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집은 황량한 서부, 만들어진지 얼마 되지 않는 작은 마을에 있다. 사람들과 말을 타고 동쪽 뉴잉글랜드로부터 신대륙을 횡단해온 것은 벌써 40년 전의 일이다. 나의 20대에서 40대에 이르는 시기는 수많은 모험담을 만들었던 인생최고의 나날들이었다. 그러나 이제 난 이 작은 마을과, 마을 구석에 위치한 나만의 통나무집에서 ‘평생의 친구’톰과 함께 한가로이 여생을 보내며 지난 일들을 추억할 뿐이다.

 

   과거의 추억들을 회상하며 감회에 젖는 것은 늙은이의 특권이다. 그리고 나의 추억들이 각별한 이유는 내가 노예들과 인디언들과 언제나 좋은 사이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에게 우리말을 말하고 읽는 법을 가르쳤고, 그들이 말을 듣지 않을 때에도 쉽게 매를 들지 않았다. 특히 톰은 명목상으로는 나의 노예였지만 실제로는 나의 친구이자 큰 형과도 같은 존재였기 때문에, 나는 그를 각별히 대했다. 이런 나를 다른 백인들이 ‘자비로운 제임스’라며 조롱하듯 말했지만 나는 이 별명이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주의 말씀인 마태복음 5장 7절에서 ‘자비로운 자들은 복되도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이 자비함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자비로운 제임스’라고 불리던 무렵부터 동료 백인들로부터 따돌림을 받기 시작한 것을 부정할 순 없었지만, 오히려 나는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덕분에 나는 인디언들과의 전쟁에 나가는 대신 여자들과 노인들을 지키는 일을 맡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난 아무도 죽이지 않아도 되었다.

   나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머릿속에 깊이 박힌 이 구절을 반복하면 나는 자부심마저 느낄 수 있었다.

 

   비가 후드득 쏟아지는 여름 아침이나 서쪽 지평선이 붉게 타오르는 가을이면 난 외로움에 가슴이 시려오곤 한다. 이따금 가족이 그립지만 어렸을 적 가족에 대한 기억이 나에겐 별로 남아있지 않다. 어머니의 이름이 ‘메리’였다는 것, 내가 아버지의 이름 ‘제임스’를 물려받았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어느 날 소리 없이 사라졌고 나는 서부로 가는 사람들과 섞여서 고향을 떠났다는 사실 이외엔 이상하게도 기억에 남아있는 것은 없었다. 톰은 나의 어린 시절이 어떠했는지를 이따금 이야기해 주었다. 우리 집은 미소가 아름다운 어머니, 엄격하지만 정의로운 아버지, 그리고 항상 시끄럽게 노는 두 남동생이 살았던 단란한 가정이었다고 했다. 추수감사절이나 크리스마스 때엔 맛있는 음식을 노예들과 같이 나누어 먹었던 추억이 기억에 남는다고도 했다. 내가 어떻게 그 가정이 사라져버렸는지를 물으면 톰은 그저 큰 사고가 있었다고 말을 얼버무렸다. 그럴 때마다 그가 나를 슬프게 하고 싶지 않은 거라고 생각하고 난 깊이 따지진 않았다. 톰과 나는 그렇게 하루하루를 지내며 노인이 되었다.

  

   나는 어린 시절을 일부러 기억해내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그저 눈앞의 일만을 처리하는 것만도 나에겐 벅찼고, 알 수 없는 지난 일에 매달리기보다 현재를 더욱 충실히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나는 집에서 멀리 산책을 나왔다. 나이가 많아도 다리가 아직도 튼튼하다는 것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멀리 가는 것이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오늘부터 매일 아무도 없는 너른 들판을 거닐며 하늘과 바람을 즐기면 몸과 마음 모두에 좋을 것 같았다. 한참 걷다가 돌무더기 위에 앉아 점심을 먹고 더 걸어갔다. 이 광야가 어디로 연결되어있는지 모르지만 나는 무작정 걸어갔다. 돌아갈 길이 걱정되기보다는, 오히려 모험을 하는 듯한 쾌감과 상쾌함마저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다 바닥에 무언가 물컹한 것을 밟았다. 쉬익하는 소리가 나더니 내 발등이 타는 듯한 아픔이 느껴졌다. 나는 살려달라고 소리 지르며 점점 정신을 잃었다.

 

   나는 어린 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저 앞에 꽤 괜찮은 집이 보인다. 나는 그곳에 이미 들어가 있다. 주위를 둘러보니 굉장히 익숙한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중년 남자가 어떤 여성을 메리라고 불렀다. 그 여성은 부엌에서 무엇을 만들다가 나를 제임스라고 부르며 미소 지었다. 이곳은 우리 집, 그리고 그들은 나의 부모님이 분명하다. 구석에서 시끄럽게 놀고 있는 남자아기 둘은 내 동생들이리라. 나는 쿠키 몇 조각을 들고 잠시 뒷문으로 나가서 놀았다. 밖은 시원하고 상쾌했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밖에서 한참 있어도 아무도 나를 찾지 않아서 난 불안해졌다. 조심스럽게 창문으로 다가가 무슨 일이 있는지 집안을 살펴보았다. 거기에선 젊은 톰과 몇 명의 사람들이 중년 남자와 여자를 묶고, 저항하는 그들을 사정없이 내려쳤다. 다른 백인들은 집안을 약탈하고 있었다. 어린이 두 명은 자는 듯이 쓰러져있었다.

   “증거를 없애야 해. 너희 같은 노예는 잡히면 바로 죽을 테니.”

   어떤 젊은 남자가 흥분해서 말했다.

   나는 놀라서 얼어붙었고 급히 정신을 차린 후에 뒤를 향해 무작정 뛰었다. 그러나 톰이 어느새 따라와 억센 손으로 나를 잡아들고서 말위에 태웠다. 뒤로는 불에 탄 집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다행히 난 아무도 죽이지 않아도 되었다. 나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 톰이 미친 듯이 계속 중얼거렸다. 나는 이건 사실이 아니라고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이 기억을 영원히 머릿속에서 추방해야했다. 결코 존재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안 된다. 안 된다…….

 

   “안 돼!”

   “진정하세요. 이제 일어나셨군요.”

   깨어나니 나는 간이 침대위에 누워있었고, 내 앞에는 인디언 주술사로 보이는 여자가 서 있었다.

   “당신은 뱀에 물렸고, 3일 만에 깨어났어요. 사람들이 일찍 발견해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내가 그동안……정신을 잃은 사이 본 것은 뭐죠?”

   “당신은 잠시 뱀의 정령에 사로잡혔던 거예요. 가장 끔찍한 기억을 일깨우는 영이죠.”

 

   나는 인디언들의 도움을 받아 기운을 회복했고, 며칠 뒤 무거운 걸음으로 다시 집을 향하여 걸어갔다. 이제 나에게 남은 한 가지 과제를 처리해야 한다.

   추억들을 회상하며 감회에 젖는 감상적인 늙은이는 이제 더 이상 없다.

  

   나는 더 이상 ‘자비로운 제임스’도 아닐 것이다.

   또다른 이 톰, 너에게 오직 끔찍한 기억만을 남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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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편한쭈니씨 2014-04-25 1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어요^^

Bomisl 2014-04-25 19:53   좋아요 0 | URL
속편한 쭈니님. 좋은 일 가득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