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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이론의 역사 - Social theory : a historical introduction
알렉스 캘리니코스 지음, 박형신 외 옮김 / 일신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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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의 위기'와 관련하여 우리는 이 책의 서두에서 사회학이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약화되었다는 언급을 볼 수 있다. 바로 영국의 경우, 대처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정책이다.  

"1980년대 동안 서구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에서 부상한 신우파는, 실제로 사회학을 사회주의의 위장으로 간주했다. 대처정부 하의 영국에서는 학술연구 관련 재단이 사회과학의 이상과 관련된 모든 것을 연구지원에서 제외하기 위해 이름을 바꾸기도 했다."  

대처의 유명한 말 "개인만 있고 사회는 없다"란 말은 이러한 상황을 웅변하는 듯하다.  

이와 같이 사회학의 연구대상인 '사회'라는 것의 위상이 약화되고 모호해지는 것(신자유주의는 정말 '사회'를 없애지 않는가? 남는 것은 '생존경쟁'이며, 믿을 것은 나 자신 뿐이다)에서 사회학 위기의 '정치적' 본질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캘리니코스는 사회학에서 하던 것을 요즘에는 '문화연구'쪽에서 하고 있다고 언급한다. 지젝 같은 경우는 문화연구가 자본주의를 타격하지 않고 자본주의의 문화산물들을 '분석'만 하고 앉아있다고 비판하곤 한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요즘은 사회학에 관심을 가질 만한 사람들이 '정치철학'에 몰려들고 있다고..)

그런데 " '사회'가 무엇인가"라는 기초적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사회학의 역사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이것은 비단 학문분과로서의 사회학이 아니라, 근대 이후 사회적인 것에 관한 여러가지 사회과학적 사유들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다) 

사회라는 실체가 있다 없다라는 질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쨌든 근대의 역사는 '사회'라는 것의 문제와 그것의 해결을 위해 사회라는 것에 대한 여러가지 표상들을 발전시켜 왔다는 것이다. 그것은 국가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이다.(요즘엔 시민사회란 용어를 많이 쓴다. 하지만 시민사회는 국가와 지나치게 '분리'된 개념이라서 문제가 있는 듯하다.)

그런 면에서 사회학사를 '정치적' 영향사로 서술하는 이 책은 여태까지 '구조'와 '행위'의 결합이라는 사회구성 논리를 세우는데만 몰두해온 사회학을 좀 더 '사회학적으로' 살펴보는 기획인 듯하다. 그래서 아마도 사회학이 아닌, 사회이론이라는 제목을 붙인 듯하다. 하지만 기본 뼈대는 일반적인 제도 사회학의 틀을 갖고 가고 있으며, 다만 사회학 형성을 사회학사 외부의 영향관계를 골고루 다루고 있다는 장점이 있다(헤겔이라든가, 하이데거, 하이예크, 케인즈, 니체 등을 다룬다. 이들이 사회학 발전에 심대한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사회학을 계몽주의의 주된 상속자로 간주하면서, "인간이성은 사회세계를 이해하고 그것을 개선할 수 있는가?"란 질문이 사회학(혹은 사회이론)의 질문이었다고 보고 있다. 계몽주의가 제기하는 여러 문제제기들에 대한 답변의 과정으로서 사회학의 역사를 자리매김하는 것.

