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종
미셸 우엘벡 지음, 장소미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미셸 우엘벡의 「복종」: 계속되는 물음>

 

 

 

    (0)“복종에 대한 책이죠.” (「복종」, 제5부 중에서, p.317)

 

    (1)미셸 우엘벡의 소설 <복종>은 문제적 작품이다. 이 작품이 출간되기 전날에 발생한 ‘샤를리 에브도’ 테러 사건 때문에 이 책이 더욱 주목을 받게 되고, 뜻하지 않았던 ‘문제적’ 효과를 얻기도 했지만, 책의 내용 자체가 던지는 물음은 테러사건이 던지는 파장보다 더 오래 독자의 가슴에 남으리라고 생각한다. 오랜 기독교 문명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유럽의 대표적 선진국인 프랑스, 문화와 예술의 나라이자 수많은 석학을 배출한 지성의 나라 프랑스에서, 프랑스적인 것과는 너무도 이질적인 이슬람 정권이 정상적 선거를 통해 출현하게 된다는 설정이 무척 독창적이면서도 충격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슬람이 프랑스를 장악한다는 사실은 정체가 모호한 불안감을 수반한다. 서구가 이슬람 세계에 대해 가지고 있는 다소 편견에 가까운 이미지들이 사람들에게 우선적으로 떠오르기 때문이다. 뉴스에서는 ‘하마스의 반대 분파가 새로운 행동을 개시하기로 결정했고, 거의 매일 폭탄을 두른 자살 테러범들이 식당이며 버스로 뛰어들었다.’ (「복종」, p.200) ‘호전적이고 폭력적인 이슬람’에 대한 이미지들은 지구 반대편 우리나라의 시청자들에게도 비슷한 불안감을 불러일으킬 정도다. 우리의 경우를 잠시 생각해보자. 세계화와 지구촌의 시대에 무색하게도 이슬람교 자체에 대한 우리의 이해도는 깊어지지 않고, 한국어나 영어로 번역된 코란을 읽어본 이도 드물다. 많은 이들이 이슬람교는 ‘알라신’을 숭배하는 종교인 것으로만 알고 있다. 그러나 ‘알라’라는 말은 신의 이름이 아니라 그냥 ‘신’이라는 뜻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프랑스의 경우도 이런 점에서는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프랑스는 우리와 다소 다른 상황에 있으며, 이점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지리적으로 우리보다 중동에 가까운 프랑스에는 수많은 이슬람 이민자들이 거주하고 있고, 이들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정치인이나 관료들은 이들을 정치적인 측면에서나 정책적인 면에서 고려해야만 한다. 이슬람은 프랑스에서 살아있는 현안이자 변화하는 시대의 증인들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슬람을 호전적인 이미지로만 생각하는 것은 ‘무해한 내면의 편견’일 수 없다. 이슬람은 ‘이해되어야 할 과제’의 지위에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슬람화된 프랑스를 이해하는데 핵심적인 요소는 가치적인 면과 체제적인 면으로 집약된다. 이 두 가지 차원에서 소설에 나오는 이슬람 정권의 기획이 정리될 수 있다.)

 

 

   (2) 정신적 가치라는 것은-그리하여 이슬람이라는 ‘가치’ 역시-언급할 때 평가를 수반하거나 평가가 선행되는 개념이다. 그런데, 제대로 이슬람을 이해해야 우리의 과제로서의 이슬람을 다룰 수도 있다. 즉, 이슬람에 대한 가치판단 이전에 가치판단의 대상이 되는 요소들에 대한 가감 없는 파악이 먼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소설에서 주목하는 ‘이슬람화’는 단순히 종교적 제의의 대상을 기독교와 교체하거나(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가 상정하는 유일신이 동일한 신인지에 대한 논의도 없는 것은 아니다.) 의복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보다 훨씬 깊은 의미의 변화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이슬람이라는 문제는 단순한 종교적인 숭배의 대상이 변화하는 차원의 것이라기보다, 또 다른 세계관이자 사고의 변화를 수반하는 ‘방법적 전환’이란 점에 핵심이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 우엘벡이 그려내는 프랑스 이슬람의 모습에는 그런 방법으로서의 이슬람의 면면이 잘 포착되어 있다.

   사고의 방법의 변화는 개개의 사고가 변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관련된 체계의 총괄적인 변화를 수반하게 되는데, 이로서 전통적인 가치를 가진 프랑스 사람들에게 불안을 야기하게 된다. 정신적 변화는 보이지 않기에 더욱 두려운 법 아니던가?

 

    이런 가치와 방법으로서의 이슬람이 처음 맞이하는 도전과 응전의 장은 정치무대이다. 이 소설에서 그려진 이슬람 정당이 프랑스의 정권을 잡는 과정은 무척이나 핍진한데, 서구의 대의 민주주의적 과정을 통해 이슬람이 정치의 영역에서 성공했다는 것이 무척이나 의미심장하다. 이는 이슬람이 서구의 체제에 완전히 적응하고 과거 이슬람의 이베리아 지배와 같은 성과를 골 족의 나라에서 이루어 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슬람은 게르만과 앵글로 색슨을 다음 대상으로 삼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 소설에서 실제로 모하메드 벤 아메스 대통령은 유럽전역과 터키, 북아프리카를 포함한 ‘새로운 로마’를 꿈꾼다. 이런 언명은 프랑스의 독자들에게 소설의 차원을 넘어 현실적인 가능성으로서 다가오는 것일 수 있다.

 

   이런 ‘체제적 이슬람화’가 유럽연합을 좌지우지할 가능성으로까지 거론되는 것은 오일달러로 대표되는 자본의 도움 덕분이기도 하다. 이슬람은 현대의 자본주의-특히 금융 분야의 지배적 지위가 만연한 전 지구적 자본주의 체제와도 아무런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서구적 자유민주주의체제와의 부정합적인 면도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지만, 현대 이슬람의 유연한 모습은 서구의 민주주의적 관용의 정신과 훌륭히 조화할 수 있다. 이 소설의 핍진함이 일부 사람들에게 생생한 현실의 공포를 야기하는 것은 이런 서술의 타당성에 기인한다. 사실, 가치와 방법으로서의 이슬람, 현대 체제에 완전히 적응한 이슬람이라는 것은 이미 어느 정도 현실에 실재하는 공포이다. 이런 추세라면 또 다른 벤 아메스가 미래에 다른 이름으로 등장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3) 우리가 거대한 체계를 고찰할 때, 문화, 정치경제적 체제와 같은 거시적 영역을 넘어 궁극적으로 도달하는 것은 개개인의 내적 차원에서의 의미이다. 소설 속에서 이슬람은 분명 성공했다. 그러나 그 현실적 성공의 가능성의 이면에는 타자의 불안감과 좌절의 이슬이 맺혀있다. 그렇기에 그 물기가 말라가고 속이 타는 불안한 내적 과정에 직면한 개개인에게는 실존적 물음이 또다시 제기될 것이다. 즉, 이슬람화의 문제는 정치적 차원의 문제를 넘어 개개인에게 실존적 과제를 부여하는 ‘삶의 문제’이자 ‘내면의 문제’이다. 그리고 이 문제를 고민하는 실존으로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 ‘나’, 프랑수아다.

