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을 그리는 건 허망한 짓이다. 
운룡은 자신의 이름자의 용을 좋아하지 않았다.

"용?"

미축의 말에 운룡은  망상에서 깨어났다..

"아, 미축인가. 황산에서 돌아왔나보군."

"......"

순간적으로 굳어지는 미축의 얼굴을 보고 운룡은 슬며시 미소지었다.

"난 왜 당신의 굳어지는 얼굴만 보면 기분이 좋을까."

"비뚤어졌기 때문이지."

미축은 그렇게 말하고는 흙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번 용이 죽었으니 황가도  드디어 안심하겠군."

운룡의 말에 미축이 고개를 저었다.

"그저 소문일 뿐이니까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다네."

"다음 황제야말로 하늘이 내린 용일테니 앞으로는 용자를 피휘하게 되리라 하지 않았던가."

"그건 믿을 수 없는 헛소리네."

"그거 자네가 한 헛소리라네. 미축. 그거  덕분에 자네가 패설사관으로 승진한 거 아닌가. 그리고  감시도 받지만 말이야."

미축은 고개를  저었다.

"그  말인즉슨 내가 자네 일족을 위험으로 빠뜨렸다는 이야기처럼 들리는군."

"말이야 사실이지. 자네만 아니었으면 사기장이던 고모님이 황후가 될 일도 없었을테니."

미축은 서서히 불만을 표하고 싶어졌다. 아무리 황후의 조카라지만, 자신에게 계속 반말을 하다니...

"어딜 가나 자넨 제사냄새를 흩뿌리게 되는군."

운룡은 빙긋 웃으면서 하얀 가루를 미축에게 갑자기 뿌렸다. 향을 잡아주는 가루였지만, 미축은 갑작스런 공격에 옛날 하던 버릇대로 검대로 손을 가져갔다. 

"저런."

"아..."

운룡은 하하하고 웃고는 그 가루를 미축에게 던져주었다.

"이젠 마지막 용은 나겠지. 용자붙은 건 이제 고모님과 나하나뿐이니...하지만 나도 얼마 후엔 죽게 될거야. 그때가 되면 자네가 그 가루로 내 몸 전체에 불냄새 나지 않게 흩뿌려주게. 유품이야. 미축."

용가의 자손들은 성씨를 앞에 붙이지 않는다. 원래는 용을 앞에 썼다고도 하는데 황제의 권력이 세지고 나서부터는 그걸 돌림자로 썼다. 그럼으로써 그들이 원래 이 대륙의 선주민이었다는 것을 알리어 왔다.
하지만 황제들은 그걸 용납하지 않았고, 그들이 이름을 그대로 쓰는 대신, 장인이 되게 만들었다.용자붙은 이는 장인이 될 수는 있어도, 관리나 무사가 될 수 없었다.
오로지 예외가 있다면 일인지하 만인지상인 황후자리뿐이었다. 그래서 전대 용가의 장녀는 사기장이었다가 황후가되었다.

"아, 하나 부탁할게 또 있는데..."

운룡은 손질이 좀 덜 된 듯한 날붙이를 갑자기 미축 앞으로 쑥 내밀었다.
운룡이 하는 일은 늘 이랬지만 미축은 항상 적응이 덜 되어 놀랄 뿐이었다.

"이거 어떻게 생각하나?"

"검?"

"음. 눈이 달렸으니 대답은 정확하군."

운룡은 검을 들어서 이리 저리 흔들어보였다. 시엑! 쉥!
버드나무 가지가 기분좋게 흔들리는 느낌...이라고 하기에는 살벌했다. 하지만 검 자체에 탄력이 있어 비무하는 순간을 즐길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살인자가 쓸 만한 검이군. 그게 이번에 진상품인가? 움직임을 보아하니 어장을 많이 건드린 것 같군."

"호오. 역시."

운룡이 날붙이에 나무집을 대어보면서 말했다.

"원래 백부께선 간장과 막야를 기본으로 잡으셨지. 하지만 황가에 진상 올릴 날은 다가오고, 병은 심하시니 어쩌겠나. 내가 대신 만들었지."

"충고 하나할까?"

미축의 말에 운룡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필요없어."

"그 검 가지고 가면 자넨 죽어."

그말에 운룡은 미축의 옆에 주저앉아 날붙이 하나를 더  꺼냈다.

"이건 이름 없는 검이야. 무명이라고 하지."

"이름 있잖나."

"하여간 진상할 검은 이거네."

"...죽진 않겠지만 자넨 호되게 경을 칠거네. 진상품을 가지고 장난을 치다니..."

"하지만 이 두 검의 주인은 따로 있어."

