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레오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방대수 옮김 / 책만드는집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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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어저께까지만 해도 눈이 계속 펑펑 내리더니 오늘은 날씨가 맑다. 그래도 밖은 눈이 꽤 쌓여있어서 햇볕에 반짝이는 눈을 보고 있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래서 토스토프옙스키의 <죄와 벌>을 덮었다. <죄와 벌>을 읽고 있자니, 라스콜니코프의 의식의 흐름을 쫒고 있자니 내가 미친듯이 빨려들어가는 느낌, 어두워지는 느낌이 들어서 이런 날과 맞지 않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생각의 소비가 심했다. 그래서 가벼운 마음을 놓치기 싫어, 표지도 산뜻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집어 들었다. 토스토프옙스키를 힘들어해 톨스토이를 선택하다니, 내가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것 같다.

​톨스토이 <부활>을 어렸을 때 읽었다. 십대 시기에 읽은(중학교 때인가, 고등학교 때인가) <부활>은 가물가물하다. 너무 어린 나이에 읽었다. 그래서 어렵다는 것과 힘들다는 느낌이 아직도 머릿속에 남아 있다.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가 평생의 역작이라지만, 읽을 힘도 읽을 능력도 없을 때라 <부활>에서 멈췄다. 기회가 되면 읽어야지 다짐해본다. 우선 도스토프옙스키 먼저 읽고.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이 책은 톨스토이의 세 단편이 실려 있는데, 천사 미하일로 인해 일어나는 이야기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결국 죽어서는 2m가량 밖에 되지 않는 땅만 필요하다고 말하는 <사람에겐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그리고 우직한 바보인 이반이 악마를 이기는 <바보 이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세 편 모두 한 번쯤은 읽거나 들었던 이야기일 정도로 유명하다. 어린아이에게도 쉽고 재미있게 읽혀(나 역시 어렸을 때 읽었던 기억이다)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은 작품집이기는 하지만  권선징악의 계몽주의와 기독교적인 세계관이 도처에 드러나 있어 쉽게 톨스토이의 세계관과 종교관을 읽을 수 있기에, 가벼운 책만은 아니기도 하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의 천사 미하일은 출산한 여인의 영혼을 차마 두지 못하고 벌을 받지만 하느님의 세 가지 말의 뜻 '인간의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가?,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의 답을 구하면서 다시 천사로 환생한다. 답은 바로, 사람의 마음속에는 '사랑'이 있다는 것,  허락되지 않은 것은 '육체를 위해 무엇이 없어서는 안되는지 아는 지혜'라는 것, 그리고 사람은 '사랑의 힘'으로 살아간다는 것인데 결국 우리 인간은 사랑을 가지고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며 공동체적 사랑의 힘을 실현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재물에 욕심을 부리는 바흠이 결국 끝없는 욕심을 부리다가 결국 쓰러지고 그가 차지한 땅은 불과 2m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람에겐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와 끝끝내 우직하게 일하고 노동의 신성함을 믿는 이반에게 군대와 재물의 탐욕의 악마에 승리를 거둔다는 비폭력 저항 운동<바보 이반>이야기의 계몽적이고 의도적인 우화와 연결된다. 결국 책을 덮었을 때 우리 모두 비슷하게 공감해버리는 무엇이 있다는 것이고, 그것은 바로 톨스토이가 말하고자 하는 기독교적 세계관에 바탕을 둔 계몽주의라고 정리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왜 톨토이는 왜 이런 계몽주의적 소설을 썼을까? 톨스토이의 인물사를 보면 해답을 얻을 수 있는데, 그는 말년에 문학보다 종교 사상에, 교육 수준이 낮은 민중 계몽에 더 힘썼다고 한다. 그 때 탄생한 작품이 이러한 짧은 교훈적인 우화들이었기에 이 세 작품은 그의 말년의 사상을 알 수 있는 소중한 이야기들인 셈이다. 물론 톨스토이의 이러한 변화가 그리 반가움의 대상은 아니었나 보다. 톨스토이의 기독교적이고 계몽적인 소설은 많은 문학도들에게 도스토프옙스키와 비교되며 호불호를 양산해냈으니 말이다.

그래서 도스토프옙스키와 톨스토이를 비교하는 논쟁은 재미있다. 러시아 문학의 최고점인 두 사람 중 누가 더 낫냐는 것은 우스운 이야기이지만, 이야기를 전개해가는 방향이나 주제 의식이 서로 달랐기에 선호도는 다를 수 있음을 공감한다. 나는 아직 두 대문학가의 소설을 완독하지 못하여서 이 논쟁을 그냥 먼 발치에서 바라보기만 하지만, 언젠가는 두 거장의 작품을 비교 분석하는 것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아직까지는 사람의 의식을 철저히 파헤쳐가며 의식의 흐름을 폭발적으로 전개해가는 도스토프옙스키가 매력적으로 다가오기는 하지만, 나의 독서량이 짧으니 우선 여기까지 하고 보류다.