계몽주의 유산으로 발생한 프랑스혁명에 대한 해석상의 갈등이라는 전쟁터에 사회학을 위치짓는다. 보수주의 이론가와 자유주의 이론가, 그리고 맑스까지... 결국 사회학은 근대성과의 대결이다. 고전사회학자인 맑스, 뒤르켐, 베버는 특히 '정치경제학'과 대결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미국의 파슨스도 결국 '공리주의'와 싸운다고 했으므로, 넓은 의미에서 경제학과의 대결이었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학문분과로서의 사회학은 20세기나 되어서야 사회학과라는 제도를 갖게 된다. 뒤르켐은 사회학과 교수였지만, 베버는 경제학자였고, 맑스는 친구 엥겔스에 재정적으로 의존하는 백수에 가까운 삶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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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아탈리, <위기 그리고 그이후>
대한민국 20대, 절망의 트라이앵글을 넘어 - 대학등록금 1000만 원, 청년실업 100만 명, 사회의 오해와 무관심
조성주 지음 / 시대의창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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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는 보수적이고 정치에 무관심하다"는 생각은 우리 사회에 상딩히 널리 퍼져 있습니다. 어제 올린 글에서는, 20대가 정치에 무관심한 것을 꼭 보수화라고 해석해야 하는지, 오히려 20대가 18대 대선 때 참여정부를 심판한 것일수 있다는 <88만원세대>의 공저자 박권일씨의 주장을 인용하여 딴지를 걸어봤습니다. 나아가 '경제대통령'담론으로 참여정부 덕분에 선출된 현 정부에 대해서도, 20대들이 참여정부에 대해 심판한 것처럼, 재보궐선거 참여를 통해 의사를 표시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좋은 책을 많이 출판해내는 새사연(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에서 <88만원 세대>의 후속편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만한 책이 나왔네요. 조성주씨가 쓴 <대한민국 20대, 절망의 트라이앵글을 넘어(시대의 창)>라는 책인데요. 보니까 우석훈씨가 쓴 <88만원세대>보다 책이 읽기 쉬운 편입니다. 두께도 얇고.. 제가 '88만원세대'에 관한 글을 지속적으로 쓰다 보니, 관련된 책이 나오면 손이 가게 됩니다. 아무래도 386세대도 아니고, 그렇다고 88만원세대도 아닌 제가(고재열 기자가 '독설닷컴'에서 '298세대론'을 개진한 적이 있는데, 전 굳이 말하자면 298세대죠. 옛날엔 뭐 X세대라고도 했죠.) 다른 세대보다 그래도 중립적인 위치에서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을 해봅니다.

 



 

<대한민국 20대>에서 20대 보수화론과 관련하여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더군요. 사실 투표율이 줄어드는 건 한국사회에서 지속적인 추세였습니다. 대선만 놓고 보면, 15대 대선 80%, 16대 대선 70%, 17대 대선 63%죠. 그런데 한국사회를 충격에 빠뜨린 것은 20대들의 2008년 4월 총선 투표율이, 정확한 통계로 나와있진 않지만 대략 20%대가 나왔다는 점입니다. 이건 정말 20대 보수화론과 탈정치화 논의에 기름을 붓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저자 조성주씨는 20대를 느슨하게 묶어서 보지 않고, 20대를 반으로 쪼갭니다. 20대 전반 세대와 20대 후반 세대를 나누어 투표율을 다시 뽑아봅니다. 그런 다음 20대 전반과 20대 후반의 투표율이 16대 대선과 17대 대선에서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 살펴봅니다.

 

17대 대선 투표율 : 19세 54.2%, 20대 전반 51.1%, 20대 후반 42.9%, 30대 전반 51.3% 

16대 대선 투표율 :               , 20대 전반 57.9%, 20대 후반 55.2%, 30대 전반 64.3%

 

이렇게 쪼개놓고 보니까 놀랍게도 16대 대선에서는 20대전반과 20대후반의 투표율이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데(2.7%), 17대 대선에서는 20대전반과 20대후반의 차이가 무려 8.2%입니다.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러고보니 17대 대선에서 20대 전반의 경우, 30대 전반의 투표율과 별 차이가 없네요? 20대 전반만 놓고 봤을 때 20대 보수화론이 사실인지 의심스러워지는군요. 물론 상당수가 이명박 지지를 했다쳐서 보수화되었다고 보더라도, 결코 탈정치화란 말을 붙이긴 민망합니다. 게다가 19세는 오히려 30대 전반보다 투표율이 더 높습니다. 지금의 대학생 초년생들이죠. 등록금 때문에 고생해도 투표 열심히들 합니다!

그런데 조성주씨가 주목한 것은, 17대 대선 때 20대 후반이었던 사람들은, 바로 16대 대선 때 탄핵촛불시위를 주도했던, 그리고 당시엔 57.9%라는 썩 나쁘지 않은 투표율을 보였던(물론 16대 대선 때 20대 전반과 30대 전반의 후표율 차이는 꽤 나는군요) 바로 그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16대 대선 때 20대 후반이었던 사람들이, 17대 대선 때 투표율이 불과 4% 정도 줄어든 반면, 16대 대선 때 20대 전반이었던 이들은 무려 투표율이 15%가 급감합니다. 이거 정말 뭔가 이상합니다. 어떻게 된 거죠?

