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마디로 낚였다!  

어지간하지 않으면 함부로 손대지 않는 분야가 있다. 바로 심리관련서와 자기계발서이다. 전공과 관련해서 들춰보는 프로이트나 라깡의 이론들 외에는 서점에 가서도 가장 인색하게 곁을 주는 책들이 바로 이 두 종류의 서적들이다. 고아노 아츠시(小欲野敦)가 <약한 자의 변명>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세상에는 자기 자신을 찾았다고 해서 무언가를 구현할 만큼 대단한 자기를 가진 사람은 거의 없다"고.1) 인간은 결코 이성적, 합리적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이성의 신화로 포장된 감성적 동물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이는 굳이 심리학 개론을 들춰보지 않아도 지금의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기만 해도, 자신의 삶을 잠깐 동안만이라도 반추(反芻)해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 부정할 수 없는 사태(事態)인 것이다.  

심리관련서/자기계발서를 읽는 목적은 대개 자기 자신을 알고 싶거나 자신을 변화시키고 싶어서일 것이다. 나 자신을 알고 싶은가? 그렇다면 이런 피상적인 심리학 개론서를 읽지 말고 차라리 문학작품을 곱씹어가면서 읽어보자. 짧은 단편이던 장편소설이던 거기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간군상의 특징과 엉킨 실타래와 같은 갈등의 양상을 파헤쳐보자. 시 한 편에서 나 아닌 한 타인의 내면의 풍경을 훔쳐보거나 예민한 감수성의 절규를 들어보자. 예컨대 요즘 읽고 있는 파스칼 키냐르의 <은밀한 생>은 상실, 사랑, 욕망, 결어, 두려움 등 모든 심리학적 주제에 대한 탁월한 보고서이다. 작가의 난해한 언어의 숲을 잘 헤쳐서만 갈 수 있다면 거기서 '나 자신'에 대한 보다 근원적인 사유를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나 자신을 변화시키고 싶은가? 무의식의 상처라고 하는 심연이, 갈등의 변증법적 전개가, 욕망의 질주가 문제가 되는가? 그것은 이런 저런 매뉴얼에 의하지 않더라도 자기 자신을 잘 들여다보면 변화의 방향과 내용이 보인다. 그 내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침묵의 시간을 갖는 것이 아마도 가장 어려운 일이겠지만.  

1) 요네하라 마리 (이언숙 옮김): 대단한 책. 마음산책 2006, 38쪽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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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기 1: 영화 <빨간 풍선>에서 인형극 성우로 일하는 줄리엣 비노쉬의 멋진 발음을 듣고서 불어를 배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 동기 2: 미셸 투르니에의 <방드르디, 세계의 끝>을 읽고서 작품의 신화적 세계를 원문으로 읽고 싶은 욕심이 났다.  
- 동기 3: 영화 <여름의 조각들>에 줄리엣 비노쉬가 또다시 등장하여 당연히(!) 불어를 쫑알거리며 내게 염장을 질렀다.  

