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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스완 (일반판)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 나탈리 포트만 외 출연 / 20세기폭스 / 2012년 1월
평점 :
품절
(1)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영화 '블랙 스완'은 심리적 투사와 그 예술적 변용이라는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영화에 나오는 백조와 흑조는 물론 인간 내면의 대립항들이자, 좀 더 추상화 시키면 대립항을 수반하는 모든 일반적 개념들에 대한 알레고리이다. A가 있으면 not-A는 당연히 존재하게 되고 - 헤겔적인 관점을 충실히 따르지 않더라도 - 테제와 안티테제는 한가지 대상의 내부에서 발생하는 모순과 대립의 계기로서 작용한다. (물론 이런 사실을 바탕으로 이 영화가 백조로 상징되는 것과 흑조로 상징되는 상태의 변증법적인 구현이며 그 지양으로서의 완성에 도달한다고 해석하려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타당하지 않다. 나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에서 결말로서 제시되는 니나의 죽음은 合(Synthese)이자 또다른 正으로서 또다시 지양되어져야 하는 변증법적 관계에 놓여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죽음을 암시하며 끝나는 상태에서 예술적 완성이라는 종착점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니나의 마지막 대사 'I was perfect'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죽음이라는 끝과 함께 발레는 완성에 도달한다.)
영화 앞부분에서 니나는 자기자신과 똑같이 생겼지만 검은 옷을 입고 더 도발적인 모습의 여성과 수차례 조우한다. 이것이 환상이든 도플갱어를 만난 것이든 현실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영화의 내적 구조와 그 의미연관항들이 제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그 심리적-정신분석적 함의이다.
처음에 니나는 백조를 완전히 구현한 인물이다, '백조만 필요하다면 너를 택했을 거야 .'(뱅상 카셀의 대사) 백조는 한없이 순결하고 아름다운 빛과 선의 세계를 상징한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흑조를 함께 제시하며 백조를 연기하는 발레리나가 흑조도 연기해야 한다. 사실 백조와 흑조는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에고와 그림자, 빛과 어둠이며, 우리는 이 모두를 성숙시켜야 할 과제를 가진다. 그런데 백조만을 고집하면 흑조는 강제로 억압당하고, 기억상실로 이어지기도 한다. 신경증의 특징인 이 방어기제는 프로이트가 '억압(Verdraengung)'이라고 부른 것이다. 의식에서 지워지자 이제 흑조는 외부에서 보이게 된다. 니나는 지하철에서, 아니면 길거리에서 흑조로 분한 자신과 마주치는 것이다.
(2) 성적 억압이 이 영화에서 암시되어 있다는 사실도 언급할 수 있다. 니나의 어머니는 딸을 매우 아끼면서도 성격장애를 가지고 있다. 니나는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매우 조신한 여성으로서 성적인 욕구를 억압하고 소녀로서의 상태에 만족하려는 것일 수 있다. (니나의 방은 매우 소녀 취향의 인형들과 오르골 등의 장신구로 가득하고, 핑크빛 이불과 벽지등으로 채워져 있다는 것을 상기하라. 영화의 후반부에서 니나가 인형들을 버리는 장면에서 우리는 그녀의 성적 억압이 풀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니나는 처음에 강제로 자신에게 키스를 한 뱅상 카셀의 입을 물어뜯는 것이다. 뱅상은 여왕백조로 뽑힌 그녀에게 집에가서 '자위행위를 하라'고 주문한다. 이후 니나는 밀라 쿠니스와 함께 환각제가 담긴 술을 마시고 동성애적인 행위를 했다고 생각한다. 또다시 뱅상과의 스킨쉽이 있게 되고, 드디어 공연이 거의 끝나는 때에 이르러서는 니나가 직접 뱅상에게 키스를 한다. 이러한 성적 개방성의 단계가 진행하는 과정에서 흑조가 차츰 그녀에게 돌아오며 니나는 또다른 심리적 의미연관항들의 전개를 보여주고 있다.