 

조성주씨는 2002년과 2007년 사이, 즉 참여정부 시기에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2002년은 한국의 내수경기가 침체하기 시작한, 즉 카드대란의 시기입니다. 2003년부터 청년실업 문제가 큰 이슈로 부각되기 시작했고, 2007년 청년실업 100만 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그런데 특히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대학등록금'문제입니다. 대학등록금 1000만원 시대가 동시에 도래했다는 겁니다. 우석훈의 <88만원 세대>가 특히 비정규직 노동 문제를 강조하는 반면, 조성주씨는 그에 덧붙여 '대학등록금' 문제를 더욱 강조합니다. 지금 20후반은 학자금 대출의 빚에 본격적으로 시달리는 세대라는 것이죠.

 

결국 이런 20대 후반 세대들은 한국사회에 대한 환멸을 느꼈던 것이고, 이제 이들은 30대의 문턱으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이 환멸은 이제 투표율이 별로 나쁘지 않은 현재 20대 전반 세대들이 지금의 기나긴 경제위기에 행정인턴과 백수 생활을 하면서 이어받지 않을까 싶습니다. 

<대한민국 20대>는 20대가 맞닥뜨리는 절망의 트라이앵글을, 대학등록금 1000만원, 청년실업 100만, 그리고 사회의 오해와 무관심(20대를 보수화되고 탈정치화된 세대라고 비난하는 인식들), 이 세 가지라고 봅니다. 

 



 저는 주로 이 중 세 번째 논의에 주목해서 정리해보았습니다. 앞의 등록금 문제와 실업 문제는 저 자신도 다룬 적이 있기 때문에, '20대 보수화' 논의가 신선하더군요. 결국 지금의 20대 후반은, 결코 정치에 무관심했던 이들이 아니었습니다. 월드컵, 탄핵촛불, 효순이미선이 촛불 등의 중심에 있었던, 축제로서의 시위문화를 만들었던 세대이자, 디지털 세대로서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세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투표를 안 하고 있습니다. 그건 무관심이라기 보다는 '환멸'이라고 표현하는게 정당할 것 같습니다.

 

"사실 알고보면 20대는 기권한게 아니다. 지난 10여년, 짧게는 지난 5년간 그들의 문제를 외면했던 사회 전반에 대한 불신임에 투표한 것이다. 20대의 보수화니 탈정치화니 하는 허황된 담론보다 더 심각한 것은 그들이 사회 전체에 대해 보이는 환멸이다."(151쪽)

 

이러한 분석을 당사자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아무래도 20대 보수화론은, 기존의 진보진영과 386세대들이 일정 정도 작위적으로 만들어낸 허상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 저도 대학 다닐 때 '의식이 부족하다'는 소리 많이들었는데, 솔직히 전 그랬던 선배들이 잘 살고 있는지, 그렇게 가르치려하고 투철했던 태도가 지금도 유지되고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이미 참여정부의 실험은, 386세대들의 명성에 거품이 있었음을 증명해준 것이죠. 오히려 386세대들은 IMF이후 한국사회 변동의 가장 핵심적인 피해자가 되고 있는 20대들에게 '연대'의 손길을 내밀어야 할 것 같습니다. 사실 386들은 학생운동하면서 자신감에 넘쳐있었죠. 삭발식을 해도 눈물을 흘리고 이러진 않았고 전투적이었지요. 그런데 지금 20대들은 나약하게도(?) 등록금 삭발식 때 울고 있습니다. 지금 우는 20대들을 '나약하다'고 또 비난하실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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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왕자 네버랜드 클래식 17
오스카 와일드 지음, 마이클 헤이그 그림, 지혜연 옮김 / 시공주니어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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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와일드의 유명한 동화 <행복한 왕자>.

