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어떻게 작동하는가]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서울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 그리고 삶은 어떻게 소진되는가
류동민 지음 / 코난북스 / 2014년 12월
평점 :
절판


올라가기도, 버텨내기도 힘든 서울의 작동원리 <서울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나에게 서울은 낮선 곳이다. 우리나라 인구의 사분의 일이 서울에 있다는데, 나는 안타까운 일인지 다행한 일인지 그 사분의 일에 해당되지 않는다. 고백을 하나 해야겠다. 교통체증이 그리 심하지 않고, 북적대는 사람들 틈바구니에 놓일 일 없이 사는 나는 가끔씩 서울에 올라가면 숨이 턱 막히고 정신이 온전하지 못하기도 한다. 신호등이 켜질때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순식간에 밀려 건너는 사람들에 겁을 먹고 뒷걸음질 치는 때도 있었고, 지하철 속 인파에 휩쓸려 내가 가야하는 노선을 잘 못 탄 적도 있다. 그렇게 나에게 서울은 두려움의 공간이자 미지의 공간이었다.

 

물론 지금은 좀 나아져서 서울에 올라가 젊은 사람들이 붐벼대는 곳에 머물기도 하고, 다양한 문화적 혜택을 받고 즐기는 욕망을 표출하기도 한다. 그리고 의도적으로 좋은 카페에 앉아 물끄러미 사람들을 바라보며, '이 많은 사람들은 이 좁은 곳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를 자문하기도 한다. 수많은 성공한 사람들과 근근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기묘하고 절묘하게 공존하는 서울은 해가 바뀌고 나이가 들어도 내가 서울에 살아가지 않는 이상(살아가더라도) 그 실체를 잘 모를 일이다.

 

유동민의 <서울은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읽었다. 모든 소비와 생산의 원천이고, 수많은 사람들이 과포화 상태로 거주하는 곳, 수도 서울의 이야기를 책 속에 담았다. 경제학자답게 서울의 작동원리를 정치경제학으로 요리했다. 그리고 그 속에 자신의 철학과 상념을 양념으로 뿌려놓았다. 몰랐던 서울의 실체에 한 발 다가갈 수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면 서울의 무엇으로 작동되고 있는가. 저자는 배제와 물신의 공간으로서의 서울을 말한다. 배제는 말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의미, 다시 말하면 시장경제체제로의 서울을 말한다. 돈을 내지 않은 자는 소비할 수 없다는 단순명쾌한 논리이며, 반대로 자본이 충분해 일정한 자격을 갖추면 만족감이나 우월감을 갖는 도시가 서울이란 것이다. 여기에 물질적인 것을 숭상하는 물신주의가 더욱 견고하게 작동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배제와 물신(fetish)의 키워드는 이 책 전반을 관통한다. 소비의 형태도 그렇고, 사는 곳의 물리적 환경도 그렇다. 또한 사교육과 대학으로 점철되는 교육도시로서의 서울의 모습도 결국 배제와 물신의 키워드가 강하게 작용한다. 사람들은 배제와 물신을 위해 서울로 몰려들며, 그 속에서 욕망을 분출하고, 또한 그 욕망으로 인해 좌절한다.

 

서울은 고도의 압충성장의 상징적인 도시이다. 그러하기에 철저한 자본의 원리로 이루어져있고, 그 속에서 자본 소유의 생존을 벌인다. 반대 급부로 타락한 자본주의의 모습이 적날하게 드러나 보이는 곳이며, 능력주의로 포장하지만 실상은 세습자본과 학벌자본으로 점철된 곳 그 곳이 서울이다.

 

우리는 지금도 계속 서울로 서울로 러시를 해 나간다. 자본이 모여있는 곳이기 때문에, 직업을 갖기 위해서,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서 서울로 몰려든다. 너무나 당연한 우리 사회의 구조, 우리의 수도 서울에 대한 이러한 수요와 욕망을 누구도 무시할 수 없다. 문제는 그럴 수록 서울은 누구나 들어가기를 욕망하지만, 역설적으로 누구나 들어올 수는 없는 곳, 그래서 이들의 환상이 더욱 커지는 곳이 되어가는 것이다. 누구나 들어올 수는 없는 곳, 배제의 공간으로서 서울은 그렇게 확고히 자신의 위치를 만들어 나간다.

 

이 책의 부제는 -그리고 삶은 어떻게 소진되어가는가 -이다. 그래서 그럴까. 책을 읽으면 자본의 욕망, 물신의 욕망이 웅크린 서울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래서 음울하고 어둡다. 읽어가는 것만으로도 삶이 소진되는 느낌으로서 이 책은 그래서 답답하다. 결국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재주껏 알아서 살아남으라(p239)는 것인가. 아님 두 개의 사회(p261)가 공존하는 서울의 본 모습을 바라보라는 것인가.

 

저자가 하고자 하는 말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요컨대, 비굴하지 않고도 먹고살 수 있는 삶 혹은 먹고사는 것 때문에 생겨나는 비굴함을 최소화하는 것은 평등주의적 열망을 긍정적인 에너지로 전환시키는 것을 통해서 가능한 일일 것이다."(p282)나 "그러하므로 비록 추상적이지만, 돈의 논리 때문에 왜곡되는 우리의 기억, 억압당하는 이들의 기억을 복권시키는 것에서 공간 생산의 정치경제학은 시작되어야 한다.(p285)에서도 확인할 수도 있듯이 그는 서울의 물신과 배제를 충분히 경계함을 인정한다. 하지만 점점 독자로서 느껴지는 화려한 괴물로서의 서울의 이 기괴함을 어찌할 수 없다.