운룡은 검 두개, 아니 아직 검이 되지 않은 날붙이 두개를 엇잡았다.

"이 검에 이름을 붙여줄 사람. 자네."

"...나까지 곤란하게 할 셈인가?"

"그리고 이 검을 가지게 될 이름없는 어떤 무사. 그가 룡을 이어받게 되겠지."

"정말 죽을 셈인가. 이걸 황제에게 바치지 않겠다고?"

"내가 만들었지만 정말 이 검들은..."

아쉬운듯 운룡은 말을 흐리고는 갑자기 땅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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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중학생이던 시절, 교과서에서 이런 구절을 읽은 적이 있다. 선생님, 차에 치인 환자가 왔는데요...
그  학생 아버지가 데리고 왔어요.얼른 수술 준비를!! 알았어! 이 수술은 내가 집도한다! 막 메스를 드는 순간 의사가 말했다! 내 아이잖아!
지금은 케케묵은 농담이 되었지만 그 당시만  해도  꽤 급진적인 농담이었다.
근데 이 농담이 현실이 될 줄이야...

"수술 결과는?"

난  대기실에 있다가  아내에게 물었다.

"잘 끝났어."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자기가 너무  긴장하는 것 같아."

"당연하지."

"이마를 좀 꼬맸을 뿐이야."

"여자애니까."

내 말에 그녀가 쿡 하고 웃었다. 순간적으로 손이 떨려왔다. 그녀가 웃은 것이 먼저인지, 내가  손이 떨린 것이 먼저인지 모르겠다.


"여보, 나도 옛날에 얼굴 꼬매봤거든, 의외로 별거 아냐."

"....."

이건 얼핏 들으면 별 것 아닐 수도 있다. 다만....
복수의 시작이라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사고차량은 어디 갔어?"

"도망쳤어."

내 말에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뺑소니 차량이야?"

"음....."

그 차의 운전자의 얼굴은 잘 기억하고  있다. 결코 잊을 수  없는 얼굴이니까.
20년전.  그녀를 친 운전자.
내 아내의 얼굴에 상처를 남기고, 그리고 내 딸의 얼굴에 상처를 남긴 그 얼굴을 어떻게 잊겠는가.

그러나...이 일은 경찰에 절대로 알려져서는 안된다.
번호판을 외워서 신고할 수도 없지만, 신고해서도 안된
이 문제는 오롯이 그 자와 나와의 관계에서만  해결되어야 한다.

"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지 뭐...."

나는 과거에 그녀가 차에서 운전하다가 그 차에 치여 얼굴을 차 창에 정면으로 박은 것을 기억했다.
첫  데이트였는데, 그녀는 차에 이마를 찍혀 고통스러워했다. 엄청난 양의 피가 차 시트에 얼룩을 남겼다.
내가 결국 책임을 지고 결혼했을 때, 그 자는 마치 음화된 영상처럼 결혼식장에 스르르 나타나 뱀처럼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다만 남아있던 것은 부조봉투안에 들어있던 섬뜩한 글,

[네가 과연 행복해질 수 있을까?]

그 네가 그녀인지, 나인지는 불분명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닌 것 같다. 그 자의 얼굴을. 그 얼굴을.. 그 뱀같은 얼굴을 알  수 있는 건 나밖에 없었으니까.

"여보, 무슨 생각해?"

그녀가 어깨를 툭 쳤다. 항상 남자같이 동작이 큰 그녀답다고나 할까.

"들어가자. 은혜 맛있는 거 사줘야지."

"음."

나는 무겁게 자리를 일어났다. 그 애의 얼굴을 어떻게 볼 건지  답답한 마음이었다
앞으로의 복수극은 그 애의 얼굴에 일어날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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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뭘 부인하겠습니까. 저 좋아합니다. 복수극...
개인적인 사정으로 그림자의 햄릿을 잠시 쉬고 있습니다. (관심있는 분이 얼마나 계실런지 모르겠지만.)
그리고 한동안 손이 안 나가서 많이 날렸습죠. 시간을...
드디어 안되겠다싶어서 슬슬 시동을 걸고 있긴 하는데...손맛이 영...
이건 그래도 조금 마음에 드는군요. 또 상만 하다가 날리는 거 아닌가 불안감이 들긴하지만...
저 앞의 농담은 아시겠죠? 중학교 교과서에 대한 오마쥬! 응답하라 199#!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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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나이테가 새겨진
의자에 앉아
나는 그를 생각한다.

10년전  그는 키가 나무같이 큰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내가 그의 키만큼 생각을 키웠다.
더 이상 자랄 곳도 없는데
내 생각은  이 나라를 벗어나 
그가 있을 저 먼 나라까지 자라나려 한다.

