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1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최종술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절망, 그 중에서도 예술가의 절망이란 감정은 우리에게 어떤 심상을 불러일으키는가? 우리는 흔히 예술가들을 떠올릴 때 내면의 괴로움에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상상한다. 그들은 술이나 담배, 연예 등에 탐닉하여 고통을 달래거나 영감을 얻기도 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거나, 반대로 내면의 고통을 빚어서 아름다운 예술로 승화시키기도 한다. 어쨌든 미와 진실을 구현하려고 애쓰는 예술가가 아무리해도 자신의 이상을 구현할 수 없어서 느끼는 절망은 어쩌면 아름답기조차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 좀 다른 예술가, 게르만이란 사람이 있다. 그는 자신을 ‘뛰어난 역량을 갖춘 작가이다. 더없이 우아하고 생생하게 표현해내는 능력은 경이롭기까지 하다.’(9쪽)고 나르시시스트적으로 표현한다. 자칭 작가인 이 화자 ‘나’는 때로 상당히 과장된 어조, 다양한 목소리, 여러 개의 언어유희를 사용하며, 혹은 신경질적으로, 때때로 강한 감정의 기복도 보이며 이야기를 이끌어가다가, 마침내 이 소설을 쓰게 된 경위를 밝히고 제목으로 “단호하게 ’절망‘이라는 단어를 썼소.”(226쪽)라고 밝힌다. 즉, 이 소설은 형식상으로 보면 화자인 ’나‘가 쓰는 소설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화자 자신이 붙인 것으로 되어있는 그 자신의 이야기는 절망의 이야기이다. 이 절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한다면 그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

 

   소설의 주인공인 ‘나’(물론 이 ‘나’는 실제 저자인 나보코프가 아니다.)는 초콜릿 사업을 하는 사업가인데, 우연히 길에서 자신과 너무도 닮은 남자 펠릭스를(‘펠릭스’는 ‘행복한 사람’이란 뜻이다. 21쪽 ; 이 이름은 반어적이다.)만나게 된다. 사업이 어려워지고 돈이 궁해진 ‘나’는 자신의 분신을 이용해서 보험금을 타내려고 한다. 즉, 펠릭스를 자기로 위장해 살해하고 도주한 뒤 자신이 미리 가입한 보험금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다. 이 이야기가 플롯의 핵심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이 ‘나’는 이 과정을 범죄행위로 인식하고 있지 않다. ‘내 작품이 완벽하다…….’(199쪽), ‘……자신에게 엄격한 만큼 자존심도 강한 천재적인 신예 작가인 나는, 3월 9일에 외딴 숲속에서 탈고하고 서명한 나의 이 작품을 사람들이 어서 평가해주기를……그래, 나는 사심 없는 예술가였다.’(199쪽)라고 술회할 뿐이다. 즉 ‘나’는 이 살인을 하나의 작품이자 예술적인 행위로 생각한다. 여기에서 화자가 모종의 광기에 사로잡혀있음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이 소설이 극적으로 반전을 보여주고, 주제를 명확히 보여주는 것은 여기서부터이다. 화자 ‘나’는 펠릭스를 살해한 후 프랑스로 가서 이 사건이 자신의 계획대로 전개되는지를 기다리며 이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그는 당연히 자신 게르만이 살해되었다는 기사가 나오길 기다린다. 그리고 보험금을 받고 미리 이야기 해놓은 아내 리다와 재회할 것을 꿈꾼다. 이후 이 사건의 수사가 시작되고 ‘나’도 신문을 통해 이 사건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접하게 되는데, 언론의 반응은 자신이 계획한 것과 다르다. 자신과 똑같이 생긴 펠릭스에게 자신의 옷까지 입혔건만, 경찰은 자신과 전혀 다른 사람에게 옷을 입혔다고 한다. 심지어 자신의 지적 능력이 의심되고, 정상이 아니라는 설까지 제기된다.(213쪽) 그러나 ‘나’는 그들이 ‘닮음의 가능성을 선험적으로 배제’하였고, ‘그게 내 시체가 아니라는 생각을 머리에 단단히 박고’있다고 생각한다. ‘나’와 펠릭스는 ‘내’가 보기에 똑같이 닮았다는 사실을 의심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후 사건의 수사가 진행되면서 ‘나’는 실수로 펠릭스의 이름이 새겨진 지팡이를 자동차에 놓고 내리는 기초적인 실수를 저질렀음을 알게된다. 작품이 실패작이 되었다는 것이 명확해진 것이다. ‘그토록 주도면밀하게 계획된, 그토록 주도면밀히 집필된 내 작품이 내가 저지른 실수 때문에 이제 모조리 내적으로, 본질적으로 파괴되었다는, 쓰레기 더미가 되어버렸다는 의식, 바로 이 생각이 나를 찔러댔다.’(226쪽) 이로써 ‘나’는 절망하게 되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게르만(나)은 일종의 예술가로 자신을 규정하고, 자신이 쓰는 이 소설과 소설 속에서 자신이 한 행위를 예술활동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게르만은 살인같은 잔학한 범죄 자체를 예술로 생각하는 살인마가 아니다. 그는 자신을 범죄자라고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다. ‘그들(잔인하고 어리석은 범죄자들)과 나 사이에는 공통점이 전혀 없다.’(216쪽) ‘그 사진에서 나는 전혀 나 같지 않았고, 정말 범죄자 같았다.’ 이런 생각은 게르만이 현실과 환상을 구별하지 못하는 일종의 광기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따라서 게르만의 시각에서 자신이 완전범죄를 저지르지 못하고, 사소한 실수를 범함으로써 계획을 망쳐버렸다는 것은 곧 예술의 실패이고 따라서 그는 ‘절망’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이 절망은 게르만 자신의 관점에서 보자면 예술가의 고뇌이지만 그는 분별력을 잃은 상태이므로, 그는 애초에 진정한 예술을 구현하려고 한 것도 아니고 예술을 완성하지 못함으로서 절망할 이유도 없다. 대신 그는 예술 자체를 시도할 수 있는 진지한 능력을 박탈당함으로써 절망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 게르만의 광기 자체에 대해 우리가 예술적 감흥을 받거나 영감을 얻을 수는 있다. 그리고 또한 이러한 게르만의 이야기라는 것 자체로 예술을 구현할 수 있다.

