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집은 황량한 서부, 만들어진지 얼마 되지 않는 작은 마을에 있다. 사람들과 말을 타고 동쪽 뉴잉글랜드로부터 신대륙을 횡단해온 것은 벌써 40년 전의 일이다. 나의 20대에서 40대에 이르는 시기는 수많은 모험담을 만들었던 인생최고의 나날들이었다. 그러나 이제 난 이 작은 마을과, 마을 구석에 위치한 나만의 통나무집에서 ‘평생의 친구’톰과 함께 한가로이 여생을 보내며 지난 일들을 추억할 뿐이다.

 

   과거의 추억들을 회상하며 감회에 젖는 것은 늙은이의 특권이다. 그리고 나의 추억들이 각별한 이유는 내가 노예들과 인디언들과 언제나 좋은 사이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에게 우리말을 말하고 읽는 법을 가르쳤고, 그들이 말을 듣지 않을 때에도 쉽게 매를 들지 않았다. 특히 톰은 명목상으로는 나의 노예였지만 실제로는 나의 친구이자 큰 형과도 같은 존재였기 때문에, 나는 그를 각별히 대했다. 이런 나를 다른 백인들이 ‘자비로운 제임스’라며 조롱하듯 말했지만 나는 이 별명이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주의 말씀인 마태복음 5장 7절에서 ‘자비로운 자들은 복되도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이 자비함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자비로운 제임스’라고 불리던 무렵부터 동료 백인들로부터 따돌림을 받기 시작한 것을 부정할 순 없었지만, 오히려 나는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덕분에 나는 인디언들과의 전쟁에 나가는 대신 여자들과 노인들을 지키는 일을 맡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난 아무도 죽이지 않아도 되었다.

   나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머릿속에 깊이 박힌 이 구절을 반복하면 나는 자부심마저 느낄 수 있었다.

 

   비가 후드득 쏟아지는 여름 아침이나 서쪽 지평선이 붉게 타오르는 가을이면 난 외로움에 가슴이 시려오곤 한다. 이따금 가족이 그립지만 어렸을 적 가족에 대한 기억이 나에겐 별로 남아있지 않다. 어머니의 이름이 ‘메리’였다는 것, 내가 아버지의 이름 ‘제임스’를 물려받았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어느 날 소리 없이 사라졌고 나는 서부로 가는 사람들과 섞여서 고향을 떠났다는 사실 이외엔 이상하게도 기억에 남아있는 것은 없었다. 톰은 나의 어린 시절이 어떠했는지를 이따금 이야기해 주었다. 우리 집은 미소가 아름다운 어머니, 엄격하지만 정의로운 아버지, 그리고 항상 시끄럽게 노는 두 남동생이 살았던 단란한 가정이었다고 했다. 추수감사절이나 크리스마스 때엔 맛있는 음식을 노예들과 같이 나누어 먹었던 추억이 기억에 남는다고도 했다. 내가 어떻게 그 가정이 사라져버렸는지를 물으면 톰은 그저 큰 사고가 있었다고 말을 얼버무렸다. 그럴 때마다 그가 나를 슬프게 하고 싶지 않은 거라고 생각하고 난 깊이 따지진 않았다. 톰과 나는 그렇게 하루하루를 지내며 노인이 되었다.

  

   나는 어린 시절을 일부러 기억해내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그저 눈앞의 일만을 처리하는 것만도 나에겐 벅찼고, 알 수 없는 지난 일에 매달리기보다 현재를 더욱 충실히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나는 집에서 멀리 산책을 나왔다. 나이가 많아도 다리가 아직도 튼튼하다는 것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멀리 가는 것이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오늘부터 매일 아무도 없는 너른 들판을 거닐며 하늘과 바람을 즐기면 몸과 마음 모두에 좋을 것 같았다. 한참 걷다가 돌무더기 위에 앉아 점심을 먹고 더 걸어갔다. 이 광야가 어디로 연결되어있는지 모르지만 나는 무작정 걸어갔다. 돌아갈 길이 걱정되기보다는, 오히려 모험을 하는 듯한 쾌감과 상쾌함마저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다 바닥에 무언가 물컹한 것을 밟았다. 쉬익하는 소리가 나더니 내 발등이 타는 듯한 아픔이 느껴졌다. 나는 살려달라고 소리 지르며 점점 정신을 잃었다.

 

   나는 어린 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저 앞에 꽤 괜찮은 집이 보인다. 나는 그곳에 이미 들어가 있다. 주위를 둘러보니 굉장히 익숙한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중년 남자가 어떤 여성을 메리라고 불렀다. 그 여성은 부엌에서 무엇을 만들다가 나를 제임스라고 부르며 미소 지었다. 이곳은 우리 집, 그리고 그들은 나의 부모님이 분명하다. 구석에서 시끄럽게 놀고 있는 남자아기 둘은 내 동생들이리라. 나는 쿠키 몇 조각을 들고 잠시 뒷문으로 나가서 놀았다. 밖은 시원하고 상쾌했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밖에서 한참 있어도 아무도 나를 찾지 않아서 난 불안해졌다. 조심스럽게 창문으로 다가가 무슨 일이 있는지 집안을 살펴보았다. 거기에선 젊은 톰과 몇 명의 사람들이 중년 남자와 여자를 묶고, 저항하는 그들을 사정없이 내려쳤다. 다른 백인들은 집안을 약탈하고 있었다. 어린이 두 명은 자는 듯이 쓰러져있었다.

   “증거를 없애야 해. 너희 같은 노예는 잡히면 바로 죽을 테니.”

   어떤 젊은 남자가 흥분해서 말했다.