(3) 이 영화에서는 니나의 등 및 손에서 피가 나는 장면들이 계속 나오는데 이것들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할까? 일단 등의 상처는 실재로 존재하는 것인데 비해, 손가락의 피는 환각일 가능성이 높다. 영화 중 손가락 피부를 뜯어내는 장면이 있는데 다시 보니 손가락은 멀쩡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손에 묻은 피는 환각이 아니라면 등을 긁어서 난 피가 묻은 것일 것이다. (물론 등의 상처는 이후 흑조의 깃털이 그 자리에 날 것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이것은 모종의 심리적 외상을 그녀가 가지고 있음을 암시한다. 또한 이것은 영화 구조상 역시 발레리나였던 그녀의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얻어진 외상일 수 있다. 엄마의 대사로 보아 등을 긁는 것은 오래된 습관으로 보여지는데, 이것은 백조로서의 인격만을 고집하는 그녀에게 나타난 무의식적 반작용으로서의 행위라고 해석한다면 이 영화의 전체적 구조에 부합할 것이다.(물론 다른 해석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4) 발레 연습실이나 니나의 집 등에서 거울이 유난히 많이 등장한다. 이 거울들은 니나가 내면을 투영하는 곳들이기 때문이다. 거울 속에서 니나와 다르게 행동하는 섬찟한 모습의 여자는 사실 니나의 일부로서 니나가 억압해 오던 것, 즉 흑조인 것이다. 이 영화에서는 백조인 니나와 억압당한 거울속의 흑조 니나가 항상 대면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영화에서 (아마도 환각적인 상황에서) 밀라 쿠니스를 거울로 밀어 거울을 깨뜨리고 그 파편으로 죽이는 장면은, 거울이 깨짐으로써 흑조가 풀려났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함이 타당하다. 막 살인을 저지르고 니나는 흑조로 분하여 무대에 서는데, 그것이 대단한 호응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잠시 후 다시 무대 뒤 분장실로 돌아가 백조역을 준비하는 니나는 자신이 밀라 쿠니스를 죽이지 않았고, 유리조각은 자신의 배에 박혀있음을 본다. 이 순간 백조와 흑조는 니나 안에서 하나가 되었고 광기어린 예술적 추구는 절정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5) 영화에서 밀라 쿠니스는 거의 항상 검은 옷을 입고 등장한다. 그러나 밀라 쿠니스는 흑조가 아니며 단지 니나가 그녀에세 흑조를 투사시키고 있는 것이다. 니나는 밀라가 자신의 배역을 빼앗으려고 자신에게 약물을 먹이고, 뱅상을 유혹하여 성관계를 가지고 대역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약물을 먹고 밀라는 니나의 집에 가지도 않았고, 니나는 밀라를 죽이지도 않았다. 따라서, 이것은 밀라라는 매개체에게서 무의식적으로 니나가 자신이 결여한 부분을 보게 된 것이고, 니나는 그녀를 볼 때마다 자신이 추방한 흑조를 보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 영화는 철저히 니나의 내면을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6) 영화 후반부에서 토슈즈를 벗고 자신의 맨발을 보는 니나는 발가락들이 기형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모습을 본다. 영화가 시작되고 니나가 꿈에서 깨어 일어나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니나의 발을 보여주는데 그 때는 발이 완전히 정상이다. 따라서 니나가 원래 발이 기형이고 그래서 심리적 외상이 생겼다는 등의 해석은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니나가 기형적인 발을 보는 것은 영화의 내적 구조에서는 니나 자신의 기형적 정신상태를 의미한다.
(7) 억지로 분리되었던 것들은 이제 다시 결합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죽음에 이르는 치명적인 방식으로 결론지워진다. 발레의 마지막 장면에서 니나는 높은 곳에서 매트리스위로 몸을 던지는 자살장면을 연기하는데 발레의 스토리에서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상처로 피를 흘리며 죽어가게 된다. 이것은 죽음에 대한 시뮬라크르가 아니라 죽음의 진실 그 자체이다. 쟝 보드리야르는 그의 '시뮬라시옹'에서 진실이야말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숨기고 시뮬라크르가 오히려 참되다고 했지만 이것은 다른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사실 이것은 영화이므로 니나의 '진짜 죽음'마저도 영화 외부에서 볼 때는 시뮬라크르인 것이다. 혼동하지 말자.) 이제 니나는 백조와 흑조 모두를 내면에 갖게 되었고 그 둘은 동일한 하나의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발레작품 '백조의 호수'에서 추구하는 함의가 실현되고, 그것은 니나의 몸과 정신에 의하여 구현되고 완성된다. '그것은 완벽하다.'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치명적인 진실이다.
(8) 이 영화는 어쩌면 단절과 회복, 억압과 해방이라는 심리적 반응에 대한 긴 알레고리일 수도 있다. 그리고 영화는 다분히 심리적인 묘사와 상징들로 가득 차있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가 단지 어느 예술가의 광기를 그린 작품이라고 소개되는 것에 반대한다. '블랙 스완'은 우리에게 좀 더 깊은 정신적. 내적 구조에 대한 통찰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것이 함의하는 바가 인간 모두에게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이러한 의미에서, 또 이 영화는 관객들 자신의 내면을 보여주고 있으며 단순한 감상의 객체로서의 지위를 벗어나 우리자신의 내성적 반성을 유도한다는 점에서 매우 뛰어나고 의미심장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감히 '완벽하다'고는 하지 않겠다. 이 영화는 질문에 대한 최종적인 답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문제제기이기 때문이다 - 이 영화는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의 블랙 스완은 어디에 있는가?"
(*이 글을 퐝퐝님께 헌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