 

책 한편에 온전한 신경을 쓰며 읽기를 반복했다. 필자의 사변체적인 느낌으로 연유한 것일 수도 있으나, 그것보다도 필자가 말하고 싶은 것에 초점을 더 두며 읽어가려 한 까닭이다. 전반적으로 느껴지는 신자유주의적 경제를 비판하는 듯한 이 학자가 서울이라는 공간을 소재 삼아 말하려는 것이 무엇이었을까. 비판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대안은 쉽지 만들어지지 않듯이, 이 학자가 극복하기 위해 무슨 말을 할까 집중해서 읽은 탓에 피로도가 큰 것도 사실이다. 부셔야 할까. 다듬어야 할까. 서울이란 공간 속에서 살고 잇지 않은 나에게 그래서 서울이란 도시는 어렵다.

 

 

"자연은 사람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주어진 것이지만, 사람들은 그 자연 위에 공간을 만들어낸다. 공간은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욕망과 행동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 만들어지며, 그렇게 만들어지는 공간은 다시 사람들의 욕망과 행동을 만들어나간다. 그러므로 사람은 공간을 만들고 공간은 사람을 만든다.(p17)

 

"기억의 공간은 그렇게 사라지며 새로 생겨나는 공간들은 점점 더 배제의 원리를 강화한다.(p123)

 

"단도직입하자면, 자녀에게 성과가 불확실한 학벌자본을 얻도록 투자해 주는 것보다는 좋은 위치에 있는 비싼 아파트 한 채를 물려주는 것이 더 확실한 방법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p150)

 

"그렇지만 꿈꾸는 공간에 이미 들어가 있는 이들은 그곳에 들어오고 싶어 하는 이들을 따돌리고 접근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더 많은 환상을 충족하기도 한다. 바로 그럴 때, 역설적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이들의 환상 또한 더 커지게 마련이다. 누구나 들어올 수는 없는 곳, 바로 배제의 공간은 그렇게 만들어진다.(p238)

 

"수직적 위계 구조를 가지는 권력의 논리는 공간의 배치 방식에도 드러나며, 다시 공간의 배치 방식은 그 안에서 지내는 사람들로 하여금 수직적 위계 구조에 익숙해져 복종하도록 만든다. 서고 구석구석에 퍼질러 앉아 자유롭게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 의견이나 관심사가 같거나 다른 사람들이 편하게 모여 앉아 논쟁을 벌일 수 있는 공간이 갖추어진 도서관과 그렇지 못한 도서관.(p248)

 

"뒤집어 생각해보면 거시적 위험과 불안이 상존하는 사회에서 개인은 누구나 알아서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는 수밖에 없게 된다. '알아서 살아남기', 그러므로 이것은 지금 여기 서울의 공간에서 적용되는 중요한 생존 원칙이다.(p278)

 

 

덧붙임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물론 솔직한 리뷰이기도 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교육과정 콘서트 - 통합교과수업을 위한 행복한 멘토링 교과서, 2014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도서 행복한 교과서 시리즈 7
이경원 지음 / 행복한미래 / 201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주제중심으로 교육과정을 재구성하는 해답 <교육과정 콘서트>


​'깊게 파려면 넓게 파야 된다'라는 말이 있다. 흙을 파본 경험이 있다면 당연히 알 것이다. 넓게 파지 않고 좁게 깊이 판다면 옆에 있는 흙이 구멍으로 무너져 내린다. 책을 읽는 일도 마찬가지 일 듯하다. 내가 관심이 있는 분야만 파고 또 파게 되면 지식의 폭과 사람의 이해의 넓이도 최소한으로 한정될 것임이 분명하다. 더군다나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빈약한 사견과 관점은 항상 경계해야 된다고 다짐한다. 그래서 넓게 읽으려고 노력하는데, 하 거참, 다시 교육 분야 책 속에서 유영하게 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더란 말인가.

 

이경원 선생님의 <교육과정 콘서트>를 읽었다. 요즘 교육과정 재구성 방식에 꽂혀 있어서 그런지, 보자마자 읽어야겠다 생각했다. 만나서 이야기를 하고 토론하면 좋겠으나, 그럴 수 없기에 선배 선생님들의 다양한 경험을 책으로나마 받아들이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요즘 부쩍 드는 '나는 진짜 교사인가', '너무 수동적으로 안일하게 살고 있지는 않는가', '왜 가르치는지에 대한 고민을 하고는 있는가'의 다소 정리하지 못하고 있는 철학적 고민과도 맞닿아 있어 더욱 읽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읽으면서 드는 생각. 이 책 참 좋다는 것이다. 단순히 '책 어때요?'라고 물을 때 '그냥 좋아요'라고 의미 없이 대답하는 것이 아니다. 책을 읽어가면서 재구성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얻었고, 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지에 대한 실천적 답의 한 조각도 얻었다. 더욱이 새로운 아이들을 얼른 만나고 싶은 열정이 확 타올랐으니 '굉장히 배울게 많은'이라는 의미의 '좋다'이다. 교육과정재구성에 관심 있는 선생님은 꼭 읽어봤으면 좋겠다.​

 

이 책은 저자가 직접 주제중심 교육과정 운영하면서 얻은 실천 보고서이다. 1부, 2부는 저자의 교육, 교육과정, 학생, 배움에 대한 철학을 담았고, 그 철학을 토대로 3부, 4부에서는 직접 주제 중심 교육과정으로 재구성해 실천한 다양한 모습을 담았다. 책을 선생님의 안내에 따라 쭉 읽어가다 보면 어느새 그 생각의 타당성과 정당성을 이해하게 된다. 아울러 나만의 교육과정 재구성에 대한 고민과 선택지를 얻어 가는 기쁨도 누린다.​​