단숨에 세 편을 읽었다. 좋은 이야기도 많이 읽어서 머릿속이 편해지는 느낌이다. 가볍게 읽고 싶을 때(절대 가볍지는 않을 수도 있지만), 삶의 긍정을 생각하고 싶을 때, 바르게 사는 가치를 고민해보고 있을 때 읽으면 좋을 것 같다. 어렴풋이 어렸을 때 읽었던 기억, 재미있게 들었던 기억을 꺼내는 재미도 쏠쏠하니 한 번 정도는 톨스토이의 우화를 정독해 읽는 것도 좋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가거라, 그래서 그 어머니의 영혼을 거두거라. 그러면 세 가지 말의 뜻을 알 수 있을 게다. 인간의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가?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이 세 가지 말의 뜻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것을 깨달은 다음 하늘로 올라오거라."(p53)

"바흠의 하인이 달려와 그를 일으키려 했지만, 그의 입에서는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그는 그렇게 쓰러져 죽은 것이었다. 하인은 삽을 들고 바흠의 무덤을 판 뒤 그곳에 그를 묻었다.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그가 차지할 수 있었던 땅은 정확히 2미터가량밖에 되지 않았다.(p96)

"다만, 이 나라에는 한 가지 관습이 있다. 손에 굳은살이 베긴 사람은 대접을 받을 수 있지만 손에 굳은살이 없는 사람은 남이 먹다 남은 것을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p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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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턴 & 데카르트 : 거인의 어깨에 올라선 거인 지식인마을 10
박민아 지음 / 김영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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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인의 어깨에 올라선 거인 '데카르트와 뉴턴'

​데카르트 하면 윤리라는 과목이 떠오르고, 이성적인 합리주의자로서의 명연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동시에 생각난다.  여기까지가 나의 한계인데, 딱 고등학교 윤리시간에 데카르트의 존재는 멈추어 있다. 그러하기에 나는 철학자로서의 데카르트밖에 몰랐다. 그래서였다. 이 책 <뉴턴과 데카르트, 거인의 어깨에 올라선 거인>이라는 책 제목을 보았을 때 신선했다. 무지에서 오는 신선함이랄까. 뉴턴과 데카르트가 밀접했나. <지식인 마을> 시리즈가(이 책은 지식인 마을 시리즈 중 열 번째 책이다) 비슷한 시기의 두 천재의 논쟁을 주로 다루는  이야기인데 두 사람이 동질적인 것이 있단 말인가. 뉴턴 하면 떠오르는 것이 '천재 과학자'이미지인데, 그럼 데카르트도 과학을 심도 있게 연구했단 말인가. 이러한 까닭으로 이 책을 집어들게 되었다.

뉴턴과 데카르트는 밀접한 연관을 이루고 있다. 좀더 엄밀히 말하면 데카르트의 영향을 뉴턴이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데카르트가 17세기 과학 혁명의 기본 뼈대를 만들어냈다면 데카르트는 그 토대 위에 빼고 더하면서 과학 혁명을 완성시켰다.  뉴턴이 데카르트를 뛰어넘고 많은 부분의 데카르트의 오류를 수정했지만, 데카르트가 없었다면 뉴턴이 자연 세계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었을까는 여전히 미지수다. 이 책의 제목처럼 데카르트라는 커다란 거인의 어깨 위에 뉴턴이라는 새로운 거인이 올라섰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뉴턴 이전의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갈릴레오, 데카르트, 훅, 보일 등의 무수한 인물들이 만들어준 조각들을 뉴턴이라는 천재가 절묘하게 조각을 배치하고 완성했다고 할 수 있다.

책을 읽으면서 느낀 것이 사실  데카르트를 이야기하기 이전에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 케플러 등을 빼놓을 수 없다는 것이다. 르네상스 시기 이후로 무수한 과학 혁명이 일어나고 있었고 그러한 혼란의 소용돌이에서 수많은 영웅들이 나타났다. 케플러, 갈릴레오, 보일, 호이겐스, 가상디 등이 그들인데 이들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후 기존의 종교적 가치 중심에서 본격적으로 자연 과학의 사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를 과학 혁명이라고도 한다.

이 과학적 변혁기 한복판에 데카르트가 있었다. 데카르트는 모든 감각을 의심하고 보이는 사실을 의심하는 회의주의자인 '피론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노력했다. 결국 그는 체계적 의심으로 이 문제를 돌파해나갔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이며 이는 모든 것을 의심하고도 끝내 의심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 그것이 바로 자신이 생각하고 있다는 그것, 바로 자신이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에게 이것은 전적인 숙명인 듯했다. 그래야 명백한 진리, 과학적 진리들이 존재한다는 것에 인정할 수 있으며, 과학적 진리들이 있어야 자신의 진리 탐구의 작업이 시작될 수 있는 것이기에 그랬다.

데카르트의 세계는 '기계적 세계'였다. 데카르트는 신이 세상의 완전한 모든 것을 만들고, 완전하기에 모든 것은 창조된 상태 그대로를 유지하게 된다고 믿었다. 그래서 물질은 스스로 계속해서 운동할 수 있어야 하고, 운동을 하려는 힘을 주면 그만큼의 다른 물체의 힘을 받아야 된다고 하였다. 이게 바로 지금의 '관성'과 '질량 보존의 법칙'과 유사하다. 또한 데카르트는 소용돌이 이론으로 지구와 우주를 설명하는데, 일견 재미있고 설득력이 있는 주장이었다.(데카르트 이론은 물론 상당 부분 틀리다. 그런데 그 주장의 과정이 재미있어서 읽는 즐거움이 있었다). 인간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영혼과 육체를 나누어보면 육체라는 인간도 기계적으로 완벽하게 설계된 자동인형이었다. 즉 그는 자연에서 영혼을 제거시키고, 일정하게 운동하는 기계적 세계관을 제시함으로써 과학혁명의 기본 구조를 만들어 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 할 수 있었다.

