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하늘은 흐렸고 날은 타는 듯이 더웠다. 소나기라도 내리면 시원하련만, 하루 종일 비는 내리지 않다가 저녁이 되어서야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저녁까지 앉아만 있으니 온몸이 찌뿌듯하다. 이제 퇴근하고 집에 가서 샤워를 한 뒤 푹 자면 딱 맞을 것이다. 오늘도 그저 그런 형사의 하루가 될 것 같았다. 그러나 늦게 부두 관리자에게서 걸려온 한 통의 전화는 이 날을 내 기억에서 잊을 수 없는 날로 만들었다.

 

    관리자 말로는 부두 냉동 창고에서 사망한 사람을 발견했다고 한다. 나는 이경사와 함께 즉시 현장에 가서 시신의 신원을 확인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일러야 다음 날 오후까지 한나절은 족히 걸릴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쉽게 사망자를 알아낼 수 있었다. 그의 품안에서 신분증이 꽂힌 지갑을 발견했던 것이다. 이형우. 작은 사업체를 운영하다 큰 빚을 지고 종적을 감추었는데, 사기혐의로 수배가 내려진 상태였다. 그와 함께 소지품이 든 가방도 발견되었는데, 가방 안에는 다 닳은 연필과 노트 하나가 있었다. 노트에는 이 냉동 창고에 들어와서 그가 사망하기 직전까지 약 일주일 동안의 그의 심경이 적혀 있었다. 나는 이 노트가 그의 상태에 대한 매우 흥미로운 기록이라고 생각한다. 노트는 사실 아주 길고 난삽해서 여기에 전문을 다 옮길 수가 없다. 여기에 내 개인적으로 흥미롭다고 생각하는 극히 일부분만을 옮겨보기로 하겠다.

 

#1. 내가 이곳에 들어올 계획은 애초에 없었다. 단지 채권자 정만수가 고용한 해결사가 나를 잡으러 왔기 때문에 주위에 도망갈 수 있는 곳으로 숨어야만 했고, 뒤늦게 알고 보니 내가 숨은 곳이 냉동 창고였던 것이다. 문은 해결사가 밖에서 잠그고 간 것 같다. 그래도 아직 모든 것을 포기할 때는 아니다. 나는 약간의 물과 손전등, 그리고 작은 칼 하나가 있다. 점퍼도 입고 있으니 당분간 버틸 수 있다. 밖의 동향을 주시하며 도움을 구해보자.

 

#2. 차가운 공기가 나를 사방에서 둘러싸고 있다. 몸이 조금씩 굳어가는 느낌이 든다. 몸이 굳어버리면 안되다. 내가 일어나지 못하면 잠들거나 쉽게 정신을 잃을 것이고, 그러면 모든 것이 끝이다. 수진아 그리고 내 딸 민정아, 남편으로서, 아빠로서 미안하다. 내가 살아 돌아가서 다시 너희를 볼 수 있으리라 굳게 믿는다. 너희를 생각하며 힘을 내겠다.

 

#3. 손전등으로 가방 안을 살피니 빵 하나와 삶은 달걀 두 개, 과자 한 봉지가 있다.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최대한 아껴서 먹어야한다. 오늘은 밖에 누가 있으면 도와달라고 하루 종일 소리를 지르고 차가운 창고 벽을 두들겼다. 그러나 어떤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확실히 이쪽은 인적이 뜸한 것 같다. 그래도 조만간 지나가는 사람이 분명 있을 것이다. 희망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오늘 힘을 많이 썼더니 졸음이 쏟아진다. 잠들면 끝이다! 다리를 찔러가면서라도 깨어있어야 한다.

