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 위화, 열 개의 단어로 중국을 말하다
위화 지음, 김태성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9월
평점 :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 고통을 넘어서>
우리는 단어를 말한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선 단어도 우리를 '말해준다.' 사실, 몇 단어가 우리 개인을 설명하고, 사회를 드러내 보이며, 세상을 규정하는 일들은 드물지 않다. 위화가 선택한 10개의 단어들은 이 드물지 않은 예를 예술의 경지까지 고양시킨다. 인민, 영수, 독서, 글쓰기, 루쉰, 차이, 혁명, 풀뿌리, 산채, 홀유. 이 단어들의 내면에 도달한 작가 위화는10개의 재료들로 자신의 삶에서 있었던 경험을 말하고, 과거의 중국과 현재의 변화된 중국을 보여주며, 삶과 역사를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의미로 향한 길을 그려보인다. 10개의 돌-단어가 세상이란 수면에 만드는 파문은 가볍지 않고 둔중하다. 그것은 돌의 무게가 무겁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수면아래의 깊이가 무척 깊기 때문이기도 하리라.
먼저 우리는 ‘인민’과 만난다. 역사적, 정치적 이유로 우린 ‘인민’보다 ‘국민’에 더욱 친숙하지만, 위화의 어린시절 - 즉, 문화혁명기의 중국은 인민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인민은 바로 마오 주석님이고, 마오 주석님은 바로 인민인 것이다(p.25).' 모두가 인민을 말하고 어디서나 인민을 보고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너무 많이 사용되는 것은 본래의 의의를 잃기 쉬운 법. 중국의 정식국호인 ’중화인민공화국‘에 등장하듯 인민의 나라를 표방하는 중국에서, 인민은 의미를 상실하고 오히려 한명의 초인격적 주체 마오쩌둥에게 모든 가치가 집중되어 버렸다. 하지만 위화는 생생하고 유머러스한 필치로 바로 이 모순의 광장에서 진정한 인민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1989년 천안문 광장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이 밤하늘 아래 국가를 부르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들은 손에 아무런 무기도 들고 있지 않았지만 신념만은 대단히 확고했다(p.39).' 작가는 이 때를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다(p.39)'고 기억한다. 약하지만 순수하고 선량한 사람들이 진정으로 서로를 위해, 국가를 위해 한데 모여 뿜어내는 목소리는 너무도 숭고하였기 때문이다. 그 목소리는 물론 '빛보다도 멀리 가는 것'이었다.
다음으로 위화는 영원한 ‘영수’의 전형인 마오쩌둥을 말한다. 당시를 상징하는 인물, 당시의 질서와 가치가 인격화된 존재가 바로 그였다. 그런데 잔혹한 문화대혁명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그를 그리워하는 중국인들이 많다고 한다. 이는 현재 중국이 가진 여러 문제들을 반영하는 현상일 것이다. 경제가 급성장하면서 발생한 사회문제들, 부조리와 폭력이, 강력한 지도자와 전체주의적 질서에 대한 중국인들의 향수를 자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위화는 ‘영수’의 사망 당시 자신과 수많은 이들이 모여서 함께 울다가 갑자기 홀로 격렬하게 웃게 되었던 경험을 소개한다. ‘영수’에 대한 숭배와 전체주의적 사고가 도달하는 한 지점이 블랙코미디의 한 장면과도 같다는 것을 드러냄으로써, ‘영수’에 대한 향수의 위험을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니 ‘영수’는 어쨌든 어떤 의미에서는 아직 살아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영수는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문제라고도 할 수 있으리라.
위화는 뛰어난 작가로서 성장하는데 밑거름이 되었을 어린시절의 ‘독서’와 ‘글쓰기’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그의 어린시절엔 <마오쩌둥 선집>과 홍보서 이외에 다른 책은 거의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책이 귀했다. 그래서 집마다 비치된 (전시용에 가까운) 마오쩌둥 선집의 주석들과 어렵사리 필사한 책, 곳곳에 붙은 대자보를 읽으며 독서의 욕구를 충족시켜야 했다. 글쓰기도 홍위병으로서 대자보를 작성한 것으로 시작했다고 한다. 이런 다소 기형적인 과정으로 독서와 창작을 시작했지만 ‘때로는 단점에서 출발한 것이 갈수록 장점이 되기도(p.136)'하였다. 그를 작가로 만든 것은 오직 ’글쓰기 덕분이었다(p.137).' 자신의 경험을 차분하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면 단순한 글쓰기를 넘어,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도 통찰할 수 있으리라. ‘사실 삶과 글쓰기는 아주 간단할 때가 있다(p.157).' 그 간단함이 삶과 글쓰기 모두를 관통하는 화살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싶다. (사실, 간단함 속에 담긴 깊은 여운의 미학은 위화가 ’루쉰‘편에서 말하는 대작가 루쉰의 작품 특징이기도 하다 ; p.161~183 참고) 단순함은 결코 단순함에 머물지 않는다.