그래서 결심했다. 불어를 배우기로!!! 
학원을 다닐까도 고민했지만 오고가는 시간이 좀 부담스러웠다. 백방으로 알아본 후 선택한 교재는 우선 동영상 강의가 제공되는 주장수의 <프랑스어 첫걸음의 모든 것>. 이어서 EBS의 <입에서 톡 프랑스어>를 시작하면 될 것 같았다. 우선 발음 공부하는데 일주일 정도 걸렸다. 전혀 흉내낼 수 없을 것 같았던 (가래침 뱉는) 프랑스어 발음이 내게서도 나더라. 독일어 원서에 번역도 없이 마구마구 인용된 프랑스어에 무지 짜증났을 때 확 배워버렸어야 했었는데... 그 좋은 환경에서는 마냥 그냥 있다가 이제야 시작을 한다. 어쨌든 전혀 해독불가능할 것 같았던 프랑스어가 조금씩 읽혀지기 시작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언젠가 엑상 프로방스에서의 한 달간의 휴가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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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빈치 최초의 과학자
마이클 화이트 지음, 안인희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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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생아, 동성애자, 채식주의자, 밀실 공포증, 편집증 환자, 강박적 피해망상증, 비밀주의자, 왼손잡이, 인간 혐오자 - 이 모든 것이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규정짓는 특징들이다. 건축가이자 예술가이며 과학자 정도로만 알고 있었던 레오나르도에게 그의 성품과 삶에 깊이 각인된 이런 인간적인 약점들이 있었을 줄이야.
작가에 의하면, 레오나르도가 남긴 노트가 1만 3000쪽에 달하는데도 불구하고 거기서 그의 개인적 삶에 대한 흔적들은 별로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각종 추론과 상상력을 통해서 작가가 재구성한 16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풍경과 이를 배경으로 전개되는 레오나르도의 삶의 여정은 오히려 한 편의 소설과도 같다. '르네상스'라고 하면 흔히들 유럽문화의 전성기라고 생각하는데, 여기서 보여주는 16세기의 삶의 조건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열악하다는 사실 또한 흥미롭다. 벌어진 상처를 위한 그 당시의 표준적 처방을 위해 필요한 약재가 1파운드의 올리브 기름, 녹색 도마뱀 10마리, 마요라나, 쓴 쑥 한 되라니! (다른 처방도 있다: 지렁이 여러 마리, 포도주, 고약, 전나무나 낙엽송의 수지)
작가는 레오나르도가 남긴 과학적 성과와 유산을 토대로 그를 '최초의 과학자'로 등극시키려고 작심하고 이 책을 쓴 것 같다. 하지만 이를 증명하기 위한 챕터인 <노트 I>, <노트 II>, <미술의 과학>에서 드러나는 작가의 어설프고 억지스러운 '과학적' 설명이 오히려 레오나르도에 대한 흥미를 반감시키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레오나르도의 과학자로서의 면모를 보다 철저하게 파헤쳐놓았기를 기대했던 독자에게는 실망을, 그의 인간적인 면모에 호기심이 있었던 독자에게는 지루함을 가져다 준 셈이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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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당신도 써라
배상문 지음 / 북포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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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에 관한 책'의 유혹은 집요하다. 서점에 진열된 이런 종류의 책들 앞에서 눈을 질끈 감으려고 해도 늘 한 권 정도는 나에게 끈질긴 추파의 눈길을 보낸다. 그래서 이번에도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냉큼 집어든 책이 바로 이 책이다.  

"그러니까 당신도 써라" - 동의한다. 저자의 단순명쾌한 이 일갈(一喝)은 그냥 쓰면 될 것을 가지고 무슨 고민이 그리 많냐고 나를 질책하는 것 같다. 잡문을 쓰든 논문을 쓰든 '글쓰기' 자체는 노동이다. 직업적 작가라 하더라도 하얀 백지를 일정 분량 채우기 위해서는 '절대적 시간'이 필요하다. 책상 앞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사유의 언저리에서 산만하게 부유하는 언어들을 손가락으로 잡아챈 다음 "글이 생각을 명료하게 만들어가는 경지"(김원우)까지 써내려간 후에는 "내 문장에 구토가 나오는 순간까지"(정여울) 고쳐야 비로소 어느 정도 괜찮다싶은 글 하나가 탄생한다. 저자도 인용하고 있는 김원우의 중편소설 <벙어리의 말>에는 이렇게 씌어져 있다고 한다. "자꾸 써 보면 알아져, 글이 생각을 불러들인다는 걸." - 그걸 알면서도 노동하려 하지 않기에 글을 쓰지 못하는 것이다. 누가? 바로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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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레오 - 교회의 적, 과학의 순교자
마이클 화이트 지음, 김명남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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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히트의 희곡 <갈릴레이의 생애 Leben des Galilei>(1938/39)에 등장하는 이 과학자의 모습은 퍽이나 인간적이다. '과학의 순교자'로서 영웅적인 면모를 기대했던 독자라면 그의 인간적 허물과 비굴한 태도에 다소 실망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종교재판정의 고문기구를 보고 겁에 질려 지동설을 철회했다니! 이러한 인간적인 면모는 그러나 진리탐구의 학문적 열정과 이를 억압하는 기득권 세력과의 팽팽한 줄다리기와 첨예한 갈등 속에서 갈릴레이가 한 인간으로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읽기 시작한 책이 마이클 화이트의 <갈릴레오 Galileo Antichrist - A Biography>이다.   