   우엘벡적 주체인 프랑수아가 걸어가는 궤적은-이른바 ‘노선’을 굳이 따져보자면-지식인이지만 현실에 비판적인 좌파이기보다는 쁘띠 부르주아의 퇴폐적인 모습에 가깝고, 그는 정치에 환멸을 느끼며 조금씩 몰락하는 궤도에서 오래도록 벗어나지 못한다. 그가 맺는 성적 관계에는 진지한 사랑이나 결혼에 대한 고려가 선행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가 결코 성적인 방탕함을 추구하거나 퀴레네적 쾌락주의자인 것도 아니다. 그저 일상의 모든 것이 환멸의 냄새를 풍긴다. 박사학위 논문을 완성한 다음날 ‘엄청난 무언가, 결코 되찾지 못할 무언가를 잃어 버렸다.’(p.15) 그렇기에 그 몰락의 과정은 계속 이어진다. 그러나 프랑수아가 박사학위를 위해 연구한 주제인 위스망스라는 작가가 추구한 세계는 프랑수아의 내적 상태에 따라 다양한 측면에서 검토되고, 위스망스의 삶의 면면과 작품들은 프랑수아의 그것들과 단속적으로 비교된다. 위스망스가 프랑수아의 분신과도 같은 존재라고 하긴 어렵다. 그러나 그는 프랑수아의 좋은 친구, 어쩌면 현실에서 사망했고 서로 만난 적도 없음에도 프랑수아에게 진정한, 그리고 아마도 거의 유일한 친구라고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프랑수아의 삶의 과정들마다 떠오르고 무언의 메시지를 던지는 친구 말이다. 마침내, 프랑수아는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마침내 이슬람으로 개종을 하고 젊은 여성과 결혼하게 되는데(무척 의미심장한 부분이다), 이마저도 위스망스가 가톨릭으로 개종을 한 모습과 대비된다. (프랑수아는 위스망스의 개종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지만.)

 

   이슬람화된 프랑스에서 ‘나’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기존의 현실에 환멸을 느낀 지식인 ‘나’의 고민, 그리고 ‘나’ 실존적 자각과 실천이라는 메시지가 이 지점에서 부상한다. 위스망스를 통해서 프랑수아는 자신의 실존적 의미에 대한 깊은 인식에 이를 수 있었다. 그 인식을 집약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위스망스의 플레이아드 총서 서문인 것이다. 서문에서 말하는 소박한 행복, 소시민적이라고 할 수 있는 삶에서 느끼는 소소한 즐거움들. 이것이 위스망스가 진정으로 원하던 것이자, 위스망스에 대해 프랑수아가 도달한 이해의 완성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복종」의 결론은 아니다. 오히려 플레이아드 총서의 서문은 또 다른 하나의 문제제기에 해당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새로운 세상에서 ‘나’가 살아가는 것의 문제를 작품이 최후로 제시하고, 열린 지평을 말미에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일 수 있다.

 

 

   (4) ‘복종’이란 것은 권위자 내지 절대자에 대한 충성과 동의어가 아니다. ‘이슬람은 세상을 받아들입니다. 온전히, 그 자체로서요.’(p.317) 세상을 그 자체로서 받아들이고 긍정한다면, 세상을 자연스럽게 사는 것이 곧 복종과 같은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이해한다 해도, 신의 법이라는 것을 말하고 이해하며 실행하는데, 인간의 요소가 들어갈 수밖에 없으므로 이 ‘복종의 미학’은 불가피하게 왜곡되고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 ‘복종’의 관념이 새겨온 역사에는 위대함과 찬란함도 있지만 고통과 핏방울의 얼룩이 배어 있기도 하다.

 

   이슬람이라는 것을 이런 정신적 과정으로 바라보는 것, 그리고 현대에 등장할 수 있는 정치적 실재로서의 모습들, 이에 대해 우엘벡이 말하고 있는 것은 앞으로 계속 답해져야 할 질문이지 그 답변이 아니다. 그러나 이 질문은 우리의 내면을 뒤흔들 만큼 충분히 의미심장하다. 그렇기에 우린 앞으로도 우엘벡과 함께 고민해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마의 일인자 1 - 1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1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리뷰] 로마의 일인자 : 일인자의 의미와 시대정신

 

 

 

 

 

  로마는 멸망하지 않았다. 로마는 현재까지 형태를 바꾸어 살아있기 때문이다.

  물론 역사에서 정치체인 로마를 말한다면 비잔틴 제국이 오스만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점령으로 멸망하는 1453년까지 로마가 존속했다고 할 수도 있겠고, 더 길게 본다면 신성로마제국의 프란츠2세가 퇴위하는 1806년까지 로마의 명맥이 살아있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형식적 명칭으로서의 ‘로마’에 집착하지 않고, 로마를 진정 유일무이한 ‘로마’로 만드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세계제국으로서의 고대 로마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 로마가 서양의 세계제국으로서 고대국가의 완성된 형태를 보여주었고, 이때 만들어진 수많은 법과 제도, 문화적 산물이 현재 세상의 기본적 틀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서구문화를 받아들여 근대화를 이룬 동양의 국가들에게도 변함없이 타당한 말이다.

  그리고 지금 현재까지 로마를 주제로 한 수많은 논문과 전문서적, 대중교양서적이 끊임없이 출간되고 있다는 사실도 로마가 여전히 우리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로마는 멸망하지 않고 수많은 요소들을 지금까지 세계에 전하며 존속하고 있다고 해도 터무니없는 말은 아닐 것이다.