과학적 결과물의 총합을 뉴턴이라는 거인이 완성했다. 뉴턴은 데카르트가 보여준 세상에 빠져들고, 이해하기는 했지만 데카르트에게서 적당히 떨어져서 바라보고 비판하였다. 세상을 바꾼 세 개의 사과가 있다고 한다. 첫 번째 사과는 성경에 나오는 사과, 두 번째 사과는 트로이 전쟁의 아프로디테의 사과, 그리고 뉴턴의 사과로 만유인력을 발견하게 한 사과다.(p88) 사실 뉴턴이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아하'하고 만유인력을 불현듯 생각해 낸 것은 아닐 것이다. 달의 궤도 운동을 생각하다가 (물론 데카르트의 소용돌이 이론으로는 설명이 안된다. 오히려 데카르트 이론으로는 밀물과 썰물이 반대되어야 한다-_-, 이제 이해했다.ㅎ) 달의 궤도까지 지구 중력이 미칠 것이라는 것을 생각해 냈을 것이다.

나는 뉴턴이 왜 대단한지 잘 몰랐다고 고백한다. 이제까지 교과서를 통해 만유인력의 법칙을 생각해 냈던 위대한 과학자 정도만 알고 있었다고 고백한다. 그래서 책을 읽어가면서 뉴턴을 찬양했다. <프린키피아>에서 뉴턴이 보여준 운동 법칙은 천부적인 것이었다. 관성의 법칙, 운동의 법칙, 작용-반작용의 법칙은 이제껏 내가 배웠던 물리의 상당부분을 함의한다. 그런데 뉴턴 개인의 찬양인 동시에 뉴턴이 숨을 쉬었던 그 놀라운 과학 혁명의 시대를 찬양했다. 뉴턴의 시대는 놀라움의 시대다. 끊임없이 과학에 대한 영감과 사고가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졌던 시대다. 갈릴레오, 데카르트, 케플러, 훅, 라이프니츠, 호이겐스... 인류 역사를 보면 이렇게 동시다발적으로 지성이 폭발하는 시기가 있는 것 같다. 이를 집단 지성의 성과라고 할까. 아니면 우리 시대의 지성 네트워크가 신경처럼 동시에 연결되어 있어서 어느 한쪽에 자극이 있으면 동시에 자극을 받게 되는 걸까.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뉴턴의 시대처럼 동시대에 문명의 사고가 폭발하는 시대가 있음에 틀림없다.(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를 읽었을 때도 이러한 느낌을 받았다. 정말 그런 것 같다)

​뉴턴의 유명한 과학적 발견은  갈릴레오나 데카르트 같은 '거인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 거인들의 어깨를 올라설 수 있는 천재성이 있었기에 뉴턴은 그 어깨들을 딛고 올라간 또 다른 '거인'이 되었다. 그리고 그 시대의 수많은 도전과 해결을 통해 집단의 지성이 발전되었다. 이 책을 통해 많은 걸 얻었다. 나에게 '철학자' 데카르트가

'과학자' 데카르트로 다가왔고, 몰랐던 뉴턴의 이야기가 눈앞에 펼쳐졌다. 과학 혁명의 시기처럼 인류의 지성의 힘과 네트워크의 소중함도 알았다. 또한 과학의 명징 성과 난해한 과학과 수학의 세계를 연구하는 수많은 이공계 학자들에게도 감사하는 마음도 생겼다. ​

 

​뜬금 없는 이야기를 첨언하자면 '지식인 마을'시리즈 요거 참 재미있는 연작이다. 책을 읽어가면서 재미를 느껴 '지식인 마을' 시리즈를 몇 권 더 구입했다. 도서정가제의 압박으로 서둘러 구입했다. 도서정가제가 시행되어도 살 것들은 사겠지만 그래도 분위기에 휩쓸려 몇 권 더 구간을 구입했다. 작은 출판사와 동네 서점의 발전을 기원하고 근본 취지는 이해하지만 자칫 책값만 높이고 과점과 독점의 출판사와 서점만 살아남지 않을까 우려도 된다. 책을 사랑하는 소소한 소비자 입장에서, 우리같은 소비자도, 출판사도 작은 서점들도 다 상생할 수 있도록 잘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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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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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테스크하고 음울하지만 매력있는

​내가 알고 있는 개념으로, 채식주의자(Vegetarian)의 의미는 고기류를 먹지 않고(의도적으로) 채소, 과일, 야채 등의 식물을 먹고(의도적으로) 사는 사람이다. 여기에서 의도적이라만 말이 중요할 텐데, 우리 인간도 육식을 하는 동시에 채식도 하는(잡식) 동물의 범주이기에, 의도적으로 한 쪽을 멀리하는 것이다. 즉, 먹을 수 있으되, 먹지 않는 사람들. 그것이 채식주의자의 모습일 것이다. 한강은 세 편의 중편소설의 연작을 모아서 책으로 냈다. 그리고 책 제목을 <채식주의자>라고 지었다. 왜 내가 채식주의자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는가는 바로 책 제목에 스스로 혼란스러워서 정리할 필요가 있어서이다.