 

교과서는 말 그대로 교육과정을 잘 가르치기 위한 예시서이다. 굳이 교과서를 진도 맞추기용으로 전도시키지 말아야 한다. 터덕터덕 교과서 진도 빼기에 바빴던, 그래서 교과서를 다 가르치면 나는 최선을 다했다고 말했던 것을 요 몇 년 줄기차게 반성했었다. 그런데 앎과 실천이 분리되어 있어서 어찌할 바를 몰랐던 적이 많았다. 교육과정을 들여다보고 성취기준에 초점을 두고 교육을 해도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었다. 그래서 요즘 나도 다시 교육과정의 새 판을 짜는 것에 몰두해 있었는데, 주제중심 교육과정 재구성 방식에 많은 아이디어를 얻었다.

 

<가르칠 수 있는 용기>(​파커, 한문화, 2008)에서 파커 역시 "우리는 주제가 '중앙에 앉아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진리의 커뮤니티에서 종합적인 방안을 찾아야 하고 또 찾을 수 있다. 따라서 교실은 교사 중심도 아니고 학생 중심도 아닌, 주제 중심이 되어야 한다."(p217)라고 말하고 있지 않는가. 결국 아이들과 나와 학부모의 삶을 어떻게 하나의 주제로 녹여내느냐가 문제일 듯하다. 이것은 철학의 문제이기도 하고 가치의 문제이기도 하다. ​

 


​"아무리 사회가 경쟁을 요구한다 하더라도 최소한, 학교 안에서만큼은 경쟁이 아닌 협력의 가치를 실천하고 배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그랬을 때 우리 사회가 건강하게 유지될 수 있다고 말이죠. 진짜 경쟁은 학교를 졸업한 후 각자가 전문가가 된 다음 전 세계의 젊은이들과 경쟁하는 것이 진짜 경쟁이 아닐까요?"(p73)

 

"결국 '왜'라는 물음부터 찾아 들어가지 않고선 아이들의 무기력함을 해결해 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교사 스스로 '왜'라는 질문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어야 했고, 그것이 바로 배움을 바라보는 눈을 키우는 것이었습니다. 즉 교사 스스로 자신을 성찰하지 않고서는 이 물음들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성찰을 제대로 실현해 내기 위해 선택한 것이 교육과정 재구성이었으며, 이렇게 시작한 것이 바로 '주제중심교육과정'이었던 것이죠.(p135)

 

"주제중심교육과정을 운영하면서부터는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것들을 연결하고 그것들이 다시 주변의 비슷한 유형들과 융합하는 과정을 겪고 있다는 것이었죠. 이렇게 시작하다 보니 어느새 이 세상 모든 것이 연결되지 않은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고 할까요? 기존의 것들도 새롭고 낯설게 보는 일이 바로 주제중심교육과정을 운영하며 겪게 되는 가장 의미 있는 일 중의 하나였습니다.(p149)

 

"주제를 정하는 세 가지 방법을 정리해 보자면
첫째, 아이들과 어떤 마음을 나누고 싶은지 생각한다. 둘째, 교육과정 성취기준을 전체적으로 분석하고 확인한다. 셋째, 학교의 행사나 계절적 요인들을 반영한다.(17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괜찮아, 아직 청춘이잖아! - 청춘들을 위한 마음치유서
김영아 지음 / 신원문화사 / 201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마음이 아픈 우리 모두를 위한 독서치유 이야기 <괜찮아, 아직 청춘이잖아!>


며칠 전에 현장 연수에서 김영아 교수의 강의를 들었다. 독서 치유에 관한 연수였는데 개념을 잡는데 도움이 많이 되었다. 독서 치유는 '독서'에 방점이 찍히는 것이 아니라 '치유'에 방점이 찍힌다는 말에 공감을 하였다. '치유'에 방점이 찍힌다는 것은 '상담'에 초점을 둔다는 것인데, 그런 의미에서 책은 상담, 즉 치유를 위한 도구가 된다. 더욱이 신들린 듯한 강의는 때로는 같이 울면서, 때로는 같이 웃으면서 몰입하게 만드는 재미가 있었다. 유익한 연수였다.

 

<괜찮아, 아직 청춘이잖아!>는 독서 치유에 관한 이야기이다. 저자가 독서 치유 과정에서 일어난 이야기들을 통해 상처 입은 우리들의 아픔을 어루만져주는 과정을 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제목이 굉장히 어색하다. 아픔이라는 것이, 내면의 문제라는 것이 비단 청춘들을 위한 전유물은 아닐 텐데, 마치 청춘들을 위한 삶의 지침서 같은 느낌이다. 제목만 놓고 보면 <아프니까 청춘이다>류의 '눈부신 청춘이니 웃어라'라는 아류의 이미지가 강하다. 아마도 출판사가 매출을 올리기 위해 카피를 뽑은 느낌이다. 저자도 제목을 바꾸어 다시 찍어낸다고 하는 것을 얼핏 말하는 것을 보니 나만 거부감이 든 것은 아닌 듯하다.

