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10월 5일 서울 종로 3가 보영빌딩 2층. 여기에 민통련(의장 문익환 목사) 사무실이 있었다. 그날 오전과 오후 양김씨(김영삼.김대중)가 차례로 찾아왔다. 정책질의회, 사실상 대통령 후보 면접시험을 보기 위해서다.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이뤄지자 양김씨는 서로 후보가 되겠다고 고집했다. 그러자 재야단체가 심판을 자임한 것이다. 양김씨도 받아들였다.
그보다 한 달 전 서울 합정동 마리스타 수도원에 국민운동본부 대표 50여 명이 모여 교황 선출처럼 끝장을 보려 한 적이 있었다. 6.10 대회를 이끈 조직이다. 그러나 결론을 내지 못했다. 그 뒤 거듭된 회의에서도 진척이 없었다. 재야는 내분에 휩싸였다.
그때 민통련이 중앙집행위를 열어 김대중씨를 지지하기로 결정했다. 소속 단체들이 반발했다. "목표가 군정 종식이지 특정 후보 지지냐"고 했다. 그러자 정책 평가를 명분으로 내걸었다. 결과는 김대중씨 지지. 종교단체도 지지대열에 참여했다. 그 뒤 김대중씨의 평민당에는 민통련 인사들이 대거 입당했다. 이해찬 전 총리, 임채정 국회의장 등이다. 김영삼씨가 수긍할 리 없었다. 그 후유증은 깊고 오래갔다. 재야는 세 조각으로 갈라졌고, 도덕적 정당성은 크게 훼손됐다. 지역이 한국 정치의 가장 중요한 변수로 자리를 굳혔다.
최근 일부 종교계 인사들이 다시 대통령 후보를 만들겠다고 한다. 소위 범여권의 단일후보를 내세우겠다는 것이다. '대통합 원탁회의'라는 걸 추진한단다. 원탁은 5~6세기 영국의 아서왕이 기사들의 우위 다툼을 막으려고 고안한 것. 참가자들이 지위와 관계없이 동등한 자격으로 발언할 수 있다. 결국 종교인들이 정치판의 한 당사자로 끼어들겠다는 말이다. 민심이나 당심보다 신의(神意)가 앞선다는 뜻인가.
종교의 현실 정치 개입은 오랜 숙제다. 사흘 동안 눈밭에서 교황의 용서를 빈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의 '카노사의 굴욕', 해방신학의 총을 든 신부 등 무수한 논란이 이어져 왔다. 신정(神政)국가가 아닌 한 정교(政敎) 분리가 원칙이다. 다만 부정과 탄압, 독재와 불관용에 저항하는 보편적 가치의 수호는 용인되는 편이다.
종교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해석해도 지금은 20년 전과 다르다. 총칼로 정권을 잡은 군사정부의 억압도, 후보 난립으로 반인권 정권이 연장될 두려움도 없다. 국민의 정당한 의사 표현이 부당하게 제약되는 것도 아니다. 정작 민심은 그들의 목소리와는 다른 것을 원하고 있는 건 아닌지.
김진국 논설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