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단식 광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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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한(漢) 왕조를 전후로 가르는 신(新)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겨우 15년을 버틴 이 나라를 세운 왕망은 공승이란 선비에게 고위직을 주려 했다. 예를 갖춰 무려 1000명이 넘는 관리들이 함께 찾아갔지만 공승은 병을 핑계로 문을 열지 않았다. 그런데도 닷새에 한 번씩 계속 찾아오자 공승은 "한 몸으로 두 성(姓)의 황제를 섬길 수 없다"며 입을 다물고 일체의 음식을 먹지 않았다. 결국 14일 만에 숨을 거뒀다. (사마광, '자치통감') 황보밀의 '고사전(高士傳)'은 팽성노부가 "아, 향초는 향기 때문에 자기를 태우고, 기름은 밝음 때문에 자신을 녹이는구나…"라고 곡을 했다고 전한다.

유교에서는 단식을 선비의 고결한 저항 수단으로 존중했다. 주나라의 곡식은 먹지 않겠다며 수양산에 들어가 굶어 죽은 백이.숙제(伯夷叔齊)의 전통이다. 나라를 곧 왕의 소유로 생각했던 왕조 시대에 무력 이외에 저항할 방법이 그것밖에 더 있었겠는가.

최익현 선생은 74세에 의병을 일으켜 쓰시마에 잡혀가자 "원수의 밥으로 연명하랴"며 곡기를 끊어버렸다. 아일랜드공화군(IRA)의 보비 샌즈는 66일간의 단식 끝에 목숨을 버렸고,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는 무려 14번이나 단식을 했다. 전두환 정부에서 김영삼씨가 할 수 있는 것도 죽음을 건 단식밖에 없었다.

단식은 무력 이상의 저항 수단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건 죽음과의 대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은 단순히 자신 주장을 드러내기 위해서도 단식을 한다. 목숨을 건 시늉은 부정직하지만 정말 생명을 거는 일은 더욱 용납하기 어렵다. 민주화된 사회라면 정상적인 소통이 이뤄져야 한다. 그 길이 열려 있다면 자기 목소리만 크게 들리게 악을 쓸 일이 아니다.

최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반대하는 정치인들이 단식을 벌였다. 집권당과 정부에서 요직을 지내고, 대통령 후보로 나서겠다는 사람들이다. 얼마든지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들이다. 협정안에 최종 동의할 권한도 그들이 쥐고 있다. 결국 잘 먹고 잘살자고 하는 정치가 고작 밥을 굶는 것일까. 힘없는 서민에게는 더 극단적인 방법을 부추기게 된다.

카프카의 단편 '단식 광대'는 단식하는 것을 보여줘 생업으로 삼는 광대 이야기다. 열광했던 관객들의 관심이 시들해졌을 때 그 광대는 이미 음식의 맛(진실)을 잃어버리고 죽음에 이르러 있었다. 생명을 흥행 수단으로 삼아 진실에 눈을 감는 단식 광대는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다.

김진국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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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헬로 키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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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캐릭터 강국이다. 시장 규모가 2조 엔을 넘는다. 캐릭터 산업은 일본이 미국에 이어 대중문화 강국 2위에 오르게 한 힘이기도 하다. 전 세계 어린이들이 포케몬.도라에몽.세일러문 같은 일본 캐릭터들과 함께 자란다.

'헬로 키티'는 일본 캐릭터 산업 1세대다. 일본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번 캐릭터이고, 세계적으로도 5위 안에 든다. 산리오사가 키티로 벌어들이는 수입이 연간 5억 달러다. 라이선스를 얻은 40여 개국 기업의 매출까지를 포함하면 매년 수십억 달러를 벌어들인다. 관련 상품이 2만여 종이고, 일본에 두 개의 테마파크가 있다.

키티는 1974년 도쿄 출생이다. 극도로 단순한 디자인으로 귀여움의 상징이 됐다. 애니메이션이나 만화에서 온 다른 캐릭터들과 달리 '원전' 없이도 33년을 살아남았다.

'헬로 키티 감성마케팅 전략'은 키티의 인기를 '귀여움의 숭배'라는 일본 문화와 연관시킨다. 귀여움에 대한 열광은 대량 산업사회 삶의 비인격화에 대한 일본식 대응이라는 것이다. 이런 귀여움의 문화가 순종적 여성 이미지를 강요한다는 비판도 잇따른다.

70년대 키티의 이미지는 세계 경제를 위협하는 '경제 동물 ' 일본인이 세계에 보여지고 싶은 이미지이기도 했다. 그때까지 일본의 상징은 '고질라' 정도였다. 90년대 중반에는 크리스티나 아길레나, 머라이어 캐리, 타이라 뱅크스 같은 서구 톱스타들이 '키티 매니어'임을 고백해 열풍을 부추겼다. '아이처럼 귀엽게 꾸미는 문화'의 전 세계적 확산이다.