 

 

간단한 줄거리

 

 

 소설 1권은 기원전 110년부터 기원전 108년에 이르기까지의 정무관직을 맡은 주요 정치인들을 언급하고, 정치적인 사건들을 소개한다. 당시 로마는 게르만 족과의 전쟁으로 수많은 병사가 필요하자 퇴역군인에 대한 법까지 개정될 정도로 절박한 상황이었다. 한편 누미디아 왕 유구르타는 왕위계승 문제로 친척들을 살해하는 과정에 로마인과 이탈리아인들까지 죽게 해서 로마와 대립하게 되었고, 결국 로마와 전쟁을 벌이게 된다.

 

  한편 마리우스는 카이사르와의 약속으로 카이사르의 딸 율리아와 결혼하고 집정관 자리에 도전할 수 있게 된다. 단, 마리우스는 카이사르의 두 아들의 장래를 위해 금전적으로 지원해주어야 하는 의무도 생겼다. 젊은 청년 술라는 함께 살던 두 여성을 죽이고 부자가 되고 이를 바탕으로 마침내 원로원 의원이 된다. 술라를 좋아하는 (율리아의 동생) 율릴라는 단식투쟁을 벌이다 마침내 술라와 결혼에 성공한다. 마리우스는 아프리카에서 메텔루스와 갈등을 겪다가 로마에 돌아와 집정관으로 당선된다.

 

 

 

왜 공화정 후기의 로마인가

 

 

 우리가 지금 만나는 <로마의 일인자> 제1권은 로마공화정 시기인 기원전 110년부터 기원전 108년까지의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로마의 일인자>는 콜린 매컬로의 7부작 <마스터 오브 로마>의 첫번째 작품이며, 이 <로마의 일인자>도 한국어판으로 3권의 분량에 달한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이 7부작 소설이 갖는 스케일은 엄청나다고 할 수 있으리라. 그런데 이 방대한 소설이 다루고 있는 시기가 로마 공화정 후기로부터 공화정 체제가 무너지고 제정이 성립하는 시기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은 중요한 점을 시사하고 있다. 사실 지금까지 학계의 로마사 연구에 있어서도 이 시기에 관한 연구가 가장 많고, 로마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나 소설 등에서도 이 시기가 집중적으로 다루어진다. 이런 사실에는 이 시기가 역사상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평가가 반영되어 있다.

 로마는 신화시대 이후 초기의 왕정 체제가 전복되고 공화정 체제가 성립한다. 그러다 한니발의 침략으로 로마는 국가적 위기를 맞았다가 다시 극복하고, 공화정 체제의 절정기에 이르는데, 바로 이 지점 이후가 <로마의 일인자>가 시작하는 지점으로서, 바로 공화정 체제가 내재적 모순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때다.

 소설의 첫 부분은 기원전 110년의 로마인데, 이때 마리우스는 47세(기원전 157년 생)이고, 술라는 28세(기원전 138년 생)의 청년이었다. 마리우스는 엄청난 부를 소유하고 있었지만 가문이 보잘 것 없어서 집정관에 당선될 꿈도 꾸지 못하는 신세이고, 술라는 잘 생기고 건장한 청년이지만 집안이 너무 가난해서 불안정한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당시 로마의 공화정 체제는 (마리우스의 경우처럼) 돈이 많아도 명문가문 출신이 아니면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없고, (술라의 경우처럼) 명문가의 사람이라도 돈이 있어야 공직을 노려볼 수 있는 사회구조였던 것이다. 또, 국제적으로는 이탈리아 북부에서 게르만 족이 로마를 위협하고 있었고, 아프리카 북부의 누미디아에서는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치열한 투쟁이 전개되고 있었다. 이들과 전쟁을 치르는 동안 로마에서는 자영농이 몰락하고 소수의 대토지 소유자들에게 부가 집중되어가고 있었다. 이렇게 노정되어가고 있는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여야 하는 과제가 당시 지배층에게 주어져 있었고, 역사는 이런 사명을 수행할 수 있는 이를 필요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사회적 요구가 어떻게 충족되고, 역사가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 7부작 <마스터 오브 로마>의 세계이다.

 이 시기는 근본적인 사회체제의 변경이라는 엄청난 사건을 겪게 되는 시기였다. 바로 이 지점에서 고대국가 로마의 시대정신이 실현될 기회가 부여되어야 했다. 그리고 이러한 시대정신은 수많은 역사적 주체, 특히 '일인자'들을 필요로 했다. 그렇기에 제1부에 해당하는 <로마의 일인자>에서 '일인자'들의 역할이 당연히 주목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리가 역사를 통해 잘 알듯이 바로 당시 사회적 문제는 공화정 체제에서 제정으로의 시스템 변화를 야기했다.

 

 

로마의 일인자

 

 

그리고, 이 변혁의 시기를 이끌어가는 이를 바로 진정한 ‘로마의 일인자’라고 부를 수 있다. 매컬로는 소설에서 ‘일인자’의 의미를 직접 말하고 있다.

......가장 뛰어난 자가 로마의 일인자는 아니었다. 지위와 기회가 동등한 자들 사이에서 제일가는 자가 로마의 일인자였다. 로마의 일인자가 된다는 것은 왕이나 전제군주, 폭군 따위가 되는 것보다 훨씬 더 대단한 일이었다. 로마의 일인자는 본인이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걸출한 자임을 증명해보임으로써 그 칭호를 유지했다. 또한 그 자리를 뺏으러 혈안이 된 자들, 자신이 지금의 일인자보다 더 걸출하다는 것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합법적으로 그 자리를 빼앗을 수 있는 자들이 세상에 가득하다는 것을 늘 명심해야 했다. (p.34)

  마리우스와 술라는 각각 율리우스 가문의 자매와 결혼함으로써(그리고 한편으로 술라는 같이 지내던 여성을 살해하고 재산을 상속받으며) 이 ‘지위와 기회’를 얻게 된다. 즉, 마리우스는 1권 후반부에서 집정관이 되고, 술라는 마리우스의 재무관이 되는 것이다. 둘 다 불가능할 것만 같던 일이지만, 두 사람은 이제 ‘로마의 일인자’로 향한 길을 어느새 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 ‘일인자’라는 것은 단순히 권력을 가장 많이 소유한 자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뛰어난 능력으로 세상과 역사의 흐름을 꿰뚫어 볼 수 있어야 하고, 권모술수에 능란한 것 이상의 지혜가 있어야 했다.