   나는 놀라서 얼어붙었고 급히 정신을 차린 후에 뒤를 향해 무작정 뛰었다. 그러나 톰이 어느새 따라와 억센 손으로 나를 잡아들고서 말위에 태웠다. 뒤로는 불에 탄 집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다행히 난 아무도 죽이지 않아도 되었다. 나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 톰이 미친 듯이 계속 중얼거렸다. 나는 이건 사실이 아니라고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이 기억을 영원히 머릿속에서 추방해야했다. 결코 존재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안 된다. 안 된다…….

 

   “안 돼!”

   “진정하세요. 이제 일어나셨군요.”

   깨어나니 나는 간이 침대위에 누워있었고, 내 앞에는 인디언 주술사로 보이는 여자가 서 있었다.

   “당신은 뱀에 물렸고, 3일 만에 깨어났어요. 사람들이 일찍 발견해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내가 그동안……정신을 잃은 사이 본 것은 뭐죠?”

   “당신은 잠시 뱀의 정령에 사로잡혔던 거예요. 가장 끔찍한 기억을 일깨우는 영이죠.”

 

   나는 인디언들의 도움을 받아 기운을 회복했고, 며칠 뒤 무거운 걸음으로 다시 집을 향하여 걸어갔다. 이제 나에게 남은 한 가지 과제를 처리해야 한다.

   추억들을 회상하며 감회에 젖는 감상적인 늙은이는 이제 더 이상 없다.

  

   나는 더 이상 ‘자비로운 제임스’도 아닐 것이다.

   또다른 이 톰, 너에게 오직 끔찍한 기억만을 남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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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편한쭈니씨 2014-04-25 1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어요^^

Bomisl 2014-04-25 19:53   좋아요 0 | URL
속편한 쭈니님. 좋은 일 가득하시길.^^
 

   거리엔 짙은 안개가 끼었다. 저 안개 너머로 은은하게 파란빛이 보인다. 몽롱한 상태에서 계속 걸어가고 있는데, 주위에서 비린내가 난다. 안개 사이로 걸어가자 쓰러진 사람들이 보인다. 주위에선 이상한 소리가 들려온다. 갑자기 나를 향해 파랗게 변색된 손이 나타나고 난 암흑 속으로 빠져든다…….

    어젯밤에도 잠을 설쳤다. 꿈에서 나타난 것에 놀라서 소리를 지르며 잠에서 깨었다. 벌써 세 번이나 같은 꿈을 꾼 것이다. 꿈속에서 나에게 다가온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극히 어둡고 사악한 느낌을 주는 것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으로 다가갔다. 봄날 아침의 햇살은 따사롭기 그지없었고, 꿈의 잔상은 햇빛과 함께 조금씩 사라져갔다.

    독일에서 보내는 두 번째 봄이다. 미술사를 전공하기 위해 독일을 선택했을 때만 하더라도 난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사실 그저 도피하고 싶은 마음으로 이곳에 온 것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2년 전, 사랑에도 실패하고, 좋은 친구 두 명도 세상을 달리하자 난 삶의 의미를 잃었다고 느꼈다. 술은 더욱 마음을 황폐하게 했고, 나는 조금씩 동료들로부터 고립되어갔다. 그러다가 떠오른 생각은 아픈 기억이 남아있는 이곳을 떠나 책에만 몰두하자는 거였다. 그러면 다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 생각이 맞았는지 몰라도 과거의 기억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2년째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가고 있으니, 내 마음은 차츰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커피와 빵으로 아침을 간단히 때우고 학교 도서관으로 공부를 하러 집을 나섰다. 걸어가는 도중에 신문도 하나 샀다. 하루 중에도 여러 번 날씨가 변하는 독일이지만 오늘은 유달리 햇살이 따사롭고 날은 밝았다. 그러나 이따금 볼 수 있는 밝은 빛들은 이곳에선 오히려 어색한 느낌이 들어서, 마음을 불안하게 하는 것이다. 밝음이란 어떤 의미에선 공포와 연결된 것일까. 과거의 미술가들도 같은 느낌을 받았던 것일까? 내가 논문 주제로 연구하고 있는 이곳의 중세 종교미술작품들을 보아도 이따금 신의 밝은 영광과 공포가 결합된 모호한 정서가 느껴진다. 어쩌면 나는 이런 정서를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오늘도 여러 권의 책을 서가에서 뽑아서 열람용 책상에서 뒤적이고 있다. 이번엔 내가 그동안 잘 몰랐던 화가들의 작품집을 골랐다. 500년도 더 전에 그들이 꾸었던 꿈이 고스란히 현실 속의 화폭에 옮겨져 있었다. 비잔틴 미술가들의 꿈, 브뤼겔의 꿈, 그리고 히에로니무스 보쉬의 꿈들……무심코 도록을 보다가 난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왜 내 꿈속에서 본 것이 여기 그려져 있는 걸까?

 

    삼면화 <쾌락의 정원>의 세 번째 그림에, 꿈에서 본 파랗고 징그러우며 무시무시한 그 존재가 기분 나쁘게도 정확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것의 주위에는 역시 꿈속의 장면과 같이 수많은 사람들이 가지각색의 그로테스크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처참하고 괴기스러운지, 그들이 만들어내는 지옥의 괴성이 귓가에 울리는 것 같았다.