앞에서도 썼듯, 이 책은 독서 치유에 대해 말하는 책이다. 상담자로서 저자는 상처 입은 내담자를 만나고 있다. 그리고 그 내담자와의 상담을 통해 문제를 공감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책'을 선택한다. '책 읽는 행위'라는 것이 결국 치유의 과정이라는 것인데 그 원리는 이렇다. 문학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서사가 읽는다는 것이고, 서사를 읽는다는 것은 다양한 인물들의 심리적, 사회적, 정서적 상황을 읽는다는 것과 같다. 그래서 독자는 책을 읽어가면서 다양한 인물에게 동화되기도 하고, 동일시하며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카타르시스는 삶을 다시 재정의하며 바라보면 통찰의 길로 안내하는 것이다.

다양한 내담자들이 이 책에 등장한다. 외로움에 지쳐있는 사람, 부모에 학대받은 사람,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사람, 무기력에 빠져 있는 사람, 사랑에 천착해 자신을 망치는 사람 등 다양하다. 비단 이 사람들의 문제만이 아니겠다. 우리 모두는 상처가 있고 그것을 안고 산다. 내면아이라고 불러도 좋고, 트라우마라고 해도 좋다.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는 신경증 환자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그러한 우리 모두의 모습을 다루고 있으며 저자는 그 한복판에서 우리들을 공감하고 위로하려고 노력한다.

책을 읽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경험을 할지도 모르겠다. 삶이란 게 녹녹한 게 아니라는 것, 그리고 '사람은 누구나 아프다'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어서 '나만 아픈 게 아니'라는 묘한 동질감을 갖게 한다. 더불어 내가 아픈 건 나의 잘못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편하다. 한 사람을 위로할 수 있을 때 나의 상처도 위로받는 경험을 하는 것처럼 책 속의 사연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그것을 공감하면서 나 또한 나의 내면의 상처를 보기도 했다.

이 책이 '치유'에 방점이 찍혀있는 책이라는 것은 읽으면서 바로 느낀다. 책 읽기에 초점을 두지 않기에 상담 내용이 주가 되고 책에 관한 내용은 소개 형식으로 나와 있다. 그래서 채에 방점을 두고 소개하는 <책은 도끼다>,<감정 수업>같은 작품과는 분위기가 다르다. 혹여 다양한 책에 대해 깊이 있게 알고 싶다면 이 책은 그리 효과적이지 않다. 다만 챕터마다 상처를 보듬을 수 있는 책을 소개해 놓았기에 참고는 될 수 있겠다. 그리고 좀 생뚱맞긴 하지만 독서치료란 무엇이며, 상황별 독서치료 리스트를 부록으로 붙여놓아 독서 치료에 대해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약간이나마 팁을 주기도 한다.

서두에서 말했듯, 책도 좋은데 이 분의 강의는 더욱 좋았다. 개인적으로는 책보다 강의에 더욱 특화되어 있는 천상 상담자, 강의자라는 느낌이 들었다. 나 스스로도 강의를 들으면서 내 '내면아이'나 나의 트라우마를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아픔이 있고, 신경증이 있다. 다만 이러한 아픔을 슬기롭게 치유하는 힘, '지금 여기'에서 서 있을 수 있는 힘이 나에게는 건강하게 지탱하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다. 그리고 이러한 치유의 힘은 독서에 있음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된 것도 감사한 일이다.

 

​"이 책은 이런 여행이고자 한다. 저 슬픔의 바다에 나의 슬픔도 한 방울 더 얹어 함께 바닷물이 되는 일이다. 남의 슬픔과 나의 슬픔을 비교하지 않고, 겨루지 않고, 너와 내가 똑같은 것으로 아파한다고, 우리는 같은 것을 그리워하고 같은 것에 힘들어했다고, 더 이상은 혼자가 아니라고, 실패를 경험하고 넘어져 일어설 수 없다고 손사래 치는 그를 일으켜 세워 괜찮다고 서로 어루만지며 함께 바닷물이 되는 여행이다."(p25)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이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으면 매일이 즐겁다. 잠자리에 들 때면 내일 할 일에 벌써 설레고, 아침에 깨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신 나게 움직인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 열정 순이다."(p45-46)


"오늘부터 나는 관객이다. 이제 더 이상 자신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누군가에 기대어 생각하기도 그만두자. 나는 관객이다. 객석에 편안히 앉아 지금부터는 내 주변의 사람들을 그저 바라보기만 한다. 그들은 배우다. 무대에 올라와 어머니 역할을 하고, 교수 역할을 하고, 친구 역할을 하고, 선임자 역할을 하는 저 배우들을 가만히 바라본다. 그들의 말을 대본처럼 드는다.(p76)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일은 내가 나 자신을 믿는 일이다. 때문에 우리가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실패가 아니라 포기다. 도전하지 않는다는 건 내가 나 자신에게 나를 믿을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이다. 자발적인 나의 의지로 도전하게 되면 결과가 어떻든 '나는 나를 믿었다'라는 황금 같은 경험이 남는다. 최선을 다했다는 경험 하나가 백 개의 실패 경험을 백지화시킨다."(p20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 어려운 시대에 안주하는 사토리 세대의 정체
후루이치 노리토시 지음, 이언숙 옮김, 오찬호 해제 / 민음사 / 2014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 시대 슬픈 젊은이들의 자화상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얼마 전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패션 디자이너가 직원들을 한 달에 10~30만 원의 급여로 장시간 일을 시켜 논란이 된 적이 있었습니다. 결국 이 디자이너는 사과를 했지만 아직도 시끄럽습니다. 또한 인터넷쇼핑 회사가 인턴들에게 최저임금으로 장시간 노동을 시키고, 결국 해고를 해서 분개한 네티즌들이 회원을 탈퇴하고 불매운동으로 이어지기도 했었지요. 이른 바 '열정 페이'라는 것인데요. 이게 머냐면 젊은 청년들은 열정이 있기에 급여가 적을지라도 스펙을 위해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우리 사회 청년들의 씁쓸한 모습을 잘 반영하고 있는 듯합니다.