이 밤에  
저 이국 어느 땅에 그와 그의 아내와 아이가
웃을지 울지 모를 그 어느 땅에 
나무 뿌리를 심었을런지.

그때부터 잘린  내 그루터기는
더 이상 밑으로는 자라지 않는데
먼 소식은 그가 이제 밑으로 자라고 있다고 한다.

머나먼 상념..
레일 위를 달리는 세계일주 기차처럼
나는 그가 있을 저 먼 곳으로 
내  머리를 날려보낸다.

뿌리내린  그 어느 땅에서
어느 누구도 잘린 그루터기 묻지 않을 땅에서
자유로워지라고...


나, 나의 생각을 마음의  날개에 실어
날려보낸다.저 멀리 날려보낸다.
그로 인하여 내 뿌리는 이 땅에 내리고
필요없는 가지는  저 멀리 떠난다.


기억하라.
나여.
네 뿌리 둘 곳  
그곳만이 너의 마음의 고향일지니..
더 이상의 빈집에 마음두지 말고
마음껏 땅에 발을 디뎌라.


그 굳건한 땅 어디에선가
뿌리를 잡아줄 누군가
널 기다리고 있다.
---------------------------------------------------------------------------------------------------

오늘 어느 모 게시판에서 본 기형도 시인의 빈집을 조금 참조했습니다.
그러고보니 기형도 시인 시집을 언제 사놓았던것 같은데
오래간만에 읽어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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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집에 혼자사는 큰 사람이 살고 있었어요.
돈도 많고, 마당도 너른 집에서 살았지만 그는 아무도 만나지 않았고, 아무것도 만들지 않았어요. 어느 누구와도 이야기 하지 않았어요.
그런 어느 날, 제비 한쌍이 그의 집 지붕밑에 둥지를 지었어요.
그리고 새가 벌레를 물어오는 기분 좋은 봄날에 조그만 요정이 찾아왔어요,


"여긴 정말 넓구나. 제비야. 태워다줘서 고마워."

그래요. 제비가 씨앗위에 앉은 요정을 태워다 준 것이었죠.
솜털처럼 작았기에 큰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방안을 구경하던 요정을 밟을 뻔했어요.
요정이 조그만 소리로 항의하자 큰 사람이 말했습니다.

"여긴 내 집이야.아무도 들어올 수 없어. "

그래서 요정을 문앞에 두고 문을 쾅!ㅘ고 닫으려 했지만 요정이 너무 작아서 문틈새로 들어오는 걸 막을 수는 없었어요, 요정은 달콤하고 고운 목소리로 "네 집에서 살게 해주면 네가 싫어하는 것들이 작게작게 네 눈에 보이지 않게 해줄게."

듣고보니 좋은 말인것 같아서 큰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날부터 요정은 큰 사람의 집에서 자질구레한 일들을 처리했습니다.
쇼핑센터에 큰 사람의 발에 맞는 구두 찾기, 옷 정리하기, 청소하기 등이요.
항상 후줄근한 옷만 입던 큰 사람이 맞는 옷을 입고, 예쁜 신발을 신자 조금 작고 어울리는 모습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죠? 옷만 바꿔입는다고 그렇게 달라보이진 않았을텐데...

요정은 큰 사람을 위해서 많은 것들을 해주었습니다. 큰사람의 엄마가 보내준 생활비 출금하기, 설거지, 거리에 나가서 장보기. 요정은 아주 작았지만 사람들은 그에게 매우 친절하게 대해주면서 큰 사람에 대해서 물어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요정은 그들이 큰 사람에게 관심이 많다는 걸 알게 되었지요.
돌아온 요정은 큰 사람에게 그들이 세상에서 하는 일들, 말들을 모두 전해주었지만 큰 사람은 슬픈 얼굴로 어깨를 오그렸을 뿐이었습니다. 기분탓이었을까요? 큰 사람은 조금 더 작아보였습니다.
하지만 이번엔 그다지 어울리지 않았어요.

요정이 큰 사람의 집에서 산지 1년이 지나갔습니다. 그동안 큰 사람도 요정을 위해서 조그만 집도 지어주고, 텃밭도 길렀지요. 요정이 좋아하는 달콤한 바나나와 멜론을  사러 가까운 거리 정도는 걸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요정과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쌓아놓았던 일거리들도 점점 빨리하는 법을 배웠지요.
그렇게 그렇게 모든 것이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어느새 큰 사람은 더 이상 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요정보다는 여전히 컸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을 정도로 크진 않았어요.