 

    나는 헐레벌떡 그 책을 대출하고 도망치듯 도서관을 나왔다. 빵을 사먹고 잠시 조용한 벤치에 앉아서 오늘 산 신문을 보았다. 주위 공기가 무거워졌고, 금세 어두워졌다. 나는 일어나 걸었다. 가까운 곳에 교통사고가 난 것 같았다. 지나가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걱정되어 가까이 가보았지만 생존한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짙은 안개가 도로를 감쌌다. 뒤에 인기척이 있어서 돌아보자 악몽속의 괴물이 나를 향해 손을 뻗었고……나는 놀라 잠에서 깨었다. 벤치 주위의 사람들이 모두 나를 보고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신문에는 하이델베르크 교외에서 일어난 교통사고 소식이 보였다.

 

    햇살이 화창한 날에 이어 연이틀 비가 계속 내렸다. 꿈인지 현실인지 구별하기 어려운 며칠의 시간이 흘러갔다. 내가 꿈을 꿀 때, 그 푸르스름한 형체는 내 머릿속에 분명히 있었다. 내가 깨어 있으면 그것은 어느 곳에든 있는 것처럼 모든 것을 향해 사악한 손길을 뻗고 있었다.

 

    나는 책을 들고 카우프만 교수를 찾았다. 중세철학과 서양신비주의의 권위자인 그에게 무엇이라도 물어보지 않고선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렇게 불쑥 찾아가는 것은 실례를 범하는 것이었지만 사람 좋은 그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반겨주었다. 마치 나를 기다렸다는 것처럼.

    “헤어 킴(Herr Kim). 자네가 본 것이 바로 이것이었나?”

    카우프만 교수는 책장에서 큰 책을 펴고 그림 몇 점을 보여주었다. 거기에도 역시 내가 꿈에서 본 것과 놀랍도록 비슷한 것이 그려져있었다.

    “이것이 바로 제 꿈에 나타난 것의 정체인가요?”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네.”

    “무슨 뜻인가요?:

    “이것들은 모두 그림일뿐이지. 꿈을 현실로 만드는 것은 그림이 아니라 인간의 생각이라네.” 카우프만 교수는 안경을 벗으며 말을 이었다. “나는 이것이 무슨 고대로부터 온 악마나 괴물은 아니라고 생각해. 사실, 고대부터 이런 괴물들에 관한 증언이 많이 있었지만 말이야.”

    “고대부터 있었다고요?”

    “그렇다네. 고대의 신화나 괴기스런 이야기가 다 거짓은 아니라네. 고대인들에겐 오히려 이것이 사실에 가까운 기록이었지.”

    "여기에 대해 혹시 참고할 책이 있을까요? “

    “이전에 이에 대해 학위논문을 쓰던 학생이 있었지. 한스 슈타버(Hans Staber)라고…….참으로 뛰어난 학생이었어. 그는 인간 역사에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하는 이 정체모를 존재들을 연구했는데, 그가 내린 결론은 이것들이 일종의 ‘툴파’라는 것이야.”

    “툴파라고요?”

    “우리가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다보면 꿈에서 그것을 보게 되는 경우가 있지. 인간의 사념이 아주 강해지면 그 생각이 투영된 대상은 때로는 현실로 나타나게 된다네. 툴파란 이 현상의 티베트식 이름이지. 수많은 사람들이 오랜 기간에 걸쳐서 굳게 믿어온 것이라면 그 사념은 얼마나 강력한 것이겠나. 티베트에 설인이 목격되었다는 말이 많이 있네. 그러나 실제 증거물은 발견되지 않았어. 그것은 이 설인이 툴파이기 때문이라네. 존재하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기를 거듭하는 거야. 그러다 사람들의 생각에서 독립해서 스스로 존재하게 되는 거라네.”

    “그렇다면 제 꿈속의 괴물은 툴파란 것이죠?”

    "그것이 툴파이든 아니든 그렇게 믿지 않기를 바라네. 그것의 존재를 믿는 순간 그것은 더욱 강해지는 거야. 그것의 이름도 붙이지 말게.”

    “그럼 이것들이 지금도 실제로 나타나고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다네. 실제로 독일의 각종 사고의 생존자들이 많은 증언을 남겼지. 수많은 사람들이 목격했고, 경찰에서도 따로 파일을 만들고 있어. 바람직하지 않은 대응방법이지만 말이야.”

    “한 가지만 더 여쭈어보겠습니다. 여기에 대해 연구하셨다는 그 한스 슈타버라는 분은 혹시 지금 어디에 계시는지 아십니까?”

    “슈타버, 그는 죽었어1). 그는 범인이 밝혀지지 않은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네. 어쩌면 그 학생은 그렇게 집착하던 툴파와 하나가 되었는지도 모르겠군.”

 

    나는 차를 몰고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아우토반은 평소와 달리 한산했다. 한참을 달리다 앞에 정지된 차가 있어 멈추고 내려서 살펴보았다. 안개가 짙게 깔리기 시작해서 주위는 어두워졌다. 비린내가 주위에 진동했다. 앞에 서있는 차에 사람들이 모두 의식을 잃은 듯 보였다. 이 장면을 어디에선가 본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지금 내가 있는 곳이 꿈인지 현실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절망해야할지 그저 웃어버릴 일인지도 알 수 없었다. 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판단할 수 없었다.

    한 가지는 확실하다. 이제 난 악몽이 다가오는 것을 직접 보게 될 것이다.

 

1) Staber, er starb. - ‘슈타버’라는 이름과 발음이 유사한 ('죽다'는 의미의) sterben동사의 과거형 ‘슈타르프’를 사용한 언어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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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편한쭈니씨 2014-04-24 2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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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misl 2014-04-25 09:04   좋아요 0 | URL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책과 글과 함께 좋은 하루 되세요.
 
