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린 듯이 일어섰던 에이타로는 빛을 등진 상대가 자신이 마지막으로 만나고 싶었던 인물이란것을 알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부축하면서 요양원의 옥상으로 올라갔다.

이제야 생각나는 것이지만...하고 에이타로가 운을 떼었다. 하우정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담뱃재를 바람에 날려보냈다. 덕분에 옆에 있던 여인으로부터 눈총을 샀지만 사실, 담배는 핑계일 뿐이었다. 그저 다른 사람의 비위를 긁고 싶었던 것이다.

"실제 나이보다 20살이나 젊다는 것은..."

"......"

"기실 만나본 사람이라면 금방 알 일이죠. 다른 사람 흉내를 내면서 사는 것도 스릴 있습니까?"

반도인이라면 무조건 냉소하고 괴롭혔던 그의 목소리에 물기가 돌았다. 푸르스름한 물기가...

"잠깐 일어난 사고가 일생을 바꾼 거죠."

하우정의 대꾸에 에이타로가 조금 집요하게 말했다.

"무언가에 실망했기 때문에 조국을 등진 게죠. 내가 그 사건을 보고 제국을 등진 것처럼 말입니다."

"실망...아, 내 실망이라면 조국같은 게 아닙니다."

하우정, 아니 김한두는 에이타로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그 기차는 정말 있었던 것이었을까요?"

"......"

에이타로는 말하지 않았다. 하우정, 아니 김한두의 말에 따라서 가 본 그 위치에는 실존하지 않는다고 하던 기차가 실제로 있었다. 그 아수라장 속에서도 반도인들은 마치 머리가 떨어져 나가도 버르적 거리던 바퀴벌레 모양, 움직이고 있었다.

"내게는..."

한두가 말을 이었다.

"그 이야기속에서 그 기차는 없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내 추억과 같이 깡끄리..."

"기차는 있었습니다."

에이타로가 말했다.

"하지만 신문에 실을 순 없었죠."

"왜요?"

하우정이 말했다.

"설마 나같은 변절자가 없어서 그렇진 않았을테고..."

"대기자라면, 자신이 금기시하거나 싫어하는 내용의 기사라도 뛰어넘어야 합니다. 그게 격인 것이죠."

"...호오."

에이타로는 늙은 자신의 목에 힘이 더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당신은 대기자입니다. 에이타로..."

김한두는 그렇게 말한 후 비스듬히 내리고 있던 헌팅 캡을 바로 썼다.
그리고 천천히 안에서 울음소리가 들려나오는것을 기다렸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건너야 하고, 싸워야 하는 마지막 순간이군요..."

얼마 뒤, 

터덜터덜 그 노신사가 걸어나왔다. 손에는 조그마한 수첩과 아내의 유품 몇가지를 안고 있었다.
한두는 천천히 옥상에서 내려가 그 노신사를 향해 걸어갔다. 며칠동안 비가 오지 않아 돌멩이는 그저 단단하고 건조한 느낌을 주었다.

"제국의 톨스토이 선생..."

한두의 말에 노신사, 아니 하우정이 대답했다.

"오늘만큼은 장난을 피해주시오.이 순간만큼은 그저 조용히 보내고 싶으니..."

하우정은 천천히 유품을 간추려 두 사람이 지켜보는 동안 꾸러미에 넣었다.

"성공했습니까?"

한두의 말에 우정이 대꾸했다.

"성공...인진 모르겠소. 하여간 내 평생에 옆에 두고 싶다는 건 이루었으니 맞다고 해둡시다."

몇분 전, 자신의 아내, 그리고 명의 약혼녀, 한두의 동행인이었던 설이 죽음을 맞이했다.
방사능 피해로 인해 정상적인 생활이 거의 불가능했던 그녀였지만, 정부기관에 글을 써서 보내거나 매일신보로 연락을 하곤 했었다.
그 열정을 자신은 평생 이해할 수 없었다. 여자는 여자일뿐...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그 사고 이후 보통 여자 이상이 되어버렸다.
한번의 성공이자 한번의 실패 이후 그녀는 결코 울지 않았다.
다만 싸울 뿐이었다. 물러서지 않는 그런 싸움을...

