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실 비치에서
이언 매큐언 지음, 우달임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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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젊고 잘 교육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둘 다 첫날밤인 지금까지 순결을 지키고 있었다. 물론 요즘에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 시절은 성문제를 화제에 올리는 것조차 불가능하던 때였다." (p.9)
 

​이 이야기는 위의 문장으로 시작된다. 지금 이곳은 체실 비치의 한 호텔이고, 남녀 주인공 애드워드와 플로렌스는 막 결혼을 한 사이다. 이곳에서 결혼 첫 날을 보내고 있다. 이들은 첫날 밤을 앞두고 있고, 보통의 신혼부부가 그렇듯 성적인 긴장감에 휩싸여 있다. 이 책의 묘미는 여기에 있다. 시작되는 문장과 그들이 지금 놓인 상황 간의 괴리, 그리고 그들이 가진 생각의 확고한 차이.

솔직히 말해, 애드워드와 플로렌스가 거닐었던 길과 나란히 누워 하늘을 바라보던 언덕이 난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그런 풍경에 대한 세밀한 묘사는 물론 너무도 아름다운 것이지만, 이 책을 읽는 동안에는 그런 풍경과 연인의 아름다운 장면들을 떠올리거나 궁금해 할 틈이 없었다. 정말 궁금하고 원했던 것은, 그 다음에 진행될 이야기 뿐이었다. 체실 비치의 호텔에서 이들이 처한 상황과 앞으로 하게 될 일 말이다. 이 남녀가 신혼 첫날 밤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 과연 무탈하게 보낼 수 있을지.

 

내가 음란마귀가 씌여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누는 장면만을 기대하면서 눈을 번득이고 있었던 게 아니라고는 못하겠다.(사실이니까.)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이렇게 포장하자면), 여기 체실 비치 호텔에서 보내는 첫 밤은 이 남녀의 연애가 끝이 나고 결혼 생활로 들어가는 문을 여는, 상징적인 의미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첫날 밤이라는 의식은, 무사히 치뤘을 때 다음 관문으로 넘어갈 수 있는 일종의 중간보스 같은 느낌이랄까. 그렇게 놓고 보면 그들이 묶는 호텔방은 모험의 공간이고, 그 밤은 역경의 시간이 된다. 그런 나름의 스펙터클이 존재한다.(중요한 순간마다 그 짧은 시간동안 각자의 머릿속에 무수히 많은 생각들이 스쳐가고, 상대의 의중을 떠보고 가늠하느라 온 신경을 집중하는, 치열한 장면이 계속된다.) 그런 모험의 관문을 거치면서 그들은 결혼이 현실이라는 것을, 더 이상 환상처럼 달콤하고 이성적이며 자신만의 가치에 부합하는 행복이 아님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

무엇보다 감탄했던 것은, 작가의 세밀한 묘사를 마주할 때였다. 좀 전에 말했던 것처럼 애드워드와 플로렌스가 호텔에 머물렀던 잠시의 시간을 다시 짧은 순간으로 나누어 그들을 스쳐가는 생각과 미세하게 변화하는 심리라든지, 상대에 대한 지레짐작 혹은 엇갈린 추측 같은 것을 참 탁월하게 그려낸다. 글을 읽고 있음에도 영상을 보는 듯 하고, 그걸 보는 나도 긴장감 속에서 그들을 지켜보게 된다.

 

작가는 그런 긴장감을 잘 이용할 줄 안다. 이야기가 좀 진전될 만 하면 과거의 추억을 회상하고, 가족에 대해, 플로렌스의 음악에 대해, 에드워드의 역사책에 대해, 교묘하게 넘어가 버린다. 물론, 두 남녀의 가치관과 취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배경을 알아야 하고 납득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건 인정. 하지만 이런 순간에 작가가 정말 얄미워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수목 드라마 목요일 분량을 5분 남겨 놓은 듯한 기분. 남녀 주인공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할 듯 말 듯 하다가 그냥 끝나버리면 난 도저히 다음주 수요일까지 기다릴 자신이 없다.

제발, 여기서 멈추지 말고 결말을 보여주라고! 그래서 첫날 밤은? 성적인 취향의 타협점을 찾았냐고!

 

이렇게 애원하듯 짜증내듯 이 책을 읽고보니, 첫날 밤의 결말보다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실은 작가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이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 마지막 열 페이지 남짓한 글을 보이기 위해 앞의 무수한 이야기들을 이끌어 온 게 아닌가 하는. 사랑에 대한 고찰을 하게 만드는 책이다. 역시 작가는 보통이 아니다.