가볍게 책을 펼쳤었다. <채식주의자>라는 용어에서 오는 산뜻함과 무엇인가 심플한 산문을 읽는 느낌으로 책을 열고 읽기 시작했었다. 그래서 당황했다. 내용이 산뜻하지 않고 음울했다. 그로테스크하다고 해야 할까. 연작의 첫 번째 소설 1부 <채식주의자>에서 화자는 '나'이다. '나'의 아내인 '영혜'는 갑자기 육식을 거부하고 채식을 하기 시작한다. 채식을 하게 되는 일련의 행위와 그걸 하게 하는 원인에 대한 궁금증, 그리고 채식을 고집하는 영혜의 상태의 변화가 속도감 있게 전개되는데 상당히 재미있다. 계속 영혜의 변해가는 상태를 따라가면서 왜 그녀는 그런 선택을 하는지에 대한 궁금함이 상당하다.

영혜는 결국 채식을 고집하고 '나'는 그런 영혜를 이해할 수 없다. 1부의 화자 '나'는 상당히 현실적인 인물이다. "내가 그녀와 결혼한 것은, 그녀에게 특별한 매력이 없는 것과 같이 특별한 단점도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p9) 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는 삶의 현실에 안주하며 무난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결혼 역시 그에게는 예외가 아니다. 사장님 만찬에서의 부부동반 에피소드 역시 그가 지극히 현실적인 인물임을 말해준다. 현실적이라는 의미는 읽는 독자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의미가 있다. 그가 육식을 즐겨먹는 것도, 영혜와 있으면 미칠 것 같은 그의 모습이 낯설지 않고, 공감하는 것도 그게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작가는 1부의 에피소드 화자를 '나'로 만들어 '나'의 시선으로 영혜를 바라보게 한 것일지도 모른다. 2부, 3부의 인물 지칭이 '그', '그녀'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 작가의 의도가 섞여있다는 확신이 든다.

영혜는 왜 채식을 고집하는가. 영혜는 꿈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탤릭 서체로 쓰인 그녀의 꿈은 피와 칼, 어둠, 죽음 등의 그로테스크한 세계이다. 이런 세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육식의 세계가 보이며 폭력성이 있는 세계가 나타난다. 폭력성이 있는 세계라... 폭력성이 있는 세계는 바로 지금의 현실이다. '너를 이겨야 내가 사는' 현재에 살고 있는 흔히 지금의 모습을 약육강식의 현실이라고 말한다. 그러한 현실이 영혜는 답답했는가... 변혁할 수 없으니 스스로 거부의 길을 택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 사회가 싫은 영혜는 채식주의로 고집하고 꽃과 나무로 본인을 인식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영혜는 갑갑한 사회를 벗어버리기 위해 본인의 작은 일탈 즉, 브래지어를 벗는 것, 옷을 벗는 것, 사물과 현상을 무심히 바라보는 것으로 대항하고 있는 것이다.

​1부의 압권은 영혜에게 고기를 먹이는 폭력성을 보여주는 영혜 가족의 모습이다. 가부장적인 영혜의 아버지는 한사코 영혜에게 고기를 먹인다. 먹이는 이러한 행위를 통해 아버지는 영혜에게 현실을 가르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현실은 고기를 먹어야 한다고 폭력적이어야 살아남는다고 알려주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혜는 확고하다. 육식은 폭력적이기에, 식물인 영혜는 동물로 대변되는 가족의 폭력에 서슴없이 손목을 긋는다.

결국 1부 소설은 정점으로 치달으며 '나'는 '영혜'와 더 이상 삶을 같이 살아갈 수 없음을 느낀다. 결국 아내의 정신병원 입원과 괴기하고 파괴적인 행동으로 마무리되는데, 책을 읽고 있는 나 역시 이들의 이야기에,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나'의 입장에서 아내의 정신병적인 행동에 흥미를 느끼며 정점으로 치닫고 있음을 아쉬워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정점에서 1부가 끝났을 때 기승전결의 구조가 없는 찝찝함으로 한동안 망설였다. 잠깐 쉴 것인가, 아님 2부로 나아갈 것인가.

 

우선 고백하자면 난 처음에는 2부가 1부의 연장이라는 생각도 없이, 연작소설이라는 사전 지식도 없었고 단지 소설집 정도로만 알고 보았기에 다른 이야기가 전개되는지 알았다. 2부의 화자도 '나'가 아니라 전지적 시점에서 바라보는 '그'였기에 이어진다고 생각하지 못 했다. 그런데 읽어가면서 '그'와 '그녀'가 1부에서 영혜가 손목을 긋던 그 상황 속의 가족이며 '그'는 손목 그은 영혜를 엎고 뛴 형부다. 그렇다면 본격적으로 형부인 '그'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펼쳐질 텐데, 여기에 소설의 재미가 있다. 소설의 매력 중 하나는 각 개개인의 삶의 모습, 특히 소외된 사람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변두리에 있었던 '그'가 무대 위의 한복판으로 올라왔을 때 독자는 전율을 느낀다. 나 역시 '그'는 어떠한지, '그'의 입장에서 아내는 무엇이고 아내의 동생인 영혜는 무엇인지가 궁금해지며 시선을 따라갔다.

2부 <몽고반점>은 파격적이다. 그의 편집적이고 욕망에 찬 그의 모습은 흥미롭다. 예술적인 표현에 한계에 부딪힌 그는 처제의 몽고반점에 본인의 욕망을 투영한다. 아이에게만 있는 몽고반점이 처제의 엉덩이에 손톱만 하게 있음을 우연히 안 그는 갈등한다. 그는 영혜의 남편을 속물로 무시할 만큼 예술 주의로 무장해 있으며 아내의 생활력과 삶의 집착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편집적인 성격의 인물이다. 일상의 자연스러움을 거부하고 순수한 예술적 그 무엇, 꽃으로 대비되는 자연의 본능을 추구하는 점에서 영혜와 닮았다. 2부는 그런 그가 영혜가 가진 날 것의 싱싱함을 쫓고 있는 그의 내면의 욕망이 드러나는 에피소드이다.