하우정 자신과 명- 방사능 피해로 일찍 죽었다.-을 구분하지 못하게 된(역시나 방사능 피해)그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는 성공했다고 중얼거릴 수 있었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마음에 찬, 최고의 여인을 만난 것이 다행이라고...지켜볼 수 있어서 행복했다고...
그러니까...예전의 그 책은 더 이상 필요 없다고...

"받으시죠."

김한두가 두툼한 무엇인가를 건넸다.

"...이건?"

"에이타로 선생이 옛날에 제본한 겁니다. 선생이름이 이대로 묻히는 것은 아깝다고. 사드같은 작가로 이름을 날리는 것도 괜찮을 거라더군요...하지만 이젠 안 되겠죠..."

하우정은 그 책을 받자마자 엄청난 힘으로 책을 죽죽 잡아뜯었다.
삽화와 사진은 말할 것도 없고, 두꺼운 종이 장정도 한번에 뜯어버린 그는 가까운 휴지통에 그것을 던져 넣었다. 그리고 미리 준비라도 했던 것처럼 라이터불을 붙여 휴지통쨰로 태워버렸다.

"이젠 아무 것도 필요 없소."

우정이 말했다.

"오로지 내게는..."


-새장에 사는 새가 말했네. 내게 주어진 환경이 얼마나 좋은 지 아니?
 먹는 거 떨어질 일 없고, 항상 씻을 수 있고, 무엇보다 좋은 건 잡혀죽을 걱정을 안 해도 된다는 거야. 넌 아침이면 벌레를 잡으러 날아가고, 밤에는 무서운 짐승들 떄문에 떨지 않니...
새장속에 들어와 모든 것이 다 있으니까.
 그러자 바깥의 새들이 말했다. 우리에겐 그 모든 것이 다 필요가 없단다.
 네가 나오면 알게 될 거야...참 불쌍한 새의 생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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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1시간 남았네요.
아까 전까지 외출 중이어서, 북풀도 이제사 보고...
이웃님들, 즐겁고 따뜻하고 행복한 신정 맞이하시고, 즐거운 새해 되시길 기원합니다.
올해는 방송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참 다사다난했던 것 같아요.
2017년도는 그저 즐겁고 편안하기만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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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키는 독방 한 구석에 흔들의자에 앉아 있는 노인에게 다가갔다. 조부는 끄덕끄덕 고개를 수그리고 졸고 있다가, 에이키를 보자마자 소리를 질렀다.

"애비냐?"

"저에요. 할아버지."

집안 어른이고 뭐고 간에 이야기하기 쉽게 조부라고 부르자. 하여간 그의 말에 조부는 소리를 질렀다.

"아니, 네 애비는 뭐하는 놈이길래 기사쓰느라 바쁜 나보다 더 안 오냐!"

"할아버지. 기사는 40년 전에 쓰셨잖아요..."

"뭐라고! 40년동안 글밥먹은 이 에이타로를 우습게 보는거냐!"

에이타로, 즉 과거의 신문기자였던 그는 하우정에게 라이벌 의식(그 당시 깊이 있는 르포기사는 전부 다 소설가가 썼으므로)을 가지고 있었다. 한때 그는 하우정의 실종기사를 다루기도 했다. 그는 아마 하우정이 살해당했을 것으로 생각하고 기사를 냈다가 후에 하우정이 만주에서 은둔생활을 하고 있다고 밝힘으로써 기자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는 그 하우정이 가짜이며, 한때 대륙행 횡단열차의 종착지에서 하우정 흉내를 내던 사람이라며 반박기사를 내려고 했지만, 그때 한창 제국과 반도 사이의 외교 문제가 발생해 실패하고 말았다. 기자생활을 접으면서 하우정의 실체를 밝히겠노라면서 존재하지 않는 대륙행 횡단열차의 실종을 밝히려 했지만 그의 재산을 노린 가족들에 의해 여기에 감금되었다.

"하여간에."

에이타로는 입가에 묻은 침을 닦아내면서 조카손자에게 물었다.