풍아송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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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중국의 지식인이 직면한 실존적 상황은 무엇인가? 나아가 지식인이란 과연 무엇이고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가? 이런 의문이 중국에서 가지는 뉘앙스는 우리나라의 지식인에 대하여 같은 질문을 던질 때와는 사뭇 다르다. 그것은 사회주의국가인 중국에서는 공산당의 방침에 의해 모든 것이 철저히 감시되고 통제되며, 학문도 예외가 아니기 때문이다. 학교에도 당관계자들이 상주하고 있으며, 당의 방침에 의해 교수들의 연구가 진행되거나 활동이 평가되고, 당의 정책과 상황에 따라 학문의 장려가 이루어지기도 하고 때로는 인기없는 학문이 쇠퇴하기도 한다. 이런 상황은 이 소설41쪽에서도 언급되어 있다.

 

   ...지디피가 십 퍼센트 성장했을 때에는 내가 발표한 논문들이 활자만 있고 원고료는 없는 처지가 되었다.

 

 

   ...원래는 문과 중에서도 힘들기로 유명한 고전문힉 수업이 얼마 전 '시경'해독을 가르치기 위해 내가 강의실에 들어갔을 때만 해도 가난한 집에 영광스러운 일이 생긴 것만큼이나 대단히 인기있는 강의였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시경'으로 대표되는 고전문학 수업은 이 사회의 미라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 소설은 중국의 급속한 경제 성장으로 인해 인문학이 소외받는 현실을 그리려는 것은 아니다. 옌롄커는 그의 소설 「풍아송」에서 ‘지식인’이자 중국 최고의 대학이라는 소설 속 칭옌대의 교수인 양커의 경험을 통해, 중국에서 지식인이 처한 좀 더 근본적인 상황과 실존적 문제에 대해 접근하려는 것이다.

 

    여기서 이 소설이 왜 ‘지식인’의 문제라는 범주로 다루어져야 하는가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즉, 이 소설이 양커라는 인물을 통해 포괄적인 중국의 사회상과 부조리에 대해 비판을 가하는 것은 아닌가? 혹은 개인의 정신적인 체험에 집중하여 이 소설을 감상할 수는 없는 것일까? 사실 이 소설 중에서 지식인의 전당이라 할 수 있는 대학사회의 부조리한 모습들을 그려낸 것은 앞부분 3분의 1정도이며, 마지막 부분에 양커가 다시 대학에 나타남에 의해 잠시 교수들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그리고 작품의 나머지 3분의 2는 고향에 내려간 양커가 고향의 주민과 겪는 일들, 젊은 시절 정혼했던 링쩐과의 만남, 천당 거리에서 만난 어린 여성들과의 일화 등을 그리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지식인 문제를 다룬 소설이라는 틀에 이 작품을 가두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시각이 적확하지 않은 이유는 양커가 고향에 내려가서도 '지식인'으로서 마을사람들과 조우했으며, 링쩐을 만나거나 몸을 파는 여성들과 이야기할때도 변함없이 '지식인'으로서 행동하고, 상대방에게도 그렇게 취급받았기 때문이다. 즉, 양커는 '지식인'으로서의 자의식을 전면에 내보였으며, 이 지식인이라는 의식은 그를 '공부 좀 한 이웃 아저씨'로 머물 수 없게 한다. 그는 일반 농민이나 시민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지식인'이므로 그가 머리를 쓰다듬은 아이는 대학에 합격할 거라고 동네 주민들이 믿을 정도이다. 또한 그는 수도 명문대의 교수라는 이유로 천당 거리의 가게들에서도 특별대접을 받았던 것이다. 중반 이후로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양커 자신이 '지식인이자 교수'라고 자신을 타인과 구분하는 경향이 커지고, 자신은 특별하므로 자신을 멸시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고 격분하기도 한다. 이러한 경향은 양커가 갓 결혼한 샤오민의 남편을 목졸라 살해하는 장면에서 광기에 가득찬 모습으로 나타난다.

 

   ...누구든지 지식인을 쉽게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란 말이다.(p.477)

 

이것은 샤오민의 남편을 죽인 후에 양커가 흥분하여 내뱉은 말이다. 양커는 지식인인 자신을 화나게 하는 이 목수(샤오민의 남편)를 살해하고도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서 양커의 의식 속의 지식인이란 것은 어떤 초월적인 권리가 있는 것인양 상정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지식인은 일반인과 다른 그 무엇이며, 일종의 주술적으로 고양된 개념으로 여겨지는 데에 기인한다.  지식인 문제가 이 소설에서는 근본적으로 양커의 자기규정의 문제이자, 주위에 의한 규정의 문제인 것이다.

 

    (2) 필자는 이 소설에서 제시하는 지식인에 대한 문제로서 1) 교수 사회의 부패와 같은 현상적인 문제와 2) 소설에서 지식인이 지식인으로 존재하는 방식의 구조적인 면에 내재하는 문제, 이 두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고 본다. 1)은 위 (1)에서 언급한 '중국의 지식인이 직면한 실존적 상황은 무엇인가?' 라는 물음과 연관되고, 2)는 (1)에서 말한 '지식인이란 과연 무엇이고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파악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이 글에서 좀 더 집중하고자 하는 것은 두번째 문제이다.

