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하늘은 흐렸고 날은 타는 듯이 더웠다. 소나기라도 내리면 시원하련만, 하루 종일 비는 내리지 않다가 저녁이 되어서야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저녁까지 앉아만 있으니 온몸이 찌뿌듯하다. 이제 퇴근하고 집에 가서 샤워를 한 뒤 푹 자면 딱 맞을 것이다. 오늘도 그저 그런 형사의 하루가 될 것 같았다. 그러나 늦게 부두 관리자에게서 걸려온 한 통의 전화는 이 날을 내 기억에서 잊을 수 없는 날로 만들었다.
관리자 말로는 부두 냉동 창고에서 사망한 사람을 발견했다고 한다. 나는 이경사와 함께 즉시 현장에 가서 시신의 신원을 확인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일러야 다음 날 오후까지 한나절은 족히 걸릴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쉽게 사망자를 알아낼 수 있었다. 그의 품안에서 신분증이 꽂힌 지갑을 발견했던 것이다. 이형우. 작은 사업체를 운영하다 큰 빚을 지고 종적을 감추었는데, 사기혐의로 수배가 내려진 상태였다. 그와 함께 소지품이 든 가방도 발견되었는데, 가방 안에는 다 닳은 연필과 노트 하나가 있었다. 노트에는 이 냉동 창고에 들어와서 그가 사망하기 직전까지 약 일주일 동안의 그의 심경이 적혀 있었다. 나는 이 노트가 그의 상태에 대한 매우 흥미로운 기록이라고 생각한다. 노트는 사실 아주 길고 난삽해서 여기에 전문을 다 옮길 수가 없다. 여기에 내 개인적으로 흥미롭다고 생각하는 극히 일부분만을 옮겨보기로 하겠다.
#1. 내가 이곳에 들어올 계획은 애초에 없었다. 단지 채권자 정만수가 고용한 해결사가 나를 잡으러 왔기 때문에 주위에 도망갈 수 있는 곳으로 숨어야만 했고, 뒤늦게 알고 보니 내가 숨은 곳이 냉동 창고였던 것이다. 문은 해결사가 밖에서 잠그고 간 것 같다. 그래도 아직 모든 것을 포기할 때는 아니다. 나는 약간의 물과 손전등, 그리고 작은 칼 하나가 있다. 점퍼도 입고 있으니 당분간 버틸 수 있다. 밖의 동향을 주시하며 도움을 구해보자.
#2. 차가운 공기가 나를 사방에서 둘러싸고 있다. 몸이 조금씩 굳어가는 느낌이 든다. 몸이 굳어버리면 안되다. 내가 일어나지 못하면 잠들거나 쉽게 정신을 잃을 것이고, 그러면 모든 것이 끝이다. 수진아 그리고 내 딸 민정아, 남편으로서, 아빠로서 미안하다. 내가 살아 돌아가서 다시 너희를 볼 수 있으리라 굳게 믿는다. 너희를 생각하며 힘을 내겠다.
#3. 손전등으로 가방 안을 살피니 빵 하나와 삶은 달걀 두 개, 과자 한 봉지가 있다.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최대한 아껴서 먹어야한다. 오늘은 밖에 누가 있으면 도와달라고 하루 종일 소리를 지르고 차가운 창고 벽을 두들겼다. 그러나 어떤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확실히 이쪽은 인적이 뜸한 것 같다. 그래도 조만간 지나가는 사람이 분명 있을 것이다. 희망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오늘 힘을 많이 썼더니 졸음이 쏟아진다. 잠들면 끝이다! 다리를 찔러가면서라도 깨어있어야 한다.
#4.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이 안에 있으니 시간을 알 수가 없다. 밖과 완전히 단절되어 있는 이곳이 혹시 지옥은 아닐까? 차가운 얼음의 지옥 혹은 영원히 혼자 버려진 감옥에 살게 되는 고독의 지옥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최대한 아껴서 먹었는데도 벌써 빵 하나를 다 먹었다. 아마도 내가 들어온 지 5일은 되지 않았을까? 혹시 하루밖에 안 된 것은 아닐까? 잠을 안 자려고 버티다보니 모든 것이 뿌옇게 보인다. 처음엔 계속 손전등을 켰지만 지금은 노트를 기록할 때만 키고 바로 불을 끈다. 건전지를 아끼려고 손전등을 끄고 있으면 내 앞의 어둠은 뿌옇게 변했다가 한 덩어리가 되어 그 찬 기운으로 나를 사정없이 내려친다. 그래, 나는 조금씩 지쳐가고 있다. 내가 살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다. 어차피 난 지금도 지옥 안에 있는데, 죽는다고 뭐가 달라질까?
#5. 발에 감각이 없다. 동상에 걸린 것 같다. 큰일이다. 걸어 다닐 수가 없으면 도움도 청할 수 없다. 온 몸이 조금씩 얼어가는 것이 느껴진다. 몸을 움직여서 몸에 열이 나게 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움직일 힘이 없다.
#6. 좀 전에 사람 소리를 들었다. 남자의 웃음소리가 분명하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기어가서 소리를 지르며 언 주먹으로 창고 문을 쳤다. 손이 터지고 부서지는 것 같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잠시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무언가가 창고 옆을 치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그래. 이것이 나를 구하러 오겠다는 뜻이리라. 나는 흥분되는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제 나갈 수 있겠구나. 이 안에서 나갈 수만 있다면 나는 정말 행복한 사람으로 다시 삶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아, 사랑하는 내 가족! 그들을 다시 볼 수만 있다면, 작은 고난은 얼마나 하찮은 것이 될 것인가!
나는 사람이 와서 문을 열어줄 것을 숨죽여 기다렸다. 30분? 한 시간? 그 정도가 흐른 것 같은데, 아직 기척이 없다. 그들간에 서류작업이나 담당자 보고가 필요한지도 모른다. 그래서 늦어지는 것이리라. 적어도 4시간이 더 지나갔다. 입으로 1부터 15000까지 세었다. 나는 아직 그대로 이곳에 있다. 혹시 내가 아까 잘못 들은 것은 아닐까? 사람이 있지도 않았는데, 환청을 들은 것일까? 이 안에 있다 보니 감각이 이상해진 것 같다. 나는 이렇게 얼어서 죽는 것인가?
#7. 나는 이제 모든 희망을 버리기로 했다. 이미 온 몸에 동상이 퍼져서 더 이상 사는 것도 불가능하다. 먹을 것도 마실 물도 없다. 나에겐 약간의 손전등 불빛이 있을 뿐이다. 삶의 마지막 순간, 빛이 있는 것만도 감사할 일이다. 나에게 고통을 준 모든 이를 용서한다. 나도 지은 모든 죄를 참회한다. 또다시 삶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아아! 정말 열심히 살 텐데……삶이란 너무나도 덧없고, 욕망은 허상과도 같다.
이형우의 기록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삶이란 너무나도 덧없고, 욕망은 허상과도 같다.’는 깨달음이 담긴 문장으로 끝났다.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다. 부검의가 사인은 심장마비라고 했지만 그의 기록을 보면 그는 분명 얼어 죽은 것이다. 그가 갇힌 냉동 창고는 근래 일주일 동안 수리를 위해 가동이 정지된 상태였는데 말이다.
그를 죽인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냉동 창고인가? 그 자신의 생각인가? 아니면 탐욕과 부정에 물든 이 세상 모두인가? 나는 대답을 담뱃불을 붙이고 다시 비오는 거리로 나가는 것으로 대신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