"내가 갖고 오라고 한 건 갖고 왔냐?"

"신문기사 말씀이신가요? 그건 5년전에 갖다드렸잖아요. 도대체 뭐가 필요하신 거에요..."

"떽! 어른 말에 토를 달다니!"

원래도 상냥한 성격이 못 되는 할아버지였지만, 여기에 감금되면서는 점점 성격이 괴팍해지더니 실제로 치매에 걸린 것처럼 되어버렸다.

"대륙행 횡단 열차의 번호 말이다."

"그 번호는 원래 없는 번호라고 기사에 떴다고 말씀드렸잖아요..."

"난 봤다."

에이타로가 말했다.

"그 심연 깊은 곳에 파묻힌 불타는 대륙횡단 열차!"

"또 그 말씀..."

"벼랑 아래 떨어진 그 횡단 열차에서 과연 살아남은 사람이 있었을까! 아니,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었어!"

에이타로의 광기어린 말투에 에이키는 진절머리를 쳤다. 과연 이 미친 노인이 한때 대륙과, 제국, 그리고 반도의 오스카 와일드라고 불렸던 하우정과 한판 붙을 정도의 기자였단 말인가?

"반도인들! 그 작자들이 살아있었어. 벼랑에 떨어지기 전, 삼등칸이 분리된 상태에서 살아남았다더군! 그리고 그 여자도!"

벌써 365번째 듣는 이야기였다.에이키는 할 수 있으면 이 노인네의 목을 졸라 죽여버리고 싶었다. 듣는 자기도 그냥 미쳐버릴 것 같아서...
반도인들은 독립했다. 에이타로의 주장에 의하면 이미 그때 독립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실제로 반도의 독립은 제국에 핵이 떨어지면서 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전에 에이타로의 주장대로라면 이미 그 대륙횡단열차의 승객들의 목숨을 담보로 독립되기로 했던 반도인들은 제국의 사기행각으로-반도인들을 모조리 말살시킬 계획이었으나 무산된-독립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여자. 아직도 살아있는지 모르겠군."

"....."

슬슬 진절머리 쳐질 이야기가 나올 차례였다.
에이타로가 이빨을 딱 부딪치면서 말했다.

"그 눈속에서 나는 봤어. 그 여자가 머리를 기다랗게 기른 채, 아무도 오지 않을 그곳에서 반도인들을 보냈지. 그 얼음속에서 한 남자를 꼭 껴안은 채로...그 남자의 살을 오득오득 씹고 있었어!"

에이키는 비위가 좋지 못해서 헛구역질을 했다.

"아...할아버지. 제발...미치려면 곱게 미쳐요!!!!"

에이키는 참을성을 잃고 에이타로의 목에 손을 갖다대었다. 더 이상 참지 못한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에이타로!"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이 소리는..."

에이타로가 벌떡 흔들의자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늙어 부실한 다리가 말을 잘 듣지 않아 그는 이내 다시 털썩 의자에 엉덩이를 내려놓았다.

"에이타로!"

낭랑한 목소리는 이미 들었던 듯 했다. 에이키는 고개를 잘래잘래 흔들었다. 저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분명히 자신은 큰 사고를 쳤으리라.

"어떤 놈이야!"

하지만 에이타로에게는 쓸데 없는 소리로 들린 모양이었다. 에이키는 잠시 고민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튼 지금은 누가 부르는지는 모르겠으나, 에이타로로부터 벗어나게 해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는 잠시 모험을 하기로 했다. 누가 조부와 친해서 놀러오는 것인지, 아니면 해꼬지를 하러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조부를 죽여주면 자신은 편해져서 좋고, 놀러오는 거라면 잠시 자신을 해방시켜주는 것이니 좋고...
그런 마음으로 에이키는 잠시 자리를 떴다.
자신의 이름인 에이키의 에이가 존경받는 대기자였던 에이타로를 닮으라는 뜻으로 붙여준 이름이라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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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괜찮으십니까? 가방을 좀 들어다드릴까요?"

