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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의 선
앨런 홀링허스트 지음, 전승희 옮김 / 창비 / 2018년 11월
평점 :
이 책이 내 눈길을 잡아내었던 건, 제목, 표지, 수상이력, 퀴어라는 주제 뿐 아니라 최근 <보헤미안 랩소디> 를 보면서 1980년대 영국, 그 당시의 인종차별, 동성애, 에이즈 등과 관련해서 관심도 많이 생겨서 마침 동시대를 다루는 맨부커상을 받은 퀴어소설인 <아름다움의 선> 을 또 다른 차원에서 읽고싶었었다. 그리고 전에 보았던 영화 <더 노멀 하트> 도 생각나면서, 그 당시를 좀 더 느껴보고싶기도 했다.
그는 다른 이들이 조정선수인 자신의 건장한 몸매에 감탄하는 것을 즐겼고, 그 사실을 익히 아는 닉은 발코니에서 그를 바라보거나 약간 숨가쁜 느낌으로 그에게 내려갔다.
윗도리를 벗어 던지는 것, 그것이야말로 미(美)가 쉽게 베풀 수 있는 자선행위가 아닌가. p.16
전체적인 줄거리는 동성애자인 닉이 옥스퍼드 동기이면서 남몰래 짝사랑해온 토비의 집(부유하고 정치적영향력이 있는 집안)에서 게스트로 머물게 되고, 이 곳에서 경험하는 상류층 사회, 동성애의 경험을 다루는 책이라고 보면 된다.
이 책이 맨부커상을 받은 최초의 퀴어소설이라는 점에서 뭔가 문학상을 받은 책이라면 절제된 표현으로 동성애에 대해 잘 표현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갖고있었는데 초반 2챕터를 읽으면서 그런 선입견은 완전히 깨졌다. 굉장히 직접적이면서도 문학적비유를 많이 담은 표현으로 동성간 성행위를 묘사해서 놀라웠었다.
그 이중의 곡선은 호가스의 '아름다움의 선', 뱀 같은 본능의 번뜩임, 하나의 움직임이 펼쳐지는 가운데 합쳐지는 두 충동의 명멸이었다. 그는 손으로 와니의 등을 쓸어내렸다. 호가스는 '아름다움의 선'의 가장 아름다운 사례인 이것, 아래로 내려갓다 다시 부풀어오르는 이 선을 보여주지 못했다. p.275
얼핏보면 굉장히 직접적인데 얼핏보면 또 비유나 표현이 고급스럽다. 닉이 영문학을 공부한 엘리트라 그런지 문학에서 차용한 표현도 많고 비유가 우아해서 퀴어 문학소설을 읽는다는 느낌이 들긴한다.
와니가 말했다. "너는 그냥 그가 워그(유색인종을 경멸적으로 칭하는 영국의 속어)라서 좋아하는 거잖아. 아마 그애랑 하고 싶겠지."
"꼭 그런 건 아니야." 닉이 말했다. 그에 대한 닉의 성욕은 단지 당시 느꼈던 범죄의 흥분, 긴장과 함께 느껴지던 안도감, 로니가 그의 돈뿐 아니라 그 또한 받아들였다는 사실에 대한 즐거운 기분의 일부였을 뿐이다. 그는 마무리 삼아 말했다. "워그라는 단어는 안썼으면 좋겠어. 네가 네 아버지만큼 구제불능은 아니라고 믿으려고 계속 노력중이란 말야." p.345
"망할 놈의 에이랍 자식에게 지다니!" 말을 뱉자마자 제럴드는 자신의 솔직함에 놀라 멈칫하며 마치 농담인 듯 굴었다. p.482
1980년대 1983, 1986, 1987 년의 여름을 담은 책으로 그냥 읽다보면 닉의 연애에 대해 보는 책 같기도 하지만 중간중간 묘사되는 엘리트 백인 페든가의 가족들의 태도, 그의 연인이자 흑인인 리오의 표현, 백만장자 유대인 연인 와니의 행동 등을 보다보면 지금도 없진 않지만 그 꽉막히고 갑갑한, 인정하지 않고 경멸해버리거나 무시하고 모른척하는 그당시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인종에 따른 그 먹이사슬 관계, 재력에 따른 그 관계들...! 그사이에 나오는 위선적인 행동들이 사이사이 잘 스며들어 이게 단순히 동성애만 다루는 소설이 아니라는 걸 느끼게 한다.
레이철은 유약을 발라 구운 사기 샐러드 그릇 아래 먼 곳을 보았다. "작년에 극동 지역에서 무슨 특이한 병에 걸려왔어요. ... (생략)" 닉은 이 불길한 허구가 유지되고 있는 데 일종의 안도감을 느꼈고, 여자친구와 제대로 눈을 맞추지 않은 채 아무것도 모르고 고개를 주억거리는 재스퍼를 바라보았다.
"엄마, 제발!" 캐서린이 말했다. "그건 에이즈예요!" 가래 섞인 거친 목소리, 분노와 싸우는 캐서린의 목소리였다. ... (중략)...
"달링, 네가 그걸 어떻게......." 레이철이 더듬거렸다. p.454
어둡다거나 우울하게 그런 것들을 표현한 것은 아니지만, 닉의 연애활동을 읽다가 동성애에 대한 터부시하는 부분이 튀어나오면 내심 불편하면서도 동시에 지금같으면 이걸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라는 생각이 들면서 읽게된다.
근데 지금도 동성애를 금기시하고, 권력있는 자들의 위세나 이중적인 삶이나, 동성애를 인정못하는 부모의 심정은 마찬가지라서...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게 없구나 싶기도 했다. (물론 이전보다는 좀더 포용하는 환경이 조성되고 특히 외국같은 경우는 인정해주는 지역도 생기고 하니 더 낫지만...)
<아름다움의 선>이 단순히 자극적인 19금 소설이 아니라 문학상을 받았다는 건 외설적인 표현가운데 이런 포인트가 긴장감있게 잘 녹아들어가서 그런 것 같았다.
생각보다 책이 두꺼워서 읽기가 약간 힘들었지만 상황, 심정을 묘사하는 표현이 새로우면서도 고급스러워서 이런 부분을 읽는 재미도 있었고 문학소설 안의 성행위를 표현하는 방식이 재미있기도 해서 두께에 비해 빨리 읽은 편이었다.
평소 읽던 장르가 아닌 새로운 장르를 접하고 싶다면? 그리고 성적인 표현과 문학적 비유가 오묘하게 어우러지는 매력을 느껴보고 싶다면? 1980년대 동성애, 에이즈, 인종차별 등에 대한 사회상을 간접적으로 경험해보고 싶다면? 신간 <아름다움의 선> 을 읽어보면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