 

#4.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이 안에 있으니 시간을 알 수가 없다. 밖과 완전히 단절되어 있는 이곳이 혹시 지옥은 아닐까? 차가운 얼음의 지옥 혹은 영원히 혼자 버려진 감옥에 살게 되는 고독의 지옥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최대한 아껴서 먹었는데도 벌써 빵 하나를 다 먹었다. 아마도 내가 들어온 지 5일은 되지 않았을까? 혹시 하루밖에 안 된 것은 아닐까? 잠을 안 자려고 버티다보니 모든 것이 뿌옇게 보인다. 처음엔 계속 손전등을 켰지만 지금은 노트를 기록할 때만 키고 바로 불을 끈다. 건전지를 아끼려고 손전등을 끄고 있으면 내 앞의 어둠은 뿌옇게 변했다가 한 덩어리가 되어 그 찬 기운으로 나를 사정없이 내려친다. 그래, 나는 조금씩 지쳐가고 있다. 내가 살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다. 어차피 난 지금도 지옥 안에 있는데, 죽는다고 뭐가 달라질까?

 

#5. 발에 감각이 없다. 동상에 걸린 것 같다. 큰일이다. 걸어 다닐 수가 없으면 도움도 청할 수 없다. 온 몸이 조금씩 얼어가는 것이 느껴진다. 몸을 움직여서 몸에 열이 나게 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움직일 힘이 없다.

 

#6. 좀 전에 사람 소리를 들었다. 남자의 웃음소리가 분명하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기어가서 소리를 지르며 언 주먹으로 창고 문을 쳤다. 손이 터지고 부서지는 것 같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잠시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무언가가 창고 옆을 치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그래. 이것이 나를 구하러 오겠다는 뜻이리라. 나는 흥분되는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제 나갈 수 있겠구나. 이 안에서 나갈 수만 있다면 나는 정말 행복한 사람으로 다시 삶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아, 사랑하는 내 가족! 그들을 다시 볼 수만 있다면, 작은 고난은 얼마나 하찮은 것이 될 것인가!

   나는 사람이 와서 문을 열어줄 것을 숨죽여 기다렸다. 30분? 한 시간? 그 정도가 흐른 것 같은데, 아직 기척이 없다. 그들간에 서류작업이나 담당자 보고가 필요한지도 모른다. 그래서 늦어지는 것이리라. 적어도 4시간이 더 지나갔다. 입으로 1부터 15000까지 세었다. 나는 아직 그대로 이곳에 있다. 혹시 내가 아까 잘못 들은 것은 아닐까? 사람이 있지도 않았는데, 환청을 들은 것일까? 이 안에 있다 보니 감각이 이상해진 것 같다. 나는 이렇게 얼어서 죽는 것인가?

 

#7. 나는 이제 모든 희망을 버리기로 했다. 이미 온 몸에 동상이 퍼져서 더 이상 사는 것도 불가능하다. 먹을 것도 마실 물도 없다. 나에겐 약간의 손전등 불빛이 있을 뿐이다. 삶의 마지막 순간, 빛이 있는 것만도 감사할 일이다. 나에게 고통을 준 모든 이를 용서한다. 나도 지은 모든 죄를 참회한다. 또다시 삶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아아! 정말 열심히 살 텐데……삶이란 너무나도 덧없고, 욕망은 허상과도 같다.

 

    이형우의 기록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삶이란 너무나도 덧없고, 욕망은 허상과도 같다.’는 깨달음이 담긴 문장으로 끝났다.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다. 부검의가 사인은 심장마비라고 했지만 그의 기록을 보면 그는 분명 얼어 죽은 것이다. 그가 갇힌 냉동 창고는 근래 일주일 동안 수리를 위해 가동이 정지된 상태였는데 말이다.

 

    그를 죽인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냉동 창고인가? 그 자신의 생각인가? 아니면 탐욕과 부정에 물든 이 세상 모두인가? 나는 대답을 담뱃불을 붙이고 다시 비오는 거리로 나가는 것으로 대신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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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편한쭈니씨 2014-04-25 1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알려진 소재를 시간에 따라 변하는 심리상태를 기록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엮었네요. 부럽습니다, 이런 능력^^

Bomisl 2014-04-25 19:5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속편한 쭈니님^^ 많이 부족한 글을 읽어주시고...
무서운 이야기로는 좀 약한 내용이 아닌가 생각도 드네요.