결국 그는 영혜에게 비디오아트를 제안한다. 옷을 벗은 채, 그녀의 몸에 꽃을 그리고 싶고, 꽃이라는 절대적 자연이 되어버린 그녀의 모습을 찍고 싶은 것이었다. 그리고 성적인 그녀의 모습보다 식물적인 무엇으로 느끼는 그녀를 안고 싶은 것이었다. 그녀의 엉덩이에 있는 몽고반점은 그 순수한 열정의 기폭제였다. 이러한 그의 실험은 결국 파국을 맞는데, 자연으로 귀의하려는 듯한 나무의 이미지의 영혜와 스스로 식물의 모습을 해야만 영혜를 안을 수 있는 그의 모습은 2부를 격정적으로 만든다. 결국 영혜와의 교합으로 인한 난잡함과 그런 모습을 본 영혜의 언니이자 그의 부인인 인혜는 절망하는데, 이때 독자 역시 섹슈얼한 판타지 이미지를 머릿속에 가득 채운 채 다시 현실을 복귀하는 결과를 맛본다. 그리고 정신 차리고, 한 발 떨어져서 다시 그와 그녀의 불충분한 논리적 상황에 혼라스러워하며 인혜에게 연민을 느낀다. 동시에 그럴 수밖에 없는 영혜를 바라보는 눈 역시 안타까움일 것이다.

3부 <나무불꽃>으로 넘어가보자​. 이제 인혜의 시선이다. 정신병원에 있는 영혜와 그런 영혜를 바라보는 인혜의 이야기이다. 현실에 가장 적응하는 인물이며, 나 아닌 타인의 삶을 위해 살며 그것이 삶이라고 생각하는 인혜의 모습은 안타깝다. 나는 인혜로서가 아닌 언니로, 아내로, 엄마로, 자식으로 사는 영혜의 삶에 연민을 느낀다. 1부의 영혜와  2부의 그녀의 남편과는 달리 인혜는 스스로 삶을 선택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고 느끼고 자신의 삶을 결정하려고 모빌 끈을 들고 뒷산으로 가지만 결국 그녀는 그녀의 자식 때문에 결국 포기한다. 그녀에게 자신의 삶은 곧 타인의 삶이고 순응인 것이다.

음식을 거부하고 나무이길 원하며 자신의 의지로 파괴되어 가고 있는 영혜와 그러한 영혜를 일으켜세우려 하며 지극히 현실을 순응하며 무너지고 있는 인혜의 모습은 다르면서도 같다. 삶에서 인혜의 순응이 맞는지, 영혜의 거부가 맞는지 알 길이 없다. 다만 그러한 자매의 모습은 공포와 불안의 현대인들의 모습과 닮았다. 순응하고 버티며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은 인혜를 닮았고, 육식의 현실을 거부하고 싶고, 본능의 삶을 살아가고 싶은 영혜의 모습은 우리의 자아와 닮았다. 극단으로 달려가고 있기에 불합리해 보이지만 결국 우리 역시 그럴 수도 있는 것이다. 인혜가 되기도 하고, 영혜가 되기도 하고, 영혜의 남편이 되기도 하고...

이 연작소설은 영혜가 가장 중심에 있다. 영혜를 중심으로 영혜의 남편인 '나'가 있고, 영혜의 언니인 인혜인 '그녀'가 있다. 그리고 인혜의 남편인 '그'가 있다. 이 소설의 재미는 이들의 관계는 멀어짐과 가까워짐을 반복하면서 서사를 만든다는 것이고, 서사의 시선이 변해, 그들의 마음속을 다양하게 탐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영혜의 남편인 '나'와 가깝다. 하지만 내면의 나와 무의식의 욕망의 나의 관점에서 본다면 영혜일 수도, 인혜의 남편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소설 속 그들이 느꼈던 삶과 죽음, 열정과 욕망, 순응과 거부, 선함과 악함의 경계에 대한 고민이 곧 내 욕망일 수도 있고, 나의 순응과 거부일 수도 있으며 나의 고민일 수도 있다.

​앞에서도 말했듯, 이 책은 우울하고 음울하며 그로테스크하다. 거기에 서사로서의 매력을 더하고 인물의 성격이 역동적이서 읽는 이는 쉽게 헤어 나오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밤보다 낮에 읽기를 추천한다. 가볍게 읽는 에세이로서 소설을 집어 들었으면 다시 제자리에 내려 놓기를 추천한다. 욕망을 소설에 투영하는 사람은 읽기 편하겠고, 현실적인 삶에 만족하는 사람은 영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작가를 욕하고 덮을지도 모르겠다. 뭐 무엇이 되었든, 어찌하였든 나는 읽으면서 채식주의자로서의 영혜가 아닌, 나무가 되고 싶어 하는 영혜가 매력 있었음을 고백한다. 한강의 다른 소설을 또 읽고 싶다고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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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수업 (양장) - 글 잘 쓰는 독창적인 작가가 되는 법
도러시아 브랜디 지음, 강미경 옮김 / 공존 / 2010년 8월
평점 :
품절


Becoming A Writer,  무엇을 하여야 할까   

 

​Becoming a writer 의 원제에서 알 수 있듯이, 도러시아 브랜디의 <작가 수업>은 작가 지망생을 위한 지침이 소개되어 있는 책이다. 따라서 머릿속에 상상의 나래를 폈었던 어렸을 때와는 달리, 지금의 나로서는 내가 작가가 되고 싶은 열망은 애석하게도 없기에 이 책 제목은 그리 매력적이지 않았다. 읽을 책도 많은데 거창하게 작가가 되는 방법을 가르치는 책이 영 낯설게 느껴지는 것이 당연하였다. 그럼에도 말도 안 되게 난 내 책상 위에 쌓여있는 수많은 책들 중 이 책을 들게 되었는데, 그 이유라는 게 이런 것이다.