  

    (3) 양커는 원래 평범한 학자였다. 시경을 연구하며 그동안 쓴 대작인 '풍아지송-시경 정신의 근원에 관한 연구'라는 책을 펴내어 자신의 뛰어난 업적이 인정받게 될 것을 기대하고 즐거워하던 사람이다. 문제가 있고 부패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그 주위의 학자들이었다. 자신의 아내인 자오루핑은 원래 고등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않았고, 학자의 자격이 없는 사람으로서 각종 편법을 써서 교수가 되었다. 그녀가 가르치는 것들의 내용도 조야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다. 그녀는 학교의 부총장 리광즈와 정사를 벌이다 양커에게 현장에서 들키기도 한다. 그리고 양커는 6.4학생운동기념일에 (전혀 다른 일로) 학생들과 행진하다가 신문에 실리게 되고, 이 사건으로 당국의 추궁을 받게 될 것이 두려운 동료교수들에 의하여 정신병원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순수한 학자인 양커가 부조리한 대학 사회와, 동료학자인 부인과 리광즈에 의하여 받게 되는 고충을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까지가 (크게 3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 이 소설의 첫번째 부분으로서 양커가 일종의 피해자로 제시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양커는 정신병원에서 탈출하여 고향인 바러우산맥 끝자락의 마을로 향하는데, 여기에서부터 내면에 변화를 겪는다.(엄밀히 말하자면 변화는 오래전부터 시작되었을 수도 있다.) 현재 그는 아내인 리핑에 대한 배신감과 동료교수들에 대한 배신감과 불신으로 고통스러워 하고 있는 상태이다. 고향에는 양커를 평생 진심으로 사랑한 링쩐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양커의 집이 있는 첸스촌에는 식당이나, 약국, 이발소 등으로 영업하면서 동시에 몰래 성매매를 하는 가게들이 모인 '천당 거리'가 있었다. 양커는 '천당 거리 때문에 나는 내 집이 있는 첸스촌에 오랫동안 머물기로 마음먹었다.'(p.243) 그렇지만 천당 거리에 가서 여러 가게를 들르고 매번 가장 어린 여종업원을 부르지만, 성적인 관계는 맺지 않고, 그냥 돈을 주며 이런 일을 그만 두고 고향에 내려가라 타이른다. 설이 되자 양커는 수도에 다녀온다고 거짓말하고, 천당 거리에 가서 설에 고향에 내려가지 못한 많은 여종업원들과 며칠을 보낸다. 그러나 이 때에도 (괴상하지만) 옷을 다 벗은 여자들 앞에서 시경을 강의하는 식으로 시간을 즐긴다. 이 때 링쩐은 양커가 천당 거리에 갔다는 말을 듣고 수면제를 먹고 세상을 뜨지만, 그녀의 헌신적인 마음이 알려지게 되고 장례식 때 모여든 나비떼들이 아름답게 눈내리는 날을 장식하는 장면으로 두번째 부분이 끝난다.

 

  마지막 부분인 세번째 부분에서 양커의 의식은 점점 이상해진다. 죽은 링쩐의 딸인 샤오민에게서 링쩐의 젊은 시절 모습을 발견한 그는 샤오민에게 욕정을 느낀다. 샤오민을 '링쩐'이라고 칭하며 양자를 구분하지 못하기도 한다. 이 시기에 양커가 머리를 쓰다듬어준 아이들이 아무도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게 되자, 아이들의 부모는 양커의 집에 와서 당연하다는 듯 물건을 가져간다. 양커는 충격을 받는다. 또, 그는 샤오민과 결혼을 꿈꾸지만, 샤오민은 다른 남자와 결혼한다. 괴로운 양커는 샤오민의 결혼식 날 천당 거리에 가서 즐기고 오는데, 이 사실이 마을에 알려지면서 비난을 받는다. 이런 사건들의 결과로 이성을 잃은 양커는 신혼 첫날밤 샤오민과 정사를 나누던 그녀의 남편을 살해하고 도망가기에 이르는 것이다. 그런데 도망가서 그가 찾게 된 것은 시경의 고성으로서, 이는 시경학상 엄청난 학술적 의의를 가진 유적이다.

 

   여기서 생각해볼 것이 있다. 양커는 지식인으로서 그가 평생 연구한 것은 '시경'이다. 그의 노작 '풍아지송'은 그가 사람을 죽이고 도망칠 때에도 챙긴 것으로서 그의 목숨과도 같은 것이다. 그가 도망자가 되어 도착한 곳이 바로 시경의 성지라고 할 수 있는 것이므로 결국 그가 학문에 의해 일종의 구원을 받게 되었다고 볼 수 있을까? 그리고선 속세와 초연한 학문을 추구하는 것이 양커가 가야할 길인 것일까? 사견으로는 이 국면에서 양커가 처한 상황은 오히려 문제의 연속이라고 생각한다.

 

    (4) 양커와 일반인을 구분한 것은 '지식인'이라는 타이틀로서, 지식인은 아이의 머리만 쓰다듬어도 아이가 공부를 잘하게 된다고 여겨졌고, 지식인은 천당 거리 같은 성매매업소에 출입해도 안되었다. 이것을 어기면 일반인은 지식인의 재산을 약탈해도 되는 것처럼 생각했다. 즉, 지식인이란 것은 모종의 구속과 의무를 지는 것으로 상정되고, 이것들은 그가 누리는 특권과 사실상의 권리의 이면이었던 것이다. 문제는 이 권리와 의무가 지식인 개념에 대한 이해와 정합적인 판단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오래된 역사적 배경과 신화적이고 맹목적인 믿음에 근거한 억견과 연결되어있다는 점이다. 이런 틀을 근본적으로 벗어나지 않는 한 이 소설에서 양커가 겪는 문제상황은 변하지 않는 것이다. 양커 자신도 자신을 (이 구조를 벗어나지 않은)'지식인'으로서 규정하고, 다시 칭옌대학에 가서 자신의 대발견을 이야기할 때에도 이러한 구조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진리추구를 위한 활동에 따르게 되는 고귀한 가치에 대한 인식 이전에, 지식인의 인격과 일체가 된 '고귀함'이 진리 이전에 미리 존재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이러한 '지식인의 신화'는 과거에 왕조시대에서 학문이라는 것이 입신양명의 수단이기도 했고, 급제한 이는 곧 권력에 접근하게 되었다는 역사적 배경과, 신분제 등에 의하여 형성된 고정관념에 의해 강화된다. 그러나 지식인이 부당히 의무를 지지 않으려면 동시에 부당하게 특권을 행사해서도 안되는 것이다.