나라가 무엇인가 잘못되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열정페이'와 '갑을 논란', '취업 고통', '세대 간의 불통, '저출산 등의 일련의 과정이 나라가 점차 절망적으로 변하는 것 같은 느낌도 듭니다. '노동 운동', '민주화 시위' 등 예전에는 시대와 사회의 문제를 제기하고 먼저 일어선 사람들이 젊은 청년들이었던 것 같은데 요즘은 너무도 조용합니다. 취업 걱정으로 정신 없어서 그렇다는데 어찌 된 일인지 젊은 사람들은 제도를 바꾸는 힘인 투표에서조차 무기력합니다. 여력이 없어진 것일까요. 아님 관심이 없어진 건가요.

후루이치 노리토시의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절망적인 나라에서 그들이 취할 수 있는 생각과 행동은 한계에 있을 수밖에 없음을 느꼈습니다. 이 책은 일본 이야기입니다. 책을 읽고 나면 적어도 현대 일본의 젊은이들에 대해 대략적으로나마 파악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습니다. 만성 재정 적자의 상태가 되어 가고 있으며, 빠른 속도의 인구 감소와 출산율 저하, 그리고 급속도의 고령화 상태가 되어 가고 있는 일본을 절망적이라고 필자는 말합니다. 그리고 거품 경제 붕괴 후 비정규직 취업이 일상이 되고 노인들의 삶까지 책임져야 할 지금의 일본 젊은이들에게 일본은 '절망의 나라'라고 정의합니다.

그런데 희한한 게 있습니다. 바로 그런 절망의 나라에 살고 있는 젊은 당사자들은 정작 자신들은 행복하답니다. 일본 내각부에서 발표한 「국민 생활에 관한 여론 조사」에 의하면 2010년도 시점에서 20대 남성의 65.9%, 20대 여성의 75.2%가 현재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격차 사회'라느니, '젊은이는 불행하다.'라느니 하는 갖가지 연설이 범람하는 가운데도, 오늘날 20대의 약 70%는 지금 생활에 만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20대 남성의 경우는 과거 40년 사이에 15%나 만족도가 상승하는 양상을 보이기까지 했답니다.(p129-130) 왜 그럴까요? 일본인 특유의 긍정성 때문일까요. 아니면 힘들지만 행복을 추구하려는 마음가짐을 갖기 위해 요즘 일본 젊은이들은 자기 수련을 하는 것일까요. 진짜 행복한 걸까요. 궁금해졌습니다. 왜 절망의 나라에서 젊은이들은 행복하다고 하는지 말입니다.

이 책은 그 답을 찾아가는 분석론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일본 사회에서 젊은이론을 정의하고, 젊은이의 문제를 사회 구조적인 문제로 파헤치는 책입니다. 요약하자면 그 까닭은 이렇습니다. 지금 생활에 불만족하다는 것은 앞으로 사회가 더 나아질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지금은 불행하지만, 장차 더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때라고 합니다.(p133) 따라서 불만족하다는 것은 미래의 가능성이 남아 있다는 의미이지요. 그렇다면 바꾸어 말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젊은이들이 행복해한다는 것은 앞으로의 사회가 '이보다 더 행복해질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이 들고 있다는 의미이고, 미래에 희망을 걸지 않고 포기하였기에 지금의 현재가 최선이라고 여기고 있다고 말입니다. 즉, 일본의 젊은이들은 절망적인 미래를 무의식적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일본 젊은이들은 미래의 행복을 찾을 수 없다고 느낍니다. 그들은 '찬란한 미래'를 접어둔지 오래이고, 그러하기에 진취적이지 않고 세상을 달관하고 있는 것이지요. 지금 일본의 젊은 세대를 '사토리 세대'라고 하는데요. 사토리는 '득도'했다는 의미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현재 상황을 되는대로 받아들이고 앞으로의 미래를 위해 아둥바둥하지 않는다는 거지요. 그리고 현재에 만족한다는 겁니다. 앞으로의 미래를 위해 나아가지 않고 희망을 포기하는 슬픈 현실을 풍자하는 말입니다.

이 슬픈 현실을 견디기 위해 그들은 득도하는 거지요. 그리고 현재가 행복하다고 주문을 외우는 겁니다. 그 주문을 위해 현재를 소비하며 저항하지 않는 거지요. 더욱 문제는 이러한 불행한 현실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얼마 없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래서 페이스북에서 좋아요를 누르며 그들만의 문화 속에서 열정을 소비하며 현재를 만족하는 걸지도 모릅니다. 이 책에서도 말합니다. '오늘보다도 내일이 나을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지금 여기'에서 동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젊은이들, 다시 말해, 그들은 작은 공동체 안에 모여 있음으로써 행복을 찾는다고요.

결국 미래는 암울해 보입니다. 지금의 행복이 진정 행복해서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지금은 행복하다고 말하지만 그들이 윗세대와 아래 세대를 부양할 시기가 되면 그때도 행복하다고 할까 궁금합니다. 포기해버린 미래에 그들이 도착한다면 윗세대와 아래 세대를 부양해야 하는 현실과 이미 저항조차 할 수 없는 무력함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심지어 필자는 "이대로 간다면 일본은 느슨한 계급 사회로 탈바꿈하게 될 것이다. '일등 시민'과 '이등 시민'의 격차는 점진적으로 확대될 것이다. 일부 '일등 시민'은 국가와 기업의 의사를 결정하는데 분주할 테지만, 다른 수많은 '이등 시민'은 태평하게 하루하루의 삶을 소일하는 그런 구도가 만들어질 것이다"(p308)라고 말합니다.

