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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불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3
피에르 드리외라로셸 지음, 이재룡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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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은 픽션, 즉 근본적으로 허구를 다루는 것이다. 그러나 그 허구는 현실과 전혀 유리된 것이 아니라 현실과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므로, 소설 속에서 허구로 만들어진 사건은 현실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견주어서 그 의미가 평가되기도 한다. 그런데 소설은 동시에 그 자체가 예술의 한 형식이라는 점에서 독자적인 예술적 가치를 가지며, 소설적 허구는 현실에 존재하는 독자적인 존재자(Seindes)다. 예컨대, 살인이나 전쟁은 분명 현실에서는 없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살인자를 다루는 소설이나 전쟁의 잔인한 모습을 그리고 있는 소설은 인간본성의 한 측면을 탐구하는 것으로 그 작품성을 인정할 수 있다.

   그런데, 소설은 독자적인 존재이면서 동시에 현실 안에 존재하는 존재자이므로, 소설 자체의 가치와 사회적인 가치가 이따금 충돌하며 갈등을 일으키는 것이다. 명백히 사악한 범죄행위를 찬양한다거나 극단적인 폭력과 도착적인 행위를 그리는 것은 때때로 사회적 이슈가 되기도 한다.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킬 정도가 아니더라도 종종 소설은 민감할 수 있는 소재를 다루고, 일반적인 가치와는 다른 판단과 행동을 하는 인물을 그린다. 이러한 소재들 중에 ‘자살’을 대표적인 것으로 들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자살이라는 논란의 소지가 있는 소재를 다룬 소설을 볼 때에는 작가가 가진 강한 문제의식을 이해해야 하고, 그로부터 작품을 평가해야 한다.

 

   수없이 많은 소설 속에서 수많은 인물들이 자살을 시도하고, 사망에 이른다. 그러나 그 자살의 모습은 가지각색이다. 어쩔 수 없이 강제로 자살을 하게 되는 사람부터, 자살을 찬미하는 이, 혹은 이를 권장하고 최고의 가치로 보는 이에 이르기까지 양상은 참으로 다양하다. 또한 소설에서는 문맥 속에서 자살의 의미를 파악해야지, 특정한 부분만 떼어볼 수는 없으므로 간단히 일률적으로 말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피에르 드리외라로셸의 「도깨비불」도 간단히 말하자면, 알랭이라는 청년이 자살을 감행하기까지 그의 생애 마지막 나날들을 그리고 있는 소설이다. 즉, 젊은 사람이 자살을 하게 되었으니 대단히 극적인 사건이고 그런 결정을 내리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가 궁금해진다. 나아가 이런 자살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를 이해하는 것이 소설을 이해하는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그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설 전체를 보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소설은 알랭과 리디아라는 여성이 정사를 나누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리디아는 그에게 결혼하자고 말한다. 그들은 사랑하는 사이로 보인다. 그러나 사실 리디아는 6개월 전 그와 결혼약속을 한뒤 사흘후에 생면부지의 남자와 결혼하고 곧 헤어져버렸다. 리디아는 알랭을 파리에 남기고 뉴욕으로 떠나는 길에도 결혼하자고 말한다. 그렇지만 그 말들은 ‘체념 어린 냉정함과 가장된 평온’이다. 서로 키스하고 일생의 중대사인 결혼에 대해 말하나 그것은 의미없는 말이고 삶을 더 무겁게 만들 뿐이다. 그녀의 노골적 노출은 관능적이지 않고, ‘그에게 아무런 감흥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17쪽) 알랭은 마약중독자인데, 리디아를 비롯한 친구들에게서 받거나 빌린 돈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그는 돈을 아끼지 않고 금새 다 써버리곤 한다. 현실은 한없이 거추장스럽다. 알랭 자신과 그 주위의 인물들을 설명하는 말들은 악덕의 총화처럼 보인다. 노골적 추파, 녹색 치아, 뱀 가죽처럼 늘어진 긴 젖가슴, 부러움과 경악, 증오, 요란한 퇴물로 변한 가치들. 이런 모습이 일반화된 알랭의 세계는 도덕이나 건실한 삶의 세계와 너무도 동떨어진 환멸의 세계다.