 

   (5) 양커는 천당 거리의 아가씨들과, 새로 합류한 노학자들과 함께 시경의 고원에서 일종의 이상적 공동체를 만들며, 여기에선 '오줌 갈기기'로 동침할 남자와 여자를 고른다. 이런 상황은 양커가 평생 연구한 시경 정신의 근원을 어느정도 현실에서 실현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결말에 이르러서 우리는 공동체 구성원 간에 있어서, 자기규정과 타자에 의한 규정이 교착된 상태를 벗어난 정돈된 상태를 볼 수 있다. 흥미롭게도 시경 정신의 근원, 원시적 창조력과 생명력의 충만은 지식인이라는 규정이 지니던 도착적 상황도 자연스레 해결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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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할 놈의 수학
카를로 프라베티 지음, 최유정 옮김, 이광연 감수 / 문학동네 / 2014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1.

 

    너무나도 중요하고 기본중의 기본이 되는 학문이자, 동시에 대중들에게 너무나도 사랑받지 못하는 학문이 바로 수학이다. 따라서 어린 학생들에게 수학을 가르칠 때에는 이 사실을 인식하고 전략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즉, 수학을 가르칠 때, 기초적인 개념들을 정확하게 전달하고, 동시에 학습의 흥미도 유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최근까지 수학의 초중등교육은 이 두 가지를 제대로 달성하지 못한 것 같다. 수학은 수십 년 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재미없고 골치 아픈 것으로 여겨지며, 학생들은 스스로 공부하려고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현상의 원인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일반적으로 수학을 극히 복잡하고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한 기호들이 오가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 학문으로서 수학의 면모는 고도의 논리로 이루어진 수학적 사실들을 특별한 기호들로 표현하고 집약한 것이다. 즉, 수학은 철저하게 논리적인 언어로 쓰여 있다. 논리로 이루어진 지식의 체계라는 것은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의 언어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오히려 치밀한 논리가 (때로 모호한) 인문학의 논리보다 더 이해하기 쉬울 수 있다. 그럼에도 수학을 거부하게 하는 것은 학생시절 수학이 다른 과목과 마찬가지로 이해보다 암기 위주로 교육이 이루어지고, 응용적 계산을 빠른 시간에 하는 기술적 능력의 학습이 우선되고, 시험에서의 수학 성적이 곧 수학에 대한 이해와 동일시되었기 때문인 것이다. 이런 상황은 강압적이고 획일적인 수업과 연관되어 더 악화된다.

 

    이해를 하며 학습한다는 모든 학문의 기본적 자세는, 본질상 자유로운 사고를 필요조건으로 한다. 또한 학습하기 위해서는 가장 기본적인 사실부터 철저히 이해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기본적 사실의 정립을 위하여는 그 사실에 대한 안티테제를 생각하는 과정이 자연스럽게 요구되며, 더 나아가 기존의 입장에 건전한 의심을 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학교교육은 학문와 수험을 동일시하며, 학문적 이해도와 성적을 동일시하고, 부조리를 질서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수학을 왜 공부하여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엔 이미 세간엔 답변이 내려져 있는 실정이다. ‘더 좋은 대학 진학을 위해서.’ 그래서 논리적인 사고의 함양이나 수학을 통한 세계의 심화된 이해와 같은 것은 목적이 아니라 우연히 얻게 되는 부수적인 것일 뿐이다. 이런 것을 전제로 하여 이 책에 대해 말하는 모든 견해는 ‘학습을 도와주는 유용성’의 차원을 본질적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이러한 인지구조가 수학학습자의 머릿속에 박히게 되면 학습으로 얻어지는 순수한 즐거움은 찾기 어렵게 된다.

  

    2.

 

    문학동네에서 최근에 출간된 카를로 프라베티의「망할 놈의 수학」은 수학을 싫어하거나, 두려워하는 초중등 학생, 또는 수학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에게 권할만한 책이다. 저자는 기초적인 수학적 논리를「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이야기를 토대로 쉽고 흥미있게 풀어가고 있다.

 

   이 책에서 다루는 수학적 주제는 다음과 같다. - 기수법, 특히 10진법, 소수의 개념, 소수를 찾는 방법으로 에라토스테네스의 체, 연속으로 이어지는 합성수의 목록을 만드는 법, 간단한 위상기하학의 개념, 구구단을 외우는 법, 기하급수의 개념, 등차수열, 등비수열, 계차수열과 소인수, 등차수열의 합, 미터단위법, 방정식, 지수법, 특별한 수열인 피보나치 수열 등.

 

    별 문제는 아니지만, 모든 것에 0을 곱하면 즉시 사라져 버리므로 모든 카드가 ‘카드0’을 두려워한다는 p.38의 언급은 조금 생각할 여지가 있다. 수학에서 0이 된다는 것이 (존재의 차원에서) 사라진다는 것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0이라 표시한 것은 어떤 파르메니데스적 절대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수학적 존재론의 차원에서 0은 다른 모든 자연수와 동일한 위상에 있다. [수학적 존재에 대하여 Platonism과 Nominalism이 대립하고 각자 필연적(necessary)이냐 우연적(contingent)이냐의 존재양상으로 더 나눌 수 있으나 이것들은 수학적 존재 자체의 동일성을 전제로 하므로 어느 것에 따라도 결과는 변하지 않는다.] 앨리스와 찰스(루이스 캐롤)가 도착한 세계에서는 수가 곧 존재하는 실체로 나타나므로 존재가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으로 처리하였으나, 이는 ‘無化’와 ‘0되기’를 동일한 것으로 오해시킬 소지가 있다.