요정에게 그 일을 말하자 그저 빙그레 웃으면서 "부작용이야."라고 말했을 뿐이었어요.

큰 사람은 이제 요정이 없이도 사람들과 더듬거리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새로 사귄 사람 중에 좋아하는 사람도 생겼어요. 예쁘게 보이고 싶어서 알이 좀 작은 진주목걸이를 하기도 했구요. 이 목걸이는 너무 작아서 훗날 그 사람이 고리목걸이로 착각하기했답니다.

어느 겨울날, 요정은 왔던 것처럼 홀연히 사라져버렸어요.
큰 사람은 요정과 있었던 날들이 그저 아득하게만 느껴졌지요. 조금 외롭기도 했어요. 하지만 이젠 외롭지도, 고독하지도, 괴롭지도, 그저 아무생각없이 지내지도 않게 되었어요.
왜냐하면 큰 사람과 큰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과 그 아기와 함께 큰집, 마당있는 집에서 살게 되었거든요.
모두 행복하게 잘 지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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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는 아주 특별한 고양이가 있다. 바로 클래식 음악을 구분할 줄 안다는 것이다.
종종 텔레비젼에서 노래부르는 고양이를 봤다고, 그 고양이는 음반을 틀어놓으면 음반에 맞춰서 노래를 부른다는데 그저 구분 좀 한다고 해봤자 노래부르는 것 밖에 더 있냐고 말하는 사람이 종종 있다.
물론 노래부르는 고양이나 개는 1년에 한두번씩은 꼭 나오지만, 내 고양이는 아주 특별하다.
처음에는 에비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이 똥고양이는 그 놀라운 능력을 선보이자마자 이름이 바뀌고 말았다.

'크라식.'

이건 이름을 바꾸길 주장했던 아버지가 일본식으로 불러준 이름이었다.
이제 이 녀석도 이게 자기 이름인지 알기 때문에 화장실 물 몰래 훔쳐먹던 버릇대신 우아하게 밥그릇에 담긴 물만 마시게 되었다.

"크라식은 특별한 고양이여. 그러니까 우리 텔레비전 고쳐야 한당게!"

도대체 어디 사투리인지도 모를(아버지는 순수 서울 깍쟁이이시다.)사투리를 섞어가며 고장난 텔레비젼을 수리해야한다고 하셨다.
음악을 좋아하는 어머니(애초에 크라식을 안고 들어오신 게 이분이시다. 고장난 텔레비전을 혼수로 들고 오신 분도,부부싸움 하느라 브라운관 정중앙에 구멍을 만들어놓으신 분도...)는 레코드는 고쳐도 그놈의 누워서 보는 버릇하는 텔레비젼은 못 고치겠노라고 싸늘하게 대꾸했다.

실직한지 이제 5년.
처음에는 일을 그만두기에는 젊지 않은가...싶은 58세에서 벌써 5년이 지났다.아직 노인이라 부르기엔 이르지만 실직이 아버지의 건강에 미친 영향은 꽤 컸다.
나름 슬림한 몸매를 자랑하던 아버지가 점점 배가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예전에는 돈을 버는 가장입네 하는 자세때문인지 항상 딱딱한 어투였는데, 언제부턴가 라디오 쇼프로그램을 자주 듣기 시작하시더니-아마 컬투였던 것으로 기억을 한다.-점점 알아듣기 힘든 사투리를 구사하시는 것이었다. 유머감각이 아마 어머니와의 사이를 좀 낫게 하지 않을까 하는 허망한 기대탓인지도...

아버지가 텔레비전을 사야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연금이 나오려면 아직 2년이나 남았으니 그동안 크라식을 이용해서 돈을 벌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애초에 크라식을 데려온 건 어머니이니 결정권은 어머니에게 있었다. 더더군다나 크라식은 이 집에 들어올 당시 아버지에게 엄청난 구박을 받은 사연이 있었다.
이 사연은 물론 아버지가 크라식의 사연을 더 애절하게 보이게 한다고 말한 근거가 되기도 했다. 크라식이 좋아하는 음반이나 크라식이나 소유권은 어머니에게 있으니 그 모든 게 일언지하게 거부되었다.
물론 크라식은 내 고양이이기도 하다. 고양이털 알레르기가 있는 어머니는 크라식에게 밥을 줄 수가 없었기 때문에 크라식의 외면을 받았다. 
그래서 고양이의 법칙상 밥주는 사람이 주인...나머지는 동거인.