  개인적으로는 이 ‘일인자’라는 것이 이 소설의 핵심을 드러내는 키워드라고 생각한다. ‘일인자’는 단순한 개인이 아니다. 오히려 ‘일인자’는 로마 공화정 후기에 이르러 집약된 로마의 정수 중의 정수로서, 그 시기의 모든 시대적 요청의 짐을 지고 있는 역사적 실존으로서의 존재이다. 걸어다니는 역사적 정신. 이것을 드러내고 로마라는 것을 통해 다시 현대의 우리를 돌아보게 하는 것이 콜린 매컬로의 위대한 업적이었고, 웅대한 구상이 흘러가는 길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런 문맥에서 또다시 로마는 곧 현대 우리들의 역사이다.

  이 소설은 문학작품으로서도 탁월하고, 당시의 시대상에 대한 엄격한 고증으로 역사적 가치도 뛰어나다. 하지만 이런 재미와 동시에 긴 서사의 과정을 통해 우리가 현재를 돌아보고 그 역사적 흐름을 읽을 수 있기를, 우리의 역사적 상황과 과제를 읽고 대처할 수 있기를 콜린 매컬로가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 시대의 역사적 실존으로서 책임감을 지고, 신중하게 행동하는 모든 이들은 ‘일인자’의 자격이 있다. 매컬로 가도(via McCulloughia)를 따라 의미심장한 진실을 향해 전진해보자. 열심히 읽으며 나아가자. 우리의 레기온은 <로마의 일인자>가 이끌 것이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심연으로부터 - 감히 그 이름을 말할 수 없는 사랑을 위해
오스카 와일드 지음, 박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스카 와일드의「심연으로부터」: 심연에서 건진 예술가의 초상

 

 

 

   「심연으로부터」는 아일랜드 출신의 문호, 오스카 와일드의 긴 편지글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길다는 것 말고도 독특한 특징이 있다. 우선 이 글은 오스카 와일드가 레딩 감옥에서 수감 중인 때에 쓴 글이라는 것이다. 사실, 이런 점을 고려해서 과거 1950년대 이래 우리나라에서 ‘옥중기(獄中記)’라는 제목으로 수차례 번역이 되기도 했다(물론 삭제판을 원본으로 해서). 그리고 이 편지의 수신인이 와일드의 동성의 연인이라는 것도 이 글의 특징이다. 하지만 이 편지글은 하루에 한 페이지만 쓰는 것이 허락되었고, 일단 쓴 편지는 소장에게 제출해야 했다. 그리고 와일드가 출소할 때 소장은 모아놓은 편지글을 와일드에게 돌려주었으므로 수신인에게 발송된 것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이 편지는 메시지의 전달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와일드의 내적 상태에 대한 고백으로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할지도 모른다.

 

   오스카 와일드가 수감된 것은 그가 동성애를 했다는 혐의를 받아서이다. 즉, 이 당시 영국에서 동성애는 범죄였다. 불과 120여년 정도 전인 당시만 해도 청교도적 윤리관과 편협한 가치관에 사로잡혀 동성애를 범죄로 처벌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당시 오스카 와일드는 시대를 풍미하던 천재로 널리 알려져 있었는데, 이 사건으로 그는 어두운 심연으로 떨어졌고 출소 후에도 사람들의 조롱과 비난 속에서 다시 작가로 재기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와일드가 이런 절망적이고 부조리한 상황에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영어(囹圄)의 나날을 살아갔는지, 이 글을 통하여 가장 가까이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이 글이 연인에 대한 편지인 만큼 연인에 대한 와일드의 마음이 주로 이 글에 명백히 드러나 있으리라고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뛰어난 예술가로서 와일드가 힘든 시기를 경험하며 예술에 대해 어떤 자세를 취했는지도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연인에게

 

   편지의 수신인은 앨프리드 더글러스라는 16살 연하의 시인이었다. 그는 와일드가 이 책에서 언급한 내용에 비추어보면 매우 자기중심적이고 배려심이 부족할 뿐 아니라, 변덕이 심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는 와일드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히 매혹적이기도 했던 것 같다. 편지의 서두는 더글러스에 대한 불평과 비난으로 가득하다.

 

이 편지 속에는 당신의 오만함에 깊은 상처를 낼지도 모르는 이야기가 자주 나올 거야.(p.44)

 

……절대 혼자 있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의 관심과 시간을 집요하게 요구하는 성격, 지적이고 일관된 집중력의 부족, 불행한 사고로 인해 지적인 문제에서 ‘옥스퍼드적인 기질’을 갖추지 못하게 된 사실. (p.48)

 

……당신은 내 예술에 절대적인 재앙으로 작용했지.(p.49)

 

   이외에도 와일드는 더글러스가가 심한 낭비벽을 가지고 있으며 그가 사치스럽게 지출한 것들을 자신이 언제나 지불해야만 했다고 말한다. 와일드는 이런 그에게 거부감을 느끼게 된 것 같기도 하다.

 

……당신의 강요는 점점 더 이성의 한계를 넘어서게 되었지. 당신의 더없이 비열한 동기, 천박하기 이를 데 없는 욕구, 지극히 저속한 열정은 당신에겐 다른 사람들의 삶이 언제나 따라야 하는 법칙이 되어버렸고, 필요한 경우에는 그 법칙에 따라 다른 사람들의 삶이 가차 없이 희생될 수도 있었지. (p.54)

 

 

   와일드에 의하면 자신에 대한 영장 청구가 받아들여진 시점에 더글러스와 상의를 하고 싶던 때에도 더글러스는 몬테카를로에 데려다달라고 졸랐다. 더글러스는 그곳에 가서 와일드는 제쳐두고 도박에 열중했고, 호텔 숙박비와 도박으로 잃은 돈은 고스란히 와일드가 지불해야만 했다. (p.57 참조) 더글러스가 와일드에게 무심하게 행동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는 와일드가 이 편지에서 언급하는 것으로만 본다면 거의 와일드와 함께 있었던 기간 내내 이런 식의 행동으로 와일드에게 상처를 준 것 같다. 다른 예로, 더글러스가 인플루엔자에 걸리자 와일드는 작품을 집필하던 것도 중단하고 성심껏 그를 간호했다. 간호중에 와일드가 인플루엔자에 전염되는데, 회복된 더글러스는 와일드를 간호하기는커녕 와일드의 돈으로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며 나날을 보낸다. 병상에 함께 있어달라고 부탁해도 거짓말로 일관할 뿐이었다. 와일드는 고통 속에서 그와 헤어질 결심을 하기에 이른다.(p.71~74 참조) 그러나 와일드는 그를 벗어나지 못한다. 더글러스의 큰형이 의문스러운 사고로 사망하여 슬픔에 빠진 더글러스에게 연민과 애정을 다시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사실, 오스카 와일드가 그와 헤어지려고 시도한 것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와일드가 말하는 것을 보자.