 

    또, p.117에서 1미터를 사분자오선 길이의 1천만분의 일이라고 정의했지만, 현재 1미터는 진공 속에서 1/299,792,458초 동안 빛이 진행한 거리로 정의된다.

  

    3.

 

    이런 수학교양서가 가지고 있는 한계도 분명 존재한다. 더욱 고도의 수학적인 내용까지 이런 식으로 계속 전달할 수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고, 이 책이 학생들에게 잠시 재미를 느끼게 하며 수학학습을 도와준다는 차원에 머물 수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수학은 원래 재미없는 것이므로’, 이 책이 ‘특별히 재미를 주기 위해 특별히 마련된 책’ 정도로 이해된다면, 그 이면에는 여전히 수학에 대한 기피감이 굳건히 자리잡고 있으며, 수학에 대한 몰이해는 여전히 존재하고, ‘재미있을 수 있는 수학’은 이런 기존의 인식구조를 잠시 은폐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재미가 있는 이런 책으로부터 다시 ‘재미없고 망할 놈의 수학’을 가르치는 교실로 바로 돌아가야 하고, ‘재미있을 수도 있다.’는 것은 ‘원래는 재미없는 것’이란 언명을 함축하게 되는 것이다.

  

    즉, 여기에서 (주로) 학생들에게 기피감을 느끼게 하는, 수학에 대한 인지의 구조적 측면이 바뀌지 않는 한, ‘쉽고 재미있는 수학’이란 말은 (원래 의도와는 다르게) 기존의 ‘재미없는 수학’이란 인식을 확대재생산 하는 구조 내의 구성요소로 기능할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망할 놈의 수학」이란 제목 자체가 드러내는 것은 수학이 ‘망할 것’이라는 일반 개인의 정서이지만, 동시에 이 제목은 ‘망할 것’으로 인식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숨겨진 구조적인 측면 또한 드러내고 있다. 이 책을 벗어나서도 수학이 재미있는 것, 유용하고 필수적인 것으로 여겨지려면, 수학학습으로 순수하게 즐거움을 느낄 수 있도록, 학습에 대한 인지적 차원의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는 구조적인 면의 개혁이 필요할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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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1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최종술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절망, 그 중에서도 예술가의 절망이란 감정은 우리에게 어떤 심상을 불러일으키는가? 우리는 흔히 예술가들을 떠올릴 때 내면의 괴로움에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상상한다. 그들은 술이나 담배, 연예 등에 탐닉하여 고통을 달래거나 영감을 얻기도 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거나, 반대로 내면의 고통을 빚어서 아름다운 예술로 승화시키기도 한다. 어쨌든 미와 진실을 구현하려고 애쓰는 예술가가 아무리해도 자신의 이상을 구현할 수 없어서 느끼는 절망은 어쩌면 아름답기조차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 좀 다른 예술가, 게르만이란 사람이 있다. 그는 자신을 ‘뛰어난 역량을 갖춘 작가이다. 더없이 우아하고 생생하게 표현해내는 능력은 경이롭기까지 하다.’(9쪽)고 나르시시스트적으로 표현한다. 자칭 작가인 이 화자 ‘나’는 때로 상당히 과장된 어조, 다양한 목소리, 여러 개의 언어유희를 사용하며, 혹은 신경질적으로, 때때로 강한 감정의 기복도 보이며 이야기를 이끌어가다가, 마침내 이 소설을 쓰게 된 경위를 밝히고 제목으로 “단호하게 ’절망‘이라는 단어를 썼소.”(226쪽)라고 밝힌다. 즉, 이 소설은 형식상으로 보면 화자인 ’나‘가 쓰는 소설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화자 자신이 붙인 것으로 되어있는 그 자신의 이야기는 절망의 이야기이다. 이 절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한다면 그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

 