2014-04-25 20: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4-26 05: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의 집은 황량한 서부, 만들어진지 얼마 되지 않는 작은 마을에 있다. 사람들과 말을 타고 동쪽 뉴잉글랜드로부터 신대륙을 횡단해온 것은 벌써 40년 전의 일이다. 나의 20대에서 40대에 이르는 시기는 수많은 모험담을 만들었던 인생최고의 나날들이었다. 그러나 이제 난 이 작은 마을과, 마을 구석에 위치한 나만의 통나무집에서 ‘평생의 친구’톰과 함께 한가로이 여생을 보내며 지난 일들을 추억할 뿐이다.

 

   과거의 추억들을 회상하며 감회에 젖는 것은 늙은이의 특권이다. 그리고 나의 추억들이 각별한 이유는 내가 노예들과 인디언들과 언제나 좋은 사이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에게 우리말을 말하고 읽는 법을 가르쳤고, 그들이 말을 듣지 않을 때에도 쉽게 매를 들지 않았다. 특히 톰은 명목상으로는 나의 노예였지만 실제로는 나의 친구이자 큰 형과도 같은 존재였기 때문에, 나는 그를 각별히 대했다. 이런 나를 다른 백인들이 ‘자비로운 제임스’라며 조롱하듯 말했지만 나는 이 별명이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주의 말씀인 마태복음 5장 7절에서 ‘자비로운 자들은 복되도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이 자비함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자비로운 제임스’라고 불리던 무렵부터 동료 백인들로부터 따돌림을 받기 시작한 것을 부정할 순 없었지만, 오히려 나는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덕분에 나는 인디언들과의 전쟁에 나가는 대신 여자들과 노인들을 지키는 일을 맡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난 아무도 죽이지 않아도 되었다.

   나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머릿속에 깊이 박힌 이 구절을 반복하면 나는 자부심마저 느낄 수 있었다.

 

   비가 후드득 쏟아지는 여름 아침이나 서쪽 지평선이 붉게 타오르는 가을이면 난 외로움에 가슴이 시려오곤 한다. 이따금 가족이 그립지만 어렸을 적 가족에 대한 기억이 나에겐 별로 남아있지 않다. 어머니의 이름이 ‘메리’였다는 것, 내가 아버지의 이름 ‘제임스’를 물려받았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어느 날 소리 없이 사라졌고 나는 서부로 가는 사람들과 섞여서 고향을 떠났다는 사실 이외엔 이상하게도 기억에 남아있는 것은 없었다. 톰은 나의 어린 시절이 어떠했는지를 이따금 이야기해 주었다. 우리 집은 미소가 아름다운 어머니, 엄격하지만 정의로운 아버지, 그리고 항상 시끄럽게 노는 두 남동생이 살았던 단란한 가정이었다고 했다. 추수감사절이나 크리스마스 때엔 맛있는 음식을 노예들과 같이 나누어 먹었던 추억이 기억에 남는다고도 했다. 내가 어떻게 그 가정이 사라져버렸는지를 물으면 톰은 그저 큰 사고가 있었다고 말을 얼버무렸다. 그럴 때마다 그가 나를 슬프게 하고 싶지 않은 거라고 생각하고 난 깊이 따지진 않았다. 톰과 나는 그렇게 하루하루를 지내며 노인이 되었다.

  

   나는 어린 시절을 일부러 기억해내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그저 눈앞의 일만을 처리하는 것만도 나에겐 벅찼고, 알 수 없는 지난 일에 매달리기보다 현재를 더욱 충실히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나는 집에서 멀리 산책을 나왔다. 나이가 많아도 다리가 아직도 튼튼하다는 것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멀리 가는 것이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오늘부터 매일 아무도 없는 너른 들판을 거닐며 하늘과 바람을 즐기면 몸과 마음 모두에 좋을 것 같았다. 한참 걷다가 돌무더기 위에 앉아 점심을 먹고 더 걸어갔다. 이 광야가 어디로 연결되어있는지 모르지만 나는 무작정 걸어갔다. 돌아갈 길이 걱정되기보다는, 오히려 모험을 하는 듯한 쾌감과 상쾌함마저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다 바닥에 무언가 물컹한 것을 밟았다. 쉬익하는 소리가 나더니 내 발등이 타는 듯한 아픔이 느껴졌다. 나는 살려달라고 소리 지르며 점점 정신을 잃었다.