 

   알랭은 마약을 다시 시작하고 주위의 아는 친구들을 찾아다니며 술과 마약을 하며, 식어버린 열정들을 추억한다. 알랭과 주위의 ‘마약중독자들은 세상에 영혼을 불어넣고 세상을 상징적 의미로 승화할 힘이 더 이상 없기 때문에 세상 속에 있는 허무의 씨앗에 도달할 때까지 세상을 축소하고 닳아빠지게 하고 갉아먹’는다. (82쪽) 이런 상황은 가치판단능력을 마비시키고 자기파괴적인 길로 그들을 몰아넣는다. 일반적인 도덕적 가치가 주변환경에 전제되고 당사자들이 이 가치를 의식하고 있으며, 거기에 대해 일탈했다거나 죄의식을 느끼는 상황이 아니다. 이들은 이런 기준점에 대한 인식 자체가 없다. 일탈이라는 단어 자체가 의미 없어지고 단지 욕망과 퇴폐적인 생활을 합리화하거나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수준의 언어구사가 있을 뿐이다. 드리외라로셸은 이런 상황을 환각제의 연기가 끼어 몽환적으로 보이는 나른한 분위기 속에서 서술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무언가 지향하는 것이 있다면 강한 남성다움, 억세고 투박하며 거친 것이다. 즉, ‘매독으로 납빛이 된 혈색에 몇 차례의 사고로 부러진 이빨. 살인과 도둑질을 한 남자’인 브랑시옹을 사람들은 대단한 존경심을 갖고 바라보았다.(131쪽) 알랭도 자신을 무시하고 거들떠보지도 않는 브랑시옹의 환심을 사기 위해 수차례 시도한다. 이것이 진정한 아름다움의 기준이 되고 이러한 것을 추구하는 미학이 분위기를 지배한다. 이러한 남성미를 추구하는 것에는 작가 개인의 이력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드리외라로셸은 어린 시절부터 영웅숭배 사상을 주입받았고, 주위학생에게 열등감을 느끼면서 남성적 힘을 추구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사회주의 미학이나 파시즘이 찬양하는 미적 가치를 구현하는 활동에 참여하기도 하였고, 이후 실제로 나치에 복무하고 자신을 파시스트라 선언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그리하여 건장한 남성들로 이루어진 군대의 사열, 발달된 근육과 강하고 거친 남성미를 보이는 병사들, 비장하게 싸우다 영예롭게 죽는 전쟁 같은 것을 아름답게 생각하는 파시즘 미학을 그는 추구하게 된다. 알랭이 동경하는 것도 바로 작가 자신이 가진 것과 같은 (파시즘 미학에서 추구하는) 가치들과 부합한다.

 