   소설의 주인공인 ‘나’(물론 이 ‘나’는 실제 저자인 나보코프가 아니다.)는 초콜릿 사업을 하는 사업가인데, 우연히 길에서 자신과 너무도 닮은 남자 펠릭스를(‘펠릭스’는 ‘행복한 사람’이란 뜻이다. 21쪽 ; 이 이름은 반어적이다.)만나게 된다. 사업이 어려워지고 돈이 궁해진 ‘나’는 자신의 분신을 이용해서 보험금을 타내려고 한다. 즉, 펠릭스를 자기로 위장해 살해하고 도주한 뒤 자신이 미리 가입한 보험금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다. 이 이야기가 플롯의 핵심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이 ‘나’는 이 과정을 범죄행위로 인식하고 있지 않다. ‘내 작품이 완벽하다…….’(199쪽), ‘……자신에게 엄격한 만큼 자존심도 강한 천재적인 신예 작가인 나는, 3월 9일에 외딴 숲속에서 탈고하고 서명한 나의 이 작품을 사람들이 어서 평가해주기를……그래, 나는 사심 없는 예술가였다.’(199쪽)라고 술회할 뿐이다. 즉 ‘나’는 이 살인을 하나의 작품이자 예술적인 행위로 생각한다. 여기에서 화자가 모종의 광기에 사로잡혀있음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이 소설이 극적으로 반전을 보여주고, 주제를 명확히 보여주는 것은 여기서부터이다. 화자 ‘나’는 펠릭스를 살해한 후 프랑스로 가서 이 사건이 자신의 계획대로 전개되는지를 기다리며 이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그는 당연히 자신 게르만이 살해되었다는 기사가 나오길 기다린다. 그리고 보험금을 받고 미리 이야기 해놓은 아내 리다와 재회할 것을 꿈꾼다. 이후 이 사건의 수사가 시작되고 ‘나’도 신문을 통해 이 사건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접하게 되는데, 언론의 반응은 자신이 계획한 것과 다르다. 자신과 똑같이 생긴 펠릭스에게 자신의 옷까지 입혔건만, 경찰은 자신과 전혀 다른 사람에게 옷을 입혔다고 한다. 심지어 자신의 지적 능력이 의심되고, 정상이 아니라는 설까지 제기된다.(213쪽) 그러나 ‘나’는 그들이 ‘닮음의 가능성을 선험적으로 배제’하였고, ‘그게 내 시체가 아니라는 생각을 머리에 단단히 박고’있다고 생각한다. ‘나’와 펠릭스는 ‘내’가 보기에 똑같이 닮았다는 사실을 의심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후 사건의 수사가 진행되면서 ‘나’는 실수로 펠릭스의 이름이 새겨진 지팡이를 자동차에 놓고 내리는 기초적인 실수를 저질렀음을 알게된다. 작품이 실패작이 되었다는 것이 명확해진 것이다. ‘그토록 주도면밀하게 계획된, 그토록 주도면밀히 집필된 내 작품이 내가 저지른 실수 때문에 이제 모조리 내적으로, 본질적으로 파괴되었다는, 쓰레기 더미가 되어버렸다는 의식, 바로 이 생각이 나를 찔러댔다.’(226쪽) 이로써 ‘나’는 절망하게 되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게르만(나)은 일종의 예술가로 자신을 규정하고, 자신이 쓰는 이 소설과 소설 속에서 자신이 한 행위를 예술활동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게르만은 살인같은 잔학한 범죄 자체를 예술로 생각하는 살인마가 아니다. 그는 자신을 범죄자라고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다. ‘그들(잔인하고 어리석은 범죄자들)과 나 사이에는 공통점이 전혀 없다.’(216쪽) ‘그 사진에서 나는 전혀 나 같지 않았고, 정말 범죄자 같았다.’ 이런 생각은 게르만이 현실과 환상을 구별하지 못하는 일종의 광기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따라서 게르만의 시각에서 자신이 완전범죄를 저지르지 못하고, 사소한 실수를 범함으로써 계획을 망쳐버렸다는 것은 곧 예술의 실패이고 따라서 그는 ‘절망’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이 절망은 게르만 자신의 관점에서 보자면 예술가의 고뇌이지만 그는 분별력을 잃은 상태이므로, 그는 애초에 진정한 예술을 구현하려고 한 것도 아니고 예술을 완성하지 못함으로서 절망할 이유도 없다. 대신 그는 예술 자체를 시도할 수 있는 진지한 능력을 박탈당함으로써 절망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 게르만의 광기 자체에 대해 우리가 예술적 감흥을 받거나 영감을 얻을 수는 있다. 그리고 또한 이러한 게르만의 이야기라는 것 자체로 예술을 구현할 수 있다.

 

   실제로 이 소설의 저자인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자신이 이 게르만이 직접 쓰는 소설이라는 형식으로 이 ‘절망’이라는 뛰어난 예술작품을 쓰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역설적인 구조가 이 소설이 역설적으로 실현하는 예술의 묘미이자 깊이 이해되어야 할 점이라고 생각한다. 즉, 이 소설은 하나의 층위에서 쓰여져 있지 않으며, 피상적으로 이해되어서도 안된다. ‘절망’의 독특한 구조는 의미의 차원뿐 아니라, 형식이라는 면에서도 나타난다. 즉, 이 나보코프의 ‘절망’은 문체나 형식, 서사방식의 다양성 등의 측면에 있어서도 최소 두 단계의 존재의 층위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사용되는 다양한 유형의 서사의 방식은 한편으로는 광기에 빠진 게르만의 혼란스러운 내면을 표현하며, 다른 층위에서는 소설 자체의 실험적인 서술과 문체, 그리고 뛰어난 예술적 성취 그 자체가 되기도 한다. 게르만은 실패한 예술가이지만 나보코프는 실패한 예술로 성공한 예술을 구현한다. 이 점이 이 소설이 가지고 있는 역설적이고도 뛰어난 특징이다.

 

   이러한 사실은 동시에 독자로 하여금 예술이라는 것, 그리고 예술가의 고뇌라는 것에 대하여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통찰할 수 있도록 해준다. - 예술은 반(反)예술이라는 것, 즉 자신과 전혀 이질적인 요소마저도 자신의 일부로 포함할 수 있으며, 모든 것이 예술의 대상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것은 주의해야 할 점이 있는데, 여기에서 예술의 구현이라고 하는 것은 반예술적인 시도 자체를 포함한다는 것이 아니라, 예술적인 반성의 사유로 추상되어진 결과물로서 최후에 주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술은 광기 자체나 게르만의 살인 자체가 아니다. 우리가 이 점을 명확히 하지 않는다면 예술도 아닌 절망의 심연 자체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나보코프는 이 점을 잘 알고 있었고, 그는 절망에서 진지하고도 뛰어난 수준의 예술을 구현해 낸 것이다. 그리하여 다시금 절망은 단순한 절망이 아닌 예술을 향한 진지한 노력으로 존재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이것이 ‘절망’을 통하여 나보코프가 전달하는 이야기의 함의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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