위화가 경험한 20세기 중엽 이후 중국의 모습은 대부분 무척이나 경직되어 있었다. 남학생과 여학생이 감히 서로 말을 주고받지도 못했고, 칠판에 누군가가 ‘사랑’이라고 적어놓자 학교 혁명위원회가 범인을 색출하려 대대적으로 나서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과거와 너무도 다르다. ‘극단적으로 억압된 시대는 사회의 급격한 변화에 따라 반드시 극단적으로 방종하는 시대를 조성(p.194)'하기 때문이다. 물론 극도로 억압되었던 과거보다는 자유로워진 현재가 더 긍정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과거와 현재의 상황 모두 빛과 어둠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히 체제나 경제적 상황에 좌우되는 것은 아니고, 인간이란 존재의 깊은 내면과 삶의 블가해함과도 맞닿아 있다. 위화의 글을 통해 우리가 도달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라고 해도 크게 틀리진 않을 것이다. (위화가 ’혁명‘편에서 궁극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은 ’혁명‘의 허구성인데, 이 허구성을 폭로하는 것이 바로 보편적 가치에 대한 모색이다. 이점에서 인간 일반의 내면과 삶의 블가해함에 대한 통찰은 정치적인 영역에서도 깊은 울림을 남기고 있다)
‘인민’이나 ‘영수’, ‘혁명’과 같은 단어가 과거 중국의 상황을 잘 보여주는 단어라면 ‘풀뿌리(草根)’, ‘산채(山寨)’, ‘홀유(忽悠)’는 현재 중국의 모습을 드러내는 키워드이다. 세 단어 모두 현대에 새로운 의미가 생겼는데, ‘풀뿌리’는 현대 중국의 비주류 약자층(p.264)을, ‘산채’는 모방이나 짝퉁제조, 권리침해, 규범위반, 농담, 못된 장난 등(p.291)을 의미하고 ‘홀유’는 남을 속이는 것(그러나 ‘사기’보다는 부드럽고 장난스러운 함의를 가진다 ; p.321.)을 말한다(흥미롭게도 ‘산채’는 쟝 보드리야르가 말한 시뮬라크르의 개념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조사해보니 ‘simulacre’를 ‘山寨’로 번역하진 않는 것 같다).
중국 경제의 급속한 성장으로 풀뿌리 출신의 인물이 벼락부자가 되는 경우가 종종 나타나는데, 그 중에는 산채물건을 만들거나 산채조직을 이용하고 홀유에 의해 돈을 번 이들이 많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산채나 홀유의 행위는 경제활동뿐 아니라 다양한 영역으로 확장되어 각종 문제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러나 위화가 말한 '인민'은 이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시사하고 있기도 하다.
'인민'은 '영수'의 지도아래, '혁명'을 경험하며 살았고, 이 시기에 한 소년은 '독서'와 '글쓰기'를 하며 '루쉰'과 비견되는 작가가 되엇다. 그와 루쉰과의 '차이'는 지금 그의 앞에 '산채'와 '홀유'의 집적으로서의 21세기 '풀뿌리'들의 중국이 놓여있다는 것이다.
이 모든 이야기를 통해 위화가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니 중국 전체가 느끼고 있을 것은 아마도 고통일 것이다. 그것은 성장통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제거해야 할 사회의 종양덩어리가 만들어내는 통증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세상에 고통만큼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 쉽게 소통하도록 해주는 것은 없을 거라고(p.353)' 위화가 말한 것 또한 통증만큼이나 명백한 진실이다. 이 책을 한마디로 ’고통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하고 싶다. 혁명의 흥분과 광기, 무자비한 살육과 숙청, 폭력과 홀유의 경험 모두 중국이 겪은 고통이다. 그렇지만 고통이 소통으로 이어지는 길을, 모두가 고통을 통과해 형통으로 가는 길을 찾고자 하는 따뜻한 마음이 이 책 바닥에 있기에, 지금의 고통을 넘어서는 한걸음을 내딛을 수 있다.
그 따뜻한 마음도 빛보다 멀리 퍼져 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