 

   나는 어린 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저 앞에 꽤 괜찮은 집이 보인다. 나는 그곳에 이미 들어가 있다. 주위를 둘러보니 굉장히 익숙한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중년 남자가 어떤 여성을 메리라고 불렀다. 그 여성은 부엌에서 무엇을 만들다가 나를 제임스라고 부르며 미소 지었다. 이곳은 우리 집, 그리고 그들은 나의 부모님이 분명하다. 구석에서 시끄럽게 놀고 있는 남자아기 둘은 내 동생들이리라. 나는 쿠키 몇 조각을 들고 잠시 뒷문으로 나가서 놀았다. 밖은 시원하고 상쾌했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밖에서 한참 있어도 아무도 나를 찾지 않아서 난 불안해졌다. 조심스럽게 창문으로 다가가 무슨 일이 있는지 집안을 살펴보았다. 거기에선 젊은 톰과 몇 명의 사람들이 중년 남자와 여자를 묶고, 저항하는 그들을 사정없이 내려쳤다. 다른 백인들은 집안을 약탈하고 있었다. 어린이 두 명은 자는 듯이 쓰러져있었다.

   “증거를 없애야 해. 너희 같은 노예는 잡히면 바로 죽을 테니.”

   어떤 젊은 남자가 흥분해서 말했다.

   나는 놀라서 얼어붙었고 급히 정신을 차린 후에 뒤를 향해 무작정 뛰었다. 그러나 톰이 어느새 따라와 억센 손으로 나를 잡아들고서 말위에 태웠다. 뒤로는 불에 탄 집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다행히 난 아무도 죽이지 않아도 되었다. 나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 톰이 미친 듯이 계속 중얼거렸다. 나는 이건 사실이 아니라고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이 기억을 영원히 머릿속에서 추방해야했다. 결코 존재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안 된다. 안 된다…….

 

   “안 돼!”

   “진정하세요. 이제 일어나셨군요.”

   깨어나니 나는 간이 침대위에 누워있었고, 내 앞에는 인디언 주술사로 보이는 여자가 서 있었다.

   “당신은 뱀에 물렸고, 3일 만에 깨어났어요. 사람들이 일찍 발견해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내가 그동안……정신을 잃은 사이 본 것은 뭐죠?”

   “당신은 잠시 뱀의 정령에 사로잡혔던 거예요. 가장 끔찍한 기억을 일깨우는 영이죠.”

 

   나는 인디언들의 도움을 받아 기운을 회복했고, 며칠 뒤 무거운 걸음으로 다시 집을 향하여 걸어갔다. 이제 나에게 남은 한 가지 과제를 처리해야 한다.

   추억들을 회상하며 감회에 젖는 감상적인 늙은이는 이제 더 이상 없다.

  

   나는 더 이상 ‘자비로운 제임스’도 아닐 것이다.

   또다른 이 톰, 너에게 오직 끔찍한 기억만을 남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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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편한쭈니씨 2014-04-25 1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어요^^

Bomisl 2014-04-25 19:53   좋아요 0 | URL
속편한 쭈니님. 좋은 일 가득하시길.^^
 

   거리엔 짙은 안개가 끼었다. 저 안개 너머로 은은하게 파란빛이 보인다. 몽롱한 상태에서 계속 걸어가고 있는데, 주위에서 비린내가 난다. 안개 사이로 걸어가자 쓰러진 사람들이 보인다. 주위에선 이상한 소리가 들려온다. 갑자기 나를 향해 파랗게 변색된 손이 나타나고 난 암흑 속으로 빠져든다…….

    어젯밤에도 잠을 설쳤다. 꿈에서 나타난 것에 놀라서 소리를 지르며 잠에서 깨었다. 벌써 세 번이나 같은 꿈을 꾼 것이다. 꿈속에서 나에게 다가온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극히 어둡고 사악한 느낌을 주는 것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으로 다가갔다. 봄날 아침의 햇살은 따사롭기 그지없었고, 꿈의 잔상은 햇빛과 함께 조금씩 사라져갔다.