 

왕자의 동상은 전체가 순금으로 얇게 도금되어 있으며, 두 눈에는 사파이어 보석이 박혀 있다. 왕자는 인간이었을 때엔, 정원에서 놀고 연회장에서 춤추며 슬픔도 눈물도 모르고 지내왔다. 하지만 동상이 되어, 시 전체를 내려다보았을 때, 그의 눈에선 눈물이 흘렀다.

 



 

1. 여왕의 시녀가 무도회 때 입을 드레스에 수를 놓는 여인. 그 여인은 과부로, 어린 아들이 옆에 앓아누워 오렌지를 달라고 보채고 있다.

 

제비는 왕자의 부탁으로 왕자의 칼자루에 박힌 루비를 뽑아, 여인을 돕는다.

 

2. 극장 연출자에게 갖다줄 희곡을 쓰는 가난한 청년. 너무나 추워 글이 써지지 않고, 정신은 너무 굶어서 맛이 간 상태.

 

제비는 왕자의 부탁으로 왕자의 눈에 박힌 사파이어를 가난한 문학 청년에게 가져다 주었다.

 

3. 팔아야할 성냥을 하수구에 빠뜨린 성냥팔이 소녀(안데르센의 패러디?). 돈을 가져가지 않으면 아버지에게 두들겨 맞을 운명.

 

제비는 왕자의 부탁으로 나머지 눈의 사파이어도 불쌍한 성냥팔이 소녀에게 가져다 준다.

 



 

 

이제 왕자는 앞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이제까지 계속해서 이집트로 가야한다고 고집하던 제비는, 앞으로는 늘 왕자 곁에 있겠다고 한다. 제비는 겨울이라 추운데도 죽지 않고 '착한 일을 해서 생겨난' 온기를 느끼며 버티고 있는 것이다. 철새학자는 겨울에 제비가 있음을 보고 놀라 자빠진다.

 

이제 제비는 왕자가 볼 수 없는 도시 구석구석까지 어려운 사람들, 고통받는 사람들을 찾아서 왕자에게 알려준다.

 

4. 부모에게 버려지고 굶어 얼굴이 누렇게 뜬 두 아이가 추위에떨며 잠을 청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경꾼은 골목에서 자지 말라고 나무라며 아이들을 쫓아낸다. 이제 아이들은 갈 데가 없다.

 

결국 왕자는 제비의 목격담을 듣고 자신의 몸에 도금된 금박을 벗기라고 말한다.

 

왕자는 이제 추한 몰골이 되었고, 제비도 결국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죽게 된다. 왕자의 몸은 두 동강이 난다.

시장, 시의원, 교수 등은 왕자의 추한 몰골을 비웃고, 자신들의 동상을 세우고자 한다.

동상을 녹일 때 왕자의 심장은 이상하게도 녹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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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왕자>는 오리가 백조가 되는 <미운오리새끼>나 잿더미 소녀가 왕자와 결혼하는 <신데렐라><백설공주>등과는 '전혀 반대'의 지향성을 보여주고 있다.

 

먼저 주인공이 다르다. 가난하고 불쌍한 이가 주인공인 여타 동화와는 달리 소위 '가진 자(왕자)'이다.(비슷한 동화가 있다면 <왕자와 거지> 정도?) 가진 자의 성채에서 나와, 시 전체를 조망할 수 있게 된, 어떤 가진 자의 체험을 나타내는 것. 쉽게 알 수 있듯이 이는 '자선'의 형식으로 표출된다.

 

하지만 그 자선은 일반적인 자선과는 달리, 자신의 것을 빼앗기는 것이며 심지어 자신을 파멸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도대체 와일드는 왜 이렇듯 적나라하게 자선의 결과를 묘사하는 것일까. 물론 왕자의 심장은 고온에도 녹지 않고, 나중에 하나님이 주시는 영원한 축복을 누린다. 하지만 내세에서의 영원한 축복을 제시한 것은, 현세에서는 '고통을 겪는다'는 말과 동일한 뜻이다. 왕자의 동반자 제비마저 철새답지 않게 봉사하느라 얼어죽게 된다.