 

   실제로 이 소설의 저자인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자신이 이 게르만이 직접 쓰는 소설이라는 형식으로 이 ‘절망’이라는 뛰어난 예술작품을 쓰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역설적인 구조가 이 소설이 역설적으로 실현하는 예술의 묘미이자 깊이 이해되어야 할 점이라고 생각한다. 즉, 이 소설은 하나의 층위에서 쓰여져 있지 않으며, 피상적으로 이해되어서도 안된다. ‘절망’의 독특한 구조는 의미의 차원뿐 아니라, 형식이라는 면에서도 나타난다. 즉, 이 나보코프의 ‘절망’은 문체나 형식, 서사방식의 다양성 등의 측면에 있어서도 최소 두 단계의 존재의 층위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사용되는 다양한 유형의 서사의 방식은 한편으로는 광기에 빠진 게르만의 혼란스러운 내면을 표현하며, 다른 층위에서는 소설 자체의 실험적인 서술과 문체, 그리고 뛰어난 예술적 성취 그 자체가 되기도 한다. 게르만은 실패한 예술가이지만 나보코프는 실패한 예술로 성공한 예술을 구현한다. 이 점이 이 소설이 가지고 있는 역설적이고도 뛰어난 특징이다.

 

   이러한 사실은 동시에 독자로 하여금 예술이라는 것, 그리고 예술가의 고뇌라는 것에 대하여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통찰할 수 있도록 해준다. - 예술은 반(反)예술이라는 것, 즉 자신과 전혀 이질적인 요소마저도 자신의 일부로 포함할 수 있으며, 모든 것이 예술의 대상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것은 주의해야 할 점이 있는데, 여기에서 예술의 구현이라고 하는 것은 반예술적인 시도 자체를 포함한다는 것이 아니라, 예술적인 반성의 사유로 추상되어진 결과물로서 최후에 주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술은 광기 자체나 게르만의 살인 자체가 아니다. 우리가 이 점을 명확히 하지 않는다면 예술도 아닌 절망의 심연 자체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나보코프는 이 점을 잘 알고 있었고, 그는 절망에서 진지하고도 뛰어난 수준의 예술을 구현해 낸 것이다. 그리하여 다시금 절망은 단순한 절망이 아닌 예술을 향한 진지한 노력으로 존재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이것이 ‘절망’을 통하여 나보코프가 전달하는 이야기의 함의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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