일본 전문가 더글러스 맥그레이는 2002년 외교 잡지 포린 폴리시에서 "키티는 일본의 문화적 영향력이 전 세계로 확산되는 증거"라며 "많은 국가가 자국의 고유 문화 쇠퇴를 염려하는 글로벌 시대에 일본의 문화적 능력 뒤에 감춰진 천재적 특질을 상징한다"고 썼다.

도쿄 외곽에 위치한 테마파크 '퓨로랜드'는 도쿄 디즈니랜드보다 규모는 작아도 더 많은 외국 관광객을 불러 모은다. 수많은 키티쇼가 펼쳐지고 온갖 상품이 판매된다. 일본이 최고의 문화상품으로 자부하며 해외 시장 공략에 열을 올리는 여성가극단 '다카라즈카' 공연도 빠지지 않는다.

앞의 책은 마이크로소프트사 빌 게이츠 회장이 56억 달러에 키티 브랜드 인수를 제안했었다고 밝힌다. 캐릭터의 무서운 힘과 가치다. 우리 캐릭터 산업은 어디쯤 와 있을까.


양성희 문화·스포츠부문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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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에어버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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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유신'의 삭풍이 한창이던 1973년 어느 날 조중훈 당시 대한항공 사장은 정권 실세한테서 뜻밖의 주문을 받았다. "프랑스와의 외교 문제 때문에 꼭 필요하니 에어버스 6대를 도입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난처했다. 세계 상용 항공기 시장은 미국 보잉의 독주 체제였다. 프랑스 등 유럽 몇 나라가 모여 항공기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성능이 괜찮은지, 안전하기는 한지 좀체 믿음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무소불위의 권력이 내세운 외교적 명분을 뿌리치기 힘들었다. 도입 기종을 실사한 기술진도 '쓸 만하다'는 의견을 냈다. 이래서 대한항공은 아시아 최초의 에어버스 고객이 됐다. 그해 10월 숙원이던 파리 취항 문제가 순조롭게 풀렸다. 조양호 한진 회장은 요즘도 에어버스 본사가 있는 프랑스 남부 툴루즈를 방문하면 국빈 대접을 받는다.

70년 창립한 에어버스는 프랑스.독일.영국.스페인 4개국 컨소시엄이라는 미증유의 실험이었다. 미국에 꿀리지 않으려고 67년 유럽공동체(EC)를 결성했듯 보잉이라는 거함에 맞서려면 강국들이라도 힘을 보태야 했다. 보잉도 잠자코 있을 리 없었다. 400석 넘는 B747, 일명 '점보' 제트기를 내놓아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는 40년 가까이 초대형 여객기 시장의 지존으로 군림해 왔다.

중.대형 기종을 집중 공략해 90년대 후반부터 보잉과 대등한 경쟁이 되는 듯싶던 에어버스가 근래 풍상을 겪고 있다. '점보'를 제압하려고 555석 규모의 '수퍼 점보' A380을 내놨다가 기체 결함 등으로 인도가 지연됐다. 세계 곳곳에서 계약 취소를 당하는 궁지에 몰렸다.

유럽연합(EU)을 배태한 로마조약 50주년(25일)을 맞아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광장의 축포는 요란했다. 하지만 거대 EU의 앞날 역시 A380처럼 불투명하다. '평화와 번영을 가능케'(메르켈 독일 총리) 할지, '타협과 화해가 어려운'(라미 EU 집행위원) 둔한 공룡이 될지 조망이 엇갈린다.

A380의 결함은 독일과 프랑스 경영.기술진 간의 의사소통 단절 때문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달 초 1만 명 감원 방침이 발표되자 서로 다른 나라에 고통을 더 분담시키려는 기색이 역력하다. '에어버스는 프랑스.독일 사업장으로 분사해야 산다'는 비관론까지 나온다. '하나의 유럽'을 상징한 에어버스의 향배는 27명의 사공이 타고 있는 'EU호'의 미래까지 점쳐 볼 수 있는 나침반이 되고 있다.

홍승일 경제부문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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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봄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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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한용운은 시에서 봄물과 사랑을 이렇게 견주었다. "봄물보다 깊으니라/ 갈산(秋山)보다 높으니라." 그래서 "사랑을 뭇너니 잇거든/ 이대로만 말하리"라고 읊었다.

김용택 시인도 '봄날'이란 시에서 "나 찾다가/ 텃밭에/ 흙 묻은 호미만 있거든/ 예쁜 여자랑 손 잡고/ 섬진강 봄물을 따라/ 매화꽃 보러 간 줄 알그라"고 했다.

봄물은 사전적인 정의에 따르자면 날씨가 따뜻해진 봄에 얼음과 눈이 녹아 흐르는 찬 물이다. 정서적으로 보는 봄물은 이보다 울림이 사뭇 크다. 얼었던 대지를 적시고 만물이 기운을 더하도록 만드는 생명의 신호와도 같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도 봄물은 문인들이 즐겨 읊던 소재였다. 남당(南唐)의 마지막 군주인 이욱(李煜)은 975년 나라를 빼앗기고 송(宋)에 항복한 뒤 포로가 됐다. 고국이 있는 난징(南京) 지역을 그리며 읊은 '우미인(虞美人)'이라는 사(詞)는 탁월한 시인으로 평가받는 그의 작품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힌다.