 

 

다시 이 책을 표현하자면, 어리석은 자존심이 가득했던, 미성숙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자, 그런 사랑은 다시 없다는 걸 깨닫게 하는 이별에 대한 이야기다. 누구나 사랑을 하지만 그 사랑의 강도는 모두가 다르듯, 한 사람의 경험들 안에서도 각각의 강도는 모두 다르며 더욱 아리거나 복받치는 추억이 있기 마련이다. 특히나 서로의 사랑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환상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세상에 둘만 존재하는 것 같았던 사랑이라면 더구나. 더불어 이별이 또 다른 그리움의 시작이 되거나, 진실된 사랑을 알게 해주거나, 그 아픔으로 스스로가 더욱 성숙해지는 때도 있다. 아쉬운 사랑일수록 더욱 많은 미련과 후회와 반성과 집착이 남게 되는 것일까. 

하지만 우리는 안다. 아쉽게 느껴지는 그 사람이 지금껏 내 곁에 있었다면, 지금 머릿속에 그려지는 장면들처럼 그렇게 아름답지는 못할 거라는 사실을. 추억이고, 아쉬움에 미화된 기억일 뿐이라는 것을. 애드워드 역시 그것을 잘 알고 있다. "그는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그녀의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싶었다."(p.196) 그는 이미 중년을 넘어섰고, 사람을 포함한 많은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남녀가 하는(이성애만을 인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소설의 설정이 그러니까.) 사랑은 단 한 순간의 오해와 의심으로도 흔들릴 수 있다. 무턱대고 견고한 사랑이라는 것은 없다. 그렇기에 서로의 헌신과 노력, 대화가 필요한 것이다.

결국은 사랑이 두 사람을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을 서로가 노력으로 지켜가야 아름다운 엔딩을 맞을 수 있다는 것.

사랑과 결혼 역시 '관계'의 문제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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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인간
성석제 지음 / 창비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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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위안을 줄 수 없다. 함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뿐. 함께 느끼고 있다고, 우리는 함께 존재하고 있다고 써서 보여줄 뿐.

이 소설의 첫 문장을 쓰기 시작한 이후 깨달은 것은 이것이다.

- 작가의 말 중에서.
 

 

이 소설을 읽고 나서 남은 것은, 스토리와 만수와 마지막 장면이었다. 어떤 소설을 읽을 때면 보통은 인상적인 구절 몇 개쯤은 있기 마련인데,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마음을 훅하고 잡아끄는 구절하나 없었다. 아니, 다시 말하자면 그저 읽고 넘기는 것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 더 맞겠다. 또 다시 말하자면, 한 쪽을 읽으면 다음 쪽을 당겨오느라 이야기에 집중하는 것 말고는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소설마다 문장이 좋은 작품이 있고, 이야기 자체로 즐거운 작품이 있다. 이 소설은 확실히 이야기가 탁월한 작품이다. 저자는 스무 명도 넘는 인물을 구성하고 그들 하나하나의 시선을 빌려 만수를 비춘다. 각각의 인물마다 개성이 있고, 그만의 가치관이 또렷하다. 이 책을 읽다보면 마치 그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한꺼번에 쏟아지는 이야기를 듣고 서 있는 것만 같다. 작가의 상상력이라고만 하기에는 너무 구체적이고 현실적이어서, 이런 유연성 넘치는 연결을 만들어가는 작가의 관록이 그저 부럽기만 하다.

 

아무래도 요즘 소설들을 보면, 비교적 단시간에 일어난, 혹은 순간의 현상에 집중한 작품들이 많은 것 같다. (그렇게 느끼는 이유가 내가 그런 작품들에 먼저 손이 가서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이렇게 서사를 갖춘 소설을 읽다보면 그 스케일에 깜짝 놀라게 된다. 한 사람이 태어나 성장하고 중년을 넘어서는 동안 시대가 변하고 세대는 교체된다. 그가 살아가는 과정은 꾸준히 세상을 비추고 있다. 우리는 그 속에서 얻은 것과 잃은 것을 셈하고, 반성하기도 하며, 변하지 않은 것을 찾아보기도 한다. 대단위의 시간 흐름 속에서 나타나거나 사라지는 수많은 관계들이 있다.