변화를 이루려 하지 않고 미래를 포기하는 '사토리 세대'를 보면 무엇인가 답답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건 바로 '절망의 일본'이라는 문구에서 일본을 우리 나라로 바꾸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앞에서 말한 일본 사회의 젊은이들의 모습에서 우리 사회의 젊은이들의 모습을 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빈부격차가 커지고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사회, 낮은 출산율과 초고속으로 진행되는 고령화 사회, 닮아도 너무 닮았습니다. 오히려 일본 젊은이들은 '득도'라도 하고 있지만 우리 젊은이들은 이 상황이 무엇인지 갈팡질팡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취업을 위해 사회를 들여다보지 않고, 열정 페이에 강요당하면서도 사회 현상으로 치부해버리는 갇힌 틀안에 있는 젊은이들의 모습이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우리는 '절망의 나라의 어찌할 바 모르는 젊은이들'이 있는 사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책은 대안 제시를 하지 않습니다. 섣부른 대안은 오히려 더욱 상황을 망칠 수 있어 말을 아낍니다. '절망적인 일본과 미래가 없는 젊은이'를 분석하고 바라봅니다. 우리가 그러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고 담담히 말합니다. 책을 읽은 우리의 과제가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이 젊은이들의 희망을 키워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미래 지향적으로 사회를 바라보게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할 시기입니다. 사회 구조를 바꾸어 보려는 열정을 가지게끔 하고 정치적 의사표시의 수단인 적극적 투표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현실을 왜곡시켜 자위하는 '일베'류의 사이트에 우리 젊은이들을 몰지 말고 그들을 현실세계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할 수 있고 그들이 강력하게 연대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야 합니다. 그러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하는 것이 대안이 될까요. 다시 한 번 사회를 바라보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이 참으로 복잡하고 어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 다만 '젊은이 희망론'은 종종 암묵적으로 젊은이들을 '편리한 협력자'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젊은이에게 권리나 구체적인 혜택, 기회를 주지 않고, 그저 '노력하라'라고만 다그치는 행동은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발언이다.(p61)

" 바꿔 말하자면, 이제 자신이 '이보다 더 행복해질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때, 인간은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하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즉, 인간은 미래에 더 큰 희망을 걸지 않게 됐을 때 '지금 행복하다." 혹은 '지금의 생활에 만족한다.'라고 대답하게 되는 것이다.(p134)


" 그렇게 되면 아무리 '격차사회'라든가, '블랙 기업'이라고 시끄럽게 떠들어 대도, 젊은이들 스스로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생각하는 한 대규모 시위 따위는 발생할 가능성이 희박하다. 그러나 바꿔 말하면 '자신들의 사회'가 침해되거나, '자기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세계'가 지적을 당했을 때는 어떤 움직임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진다."(p219)


" 빈곤은 미래의 문제이므로 잘 보이지 않는다. 승인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도구는 수없이 많이 준비되어 있다. 이러게 보니 그토록 수많은 젊은이들이 자기 생활에 만족하는 것도 수긍이 간다."(p299)


" 돌아가야 할 '그때'도 없고, 눈앞에는 처리해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다. 게다가 미래에는 '희망'조차 없다. 하지만 현재 상황에 달리 불만이 있는 것도 아니다. 왠지 행복하고, 왠지 불안하다. 우리들은 바로 그러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절망의 나라에 사는 행복한 '젊은이'로서."(p316)

 

덧붙임 하나.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이란 일본식 문법구조가 상당히 거슬립니다. 일본식 조사 の의 번역인 것 같은데요. 결벽증이 있나.. 이런 것이 왜 이렇게 거슬릴까요. 어쩔 수없이 제목을 직역하였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인 것 같은데 '절망의 나라의' 대신 '절망적인 나라의'가 더 자연스러운 것 같습니다.

덧붙임 둘.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물론 솔직한 리뷰이기도 하지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은 도끼다
박웅현 지음 / 북하우스 / 201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새롭게 그리고 묵직하게을 다시 바라볼 수 있는 힘

얼마 전에 목포로 워크숍을 다녀왔다. 유달산을 등반하는 일정이 있었는데, 올라가고 내려오는 길에 동백꽃을 보았다. 예전에는 그냥 지나쳤을 텐데 예사로이 보이지 않았​다. 잠시 등반을 멈춰 동백을 살폈다. 왜 이렇게 추운 겨울에 꽃이 피는가. 왜 벚꽃처럼 잎이 낱처럼 흩뿌리지 않고 온전한 송이로 떨어지는가.. 신기한 일이지.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그리고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 했다. 항상 거기에 그렇게 있는데, 등산을 하면서 숱하게 보았을 꽃인데 이제서야 보인다. 이 책 '책은 도끼다'를 읽고 난 후의 일이다.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김훈의 <자전거 여행>의 기행문 한 구절에 동백을 이렇게 표현한다. '동백은 한 송이의 개별자로서 제각기 피어나고, 제각기 떨어진다. 동백은 떨어져 죽을 때 주접스러운 꼴을 보이지 않는다. 절정에 도달한 그 꽃은, 마치 백제가 무너지듯이, 절정에서 문득 추락해버렸다.' 작가 박웅현은 이 글에 감탄을 하며 자기식으로 문장을 풀어 놓는다. 나 역시 도끼로 찍힌 듯 전율이 흘렀다. 내가 쉽게 보고 지나가서 나에게 의미로 다가오지 않았던 동백이 이렇게도 다가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래서 그 후로는 주위의 자연과 사물을 쉽게 지나치는 것을 망설였다.