달 뜨는 밤, 봄바람 찾아오는 유폐지에서 눈물을 훔치던 그는 마지막에 스스로 묻고 대답한다. "그대 슬픔이 얼마나 되는지 아는가/ 온 강의 봄물이 동쪽으로 흘러가는 듯하네(問君能有幾多愁/ 恰似一江春水向東流)."

슬픔이 봄물처럼 흘러간다. 그런데 그 슬픔은 강 전체를 가득 채우고도 남는다. 하나라는 뜻의 '일(一)'이라는 글자는 단순한 숫자에 불과하지만 여기서는 전체를 뜻한다. 슬픔의 경계가 무한으로 커진다. 모든 것을 부풀리는 봄물의 상징성과 강물 가득하다는 크기의 형용이 섞여 큰 공명(共鳴)을 주는 대목이다. 대만의 국민 가수로 불리는 덩리쥔(鄧麗君)은 이를 노래로 불렀고, 빼어난 가창력 덕분에 중국권에서는 모르는 이 없을 정도의 가요가 됐다.

봄물은 이렇게 감정의 의탁(依托)이 쉬운 대상이다. 때론 생명의 환희를 주기도 하고, 애절한 사랑의 깊이를 견줄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할 수 있다.

이 얼음 녹는 물이 요즘엔 무섭다. 지구가 따뜻해지면서 북극에서 녹아드는 빙산이 장난 아니다. 10년 주기로 3~4% 줄어들었던 빙산이 21세기 들어서는 8%로 많아졌다. 올해에도 북반구에 봄이 다가오면서 해빙기에 접어든 북극의 빙산은 더 빠르게 녹아내릴 전망이다. 남극의 빙벽도 마구 무너진다. 화석 에너지 과소비가 낳은 지구 온난화가 주범이다. 공해와 자원 낭비라는 단어를 떠올려야 하는 얼음 녹는 시절. 이 봄이 참 스산하다.

유광종 국제부문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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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정치와 종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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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10월 5일 서울 종로 3가 보영빌딩 2층. 여기에 민통련(의장 문익환 목사) 사무실이 있었다. 그날 오전과 오후 양김씨(김영삼.김대중)가 차례로 찾아왔다. 정책질의회, 사실상 대통령 후보 면접시험을 보기 위해서다.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이뤄지자 양김씨는 서로 후보가 되겠다고 고집했다. 그러자 재야단체가 심판을 자임한 것이다. 양김씨도 받아들였다.

그보다 한 달 전 서울 합정동 마리스타 수도원에 국민운동본부 대표 50여 명이 모여 교황 선출처럼 끝장을 보려 한 적이 있었다. 6.10 대회를 이끈 조직이다. 그러나 결론을 내지 못했다. 그 뒤 거듭된 회의에서도 진척이 없었다. 재야는 내분에 휩싸였다.

그때 민통련이 중앙집행위를 열어 김대중씨를 지지하기로 결정했다. 소속 단체들이 반발했다. "목표가 군정 종식이지 특정 후보 지지냐"고 했다. 그러자 정책 평가를 명분으로 내걸었다. 결과는 김대중씨 지지. 종교단체도 지지대열에 참여했다. 그 뒤 김대중씨의 평민당에는 민통련 인사들이 대거 입당했다. 이해찬 전 총리, 임채정 국회의장 등이다. 김영삼씨가 수긍할 리 없었다. 그 후유증은 깊고 오래갔다. 재야는 세 조각으로 갈라졌고, 도덕적 정당성은 크게 훼손됐다. 지역이 한국 정치의 가장 중요한 변수로 자리를 굳혔다.

최근 일부 종교계 인사들이 다시 대통령 후보를 만들겠다고 한다. 소위 범여권의 단일후보를 내세우겠다는 것이다. '대통합 원탁회의'라는 걸 추진한단다. 원탁은 5~6세기 영국의 아서왕이 기사들의 우위 다툼을 막으려고 고안한 것. 참가자들이 지위와 관계없이 동등한 자격으로 발언할 수 있다. 결국 종교인들이 정치판의 한 당사자로 끼어들겠다는 말이다. 민심이나 당심보다 신의(神意)가 앞선다는 뜻인가.

종교의 현실 정치 개입은 오랜 숙제다. 사흘 동안 눈밭에서 교황의 용서를 빈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의 '카노사의 굴욕', 해방신학의 총을 든 신부 등 무수한 논란이 이어져 왔다. 신정(神政)국가가 아닌 한 정교(政敎) 분리가 원칙이다. 다만 부정과 탄압, 독재와 불관용에 저항하는 보편적 가치의 수호는 용인되는 편이다.

종교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해석해도 지금은 20년 전과 다르다. 총칼로 정권을 잡은 군사정부의 억압도, 후보 난립으로 반인권 정권이 연장될 두려움도 없다. 국민의 정당한 의사 표현이 부당하게 제약되는 것도 아니다. 정작 민심은 그들의 목소리와는 다른 것을 원하고 있는 건 아닌지.

김진국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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