면 그가 미처 삶을 알기도 전에 삶이 날아가버리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쨌거나 하는 일이 적을수록 시간은 더 천천히 지나간다. 언젠가 괴테는 '게으름'은 시간을 참을 수 없이 길게 만들지만, '일하는 것'은 시간을 짧게 만든다고 했다. 그래, 그렇다면 결국엔 사후경직이 찾아오리라. 그건 사실이지만, 그게 꼭 눈 깜짝할 사이는 아니다. 제로도 같은 결론에 도달했나보다. 우리가 마지막에 본 그는 노인이 되어서 자신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한가운데 있는 스파 욕조에서 행복하게 빈둥거리고 있다.

말할 필요도 없지만, 당신은 게으름을 피우기 위해서 행복해야 한다. 행복하기 위해 게으름을 피워야 하는 게 아니다. 무슈 귀스타브가 진정 행복한 사람이었는지 의심스럽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는 바로 바로 바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다 ㅎㅎ

웨스 앤더슨을 좋아하고 감독의 아름다운 색감, 경치, 그리고 절대 빠질 수 없는 좌우대칭 비율까지!

아기자기 보는 맛도 있고 쌩뚱맞은 구성도 너무 좋다.

<게으름 예찬>에는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종종 언급한다.

나는 보면서 쫓고 쫓기는 귀여운(?) 추격전이나 죽음과 관계 대한 가벼움, 그리고 지배인 무슈 귀스타브가 어린 로비 보이 제로에게 들려주는 삶의 무거운 이야기들을 느꼈는데 로버트 디세이처럼 게으름이라는 관점에서도 볼 수 있겠구나.

사교생활과 일로 바쁜 무슈 귀스타브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행복하게 빈둥거리는 제로와 참 대조적이다.

누가 더 행복할진 알 수 없지만 저자는 이런 말을 하나 훅 던져준다.

"당신은 게으름을 피우기 위해서가 행복해야 한다. 행복하기 위해 게으름을 피워야 하는게 아니다."

앞 뒤를 바꿔서 그 의미를 다시 읽고 또 읽어보고 있는데 진정한 게으름은 어디에서 나오는지 종종 생각해봐야겠다.

*이 글은 다산초당으로부터 도서만을 제공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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