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테의 <신곡 Divina Commedia> 입문서라고 할 수 있는 이마미치 도모노부의 강의록을 읽고 있다. 이제 막 지옥 여행을 시작했는데, 흥미로운 사실은 단테의 지옥도(地獄圖)에 따르면:  

1. 지옥문은 지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상에 있다는 사실. 즉 지옥으로 향하는 문은 현실세계 도처에 열려있다.   
2. 지옥문에 씌어져 있는 글귀:    

PER ME SI VA NELLA CITTÀ DOLENTE,
PER ME SI NELL' ETERNO DOLORE,
PER ME SI VA TRA LA PERDUTA GENTE.
나를 지나는 사람은 슬픔의 도시로,
나를 지나는 사람은 영원한 비탄으로,
나를 지나는 사람은 망자에 이른다.  

"여기에 들어오는 자 희망을 버려라." - 지옥문 앞에서 버리고 가야 할 것은, 이 지상에 남겨 두고 가야할 가장 마지막 것은 '희망'이라 한다. 희망 없는 삶을 그래서 지옥이라 했던가. 근데, 난 왜 하필이면 부활절날 지옥문을 어슬렁거리고 있는 걸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작가 이상(李箱)이 1934년 7월 24일 조선중앙일보에 발표한 <오감도(烏瞰圖)>의 '시제1호(詩第一號)'의 전문.   

13人의兒孩가道路로疾走하오.
(길은막다른골목길이適當하오.)

第1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2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3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4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5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6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7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8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9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10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11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12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13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13人의兒孩는무서운兒孩해와무서워하는兒孩해와그렇게뿐이모였소.
(다른事情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中에1人인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좋소.
그中에2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좋소.
그中에2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
그中에1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適當하오.)
13人의兒孩가道路로疾走하지아니하여도좋소.  

 

김홍중의 <마음의 사회학>에 실린 비평 "13인의 아해(兒孩) - 한국 모더니티의 코러스"를 읽으면서 문득 겹쳐지는 그림은 바로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의 <절규 Der Schrei>.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부제(副題)가 말해주듯이 이 책은 '한 아이의 유년기를 통해 보는 한국 남자의 정체성 형성 과정'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책을 읽기 시작한 원래 이유는 성성치학적 관심 때문이었지만, 책장을 넘기다 보니 이론적 관심은 증발해 버리고 나보다 조금 더 연배(年輩)가 있는 저자의 유년기의 일화들은 어느새 나를 나의 유년시절로의 여행으로 초대하고 있었다. 낚시와 관련된 아버지의 공간의 질서, 밥상머리의 풍경, 안택고사, 아버지와의 외출, 빨래하는 어머니의 푸념, 맏이였던 내가 누렸던 가족 내의 특권 등등.. 얼마 전 구입한 사진집 <윤미네 집>과 함께 이 책을 읽으면서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다만 그리울 뿐인 유년시절에 한동안 머물렀었다. 올해는 짬짬이 시간을 내서 옛날 흑백사진들을 정리해야겠다는 '2010프로젝트'를 구상하면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첫번째 여자 - 영국 1920년대: <댈레웨이 부인>을 집필 중인 버지니아 울프.

두번째 여자 - 미국 LA 1950년대: <댈러웨이 부인>을 읽고 있는 가정주부 로라.

세번째 여자 - 미국 NY 2000년대: '댈러웨이 부인'이라고 불리는 출판편집자 클래리사.

3명의 여자의 삶을 정교하게 교차시키면서 시대별 여성의 자의식을 섬세하게 보여주고 있는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영화 <디 아워스 The Hours>를 보고 읽기 시작한 책이다. 놀랍게도 저자는 버지니아 울프의 여자 애인이었던 비타의 아들이다. 어린 시절 가까이에서 버지니아 울프를 지켜볼 수 있었던 까닭에서인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시대를 앞서간 페미니스트로 각인된 버지니아 울프의 삶에 드리워진 여성주의적 '신화'의 베일을 벗겨내고 그녀의 삶을 보다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자 한다. 페미니스트라면 받아들이기 불편한 버지니아 울프에 대한 저자의 견해도 더러 눈에 띈다. 하지만 나의 관심을 끌었던 부분은, 버지니아 울프에게서 볼 수 있는 도발적 몸짓은 그녀만의 독창적인 사회적, 정치적 이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녀의 작가로서의 치열한 자의식과 블룸즈버리 그룹의 개방적이고 지적인 분위기에서 기인한다는 점이었다. 자유롭고 창조적인 지적 공동체 - 문학, 예술, 학문을 하는 사람들이 꿈꾸는 유토피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대단한' 책이라서 그랬을까? 제법 오래 전에 마지막 책장을 덮었건만 도통 정리를 할 수 없었다. 한 번 대출연장을 했기에 이제 무조건 반납해야 하는 상황에 몰려서야 비로소 이 두툼한 책을 앞에 놓고 짧은 단상으로나마 정리를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그렇다! 책을 읽어내는 것은 오히려 쉬운 일이다. 전공과 관련된 치밀한 책읽기를 해야 하는 경우라 할지라도 자신의 관심에 따라 집어든 책에 기꺼이 시간을 투자하면서 즐기는 일이 무슨 어려운 일이랴. 정작 수고를 필요로 하는 것은 읽은 책을 어떠한 형식으로든 자신의 '노동의 생산물'로 만들어내는데 있다.
방대한 분량의 책을 읽고 그것을 독서일기 혹은 서평으로 정리해내는 것 - 이것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요네하라 마리가 인용한 사이토 미나코(齌藤美奈子)의 말이 인상적이다: "무언가를 쓰는 일이든 읽는 일이든, 모든 지적인 작업에는 인간의 존엄을 회복시켜 주는 힘이 있다. [...] 감정을 발산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자기와 주변을 관찰하는 기회가 되기 때문에"(225쪽). 아마 요네하라 마리의 인간적 매력에 사로잡히는 것은 이 말이 그 누구도 아닌 바로 그녀 자신에게 해당되기 때문이리라.

p.s. 요네하라 마리는 일본어-러시아어 통역가답게 소련과 중국을 비롯한 동남아시아, 그리고 한반도의 역사에 대한 통찰과 날카로운 현실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작가의 독서목록을 훑어보니 일본에서는 "컬트 국가" 북한을 비롯하여 이들 지역에 대해 우리나라가 갖고 있는 관심과 지식의 정도와는 대조될 정도로 상당히 많은 전문서적들이 출간되고 있는 듯하다. 거의 관심이 없었던 이 지역들의 역사와 현실에 관한 방대한 정보를 접할 수 있었던 것이 내가 거둔 수확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