첫째, 이 책의 표지가 마음에 들었다. '작가 수업'의 타이틀보다는 책 표지의 중후하고도 멋진 두 인물이 눈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위 쪽은 '윌리엄 서머싯 몸'이고 아래쪽 멋드러진 인물은 ​'어니스트 헤밍웨이'이다. 특히 헤밍웨이의 모습이 눈에 강렬했는데, 둥근 안경 속에 집중하는 눈빛과 귀밑에서부터 내려오는 흰 구레나룻 수염, 그리고 빗어 올린 머리가 너무 말쑥해서 마치 빛바랜 영화의 한 장면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흑백의 두 사진의 가운데를 가르는 고딕체의 글자는 얼마나 멋진지. 멋진 책을 읽을 것만 느낌이어서 선택했다.

둘째, '글 잘 쓰는 독창적인 작가가 되는 법'이라는 부제 때문이었다. 이 긴 부제에서 유독 '글 잘 쓰는'이라는 타이틀이 눈에 선명했고, '독창적인 작가가 되는'이라는 문구는 마치 없는 듯 쏙 빠지고 '되는 법'이 두드러지게 보였으니, '글 잘 쓰는 법'이라는 부제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작가가 되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지만, 글은 잘 쓰고 싶지 않은가. 글은 말과 생각이 논리적이고 체계적이지 않으면 절대 잘 쓰지 못한다는 평소 지론이, 순간 내 생각을 점령했기에 '글 잘 쓰는'이라는 문구가 상당한 매력적이었다. 

뭐 어쨌든, 나도 본의 아니게 '작가가 되는 수업'에 동참하였다. 브랜디는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재능은 배운다고 해서 트이는 것이 아니다."라는 선언에 반기를 든다. 대신 글쓰기는 재능과는 다른 차원의 글 쓰는 비법이 있다고 말한다. 즉, 글을 쓴다는 것은, 갑자기 재능으로 인한 영감의 표출이 아니라, 글을 쓰게 되는 무엇이 있다(무의식, 습관 등)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서사의 방법, 인물의 형성에 관한 것 등의 기교를 가르치는 책은 아니다. 그녀는 줄곧 작가의 생각과 마음에 초점을 맞추어 글쓰기를 설명한다. 

작가의 생각과 마음에 대한 비법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작가가 되려면 작가로서의 생활과 태도와 습관, 나아가 성격에서의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글을 잘 쓰는 법을 배우려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작가의 기질을 배양하고 글은 무조건 써야 하는 의무를 가져야 한다. 또한 작가로서의 이중성을 이해하여야 하며 의식과 무의식을 구분할 줄 알고 적절하게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 이 밖에도 글을 쓰는 습관, 검토 작업, 비평, 모방, 휴식, 독창성, 습작 등에 대해 작가로서의 취해야 할 행동에 대해 이야기한다.

특히 두 가지가 눈에 들어오는데, 일정한 시간에 글쓰기와 무의식의 활용에 대한 설명이다. 글은 천재적 영감같이 갑자기 떠오를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정해서 그 시간에는 꼭 써야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작가는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이며 부단한 글쓰기 연습과 반복을 통해​ 일어난다고 강조한다. 또한 무의식과 의식을 이야기함으로써 우리 개개인의 의식 속에 무의식을 건드릴 수 있도록 부단히 노력해야만 작가가 된다는 것이다.

​사실 이 책은 번역투의 문장이 쉽게 다가오지 않아서 그런지, 그리 잘 읽히는 책은 아니다. 그리고 그 시대에는 새로운 이야기일지는 몰라도( 재능보다도 열정과 노력) 지금의 독자가 읽기에는 추상적인 이야기로 다가올지도 모르겠다. 더욱이 나 같은 작가 수업에 그리 관심 없는 사람에게는 그렇다. 그렇다고 마냥 덮을 책은 또한 아니다. 블로그와 카페, 페이스북 같은 곳에 끊임없이 쓰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한 번쯤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노력과 열정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블렌디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볼 필요도 있다.