 

오스카 와일드의 이런 의도는, 시장 같은 지배계급들이 왕자의 동상의 몰골을 보고 비웃는 반응에서 유추해 볼 수 있다. 아무리 가난하고 어려운 이를 도와도 현실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자선'의 한계이기도 한 것이다. 왕자의 가치있는 자선은 곧 잊혀질 것이다. 조만간 시장의 동상이 세워질 것이니 말이다. 그들은 물질적 부나 화려함을 자랑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자들이 세상을 지배할 것이다.

 

하지만 와일드의 의도는 왕자/제비 vs 시장,시의원,교수의 대비를 통해 관철될 수 있다. 왕자의 자선은 불완전하지만 어쨌든 사회의 갈등과 모순을 폭로할 수 있다. 이로써 독자들은 자선을 넘어서는 사회의 변화를 상상하도록 초대될 수 있을 것이다.

 



 

강남 인구의 절반 가까이가 기독교인이다. 만일 그들이 부모 때문에 신념없이 다니거나, 단지 교양이나 문화로 다니거나, 혹은 기복신앙으로 다니는게 아니라면, 적어도 기독교 전통은 '자선'을 기독교인의 의무로 제시하고 있다. 나는 자선의 의무가 강남 좌파를 발생시킬 수 있는 기초적인 에토스라고 본다. 하지만 자선이란,  결국 기존 시스템을 유지시키는 도구가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게다가 부자들은 자선을 통해 도덕적 만족과 정당성을 얻고 심지어 종교를 통해 영생까지 취하려 한다. 근본적으로 자선이란 순수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행복한 왕자>는 이러한 자선의 자기만족이 어불성설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훌륭하고 전복적인 동화다. 자선은 자기 것을 빼앗기는 지경으로 나아갈 수 있으며, 아무런 대가도 없을 수 있다는 것. 심지어 비웃음을 살  수 있으며,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을 수 있다는 것. 오히려 사회의 모순만 경험할 수도 있다는 것. 

 

왕자의 자선은, 자선의 행위가 '줄기차게 지속되었기에' 숭고하게 승화된 측면이 있다. 자선을 적당히 하면 그 안에 안주할 수 있다. 하지만 계속할 경우 자기 것을 빼앗길 수도 있는 것이다.

 

이렇듯 일반적인 자선에서 '숭고한 자선(?)'으로 넘어가는 경계, 그 턱을 넘는 지점에서 강남 좌파가 탄생 가능하다고 본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왕자처럼 넓은 세상을 조망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슬픔도 들어오고, 눈물도 흐를지 모른다. 나를 위한 눈물이 아닌, 타인을 위한 눈물 말이다.  

 

삽화출처 : 삽화는 전병준님의 그림 - '행복한 왕자'입니다.
그림 출처는 http://www.chonbj.com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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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 그리고 그 이후
자크 아탈리 지음, 양영란 옮김, 이종한 감수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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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2008년 9월과 10월 글로벌 자본주의 시스템은 사라질 뻔했다. 프랑스 미래학자 자크 아탈리의 진단이다. 9월 15일 이명박과 조선일보가 어이없게 러브콜을 보내던 리먼 브라더스가 파산했다. 세계 최대보험회사 AIG가 손실에 노출되 기어이 국유화되었다. 전 재무장관이었던 헨리 폴슨은 위기에 처한 은행들의 '악성채무'만을 골라 사들이고자 했다. 여기에 우파와 좌파 모두 반발했다. 무엇보다 자신들의 세금을 탐욕의 투기판을 벌인 투자은행에 쏟아붓고자 하는 시도에 미국유권자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9월 29일 하원은 이 계획을 '부결'시켰고, 결국 다우지수는 777포인트 폭락했다. 그러자 은행들은 자신들의 자금을 묶어버렸다. '신용경색'이다. 게다가 서브프라임의 신용등급을 AAA로 진단하여 투자자들을 오도한 무책임한 신용평가기관들이 그제야 보험회사 등의 신용등급을 하향조정했다. 그 회사들의 주가는 재차 폭락했다. 이러자 영국에서는 결국 은행 '국유화' 조치를 취했다. 결국 미국도 영국의 처방에 따라갔다. 구제금융을 받는 기업의 경영진 보수는 제한되었고, 이사회에 정부기구가 참여하게 되었다. 보수적 의원들은 이 방안의 사회주의적 색채에 충격을 먹었다. 이제 위기는 실물경제로 옮겨갔다. 그리고 오바마가 당선되었다. 최근 오바마는 뉴욕타임즈로부터 '당신은 사회주의자입니까'란 질문을 받았다. 오바마는 답하지 않았다. 오바마는 사회주의란 말에는 많은 깊은 의미가 담겨있으므로 그렇게 심플한 질문 자체가 적절하지 않다고 답했다. 지금은 이념을 따질 때가 아니라는게 오바마의 생각인 듯하다.