하여간에 크라식이 어떻게 음반을 듣고 구분하느냐고 하면 녀석이 제일 좋아하는 것은 비발디의 오페라 중 바자제인데, 비비카 주노가 나는 학대받는 아내라오...를 부르기 시작하면 높은 음(아마 제 딴에는 하이씨인듯한,)을 불러제끼기 시작한다. 이건 내가 좋아하는 비발디닷! 이라는 뜻이다.
근데 나는 비발디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클래식 자체도  딱히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나는 조수미가 부르는 편안한 팝페라가 좋다.-중간에 조수미로 판을 갈아 끼우는데   이 녀석이 우르르르릉냥캬앗!  을 시전하는 것이다.
그것만으로 끝인가? 아니다. 물론  어머니는 팝페라도 좋아하시지만  비발디보다는 피셔 디스카우가 노래하는 슈베르트의 마왕을 좋아하신다.  
킄라식의 취향은 여주인도 조금 닮았는지 이 녀석은 노래는  짜증은 내지 않고 고 어머니곁에 자리 틀고 앉아 졸기 시작한다.
슈베르트의 우울한 취향이 녀석에게는 자장가인지...
하여간 이것도 훈련하면 는다고....
요즘 아버지는 그 소소한 구분법을 체계화시키기 위해서 훈련을 하시기 시작했다.

영재야! 네 엄매 음반  작가 구분을 우예하노?

그 알 수 없는 사투리 구사에는 어떻게든 텔레비젼에 나가 용돈벌이라도 하겠다는 의지가 굳건히 보였다.

"글쌔요..."

쌤통이대 싶지만, 내버려두면 아버지는  곧 나가서 크라식, 아니 에비를 못 살게 굴 것 같아서 얼른 대답했다.

"아버지, 정  구분이 안되시면 제 아이패드에  적혀 있는 것 보고 하시면 돼요. 요즘 웬만한 음반은?"

헉!! 아버지가 어머니의 음반을 뒤지기 시작했다. 더더군다나 지금 고르고 있는 건  어머니의 고급 레코드판!
크라식이 마침 아버지의 손에서 좋아하는 쥐포를 발견했다.
저 영감님이 마누라 몰래  냉장고에서  크라식 간식으로 있던 쥐포를 입에 물고....
캬앙!

잠깐동안 인간과 묘종 사이에 큰 싸움이 있었다.
아버지는 손에 들고 있던 레코드를 예전에 수집했던 수석위로 집어던지면서-겨냥은 크라식을 향해서 했다.-
이노무 자식!을 시전했고 어머니가 애써 소장했던 레코드는 그걸로 아작이 나버렸다.
그 이후 열뻗은 아버지가 크라식을 잡겠다고 소란을 피우다가 고가의 엘피도  박살이 나버렸다.

어머니는 곧 돌아왔고, 화를 내면서 아버지에게 잔소리를 퍼부었다.
아버지는 사나이 체면을 뭐 그런거 가지고 깎냐고 짜증을 내고는 "이노무 집구석 꼴 보기 싫다."고  마지막으로 뱉고는 사라졌다. 그리고 어머니도 한동안 속상해가지고 집을 나가서 밤  12시에 들어오셨다.
아버지는 그때가 되도록  돌아오지 않았는데 그때사 어머니가 크라식을 찾기 시작하셨다.
자기 전 -그러니까 크라식이 자기 전-에 틀어놓는 가곡집.
베토벤의 아델라이데를 덜덜 돌아가는 구형 컴퓨터에 넣고 틀기 시작했는데 크라식의 골골거리는 소리가 어디에도 들리지 않았다.

영재야!

이 집에서 크라식아! 하는 소리보다 더 들리지만 두분 부모님에게 비중이 덜한 소리가 오늘 두번 들렸다.

"크라식 가 어디 갔나?"

설마하니 문 여는 동안 사라졌나 싶었지만 클래식 음반도 구분할 줄 아는 고양이가 그런 기초적인 실수를 할리는 없었다. 당연히 업둥이 고양이 출신이니 바깥이  얼마나  춥고 배고픈지도 알테니...

"글쎄요?"

크라식이  없어진 것이다. 어머니는 레코드가 박살난  것보다 더 상심했고, 더욱 어머니를 속상하게 한 것은 아버지가 사라져서 한달동안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 한달동안 우리집에서는 고장난 레코드보다, 더 잘돌아가는 구형 컴퓨터가 있는데도 그 좋아하시는 클래식 음악이  울려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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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상 클래식 음악이라고 부르긴 했지만 이 단편에 나오는 클래식은 라벨, 드뷔시, 스트라빈스키 등 근현대의 음악가들을 포함한 것입니다. 물론 클래식 음악과는 거리가 있지만...편의상...그렇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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