이 책의 구성 내용은 대략 이렇다. 박웅현의 감성을 깨뜨렸던 도끼들. 박웅현이 읽은 인문학 책을 소개한다. 주옥같은 책들이 전반에 걸쳐 흘러나오며 그 책의 문장들을 박웅현식 감성으로 분석하고 풀어낸다. 그리고 그 머릿속 도끼질의 흔적을 사람들과 공유하기 위해 노력한다. 강의를 옮겨 놓은 듯 글투가 구어체적인 특징을 가지며, 그러하기에 쉽게 읽힌다. 그렇다고 내용이 쉬운 것은 아니고, 충분히 철학적이고 인문학적 사유가 넘쳐나는 작가와 글들을 소개하여 지적 충족도 얻을 수 있다. 8강. 8장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각 장마다 새로운 작가와 작품이 등장한다.

1장은 이철수, 최인훈, 이오덕을 소개하는 책이다. 최인훈과 이오덕은 나름 친숙해서 기뻤는데 이철수는 낯설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다 보면 어느새 판화가 이철수와 그의 작품을 마주하게 된다. 개인적으로도 꼭 사서 읽고 싶을 만큼 그의 글은 재미있고 신선하다. 2장은 김훈의 책과 문장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나 역시 가장 사랑하는 작가로 김훈을 종종 꼽는데, 그래서 더욱 반가웠고 행복했다. 수식어를 최대한 배제하고 사실의 나열만으로도 놀라운 글을 써내는 김훈은 언제나 존경의 대상이다. 3장은 알랭 드 보통, 오스카 와일드의 작품을 소개한다. 예전에 <불안>이란 책을 읽다 덮은 적이 있는데, 다시 꺼내 읽고 싶은 생각이 새록새록 드는 장이다. 4장은 대니얼 디포, 고은, 미셸 투르니에를 이야기한다. 개인적으로 고은의 시를 음미하며 책을 읽었는데, 고은의 반짝거리는 시를 계속 읽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며 읽었다. 5장은 지중해 문학의 밝고 아름다운 장을 소개하는 장인데, 읽고 있으면 지중해의 낭만을 간접적으로나마 만끽할 수 있다. 6장은 밀란 쿤데라의 작품을 통해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고, 7장은 안나카레니나를 말한다. 두 작품 다 읽어 보겠다고 정가제 전에 사두어서, 작품 먼저 읽고 읽을 요량으로 읽지 않고 넘겼다. 꾹꾹 눌러서 읽을 터다. 마지막 장인 8장은 우리 옛 선조들의 지혜를 들여다볼 수 있는 작품 위주로 소개하고 있다. 동양식 사고의 유연함과 아름다움이 잘 드러나 있다.


박웅현은 책을 읽으면서 밑줄을 쳐나간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에게 도끼로 와 닿았던 책들은 다시 읽으며 전에는 보지 못하고 넘어간, 새롭게 감동으로 다가온 문장에 또 밑줄을 긋는다고 하였다. 그래서 이 책에는 저자가 읽으며 울림으로 다가왔던 문장들이 소개되어 있다. 그리고 그 소개된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감탄하며 동시에 나 자신에 대해 반성하게 된다. 나는 쉽게 지나쳤을 문장을 이렇게 곱씹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과 페이지를 넘기는 데 급급하여 작가가 고민을 거듭하여 썼던 사유를 나는 읽어가지 못했구나라는 생각.

박웅현이 '미친 사람'이라고 평하는 김훈이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내가 쓴 장편소설 <칼의 노래> 첫 문장은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입니다.(...) 나는 처음에 이것을 '꽃은 피었다'라고 썼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있다가 담배를 한 갑 피면서 고민고민 끝에 '꽃이 피었다'라고 고쳐놨어요. 그러면 '꽃은 피었다'와 '꽃이 피었다'는 어떻게 다른가. 이것은 하늘과 땅 차이가 있습니다. '꽃이 피었다'는 꽃이 핀 물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진술한 언어입니다. '꽃은 피었다'는 꽃이 피었다는 객관적 사실에 그것을 들여다보는 자의 주관적 정서를 섞어 넣은 것이죠. '꽃이 피었다'는 사실의 세계를 진술한 언어이고, '꽃은 피었다'는 의견과 정서의 세계를 진술한 언어입니다. 이것을 구별하지 못하면 나의 문장과 서술은 몽매해집니다."

너무 멋진 말이다. '이'과 '은'의 세계를 김훈은 이렇게 표현하고 이렇게 아껴 글을 쓴다. 엄청난 인문학적이며 철학적 사고가 담겨 있는 문장들을 우리는 쉽게 읽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본다. 그리고 "저는 책 읽기에 있어 '다독 콤플렉스'를 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독 콤플렉스를 가지면 쉽게 빨리 읽히는 얇은 책들만 읽게 되니까요. 올해 몇 권 읽었느냐, 자랑하는 책 읽기에서 벗어났으면 합니다. 일 년에 다섯 권을 읽어도 거기 줄 친 부분이 몇 페이지냐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p34)처럼 다독에 목매지 말고 정말 얼마나 주의를 기울여 책을 읽고 있는가. 문장을 곱씹고 사유하며 글을 읽고 있는가를 다시 돌아보게 된다.