   이러한 맥락을 볼 때 알랭이 이제 추구하는 것은 브랑시옹 같은 사람이 되는 것, 혹은 남성적이고 투박한 것을 지향하는 것이리라.  그런데‘브랑시옹, 포샤르. 이들이 진짜 남자다. 그런 남자들의 세계는 내게 닫혀 있다.’(150쪽) 따라서 그는 이제 자살을 하게 되는데, ‘자살, 그것은 행동, 다른 행동을 실천하지 못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행동’(151쪽)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자살은 알랭이 자신의 상황을 절망하고 마지막으로 선택하는 극단적인 선택이라기 보다는 좀 더 적극적인 의미를 가진 것으로 묘사된다. 자살을 선택하기까지 과정이 번민에 가득찬 것으로 나타나지 않고, 그는 자살을 결심하고 바에서 마약을 맞고나서, 또 다른 바에 가서 친구와 술을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까지 한다. 그리고 자고 일어난 아침에는 ‘구원이라는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확실하게 죽음에 영역에 들어서 있었다.’(161쪽) 즉 자살은 일종의 구원같은 것이고, 마지막으로 권총을 잡는 순간에도 극도의 흥분과 고통, 회한이 있지 않다. 오히려 다소 무감각하고, 약간이나마 권태로운 일처럼 느껴지기까지 하는 것이다. 죽음을 단순히 괴로움에 가득찬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로 여기는 것이라거나, 괴로움을 이길 수 없어서 자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살은 일종의 열정의 표현인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이 소설에서 자살하는 알랭의 실제 모델이 되었던 자크 리고라는 사람의 사망소식을 듣고 피에르 드리외라로셸이 그를 추모하며 쓴 글인 ‘잘 가라, 공자그’라는 글에서도 짐작해 볼 수 있다. 드리외라로셸은 말한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단 하나밖에 없는데 그것은 열정이며, 그것은 오로지 타인이나 자기 자신을 살해함으로써만 표현될 수 있다.’(171쪽) 알랭의 죽음을 통해서 이런 생각이 구현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즉, 자살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자살이라는 것, (문맥을 바꾸면) 죽을 것을 알면서도 전투에서 용맹히 싸우다 죽는 군인과 같은 남성적이고 열정적인 것을 아름답게 보는 파시즘적인 미학의 입장이 개입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미학은 주의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단순히 도덕적인가 아닌가의 문제나, 종교적인 자살관의 문제를 언급하려는 것은 아니다. 드리외라로셸의 생각에는 죽음에 대한 열정이 삶을 잠식하고, 삶은 자살을 위한 수단처럼 여겨지고 있다. 삶을 진지하게 고려한 결과 어떤 존엄함을 지키기 위해서 자살을 선택한다는 관념 같은 것이 들어설 자리가 없는 것이다.

 