    독일에서 보내는 두 번째 봄이다. 미술사를 전공하기 위해 독일을 선택했을 때만 하더라도 난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사실 그저 도피하고 싶은 마음으로 이곳에 온 것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2년 전, 사랑에도 실패하고, 좋은 친구 두 명도 세상을 달리하자 난 삶의 의미를 잃었다고 느꼈다. 술은 더욱 마음을 황폐하게 했고, 나는 조금씩 동료들로부터 고립되어갔다. 그러다가 떠오른 생각은 아픈 기억이 남아있는 이곳을 떠나 책에만 몰두하자는 거였다. 그러면 다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 생각이 맞았는지 몰라도 과거의 기억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2년째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가고 있으니, 내 마음은 차츰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커피와 빵으로 아침을 간단히 때우고 학교 도서관으로 공부를 하러 집을 나섰다. 걸어가는 도중에 신문도 하나 샀다. 하루 중에도 여러 번 날씨가 변하는 독일이지만 오늘은 유달리 햇살이 따사롭고 날은 밝았다. 그러나 이따금 볼 수 있는 밝은 빛들은 이곳에선 오히려 어색한 느낌이 들어서, 마음을 불안하게 하는 것이다. 밝음이란 어떤 의미에선 공포와 연결된 것일까. 과거의 미술가들도 같은 느낌을 받았던 것일까? 내가 논문 주제로 연구하고 있는 이곳의 중세 종교미술작품들을 보아도 이따금 신의 밝은 영광과 공포가 결합된 모호한 정서가 느껴진다. 어쩌면 나는 이런 정서를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오늘도 여러 권의 책을 서가에서 뽑아서 열람용 책상에서 뒤적이고 있다. 이번엔 내가 그동안 잘 몰랐던 화가들의 작품집을 골랐다. 500년도 더 전에 그들이 꾸었던 꿈이 고스란히 현실 속의 화폭에 옮겨져 있었다. 비잔틴 미술가들의 꿈, 브뤼겔의 꿈, 그리고 히에로니무스 보쉬의 꿈들……무심코 도록을 보다가 난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왜 내 꿈속에서 본 것이 여기 그려져 있는 걸까?

 

    삼면화 <쾌락의 정원>의 세 번째 그림에, 꿈에서 본 파랗고 징그러우며 무시무시한 그 존재가 기분 나쁘게도 정확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것의 주위에는 역시 꿈속의 장면과 같이 수많은 사람들이 가지각색의 그로테스크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처참하고 괴기스러운지, 그들이 만들어내는 지옥의 괴성이 귓가에 울리는 것 같았다.

 

    나는 헐레벌떡 그 책을 대출하고 도망치듯 도서관을 나왔다. 빵을 사먹고 잠시 조용한 벤치에 앉아서 오늘 산 신문을 보았다. 주위 공기가 무거워졌고, 금세 어두워졌다. 나는 일어나 걸었다. 가까운 곳에 교통사고가 난 것 같았다. 지나가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걱정되어 가까이 가보았지만 생존한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짙은 안개가 도로를 감쌌다. 뒤에 인기척이 있어서 돌아보자 악몽속의 괴물이 나를 향해 손을 뻗었고……나는 놀라 잠에서 깨었다. 벤치 주위의 사람들이 모두 나를 보고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신문에는 하이델베르크 교외에서 일어난 교통사고 소식이 보였다.

 

    햇살이 화창한 날에 이어 연이틀 비가 계속 내렸다. 꿈인지 현실인지 구별하기 어려운 며칠의 시간이 흘러갔다. 내가 꿈을 꿀 때, 그 푸르스름한 형체는 내 머릿속에 분명히 있었다. 내가 깨어 있으면 그것은 어느 곳에든 있는 것처럼 모든 것을 향해 사악한 손길을 뻗고 있었다.

 

    나는 책을 들고 카우프만 교수를 찾았다. 중세철학과 서양신비주의의 권위자인 그에게 무엇이라도 물어보지 않고선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렇게 불쑥 찾아가는 것은 실례를 범하는 것이었지만 사람 좋은 그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반겨주었다. 마치 나를 기다렸다는 것처럼.

    “헤어 킴(Herr Kim). 자네가 본 것이 바로 이것이었나?”