사족이지만 나 자신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ㅎㅎ. 글 쓰는 것은 힘든 작업이다. 글을 잘 쓰는 사람들을 보면 마냥 부럽다. 그렇다고 투정 부리지 말고 노력하자. 글 쓰는 것에는 왕도가 없다. 끊임없이 읽고,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보며 논리적 체계를 갖추어 본다. 그리고 정해진 시간에 글을 막무가내로 써 보자. 계속 써 내려가면 어느 순간 정제되고 유려한 나만의 글이 보이지 않을까. ​ 힘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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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독서 - 세상을 바꾼 위험하고 위대한 생각들
유시민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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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유시민을 키운, 유시민과 같이 읽는 인생의 지도

유시민을 기억한다. 한창 정치 및 사회에 관심이 막 생길 나이어서 '100분토론'을 꽤 열렬하게 시청했었다. 그때 MBC 100분토론 사회자가 유시민이었다. 날카로운 인상이었으나 웃음기가 어려있었고 말쑥했다. 무엇보다도 토론을 리딩해 가는 능력이 참으로 놀라웠다. 패널들의 잘못된 논리적 모순을 정확하게 지적하였고, 자칫 산으로 갈 수 있는 토론에 중심을 잘 잡아 논제에 집중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었다. 편향적이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진보를 이야기하는 그의 언뜻언뜻 비치는 언행에 묘한 동질감을 느껴 참 매력적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노무현 대선 활동에 그가 뛰어들 즈음, 읽은 게 유시민의 '항소이유서'였다. 유시민에게 항상 연관되어 따라오는 유명한 글이다. 1985년 '서울대 프락치 사건'으로 1심에서 징역형을 선고받고 '항소'를 하며 직접 썼다. 명문이다. 글이 논리적이고 적확했으며 읽기 편하며 유려했다. 군부 독재의 비민주성과 사건의 왜곡과 날조에 맞서서 신념을 가지고 통쾌하게 썼다. 그때 그의 나이가 스물일곱이었다니 그 젊은 시절에 얼마나 세상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였는지 느낄 수 있었고, 한편으로는 그의 신념과 논리적 사유가 부러웠다. 노무현을 따라 정치의 길에 들어선 유시민은 장관, 국회의원을 역임하고 치열하게 정치와 싸우다 돌연 정계 은퇴하였다.

이 책 <청춘 독서>는 그런 유시민의 인생을 만든 책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갈림길과 장애물이 나타날 때마다 도움받았던 낡은 지도를 꺼내 살펴보는 것처럼 유시민은 긴 여정을 함께 했던 지도를 들여다보면서 지난 시기의 선택이 올바른 것이었는지를 차분히 되짚어보기 위해 이 책을 썼다 했다. 그래서 고전이라고 일컫는 문학과 철학, 인문 사회학의 책을 읽으면서 과거의 유시민을 읽을 수 있었고, 더불어 유시민의 치열했던 고민과 성찰도 아울러 읽을 수 있다. 무엇보다도 다양한 분야의 위대한 생각들을 유시민의 안내에 따라 편하게 읽을 수 있었다. 진보와 자유를 한 번쯤 고민해보았던 사람들은 유시민의 지도를 지금에서야 같이 보고 있다는 황홀한 경험도 해 볼 듯하다.

​이 책에서는 다양한 문학과 인문과학 책들이 쏟아져 나온다. 가치의 우열을 가늠하기 힘든 총 열네 개의 책들이 유시민의 입을 빌려 이야기를 한다. 문학 작품이 총 다섯 편이고 나머지는 인문과학 책이다. 다섯 편의 문학 작품 중 세 편이 러시아 문학이며 책 후기에서 나와 있듯이, 더 쓰고 싶었던 작품들도 거의 대부분이 러시아 문학이었다니 사상적 원천을 대략 가늠해볼 수 있겠다. 난 개인적으로 문학 작품에 대한 위대한 작가들의 철학적 고민에 대해 좀더 집중했으며 그들의 책에 대한 유시민의 서평이 흥미로웠다. 항상 문학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인데, 문학은 인간의 삶을 고민하게 하고, 사람을 이해하고 철학을 생성하며 방향을 제시하는 이정표인 것 같다. 아마 유시민도 그러하였을 것이기에 그의 마음에 남아있는 이런 문학 작품들을 나 역시 다시 한번 꺼내어 읽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이 다 버릴 것이 없지만, 개인적으로는 토머스 맬서스의 <인구론>에 관련한 서평, '불평등은 불가피한 자연법칙인가'(p70), 푸쉬킨의 <대위의 딸> 서평,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p92),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슬픔도 힘이 될까'(p182), 헨리조지의 <진보와 빈곤>, '문명이 발전해도 빈곤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p246)를 상당히 재미있게 읽었다. <인구론>서평에서 만난 맬서스의 피도 눈물도 없는 그의 논리적 편견에 눈을 뗄 수 없었으며, 푸쉬킨과 솔제니친의 문학에서는 삶에 대한 연민과 슬픔과 노여움을 바라보는 담담한 시선을 느낄 수 있어 먹먹했다. 헨리조지의 <진보와 빈곤>에 관련한 서평은 헨리조지의 명쾌한 경제학 논리를 쉽게 이해할 수 있었고, 그의 사상을 통해 사회의 진보와 그에 따른 빈곤을 날카롭게 바라보게 하는 시각을 갖는 데에 도움을 받았다.