   결국 알랭이 죽는 것처럼 작가 자신도 자살로서 생을 마치게 된다. 이러한 결과가 그의 신념을 실현하고 자신을 작품과 일치시키는 ‘일종의 작품의 완성’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작가는 나치에 협조한 죄목으로 체포되게 되자 자살을 선택하였고, 열정의 표현을 위해 죽은 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완성된 작품은 반짝 빛나는 것이 아니라 퇴색된 빛만을 보이고 있으며, 암울하고 허무한 청춘의 모습으로 쓸쓸히 남았을 따름이다. 도깨비불이라고 번역된 원제 ‘Le feu follet'에는 ‘덧없이 사라지는 것’이라는 뜻도 있거니와 알랭과 자크 리고, 그리고 작가 자신의 최후는 결국, 덧없이 사라진 청춘, 잠시 동안 약하게 타오르다가 꺼진 불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 불꽃은 우리 자신으로 하여금 삶에 대해 잠시 생각에 잠기게 하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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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卍).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7
다니자키 준이치로 지음, 김춘미.이호철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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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가 ‘예술은 무엇을 추구하는가?’ 혹은 좀 좁게는 예술의 한 부분으로서 ‘문학은 무엇을 추구하는가?’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무엇이라 대답할 것인가. 아마도 우리는 보통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문학(혹은 예술)은 아름다움(美)을 추구한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럼 그 ‘아름다움’이란 것은 무엇일까? 물론 아름다움이란 것은 한마디로 정의 내려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특정한 종류의 것만을 아름답다고 할 수도 없다. 미의 기준은 상대적인 것이고, 어떤 부류만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도록 강제하는 것은 일종의 폭력일 수도 있는 것이므로. 그러나 우리는 대체로 기존의 미적 기준에 맞추어 아름다움을 정의하려는 경향이 있으며, 따라서 우리는 이따금 다른 종류의 미적 감각에 대하여 거부감을 느끼기도 하고, 혹은 색다른 일탈의 매력에 사로잡히기도 하는 것이다.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작품에 접할 때 느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거부감과 동시에 우리를 사로잡는 일탈과도 같은 관능의 매력일 것이다.「만·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의 저자인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평생동안 자신만의 독특한 미적인 세계를 탐구하였는데, 그가 그토록 집착한 주제는 성(性), 특히 여성과 관련된 성적인 아름다움의 세계였다. 그의 작품으로 문학동네에서 출간된 「만·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는 이런 다니자키의 면면과 그의 미적 세계의 진수를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여기서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진수라고 한 관능과 여성의 아름다움, 그리고 이를 통한 예술적 완성의 추구는 그의 작품의 한 소재라거나 작품 중에서 부분적으로 등장하는 양념으로 잘 기능하는 데 머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 자체가 최고의 목적이자 지상(至上)의 가치로 여겨지는 데에 이르고, 이 책의 역자가 밝힌 것과 같이 다니자키는 그의 삶 자체로서도 이러한 여성에 대한 숭배와 관능에 대한 찬양을 실천했다. 이것은 저자 자신이 밝힌 말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내 삶의 보람은 예술을 뜨겁게 사랑하는 것이다……나는 어디까지나 나를, 나만을 소중히 여기는 에고이스트다.」고 그는 말하며, 이 에고이즘이 파괴되면 예술도 파괴될 것을 염려하였다. 그는 심지어 예술에 대한 열정이 자신의 아이를 사링하는 마음 때문에 약해질까봐 아이를 낙태시키기까지 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니자키가 추구한 미학과 「만·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의 세계에 묘사된 것이 극도로 아름다우면서도 사회적인 가치나 통념과 어긋나는 사뭇 위험하기조차 한 탐미의 세계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으리라. 그리하여 우리는 그의 작품을 읽을 때 마치 위험한 게임에 참가하는 듯한 긴장과 흥분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일탈의 기분은 「만·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에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이 책에 수록된 첫 번째 작품인 ‘卍’은 제목만 보아선 종교적인 인상을 받을 수도 있지만, 사실 이 제목은 한자 ‘卍’이 가진 시각적 모양이 네 사람 간에 얽힌 관계를 상징적으로 구상화 시켜주고 있다는 이유로 붙여진 것이 분명하다. 이 ‘卍’에 나오는 중심인물은 모두 네 명이다. 소노코와 그녀의 남편, 그리고 미혼의 미쓰코와 그녀와 일종의 애인 사이에 있는 남자 와타누키. 소노코와 미쓰코는 여자기예학교에서 미술을 공부하다가 서로 알게 되는데, 둘 사이는 점차 동성간의 사랑으로 발전한다. 그 사랑의 표현은 거칠고 위험하기까지한데, 예를 들면 소노코는 미쓰코가 벌거벗은 채 침대 시트를 두르고 있는 것을 보고 아름답다며 눈물을 흘리다가 이내 충동적으로 시트를 찢고 ‘차라리 죽여버리고 싶어.’라고 말하며, 미쓰코도 ‘죽여줘’하며 눈물을 흘린다.(32-36 페이지) 두 사람은 서로의 관계가 소노코의 남편에 들키지 않게 조심하는데, 어느 날 미쓰코의 애인이라는 와타누키라는 남자가 등장하여 소노코를 괴롭히고 소노코의 남편을 협박하기도 한다. 그러다 소노코와 미쓰코는 위장으로 자살시도를 하고 둘 다 다행히 약을 먹은 후 깨어난다. 그러나 소노코의 남편과 미쓰코는 이 사건을 계기로 서로 정을 통하고, 이 세 사람은 결국 모두 약을 먹고 자살시도를 하는데 소노코만은 이후 깨어나서 살아남는다.

