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에어버스 [중앙일보]

관련링크
'10월 유신'의 삭풍이 한창이던 1973년 어느 날 조중훈 당시 대한항공 사장은 정권 실세한테서 뜻밖의 주문을 받았다. "프랑스와의 외교 문제 때문에 꼭 필요하니 에어버스 6대를 도입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난처했다. 세계 상용 항공기 시장은 미국 보잉의 독주 체제였다. 프랑스 등 유럽 몇 나라가 모여 항공기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성능이 괜찮은지, 안전하기는 한지 좀체 믿음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무소불위의 권력이 내세운 외교적 명분을 뿌리치기 힘들었다. 도입 기종을 실사한 기술진도 '쓸 만하다'는 의견을 냈다. 이래서 대한항공은 아시아 최초의 에어버스 고객이 됐다. 그해 10월 숙원이던 파리 취항 문제가 순조롭게 풀렸다. 조양호 한진 회장은 요즘도 에어버스 본사가 있는 프랑스 남부 툴루즈를 방문하면 국빈 대접을 받는다.

70년 창립한 에어버스는 프랑스.독일.영국.스페인 4개국 컨소시엄이라는 미증유의 실험이었다. 미국에 꿀리지 않으려고 67년 유럽공동체(EC)를 결성했듯 보잉이라는 거함에 맞서려면 강국들이라도 힘을 보태야 했다. 보잉도 잠자코 있을 리 없었다. 400석 넘는 B747, 일명 '점보' 제트기를 내놓아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는 40년 가까이 초대형 여객기 시장의 지존으로 군림해 왔다.

중.대형 기종을 집중 공략해 90년대 후반부터 보잉과 대등한 경쟁이 되는 듯싶던 에어버스가 근래 풍상을 겪고 있다. '점보'를 제압하려고 555석 규모의 '수퍼 점보' A380을 내놨다가 기체 결함 등으로 인도가 지연됐다. 세계 곳곳에서 계약 취소를 당하는 궁지에 몰렸다.

유럽연합(EU)을 배태한 로마조약 50주년(25일)을 맞아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광장의 축포는 요란했다. 하지만 거대 EU의 앞날 역시 A380처럼 불투명하다. '평화와 번영을 가능케'(메르켈 독일 총리) 할지, '타협과 화해가 어려운'(라미 EU 집행위원) 둔한 공룡이 될지 조망이 엇갈린다.

A380의 결함은 독일과 프랑스 경영.기술진 간의 의사소통 단절 때문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달 초 1만 명 감원 방침이 발표되자 서로 다른 나라에 고통을 더 분담시키려는 기색이 역력하다. '에어버스는 프랑스.독일 사업장으로 분사해야 산다'는 비관론까지 나온다. '하나의 유럽'을 상징한 에어버스의 향배는 27명의 사공이 타고 있는 'EU호'의 미래까지 점쳐 볼 수 있는 나침반이 되고 있다.

홍승일 경제부문 부장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