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왕자 네버랜드 클래식 17
오스카 와일드 지음, 마이클 헤이그 그림, 지혜연 옮김 / 시공주니어 / 200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오스카 와일드의 유명한 동화 <행복한 왕자>.

 

왕자의 동상은 전체가 순금으로 얇게 도금되어 있으며, 두 눈에는 사파이어 보석이 박혀 있다. 왕자는 인간이었을 때엔, 정원에서 놀고 연회장에서 춤추며 슬픔도 눈물도 모르고 지내왔다. 하지만 동상이 되어, 시 전체를 내려다보았을 때, 그의 눈에선 눈물이 흘렀다.

 



 

1. 여왕의 시녀가 무도회 때 입을 드레스에 수를 놓는 여인. 그 여인은 과부로, 어린 아들이 옆에 앓아누워 오렌지를 달라고 보채고 있다.

 

제비는 왕자의 부탁으로 왕자의 칼자루에 박힌 루비를 뽑아, 여인을 돕는다.

 

2. 극장 연출자에게 갖다줄 희곡을 쓰는 가난한 청년. 너무나 추워 글이 써지지 않고, 정신은 너무 굶어서 맛이 간 상태.

 

제비는 왕자의 부탁으로 왕자의 눈에 박힌 사파이어를 가난한 문학 청년에게 가져다 주었다.

 

3. 팔아야할 성냥을 하수구에 빠뜨린 성냥팔이 소녀(안데르센의 패러디?). 돈을 가져가지 않으면 아버지에게 두들겨 맞을 운명.

 

제비는 왕자의 부탁으로 나머지 눈의 사파이어도 불쌍한 성냥팔이 소녀에게 가져다 준다.

 



 

 

이제 왕자는 앞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이제까지 계속해서 이집트로 가야한다고 고집하던 제비는, 앞으로는 늘 왕자 곁에 있겠다고 한다. 제비는 겨울이라 추운데도 죽지 않고 '착한 일을 해서 생겨난' 온기를 느끼며 버티고 있는 것이다. 철새학자는 겨울에 제비가 있음을 보고 놀라 자빠진다.

 

이제 제비는 왕자가 볼 수 없는 도시 구석구석까지 어려운 사람들, 고통받는 사람들을 찾아서 왕자에게 알려준다.

 

4. 부모에게 버려지고 굶어 얼굴이 누렇게 뜬 두 아이가 추위에떨며 잠을 청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경꾼은 골목에서 자지 말라고 나무라며 아이들을 쫓아낸다. 이제 아이들은 갈 데가 없다.

 

결국 왕자는 제비의 목격담을 듣고 자신의 몸에 도금된 금박을 벗기라고 말한다.

 

왕자는 이제 추한 몰골이 되었고, 제비도 결국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죽게 된다. 왕자의 몸은 두 동강이 난다.

시장, 시의원, 교수 등은 왕자의 추한 몰골을 비웃고, 자신들의 동상을 세우고자 한다.

동상을 녹일 때 왕자의 심장은 이상하게도 녹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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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왕자>는 오리가 백조가 되는 <미운오리새끼>나 잿더미 소녀가 왕자와 결혼하는 <신데렐라><백설공주>등과는 '전혀 반대'의 지향성을 보여주고 있다.

 

먼저 주인공이 다르다. 가난하고 불쌍한 이가 주인공인 여타 동화와는 달리 소위 '가진 자(왕자)'이다.(비슷한 동화가 있다면 <왕자와 거지> 정도?) 가진 자의 성채에서 나와, 시 전체를 조망할 수 있게 된, 어떤 가진 자의 체험을 나타내는 것. 쉽게 알 수 있듯이 이는 '자선'의 형식으로 표출된다.

 

하지만 그 자선은 일반적인 자선과는 달리, 자신의 것을 빼앗기는 것이며 심지어 자신을 파멸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도대체 와일드는 왜 이렇듯 적나라하게 자선의 결과를 묘사하는 것일까. 물론 왕자의 심장은 고온에도 녹지 않고, 나중에 하나님이 주시는 영원한 축복을 누린다. 하지만 내세에서의 영원한 축복을 제시한 것은, 현세에서는 '고통을 겪는다'는 말과 동일한 뜻이다. 왕자의 동반자 제비마저 철새답지 않게 봉사하느라 얼어죽게 된다.

 

오스카 와일드의 이런 의도는, 시장 같은 지배계급들이 왕자의 동상의 몰골을 보고 비웃는 반응에서 유추해 볼 수 있다. 아무리 가난하고 어려운 이를 도와도 현실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자선'의 한계이기도 한 것이다. 왕자의 가치있는 자선은 곧 잊혀질 것이다. 조만간 시장의 동상이 세워질 것이니 말이다. 그들은 물질적 부나 화려함을 자랑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자들이 세상을 지배할 것이다.

 

하지만 와일드의 의도는 왕자/제비 vs 시장,시의원,교수의 대비를 통해 관철될 수 있다. 왕자의 자선은 불완전하지만 어쨌든 사회의 갈등과 모순을 폭로할 수 있다. 이로써 독자들은 자선을 넘어서는 사회의 변화를 상상하도록 초대될 수 있을 것이다.

 



 

강남 인구의 절반 가까이가 기독교인이다. 만일 그들이 부모 때문에 신념없이 다니거나, 단지 교양이나 문화로 다니거나, 혹은 기복신앙으로 다니는게 아니라면, 적어도 기독교 전통은 '자선'을 기독교인의 의무로 제시하고 있다. 나는 자선의 의무가 강남 좌파를 발생시킬 수 있는 기초적인 에토스라고 본다. 하지만 자선이란,  결국 기존 시스템을 유지시키는 도구가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게다가 부자들은 자선을 통해 도덕적 만족과 정당성을 얻고 심지어 종교를 통해 영생까지 취하려 한다. 근본적으로 자선이란 순수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행복한 왕자>는 이러한 자선의 자기만족이 어불성설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훌륭하고 전복적인 동화다. 자선은 자기 것을 빼앗기는 지경으로 나아갈 수 있으며, 아무런 대가도 없을 수 있다는 것. 심지어 비웃음을 살  수 있으며,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을 수 있다는 것. 오히려 사회의 모순만 경험할 수도 있다는 것. 

 

왕자의 자선은, 자선의 행위가 '줄기차게 지속되었기에' 숭고하게 승화된 측면이 있다. 자선을 적당히 하면 그 안에 안주할 수 있다. 하지만 계속할 경우 자기 것을 빼앗길 수도 있는 것이다.

 

이렇듯 일반적인 자선에서 '숭고한 자선(?)'으로 넘어가는 경계, 그 턱을 넘는 지점에서 강남 좌파가 탄생 가능하다고 본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왕자처럼 넓은 세상을 조망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슬픔도 들어오고, 눈물도 흐를지 모른다. 나를 위한 눈물이 아닌, 타인을 위한 눈물 말이다.  

 

삽화출처 : 삽화는 전병준님의 그림 - '행복한 왕자'입니다.
그림 출처는 http://www.chonbj.com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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