 

내(와일드) 잘못은 당신(더글러스)과 헤어지지 않은 게 아니라, 당신과 너무 자주 헤어졌다는 거야. 내 기억으로는, 난 석 달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당신과의 관계를 끝냈어. (p.58~59)

  

   이 문장이 블랙유머에 가깝게 여겨질 정도로 와일드의 마음은 심하게 더글러스에게 흔들렸던 것 같다. 혹자는 이해할 수 없는 변덕이라고 할지 모르나, 와일드가 극히 섬세한 감성을 지닌 예술가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연인 때문에 고통을 받으면서도 연인을 여전히 사랑하는 마음이 남아있는 것이다. 그것은 이 편지글 전체에 비추어보아도 명확하다. 와일드는 더글러스를 향해 수많은 비난과 질책을 하고 있지만, 이것은 더글러스가 법의 처벌을 받기를 바라거나, 증오심을 드러내거나, 출소 후에 어떤 식으로든 복수하겠다고 위협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는 더글러스에게 감정적으로 심정을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더글러스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길 바라는 태도, 마치 서로 다툰 연인 간에 있을법한 그런 심경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와일드는 직접 자신이 편지를 쓰는 이유를 말하고 있다.

 

내가 당신에게 아주 길게 편지를 쓰는 것은, 내가 수감되기 전 당신과 3년간 치명적인 우정을 나누는 동안 당신이 내게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제 만기까지 두 달도 채 남지 않은 내 수감 기간 동안 당신이 내게 어떻게 했는지, 그리고 출옥 후에는 나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지 알게 하기 위해서야. (p.219)

 

   그러나 이 편지의 목적이 달성되었는지는 알기 어렵다. 와일드가 출소하기까지 그는 와일드에게 편지 한통도 쓰지 않았다. 대신 와일드는 심연에서 자기 자신의 모습과 대면하게 되고 자신이 예술가로서의 혼을 여전히 가지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예술가 와일드

 

   「심연으로부터」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다른 것은 감옥이라는 일종의 지옥에서도 꺼지지 않은 예술가로서의 불빛이다. 평소 유미주의의 사도로 자처하고 아름다움에 대한 강한 신념을 보여주던 그로서 이런 태도는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정신을 갉는 고된 노동과 처벌이 일상인 감옥에서 이런 섬세한 정신은 오히려 더 고통을 안겨줄 것이니, 이런 처지를 고려하면 그의 모습은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그는 명백히 감옥에서 신체적, 정신적으로 크나큰 고통을 받았다. 그러나 이 고통은 그에게는 단순히 파괴적인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고통은 삶과 예술 모두에서 지고한 전형이 될 수 있지……고통에 비견할 수 있는 진실은 세상에 없어. 때로는 고통만이 유일한 진실인 것처럼 여겨질 때도 있지……삶의 비밀은 고통이기 때문이야. (p.153~154)

 

 

   그에게 고통은 예술에서의 진실로서 거의 유일한 진실이기도 하며, 삶의 비밀도 바로 고통으로 파악된다. 즉, 고통은 그의 예술론에서 거의 근본적인 자리에 있는 개념으로 자리매김 되며, 이런 그의 말에 따르면 현재 크나큰 고통을 겪고 있는 자신의 현모습은 완전한 예술가의 고뇌하는 영혼일 수 있다. 그런데 ‘예술가는 오직 표현을 통해서만 삶을 상상할 수 있’다.(p.170) 따라서 현재 창작을 할 수 없는 와일드는 예술가로서의 실존적 위기를 겪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새로운 ‘그리스도論’을 통하여 예술에 대한 생각을 피력한다.

 

 

   즉, 그리스도는 자신을 고통의 인간의 이미지로 구현했다. 자신을 통하여 예언이 실현되도록 함으로써 하나의 아이디어(이를테면 이사야의 예언)를 하나의 이미지로 변화시킨다. 그런데, 이 예언의 실현은 본질이 예술과 같은 것이다.(p.172 참조) 그리스도는 상상력에 의해서 로맨스의 중심인물이 되고(p.174 참조), 낭만적 운동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그는 연민을 가진 존재였으며, 사상이나 도덕으로 이루어진 시스템에 의해 인간의 삶이 희생되는 것을 거부했다. (p.180 참조) 상상력에 의해 일깨워지지 않은 이런 시스템은 속물주의적인데, ‘상상력은 단지 사랑의 발현’이기 때문이다.(p.181 참조) 그리스도는 상상력과 사랑으로 충만했고, 그의 삶은 한편의 시와 같다.

   이런 사유를 바탕으로 와일드는 유미주의적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받기를 바라게 된 것이라 생각한다. 실제 와일드는 출소 후 수도원에서 머물기를 희망하기도 하고, 죽기 전에 세례를 받는다. 이런 와일드의 모습은 단지 정신적 도움이 필요한 지친 남자의 모습으로만 치부할 것은 아니다. 와일드는 출소 후 거의 창작을 하지 못하고 사망하는데, 이것만으로 영혼이 예술가인, 너무나도 예술적 영혼을 지닌 그의 모습을 단정 짓기는 불합리한 면이 있다. 예술과 진실에 대한 그의 말을 들어보자.

 

예술에서의 진실이란 결국, 내가 앞서 말한 것처럼 “내면을 표현하는 외형, 인간의 모습을 한 영혼, 정신이 충만한 육체, 형식이 내용을 드러내는 삶”이 아닐까? (p.172)

 

   감옥이 와일드를 한없이 피폐하게 했지만, 이런 예술에서의 진실을 완전히 무력하게 만들어버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이 「심연으로부터」자체가 증명한다. 그토록 어떤 책도 읽지 못하고 종일 계속되는 중노동을 하면서도 아름다운 이 편지를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예술에서의 진실을 완전히 실현했다고는 말하지 못해도, 그는 이 진실을 평생 간직했고, 이 진실이 육화(肉化)된 사람으로 살았다. 「심연으로부터」에는 앙드레 지드가 쓴 글도 함께 실려 있는데, 여기에서 지드는 와일드가 위대한 작가가 아니라고 말한다.(p.248 참조) 그러나 이런 평가에 상관없이 와일드는 자신이 말한 예술가의 모습을 지키려 평생 노력했고, 예술가로 죽었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결어

 