그때로부터 어언 40년이 지났다. 품위 있게 늙은 신사가 저 꼭대기 위에 있는 요양원으로 가고 있었다. 치매 환자들이 최종적으로 가게 된다는 그곳.
가방을 들어주려 한 청년은 그 노인이 환자인지, 아니면 면회자인지 궁금했지만 일부러 물어보려 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자신도 그곳에 갈 계획이니, 가게 되면 알게 되리라.

"아, 무겁지는 않습니다."

노인이 대답했다.

"어차피 아내에게 필요한 건 며칠 전에 다 부쳤으니까요."

노인은 그렇게 말했지만 약간 발을 끌었다. 짐이 그렇게 많지는 않지만, 저 꼭대기까지 올라가려다보니 몸이 조금 힘든 모양이었다. 청년은 억지로 노인에게서 짐을 받아들었다.

"힘드시겠습니다."

젊은이가 말했다.

"뭘요. 그리 힘들지 않습니다."

노인과 청년이 서로 바뀐 듯 노인의 어조가 밝은 반면, 청년의 어조는 슬프고 처졌다.

"그럼 저만 그렇게 생각하는거군요. 전 집안 어른이 치매로 저기에 계신데 갈수록 상태가 심해져서 걱정입니다. 이젠 제 얼굴도 몰라보시는 거 같아요. 속물같지만 재산상속까지 받아서, 제가 책임을 져야 하는데 점점 힘들어집니다."

"...하하, 힘들었던 건 제가 아니라 제 아내일거라고 생각하니 힘들진 않군요. 일생 동안 제가 그렇게 애를 먹였으니까요."

노인의 눈이 반짝였다.

"하지만, 그녀의 사랑이 있어서 제가 살아갈 수 있었던 것 같군요. 여기까지 오느라 정말 힘들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한 후 다리를 쭉 폈다. 청년과 이야기하면서 속에 담은 것이 좀 풀어졌는지.
눈동자에는 힘이 넘쳤다.
그들이 약 20분후 도착한 병원에서 일대 소동이 벌어졌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를 연호한 아이들과 아가씨들(이들은 요양원에 와 있긴 했으되 국가에서는 이들이 왜 이곳에 있는지 다른 환자들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치매가 아닌 것은 확실했지만...)이 노인과 청년을 둘러쌌다.

어리둥절한 청년에게 노인이 말했다.

"아, 맞군. 난 에이동에 볼일이 있답니다. 조부께선 아마 비동에 계실 겁니다. 치매라시니..."

"선생님...이건..."

"아무 일도 아닙니다. 에이키군."

노인이 청년의 이름을 불렀다.

"어떻게 제 이름을..."

"...나중에 이야기하지요...저기 아내가 오는 군요..."

이미 첫부분에서 언급했던 소녀같은 할머니가 천천히 걸어나왔다. 옆에서 질문하던 소녀도 할머니의 손을 잡고 그에게 다가왔다.

"정말 오래 기다렸어요. 빨리도 오시는군요."

눈을 살짝 흘기며 그녀가 말했다.

"어서 오세요. 여보.당신의 편지가 있어서 그나마 오래 기다리지 않았어요..."

그녀의 몸에는 여기저기 피부가 벗겨진 자국이 역력했다. 그것은 방사능 피해로 인한 자국이었다.

"자자, 들어갑시다."

노인이 말했다.

"당신에게 이야기해줄 바깥 이야기가 정말 많답니다. 여보. 내 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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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를 했다가 손목이 나가서 1주일째 치료 중입니다....
병원에서 침도 맞았고, 그러고나서 나았는 줄 알고 손을 다른 데 쓰다가 또 아프군요...
두툼한 고정대를 대고 계속 손을 쓰곤 합니다만, 한동안 페이퍼는 무리겠지요...
하여간 북플 눈팅은 계속되겠지만 소설이나 포함 그 밖의 다른 것들은 무리인 듯 합니다.
이웃 님들 그동안 계속 찾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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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6-12-22 05: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태인님 건강 조심하세요^^

태인 2016-12-27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 감사합니다.지금은 다 나았어요~ 손이 나으니 정말 할 수 있다는 게 정말 중요하게 생각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