또한 새로운 책을 소개할 때마다 계속해서 지적 확장도 이루어졌는데  <종의 기원> 서평을 읽으면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와 대입해 보며 이타적 인간의 가능성을 생각해보는 유시민을 만났으며, <역사란 무엇인가> 서평에서 나타난 인간의 진보에 대한 유시민의 믿음을 읽을 수 있었다. 특히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책은 참 반가운 것이었는데, 가장 최근에 읽었던 내용이라 그랬고, 영화 '변호인'에서 송강호의 법정 씬에서 강렬하게 나온 책이라 더욱 그랬다. '만약 누군가 나에게 50면을 살면서 읽은 책들 가운데 가장 소중한 것 하나만을 고르라고 한다면 나는 바로 이 책 <역사란 무엇인가>를 집어 들것이다'(p311)에서 말하는 것처럼 유시민의 진보에 대한 믿음을 확언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나 역시 역사의 진보, 도킨스의 말을 빌린다면 '문화라는 밈의 스푸'의 진화를 믿기에 그의 자유와 진보에 대한 믿음이 와 닿았다.(물론 김언수가 <눈먼자들의 국가-그러니 다시 한번 말해보시오, 테이레시아스여>편에서 세월호 사건을 통해 우리의 역사는 퇴보될 수도 있다는 주장에 심히 공감해 버렸지만 난 그것이 김언수의 문학적 역설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의미 있는 책 읽기였다. 정당인 유시민이 아닌 '자유주의자', '지식소매상' 유시민을 만날 수 있어 좋았다. 아쉽기는 하지만 때로는 정당인 유시민보다 작가 유시민이 더 좋다. 아마도 그건 그가 거친 정치 세상에 있으며 진보와 보수 모두에게 비난의 화살을 받는게 안쓰러운 마음도 들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생각과 사상을 같이 공유하고 시대를 같이 읽어가는 작업에 같이 독자로서 동참할 수 있어 그럴 것이다. 얼마 전에 <나의 한국현대사>라는 책이 나왔다고 한다.  유시민의 책을 더 읽고 싶다. 그리고 '지도에는 길섶에 핀 들꽃이나 종달새 노래의 아름다음을 표시할 수 없다. 그런 아름다움을 맛보게 해준 책들은 전혀 다루지 못 했다'(p314)는 그의 고백처럼 그러한 것까지도 읽어 가고 싶다. 꼭 이런 책들이 나오길 바란다.

​덧붙이며) 유시민의 항소이유서와 항소이유서에 마지막 단락에 실린 멋진 문장임과 동시에, 항소이유서 때문에 유명해진 네크라소프의 구절을 마지막으로 덧붙인다.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

항소이유서 : 유시민 사이트 링크 http://www.usimin.net/?p=395 

차례

​위대한 한 사람이 세상을 구할 수 있을까(도스토옙스키 '죄와 벌') / 지식인은 무엇으로 사는가(리영희 '전환 시대의 논리') / 청춘을 뒤흔든 혁명의 매력(마르크스,앵겔스 '공산당 선언') / 불평등은 불가피한 자연법칙인가(맬서스 '인구론) /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푸시킨 '대위의 딸') / 진정한 보수주의자를 만나다(맹자 '맹자') / 어떤 곳에도 속할 수 없는 개인의 욕망(최인훈 '광장') / 권력투쟁의 빛과 그림자(사마천 '사기') / 슬픔도 힘이 될까(솔제니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인가(다윈 '종의 기원) / 우리는 왜 부자가 되려 하는가(베블런 '유한계급론') / 문명이 발전해도 빈곤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헨리조지 '진보와 빈곤) / 내 생각은 정말 내 생각일까(뵐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 역사의 진보를 믿어도 될까(카 '역사란 무엇인가')

​다시 인구론을 읽으면서 느끼는 감정은 두려움이다. 우리 모두는 갖가지 편견과 고정관념을 지니고 산다... (중략)... 그렇다면 나는 맬서스와 얼마나 다른가. 내가 옳다고 믿는 것, 내 신념을 받치고 있는 수많은 통념들 가운데 그릇된 편견이나 고정관념이 없을 것인가? 지금 쓰고 있는 이 글 속에도 그런 것이 없다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는가? <인구론>과 맬서스는 금이 간 거울이다. 내 생각도 그릇된 편견과 고정관념으로 일그러져 있지 않는지 경계하면서, 거기에 나를 비추어 본다. 생각은 때로 감옥이 될 수 있다!(p91)

​저학력 저소득 고령층 유권자들이 유한계급의 속물주의와 물신숭배 문화를 충실히 대변하는 보수정당을 지지하는 것은 '준평화적 야만 문화'단계에 있는 모든 나라에서 볼 수 있는 보편적 현상이다. 우리나라가 매우 심한 편이지만 우리만 그런 것은 아니다. 혁신과 진보는 언제 어디서나 저속하고 품위 없다는 인습적 비난에 봉착한다는 베블런의 다음과 같은 분석에 위로를 받으면서 자문해본다. 나도 그처럼 팔짱을 끼고 냉담한 태도로 이 세상을 관찰만 하면서 살면 마음이 편해질까?(p243)

​카타리나 블룸이 묻는다. "그대는 신문 헤드라인을 진실이라고 믿습니까?" 나는 대답한다. "아니오. 믿지 않습니다. 헤드라인을 진실로 믿어도 되는, 그런 좋은 신문을 집에서 구독해보는 것이 내 간절한, 언제 이루어질지 모르는 소망입니다."(p294)

​나는 단지 역사가의 작업이 그가 속한 사회를 얼마나 정확하게 반영하는가를 보여주고 싶을 뿐이다. 흘러가는 것이 사건만은 아니다. 역사가 자신도 그 흐름 속에 있다. 역사 책을 볼 때 표지에 있는 저자의 이름을 찾아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언제 집필되었는지 언제 출판되었는지도 살펴보아야 한다. 때로는 이런 것이 더 많은 비밀을 드러낸다. 만일 똑같은 강물에 두 번 다시 들어갈  수 없다고 한 철학자의 말이 옳다면, 한 역사가가 같은 책을 두 번 쓸 수 없다는 말 역시, 같은 이유로 진실일 것이다.(역사란 무엇인가 p60~61 재인용, p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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