   오스카 와일드에 대해서는 그가 살아있던 시기부터 수많은 악평과 의도적인 험담이 가하여졌고, 그의 스캔들은 자극적인 가십의 주제로 애용되기도 했다. 그의 예술가로서의 면모는 정당하게 평가되지 못하였고, 그것은 이 땅에 사는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훌륭한 번역으로 출간된 「심연으로부터」를 통해 이런 오해가 해소되고 와일드의 가치가 정당하게 평가되기를 바란다. 로마시대의 시인 테렌티우스는 말했다. ‘나는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적인 어떤 것도 나에게는 무관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와일드 역시 인간으로서 인간의 예술적 본질과 사랑을 추구하며 살았고, 이 점에서 그는 ‘철저한 인간’이었다. 그는 예술을 실현하는 삶을 살았고, 그의 삶은 한편의 시와도 같았다. 심연에 있어도 건져 올릴 수 있는 그런 시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삶을 바꾼 만남 - 스승 정약용과 제자 황상 문학동네 우리 시대의 명강의 1
정민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누군가와의 만남은 우리가 매일 겪는 일이다. 이 사실을 반영하듯이 그냥 만나고 쉽게 헤어지는 관계가 요즘 노래가사들 속에서 넘쳐난다. 그러나 쉬운 만남의 기회가 풍족할수록 만남의 의미는 더욱 빈곤해지는지도 모른다. 많은 현대인들은 타인이라는 존재를 만남에서 소외시키고, 자신 또한 만남으로부터 소외되는 상실을 겪게 되었다. 만남에서 남는 것은 의미가 아닌 이미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과거 어느 때보다 세상에는 이미지가 넘쳐나지만 의미는 시각의 즉물적 자극 속에서 잠시 명멸할 뿐이다. 과연 이 시대에 진정한 만남이란 가능한 것일까? 정민 교수의 책 <삶을 바꾼 만남>은 만남의 의미가 퇴색된 지금, 이 질문에 대한 새로운 답을 제시하고, ‘너와 나가 우리가 되는’ 만남의 가능성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2) 많은 만남이 아무런 의미도 없이 사라지는 허상이지만, 만남은 진정 우리를 바꾸고, 삶을 바꿀 수 있다. 정양용과 황상의 만남이 그러했다. 어린 소년 황상이 자신을 가르치게 된 대학자 정약용에게 묻는다.

 

   제게 세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는 너무 둔하고, 둘째는 앞뒤가 꼭 막혔으며, 셋째는 답답합니다. 저 같은 아이도 정말 공부할 수 있나요? (p.35)

 

그러자 정약용은 오히려 황상이 그런 점이 있기 때문에 공부하기에 더 적합하다고 말한다.

 

...공부는 꼭 너 같은 사람이 해야한다...구멍은 어떻게 뚫어야 할까? 부지런히 하면 된다. 막힌 것을 틔우는 것은? 부지런히 하면 된다. 연마하는 것은 어찌해야 하지? 부지런히 하면 된다. 어찌해야 부지런히 할 수 있겠니? 마음을 확고하게 다잡으면 된다. 그렇게 할 수 있겠지? 어기지 않고 할 수 있겠지? (p.35-36)

 

    이렇게 격려의 말을 들은 황상은 평생 공부에 매진할 수 있었다. 만남이 전인적인 교육의 기회가 되었고, 이로서 한 아이가 새로운 인생의 길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공부에 대한 황상의 열정은 대단한 것이 되었다. 학질을 앓을 때에도 공부를 멈추지 않았다. 정약용은 이런 그에게 <학질 끓는 노래>라는 시를 지어주며 격려한다. 이후 1803년 노전리에서 관아의 횡포에 못견뎌 한 남자가 자해를 하는 일이 일어나자 스승과 제자가 시를 지어 울분을 토했다. 이렇게 시를 지음으로 먼저 지어진 제자의 시를 스승이 간접적으로 평하기도 하고, 당시 사회에 대한 비판의 정신도 동시에 보여주는 것이다.

    황상을 가르치는 정약용은 다정하게 대하다가도, 필요하면 엄하게 혼내기도 하고, 황상이 뉘우치면 다시 어버이같이 대하며 공부를 격려했다. 다산이 보여주는 것은 권위와 과시가 아니라, 진정한 내면의 애정이 행동으로 우러나온 것이었기에 황상의 내면을 변화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3) 이 책의 부제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책이 다루는 주요한 만남은 정약용과 황상의 만남이다. 그러나 정약용의 만남은 황상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황상 외에도 이청과 황경, 황지초와 김재정 등의 제자를 가르쳤고, 외로운 유배생활에 지적인 교류를 나누던 혜장이란 승려가 있었다.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정약용의 두 아들, 학연과 학유 형제도 찾아와 오랜만에 인사를 올리고 아버지 다산과 함께 공부를 하고 돌아갔다. 정약용과 이들의 만남에 공통적인 것은 바로 ‘공부’였다. 경전공부가 아니면 한시를 지었다. 작은 만남이나 소소한 일상의 일을 시로 지어 타인과 나누었다. 다산의 시를 받은 제자들도 답시를 쓰거나 차운한 시 등을 숙제하듯 적어서 보냈다. 스승 다산은 좋은 시를 받으면 그 문재(文才)를 칭찬하고 흐뭇해하였고, 나무랄 점이나 모자란 점이 있으면 역시 적절히 가르쳤다.

     

    자신의 두 아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농사를 짓느라 공부를 소흘히 한 아들을 엄히 가르치고, 학문을 게을리 하지 말라는 분부를 내렸다. (「答二兒」에서는 ‘父子而師弟, 不亦 樂乎. 즉, ’부자간에 사제가 되는 것이 또한 즐겁지 않겠느냐?‘고 전한다.) 아들에게 친히 「주역」과 「예기」를 교육시키고, 촌수와 상을 당한 경우의 예법을 상세히 밝혔다. (「승암예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초서를 통한 독서법을 아들에게 편지로 자세히 쓴 것은 차라리 강의록에 가깝다. 이 모든 일들에서 학자이자 스승으로서 다산의 면모가 드러난다.

    다산의 이런 모습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아마도 다산이 혜장과 아들 학연, 그리고 제자 황상이 함께 돌림노래를 짓는 장면일 것이다. (p.198~204) 옹기 그릇 안에 같은 운목(韻目)에 속한 한자를 적어 넣고 네 사람이 한자씩 돌아가며 뽑은 한자를 운자로 삼아 두 구절을 짓는 것이다. 그런데 이 구절들은 모두 연결하여 하나의 완성된 시가 되어야 한다. 돌림노래 중에 황상이 지은 마지막 부분은 달관의 경지가 엿보인다. 어쩌면 다산의 속마음을 읽은 것일까.