책을 통해 새롭게 세상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즐겁다. 내가 독서를 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는 듯하다. 그냥 넘어가거나, 생각지 않았던 것들을 잠시나마 돌아볼 수 있도록 누군가가 가르쳐주고 이야기해주는 것, 그것만으로도 독서의 가치가 충분하다. 박웅현식 책 읽기에 빠진 게 두 번째 일이다. 처음에 읽은 책이 오히려 이 책<책은 도끼다> 후에 나온 책인 <여덟 단어>였는데 그 책 역시 많은 감흥을 주었다. 후작인 <여덟 단어>가 삶을 살아가진 지혜를 이야기하였다면 이 책은 온전한 인문학적 책 읽기에 집중한 느낌이다. 계속 읽으면서 느낀 건데 쉬운 문장으로 깊은 사유를 표현해내는 그의 글이 참 매력적이다. 박웅현의 책에 웅크린 수많은 명작들, 언젠가는 다 읽어버리라. 2015년에도 역시 '그래봤자 독서' '그래도 독서'다.



이철수는 또 저에게 동양철학과 서양철학, 동양의 삶의 태도와 서양의 삶의 태도를 가장 극명하게 비교하게 해주었는데요, 그것은 역시 판화<가을 사과>에 쓴 한줄의 글이었습니다. .. '사과가 떨어졌다. 만유인력 때문이란다. 때가 되었기 때문이지'(p22)


 

오스트리아에 한 음악학교가 있다고 합니다. 그 학교는 음악학교인데도 어린아이들에게 악기 연주를 시키지 않는 대신 애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 자연의 음들을 들려준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바닷가에 가서 자갈을 들고 큰 돌과 큰 돌이 부딪치는 소리, 큰 돌과 작은 돌이 부딪치는 소리, 파도가 치는 소리를 들으며 얘기하는 것이죠. 이렇게 음에 대한 새로운 생각들이 중요한데 우리는 기술만 가르치고 있으니까 요즘 교육이 문제가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p38)



파리가 아름다운 이유는 파리가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곳에 있을 시간이 삼 일밖에 없기 때문입니다.(p51)



우리가 사랑에 빠지는 것은 상대가 다른 누구도 주목해주지 않았던 어떤 부분을 주목해주거나 다른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던 진가를 알아줘을 때 사랑에 빠진다는 거죠.(p115)


​알랭 드 보통은 바로 그것, 상대적 궁핍과 궁핍해질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우리를 불안하게 만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알고 나면 덜 불안해진다는 이야기도 덧붙입니다. "거지가 질투하는 대상은 백만장자가 아니라 좀 더 형편이 나은 다른 거지다."라는 버트런드 리셀의 말도 같은 문맥인 거죠.(p120)

프루스트가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 했던 방법 중 하나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는 대화의 소재를 다른 사람들의 생각 속에서 찾았다.(...) 그는 당신이 관심을 기울이게 하는 대신에 당신에게 관심을 기울였다.' 이 부분은 제가 삶의 태도로 가져가고 싶은 부분이라서 늘 마음에 새기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p136)


알랭 드 보통의 사랑 이야기를 주제로 했으니, <동물원에 가기>에 있는 키스에 대한 이야기로 알랭 드 보통을 마무리하겠습니다. '키스는 모든 것을 바꾸어버린다. 두 살갗이 접촉하게 되면 우리는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들어가, 암호화된 말의 교환은 끝이 나고 드디어 이면의 의미들을 인정하게 될 터였다.'(p136)



제가 책을 읽으면서 계속해서 목표로 삼는 건 온몸이 촉수인 사람이 되는 겁니다. 알랭 드 보통의 책이나 오스카 와일드의 책을 읽고 나면 촉수가 더 예민해지는 것 같아요. 혹은 없던 촉수가 생겨나는 느낌인데요. 세상의 흐름을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내 인생을 온전하게 살고 싶어요. 오늘의 날씨, 해가 뜨고 비가 오고 바람이 부는 것 하나 흘려보내지 않고, 사람과의 만남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으면 해요.(p139)

 


낯선 곳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거에요. 니코스 카잔차키스도 말하죠. 익숙한 것을 두려워하라고, 땅버들 씨앗 같은 삶의 태도로 살았으면 좋겠다고요.(...)우리 인생도 크게 다르지 않아요. 내 마음대로 직조할 수 없어요. 시대라는 씨줄과 내 의지라는 날줄이 맞아야 해요. 내가 아무리 날줄을 잘 세운다고 해도 씨줄이 너무 세게 밀고 들어오면 휘게 되어 있어요. 살다 보면 우리 뜻대로 되지 않아요. 급한 물이 밀려올 때가 있죠. 그럼 타야지 어쩌겠어요.(p154)

 

 


 

우리 팀에는 두 가지 원칙이 있는데 첫째는 '모든 사생활은 모든 공무에 우선한다'이고 둘째는 '모든 술자리는 모든 회의에 우선한다'입니다. 꽃 보러 가야죠. 나라에서 비상사태를 선포해야 할 정도로 꽃이 흐드러진 날에는 꽃 보러 가는 게 맞아요.(p172)


 

 한형조의 <붓다의 치명적인 농담>에서 마지막으로 한 문장을 더 소개하겠습니다. '내 뜻대로 모든 것을 이루리라'라는 기필을 거두십시오. 세상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그 오만과 야만을 버려야 합니다.(p34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