이 책은 로마교황청의 종교재판 사건으로 인해 오히려 '신화적' 인물이 되어버린 인간 갈릴레이의 일생을 각종 자료를 토대로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책장을 넘기며 갈릴레이의 인생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그는 학문적 열정에만 사로잡힌 상아탑 학자도, 교회의 권위에 맞서 용감하게 항거한 순교자도 아닌 상당히 탁월한 현실감각을 지닌 현실주의자(!)였다는 확신을 굳히게 된다. 

아버지의 음악적 재능을 이어받아서인지 갈릴레오 그 자신이 뛰어난 류트 연주자였고 재능있는 화가였다는 사실은 갈릴레이도 다방면에 출중한 전인적 '르네상스인'이라는 인상을 준다. 이는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갈릴레이가 쓴 저술에서도 드러난다. 나로서는 상당히 재미있는 발견이었는데 (하긴 몇백년 전 과학저술을 읽을 일이 어디 있었겠는가!), 당시의 과학적 저술이 오늘날의 과학자들이 논문 쓰는 방식과는 달리 상당한 문학적 상상력과 묘사를 토대로 씌어졌다는 사실이다. 갈릴레이는 프롤레마이오스 천체관과 코페르니쿠스 천체관을 비교하는 그 유명한 저작인 <대화 Dialog sopra i due massimi sistemi>를 사르레도, 살비아티, 심플리초라는 세 사람의 대화형식으로 구성했는데, 책에 짧게 인용된 심플리초와 살비아티의 대화만 보더라도 그가 자신의 이론이 일반 대중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얼마나 고심해서 쓰고자 했는지를 알 수 있다. 또한 갈릴레이는 과학적 내용이나 자신의 신념을 다채로운 은유를 통해서 표현할 수 있는 문학적 재능이 있었는데, 이는 그가 쓴 편지들에서도 잘 나타난다.  

아쉬운 점은, 저자가 바티칸에 보관되었다가 최근에서야 일부 공개된 갈릴레이 관련 문헌을 근거로 새롭게 주장하고 있는 사실, 즉 갈릴레이를 종교재판정에 세웠던 이유는 그가 코페르니쿠스의 천체관을 과학적으로 증명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카톨릭 교회의 성체성사를 부정할 수 있는 위험한 원자이론을 <황금계량자 Il Saggiatore>라는 저서에서 개진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은 유감스럽게도 별로 흥미를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는 점이다. 또한 갈릴레이가 쓴 <토스카나의 크리스티나 대공 부인께 드리는 편지>에 담긴 신학적 내용은, 그 자신이 생각했던 것처럼 그가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음을 부인하기에는 어려울만큼 깊은 신앙적 깊이를 보여주고 있다. 교황청이 갈릴레이의 영향력의 파급을 두려워해서 그를 '적그리스도 antichrist'라고 낙인찍었을 수는 있겠지만, 갈릴레이가 교황청과 대립했던 것은 신앙의 진리 때문이 아니라 학문의 진리 때문이지 않았나? '적그리스도'의 명칭을 달기에 갈릴레이는 21세기를 사는 카톨릭 신자인 내가 보기에 신앙심이 너무 깊다. 하지만 그만큼 당시의 교회의 권력은 하늘을 치솟는 무소불위의 권력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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