 

   이만하면 쾌락을 이루었거니

   벼슬아치 부러울 것 하나 없지요.

 

   이 연구시(聯句詩)짓기는 시를 짓는 예술이자 창작이라는 작업이 놀이와 훌륭하게 결합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이 대목은 결코 정약용은 고루한 유학자가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정약용이 공부를 그렇게 강조한 것에서 따분하고 완고한 학자의 모습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당시 교육제도와 사회상을 염두에 두고, 제자들과 아들들이 인간적인 삶을 살기위해 반드시 필요한 교양과 학문을 전수하려 했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심지어 그는 당시의 등용문인 과거시험을 대비해서 제자들에게 시를 짓는 연습도 시켰다. 결코 허황된 명분을 위한 공부를 강조한 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다산이 주변의 여러 사람들을 만난 것은 결코 금전적 이득이나 명성을 원해서가 아니었고, 귀양 온 사람으로서 어떤 세력을 키우고자함도 아니었다. 학자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조용히, 따뜻하게 만남을 통하여 실천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기에 이 만남은 다산 자신의 마음이 진실하게 밖으로 드러나는 기회였다.

 

   (4) 우리가 한가지 더 생각할 수 있는 만남은 귀양온 사람으로서의 자기자신을 생각하는 다산의 내면에서 찾을 수 있다. 즉, 다산이라는 인간은 자신의 내면의 자아를 어떻게 생각하고 반성하였던가, 자기 자신과는 어떻게 만났던 것인가. 그는 시를 많이 지어서 자신의 심정을 토로했다. 멀리 있는 아내를 그리워하며 탄식하기도 하고(‘蚜生’이라는 시를 참조하라), 오는 근심을 시로 맞이하고(‘憂來’), 시름을 시로 풀어서 보내기도 했다.(‘遺憂’) 너무도 힘들었던 것인가. ‘세가지 소리(三詞聲)’에서는 세 수의 구절이 모두 다음의 질문으로 시작된다.

 

    어떤 때 맘 가누기 어렵던가? (何處難爲情)

 

    한편으로 그는 여전히 여러 가지 계획과 학문적 열정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상적인 삶을 위해 끝까지 노력했다. 다산초당을 자신의 이상에 맞게 꾸민 것도 그 한 모습이다. 그는 자신 때문에 폐족이 되고 힘겹게 살아가는 가족에게 미안했던지, 길러야 할 야채와 그 취급법을 상세하게도 편지에 적어 보냈다. 귀양온지 두 번째 새해에 그는 봉놋방 서당에 <사의재(四宜齋)>라고 써 붙였다. 이는 의로움으로 통제한다는 말이며, 뜻과 학업이 무너진 것을 반성한다는 뜻이다.(p.53) 그가 죄를 지어서 강진에 유배된 것이 아니라 벽파가 일으킨 신유사옥으로 그렇게 된 것이니,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된 한이 클 것이었다. 그러나 다산은 포기하지 않았고, 유배시절부터 해배가 된 이후 생을 다하기까지 학문을 연구하여 <일표이서(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등의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어쩌면 그가 세상을 떠나기 불과 3일 전에 지은 시에서 그가 마침내 자기자신에게 부끄러움을 남기지 않았음을 엿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살아 이별 죽어 이별 늙음만 재촉하고

   짧은 근심 긴 기쁨에 임금 은혜 감격하네.

   이 밤에 목란사는 가락이 더욱 좋고

   그 옛날의「하피첩」엔 먹 자국이 남았구나.

   갈라졌다 되합쳐짐 내 형상 그대로라

   합환 술잔 남겨두어 자손에게 주리라.

                                                                        (<회근시> 중에서)

 

「하피첩」은 아내가 시집올 때 입은 치마로 만든 공책에 아들에게 보내는 글을 적은 것이다. 마지막 구절에서 다산이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제 다 이루었다. 다음 세상은 자손에게, 그리고 제자들에게 넘겨주어도 되겠다’라고.

 

    (5) 유배지의 다산과 여러 인물들간의 만남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를 시사한다. 갑자기 곤경에 처하고 정적에게 밀려난 지식인이 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위기의 시대에 지성인의 역할은 무엇인지, 혹은 진정한 스승이란 무엇이며 어버이란 무엇인지, 또는 한 인간으로서 어떤 모습을 지녀야 할지에 대해서 정약용은 그의 삶 자체로서 메시지를 전한다. 이 모든 삶의 과정은 만남, 너와 나의 만남, 그리고 우리 자신과의 만남으로 이어지는 긴 조우의 여정이었다고. 이것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세가지 문제를 말하고 답을 얻은 어린 황상처럼 기뻐할 수 있으리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침부터 하늘은 흐렸고 날은 타는 듯이 더웠다. 소나기라도 내리면 시원하련만, 하루 종일 비는 내리지 않다가 저녁이 되어서야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저녁까지 앉아만 있으니 온몸이 찌뿌듯하다. 이제 퇴근하고 집에 가서 샤워를 한 뒤 푹 자면 딱 맞을 것이다. 오늘도 그저 그런 형사의 하루가 될 것 같았다. 그러나 늦게 부두 관리자에게서 걸려온 한 통의 전화는 이 날을 내 기억에서 잊을 수 없는 날로 만들었다.

 

    관리자 말로는 부두 냉동 창고에서 사망한 사람을 발견했다고 한다. 나는 이경사와 함께 즉시 현장에 가서 시신의 신원을 확인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일러야 다음 날 오후까지 한나절은 족히 걸릴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쉽게 사망자를 알아낼 수 있었다. 그의 품안에서 신분증이 꽂힌 지갑을 발견했던 것이다. 이형우. 작은 사업체를 운영하다 큰 빚을 지고 종적을 감추었는데, 사기혐의로 수배가 내려진 상태였다. 그와 함께 소지품이 든 가방도 발견되었는데, 가방 안에는 다 닳은 연필과 노트 하나가 있었다. 노트에는 이 냉동 창고에 들어와서 그가 사망하기 직전까지 약 일주일 동안의 그의 심경이 적혀 있었다. 나는 이 노트가 그의 상태에 대한 매우 흥미로운 기록이라고 생각한다. 노트는 사실 아주 길고 난삽해서 여기에 전문을 다 옮길 수가 없다. 여기에 내 개인적으로 흥미롭다고 생각하는 극히 일부분만을 옮겨보기로 하겠다.