 



 

자크 아탈리는 연초에 번역출간된 <위기 그리고 그 이후>에서 현재의 위기의 원인 중 핵심은 '사회적 불평등'으로 인한 수요 부족에 있다고 보고 있다. 중산층에게 적절한 임금을 지급하지 않고, 빚을 얻으라고 부추김으로써 시스템의 모순을 계속 덮어왔다는 것이다. 이게 거품이 되어 터진 것이다. 파생상품만 해결하면 되는 것도 아니고, 국유화로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탐욕 때문만도 아니다.  

 

이 책의 미덕은 현재의 경제위기에 대해 역사적인 분석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금융위기는 점점 더 실물경제 위기와 정치 위기를 예고하는" 기능을 수행해왔다. 지금의 위기는 무엇을 예고하는 것일까? 1929 대공황처럼 결국 전쟁이 일어나야 하는가? 아탈리는 최악의 경우 그럴수도 있다고 본다. 미국이 헤게모니 국가로서의 지위를 잃어버릴 것인가? 달러의 생존여부에 달려있다. 그런데 이는 사실상 달러를 많이 가진 중국의 판단에 달려있다. 다행히 아직은 통화위기(달러위기)로는 확산되지 않고 있다. 아마 중국이 내수로 살 수는 없기 때문에, 달러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아직은 미국이 망하면 중국도 위험한 것이다. 그러니 아탈리는 미국이 금방 망할 것 같지는 않다고 본다.

 

70년대의 오일쇼크는 어떻게 극복되었나? 미국의 정보기술혁명으로 극복되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위기는 무엇으로 극복될 수 있는가? 아탈리는 이번 위기가 세계화 이후 첫번째 중대한 위기이며, 네덜란드 튤립투기의 광풍 이후 네덜란드 금융시스템이 성찰적으로 재정비되면서 네덜란드가 세계 경제의 중심으로 섰듯, 이번 위기를 잘 극복하게 되면 굉장한 성장기를 맞이할 수도 있다고 보고 있다. 네덜란드 튤립투기는 인간의 탐욕의 표상으로 주식투자서에 단골로 인용되는 사례이다. 그런데 이러한 거품 이후 네덜란드가 세계 최강국이 되었다는 아탈리의 지적은 낯선 것이며 신선하다. 네덜란드처럼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실질적으로 새로운 부를 생산해내지도 않으면서 소수집단이 합법적으로 남이 만들어낸 부의 상당 부분을 가로챌 수 있는 ... 이런 부조리를 가능하게 하는 체제 따위는 더 이상 존재할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126~127쪽) 지금의 위기는 이런 진실을 사람들이 깨닫도록 해주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는게 그의 생각이다. 깨달았으면 뭔기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다시는 이렇게 살지 말자고. 아탈리가 제시하는 것은 세계 금융규제 기구이다. 다소 실망스러운 대안이다. 하지만 아탈리는 유일한 대안이라고 주장한다.

 

지금까지는 민주주의와 시장이 비교적 긴장 속에서도 잘 지내왔다. 하지만 이제 시장이 민주주의를 질식시키는 상황이다. 이른바 금권정치 상황인 것이다. 시장은 글로벌한데, 법을 구현하는 국가는 시장을 규제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이게 세계화이자 신자유주의다.(물론 아탈리는 신자유주의란 용어를 쓰지 않는다) "쳐들어갈 겨울궁전도 해방시켜야 할 바스티유 감옥도 없는 셈이다!"(142쪽) 문제는 민주주의와 시장이 공유하고 있는 공통가치, 곧 '개인의 자유'라는 원리이다. 민주주의는 결국 소비자민주주의가 되었고, 개인의 탐욕을 제어하지 못하게 되었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에 따르면, 소비자의 선택의 자유는 민주주의와 시장이라는 두 원리를 교묘하게 결합시켜왔다. 소비자는 선택의 '민주적' 자유를 누리면서 시장의 메커니즘에 빨려들어간다. 그런데 소비하지 못하는 자는 이제 사회의 '쓰레기(waste)'가 된다.)   