 

내가 주목한 것은 사람의 관계였다. '힘든 시대에 태어나서' 혹은 '먹고 살기 위해서'라는 얇팍한 말로 포장된, 이기심에 다름 없는 본능. 또 이해관계에 따라 미세하게 달라지는 심리와, 그에 대한 합리화의 말들을 나는 먼발치 떨어진 곳에서 완전한 타인의 시선으로 보고 들으며 확인하고 있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람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 얼마나 쉽게 타인의 배려와 희생은 잊어버리는지, 확인을 거듭할수록 습습한 마음을 거두기가 힘들었다. 그건 내 모습은 아니었는지.

 

그런 관계의 한가운데 만수가 있다. 부모에게조차도 맹목적인 사랑이나 희생을 받아본 적이 없는 그가, 누구에게도 받아본 적 없는 그런 류의 사랑을 타인에게 나눠주느라 삶을 끊임없이 소진한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절대로 포기하거나 망설이지 않고, 웃음을 잃지 않으며 만수는 자신의 삶을 살아낸다는 것이다. 소문만복래라, 일소일소 일노일로라, 했던 할아버지의 말처럼.

그런 삶을 살고도 투명인간이 되어 더 이상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된 만수가 나는, 시대가 변했다는 핑계로 우리가 잃고 있는 가치를 대변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분명히 존재하지만 우리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그래서 사라진 것이 분명하다고 확신하게 되는 가치 혹은 관념 혹은 그런 사람들. 그래서 미처 잃는 것이라고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고, 이제 우리와는 무관한 것이라고 치부해버리기 쉬운,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요즘 시대에 무슨, 이라고 그냥 넘겨버릴 수도 있을 그런 무언가.

 

이야기가 끝나도록 만수는 화자로 등장하지 않는다. 단지 수많은 인물들이 전하는 일화들 속에서만 만날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의 입장에서 만수를 해석하고 평가하지만, 누구도 만수가 겪었을 일들과 느꼈을 감정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지는 못한다. 다만 추측할 뿐. 이들의 이야기 속에서만 존재하는 만수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않거나 낼 수 없는 만수는 그렇게 투명인간이 되었다.

 

나는 그가 우리 주변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비록 보이지는 않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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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불로 떠난 이민, 20년 세계일주가 되다》

 

김현성(지은이) / 이명환(그림) / 다반 / 2016-09-10
반양장본 / 440쪽 / 220*150mm / 572g

 

 

부제가 '대책 없는 가족의 생활 거주형 세계여행기'이다. 성인이 된 부모야 세계일주라지만,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사는 곳이 자꾸 바뀌는 아이들은 괜찮을까,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그럼에도 이 책에 관심이 가는 건, 요즘 나도 이 나라를 떠나는 것에 자꾸만 관심이 가기 때문이다. 얼마 전 뉴스를 보니 미군 내 외국인 입대자 중 30%가 한국인이라고. 더 나은 대우를 받기 위해 국적을 포기하는 사람들을 보자니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다.

 

저자는 안정된 직장과 생활보다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을 위해 이 '거주형 세계여행'을 시작했다고 한다. 내가 지금 떠나고 싶은 이유와 관점은 좀 다르지만, 이방인으로서 어디에도 정착함 없이 살아온 이 가족의 삶에서 꼭 무언가 얻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세상에는 두 가지의 양이 있어요. 축사 안에서 편안히 사는 양과 넓은 들판에서 사는 자유로운 양이죠. 축사 안에서 사는 양은 때가 되면 밥을 먹을 수 있고, 비가 오면 숨을 지붕도 있고 늑대가 오면 보호해 줄 주인도 있죠. 하지만 언젠간 털이 모두 깎여 버릴 겁니다. 이와 달리 들판에서 사는 양은 잡초를 먹고 생활하고, 비가 오면 바위틈에 숨어야 하죠. 언제 늑대의 공격을 받을지 모른다는 위험도 있고요. 하지만 마음껏 뛰어놀 수 있어요. 저는 제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는 들판의 양이 되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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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불로 떠난 이민, 20년 세계일주가 되다- 대책 없는 가족의 생활 거주형 세계여행기
김현성 지음, 이명환 그림 / 다반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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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 장정일의 독서일기
장정일 지음 / 범우사 / 199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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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빠짐없이 기록한 독서일지. 때론 명랑하기도, 때론 험악하기도 하다. '일기'이기에 가감없고, 솔직해질 수 있는 거라 생각한다. 다른 사람의 생각이 모두 맞다고 생각하진 않는 편이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모두 정답은 아니더라도, 이 책을 만난 건 행운이다. 모두 구해서 읽는 것을 장기적으로 계획한다. 분명한 것은, 이런 책은 아무나 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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