 

#1. 내가 이곳에 들어올 계획은 애초에 없었다. 단지 채권자 정만수가 고용한 해결사가 나를 잡으러 왔기 때문에 주위에 도망갈 수 있는 곳으로 숨어야만 했고, 뒤늦게 알고 보니 내가 숨은 곳이 냉동 창고였던 것이다. 문은 해결사가 밖에서 잠그고 간 것 같다. 그래도 아직 모든 것을 포기할 때는 아니다. 나는 약간의 물과 손전등, 그리고 작은 칼 하나가 있다. 점퍼도 입고 있으니 당분간 버틸 수 있다. 밖의 동향을 주시하며 도움을 구해보자.

 

#2. 차가운 공기가 나를 사방에서 둘러싸고 있다. 몸이 조금씩 굳어가는 느낌이 든다. 몸이 굳어버리면 안되다. 내가 일어나지 못하면 잠들거나 쉽게 정신을 잃을 것이고, 그러면 모든 것이 끝이다. 수진아 그리고 내 딸 민정아, 남편으로서, 아빠로서 미안하다. 내가 살아 돌아가서 다시 너희를 볼 수 있으리라 굳게 믿는다. 너희를 생각하며 힘을 내겠다.

 

#3. 손전등으로 가방 안을 살피니 빵 하나와 삶은 달걀 두 개, 과자 한 봉지가 있다.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최대한 아껴서 먹어야한다. 오늘은 밖에 누가 있으면 도와달라고 하루 종일 소리를 지르고 차가운 창고 벽을 두들겼다. 그러나 어떤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확실히 이쪽은 인적이 뜸한 것 같다. 그래도 조만간 지나가는 사람이 분명 있을 것이다. 희망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오늘 힘을 많이 썼더니 졸음이 쏟아진다. 잠들면 끝이다! 다리를 찔러가면서라도 깨어있어야 한다.

 

#4.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이 안에 있으니 시간을 알 수가 없다. 밖과 완전히 단절되어 있는 이곳이 혹시 지옥은 아닐까? 차가운 얼음의 지옥 혹은 영원히 혼자 버려진 감옥에 살게 되는 고독의 지옥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최대한 아껴서 먹었는데도 벌써 빵 하나를 다 먹었다. 아마도 내가 들어온 지 5일은 되지 않았을까? 혹시 하루밖에 안 된 것은 아닐까? 잠을 안 자려고 버티다보니 모든 것이 뿌옇게 보인다. 처음엔 계속 손전등을 켰지만 지금은 노트를 기록할 때만 키고 바로 불을 끈다. 건전지를 아끼려고 손전등을 끄고 있으면 내 앞의 어둠은 뿌옇게 변했다가 한 덩어리가 되어 그 찬 기운으로 나를 사정없이 내려친다. 그래, 나는 조금씩 지쳐가고 있다. 내가 살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다. 어차피 난 지금도 지옥 안에 있는데, 죽는다고 뭐가 달라질까?

 

#5. 발에 감각이 없다. 동상에 걸린 것 같다. 큰일이다. 걸어 다닐 수가 없으면 도움도 청할 수 없다. 온 몸이 조금씩 얼어가는 것이 느껴진다. 몸을 움직여서 몸에 열이 나게 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움직일 힘이 없다.

 

#6. 좀 전에 사람 소리를 들었다. 남자의 웃음소리가 분명하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기어가서 소리를 지르며 언 주먹으로 창고 문을 쳤다. 손이 터지고 부서지는 것 같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잠시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무언가가 창고 옆을 치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그래. 이것이 나를 구하러 오겠다는 뜻이리라. 나는 흥분되는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제 나갈 수 있겠구나. 이 안에서 나갈 수만 있다면 나는 정말 행복한 사람으로 다시 삶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아, 사랑하는 내 가족! 그들을 다시 볼 수만 있다면, 작은 고난은 얼마나 하찮은 것이 될 것인가!

   나는 사람이 와서 문을 열어줄 것을 숨죽여 기다렸다. 30분? 한 시간? 그 정도가 흐른 것 같은데, 아직 기척이 없다. 그들간에 서류작업이나 담당자 보고가 필요한지도 모른다. 그래서 늦어지는 것이리라. 적어도 4시간이 더 지나갔다. 입으로 1부터 15000까지 세었다. 나는 아직 그대로 이곳에 있다. 혹시 내가 아까 잘못 들은 것은 아닐까? 사람이 있지도 않았는데, 환청을 들은 것일까? 이 안에 있다 보니 감각이 이상해진 것 같다. 나는 이렇게 얼어서 죽는 것인가?

 

#7. 나는 이제 모든 희망을 버리기로 했다. 이미 온 몸에 동상이 퍼져서 더 이상 사는 것도 불가능하다. 먹을 것도 마실 물도 없다. 나에겐 약간의 손전등 불빛이 있을 뿐이다. 삶의 마지막 순간, 빛이 있는 것만도 감사할 일이다. 나에게 고통을 준 모든 이를 용서한다. 나도 지은 모든 죄를 참회한다. 또다시 삶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아아! 정말 열심히 살 텐데……삶이란 너무나도 덧없고, 욕망은 허상과도 같다.

 

    이형우의 기록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삶이란 너무나도 덧없고, 욕망은 허상과도 같다.’는 깨달음이 담긴 문장으로 끝났다.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다. 부검의가 사인은 심장마비라고 했지만 그의 기록을 보면 그는 분명 얼어 죽은 것이다. 그가 갇힌 냉동 창고는 근래 일주일 동안 수리를 위해 가동이 정지된 상태였는데 말이다.

 

    그를 죽인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냉동 창고인가? 그 자신의 생각인가? 아니면 탐욕과 부정에 물든 이 세상 모두인가? 나는 대답을 담뱃불을 붙이고 다시 비오는 거리로 나가는 것으로 대신하려 한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속편한쭈니씨 2014-04-25 1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알려진 소재를 시간에 따라 변하는 심리상태를 기록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엮었네요. 부럽습니다, 이런 능력^^

Bomisl 2014-04-25 19:5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속편한 쭈니님^^ 많이 부족한 글을 읽어주시고...
무서운 이야기로는 좀 약한 내용이 아닌가 생각도 드네요.

2014-04-25 20: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4-26 05:2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