 



 

이제 더이상 일국 단위의 해결책은 불가능하다. 이것이 '보호주의'로의 길이다. 왜 2차대전이 일어났는가? 각 나라가 대공황의 여파로 각자 먹고살겠다고 보호무역주의로 퇴거하지 않았는가. 아탈리는 보호주의는 대안이 될 수 없다고 본다. 특히 전쟁이라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금융시장을 제대로 관리감독할 수 있는 세계적 기구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도출한다. 이러한 그의 견해는 현재 유럽국가들에서는 광범위하게 논의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과연 동유럽이 쓰러지고 자기 나라가 위험에 빠질 때, 공동 협력 기구를 만들 수 있을까? 특히 미국이 동참할까? 아탈리는 이 해결책이 유토피아적이란 점을 인정한다. 하지만 이것만이 남아있는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한다. 특히 민주주의를 유지하기 위해선 더더욱 이 해결책밖에 없다. 아니면 전체주의 파시즘으로 가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일단 여러 곳에 분산된 금융감독 권한을 단일 기구로(당장은 IMF로) 통합하고, 나아가 달러가치 폭락을 대비해서 세계 단일 통화를 모색하는게 해법이라고 한다.

 

물론 내가 생각하는 다른 해결책도 있다. 바로 혁명이다. 어떤 형태의 혁명이 될런지는 모르지만, 공황이 생각보다 길어질 경우 혼돈 속에 (사회주의적이든 어떤 형태든) 혁명이 발생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아탈리 같은 중도주의자는 배제하는 예측이지만, 확률이 낮다고 해서 발생하지 않는다 단언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러시아혁명도 아무도 예측할 수 없던 혁명이지 않았는가. 

 

"부의 분배를 문제 삼지 않으면서 미국의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임금을 인상하지 않고 수요를 창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중산층이 빚을 지는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암묵적인 동의 속에서 1980년대 초부터 소비재구입용 각종 신용카드 발급, 주택 구입을 위한 특별 담보 대출 등을 통해 미국 사회가 기능해온 방식이다."(52쪽)

한국의 경제위기 해결 방식도 다시금 서민들이 빚을 내게 하고 중산층을 몰락시키는 방식이다. 부동산은 붙들고 있으며, 임금은 삭감하고. 유효수요를 죽이고 있다. 전세계가 불황인데 수출이나 떠벌이고 있는 것이다.(기껏해야 현대차나 살아남는 정책 아닌가) 향후 몰락하고 빚지는 국민들은 늘어날 것이다. 도대체 미국의 방식을 반복할 것인가? 과감히 '부의 분배'를 문제삼아야 한다. 부유층을 '건드려야'한다. 분명 금융자본주의는 소수세력에 의한 개미투자자의 합법적이고 매우 비도덕적인 착취라는게 이번 공황을 통해서 드러나고 있는데, 더이상 무엇이 문제인가. 그런면에서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이 신앙과도 같이 붙들고 있는 <시장근본주의과 개발독재의 이상한 조합>은 버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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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대, 과연 보수화되었는가? '환멸'을 표시했을 뿐
    from chihyun7님의 서재 2009-06-05 17:25 
    "20대는 보수적이고 정치에 무관심하다"는 생각은 우리 사회에 상딩히 널리 퍼져 있습니다. 어제 올린 글에서는, 20대가 정치에 무관심한 것을 꼭 보수화라고 해석해야 하는지, 오히려 20대가 18대 대선 때 참여정부를 심판한 것일수 있다는 <88만원세대>의 공저자 박권일씨의 주장을 인용하여 딴지를 걸어봤습니다. 나아가 '경제대통령'담론으로 참여정부 덕분에 선출된 현 정부에 대해서도, 20대들이 참여정부에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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