    카우프만 교수는 책장에서 큰 책을 펴고 그림 몇 점을 보여주었다. 거기에도 역시 내가 꿈에서 본 것과 놀랍도록 비슷한 것이 그려져있었다.

    “이것이 바로 제 꿈에 나타난 것의 정체인가요?”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네.”

    “무슨 뜻인가요?:

    “이것들은 모두 그림일뿐이지. 꿈을 현실로 만드는 것은 그림이 아니라 인간의 생각이라네.” 카우프만 교수는 안경을 벗으며 말을 이었다. “나는 이것이 무슨 고대로부터 온 악마나 괴물은 아니라고 생각해. 사실, 고대부터 이런 괴물들에 관한 증언이 많이 있었지만 말이야.”

    “고대부터 있었다고요?”

    “그렇다네. 고대의 신화나 괴기스런 이야기가 다 거짓은 아니라네. 고대인들에겐 오히려 이것이 사실에 가까운 기록이었지.”

    "여기에 대해 혹시 참고할 책이 있을까요? “

    “이전에 이에 대해 학위논문을 쓰던 학생이 있었지. 한스 슈타버(Hans Staber)라고…….참으로 뛰어난 학생이었어. 그는 인간 역사에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하는 이 정체모를 존재들을 연구했는데, 그가 내린 결론은 이것들이 일종의 ‘툴파’라는 것이야.”

    “툴파라고요?”

    “우리가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다보면 꿈에서 그것을 보게 되는 경우가 있지. 인간의 사념이 아주 강해지면 그 생각이 투영된 대상은 때로는 현실로 나타나게 된다네. 툴파란 이 현상의 티베트식 이름이지. 수많은 사람들이 오랜 기간에 걸쳐서 굳게 믿어온 것이라면 그 사념은 얼마나 강력한 것이겠나. 티베트에 설인이 목격되었다는 말이 많이 있네. 그러나 실제 증거물은 발견되지 않았어. 그것은 이 설인이 툴파이기 때문이라네. 존재하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기를 거듭하는 거야. 그러다 사람들의 생각에서 독립해서 스스로 존재하게 되는 거라네.”

    “그렇다면 제 꿈속의 괴물은 툴파란 것이죠?”

    "그것이 툴파이든 아니든 그렇게 믿지 않기를 바라네. 그것의 존재를 믿는 순간 그것은 더욱 강해지는 거야. 그것의 이름도 붙이지 말게.”

    “그럼 이것들이 지금도 실제로 나타나고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다네. 실제로 독일의 각종 사고의 생존자들이 많은 증언을 남겼지. 수많은 사람들이 목격했고, 경찰에서도 따로 파일을 만들고 있어. 바람직하지 않은 대응방법이지만 말이야.”

    “한 가지만 더 여쭈어보겠습니다. 여기에 대해 연구하셨다는 그 한스 슈타버라는 분은 혹시 지금 어디에 계시는지 아십니까?”

    “슈타버, 그는 죽었어1). 그는 범인이 밝혀지지 않은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네. 어쩌면 그 학생은 그렇게 집착하던 툴파와 하나가 되었는지도 모르겠군.”

 

    나는 차를 몰고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아우토반은 평소와 달리 한산했다. 한참을 달리다 앞에 정지된 차가 있어 멈추고 내려서 살펴보았다. 안개가 짙게 깔리기 시작해서 주위는 어두워졌다. 비린내가 주위에 진동했다. 앞에 서있는 차에 사람들이 모두 의식을 잃은 듯 보였다. 이 장면을 어디에선가 본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지금 내가 있는 곳이 꿈인지 현실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절망해야할지 그저 웃어버릴 일인지도 알 수 없었다. 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판단할 수 없었다.

    한 가지는 확실하다. 이제 난 악몽이 다가오는 것을 직접 보게 될 것이다.

 

1) Staber, er starb. - ‘슈타버’라는 이름과 발음이 유사한 ('죽다'는 의미의) sterben동사의 과거형 ‘슈타르프’를 사용한 언어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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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편한쭈니씨 2014-04-24 2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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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misl 2014-04-25 09:04   좋아요 0 | URL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책과 글과 함께 좋은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