   이 ‘卍’은 이런 전 과정을 소노코가 어떤 작가나 의사 정도로 추정되는 ‘선생님’에게 말로 들려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작품에서 청자인 ‘선생님’은 끝까지 등장하지 않지만, 이런 작품의 형식상의 특성은 소노코가 자신의 극히 사적인 이야기까지 고백하는 노출증적인 증상을 드러내고, 청자의 일종의 관음증적인 욕망을 만족시키고 있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독자는 이중의 일탈적인 상황을 경험하게 되고 다니자키가 보여주는 관능과 치명적인 아름다움의 효과는 배가된다.

 

   이 책에 수록된 두 번째 소설 ‘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는 ‘만’보다는 성적인 것 자체가 주제로서 덜 부각되고, 격조있고 서정적인 문체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는 20대 초의 젊은 여자였으나 여든 살 남짓한 남편을 두고 있다. 그녀의 남편은 반강제로 그녀를 높은 대신인 시헤이에게 바치고 그녀를 그리워하며 살아간다. 시게모토는 이후 40여년간 어머니와 단절되었다가 극적으로 어머니와 해후하며 뜨거운 눈물을 쏟는다. 이 작품에서는 다니자키의 원숙한 경지를 느낄 수 있다. 특히, 늙은 남편이 떠나간 아내를 잊기 위해 시신 옆에서 부정관(不淨觀)을 행하는 장면이라든지, 마지막 부분에 시게모토가 어머니가 계시는 곳에 이르렀을 때, 자연에 대한 묘사는 탐미적인 묘사의 극치를 보여준다.

 

   작품 전체에서 나타나는 에로티즘은 에로티즘 자체의 성질 또한 보여준다. 에로티즘에 대해 천착한 프랑스 학자 죠르쥬 바따이유는 그의 저서 「에로티즘」에서 ‘……두 연인의 결합은 열정의 결과라고는 하지만, 그 열정은 죽음을 부르고, 살해욕망, 자살에의 충동을 부를 수도 있다는 것이다.’(에로티즘, 죠르쥬 바따이유, 조한경 옮김, 민음사, 1996, 21페이지)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다니자키가 소설 ‘卍’에서 그대로 보여주는 바이다. 또한 ‘에로티즘의 본질은 이러한 상호성에 있는 듯하다……결혼이 에로티즘에서 멀어지면, 거기에는 물질적 가치만이 두드러진다.’는 구절(같은 책, 239페이지)은 시게모토 소장의 늙은 아버지가 젊은 아내를 시헤이에게 선물로 바친 것의 사정과도 잘 대응하고 있는 것이다.

 

   ‘예술이 무엇인가? 혹은 문학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여자 없이는 내 시도 예술도 없다’고 말했고, 여성에 대한 이러한 신념만을 평생 고집해오고 다른 시도는 철저하리만치 하지 않았다. 그를 두고 사회적 문제 의식이 없다든가, 외설적인 것에 집착한다고 비난할 수도 있고, 이런 비난은 상당히 타당한 것이리라. 그러나,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자신이 추구한 아름다움이 가장 고결하다든가 도덕적이라는 식으로 포장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말하는 것의 본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으며, 단지 자신의 신념을 평생 추구해 간 것이다. 그로써 그의 작품은 독자적인 탐미의 세계를 창조하였고, 여성의 성에 대한 매우 깊은 시각을 열어주었다. 이러한 사실 만으로도 그의 작품은 계속 읽히고 음미될 자격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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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라이프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3
앨리스 먼로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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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마도 언젠가 당신은 이 날이 당신 인생에서 가장 큰 행운의 날이었다고 생각하게 될 걸요.” (『디어 라이프』중「아문센」p.85)

 

   앨리스 먼로의 소설집 『디어 라이프』를 만난 순간을 이렇게 표현해도 지나치지는 않을 것이다. 이 말이 과장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도 있으리라. 이 책을 읽어보고 나서 드는 첫 번째 느낌이 아마도 쉽고 이해하기 쉬운 문장에, 소박하고도 단순한 사건들이 여운을 남기는 정도라고 여겨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떤 이는 이 작품이 노벨상 수상작가의 주요 작품이라는 위상에 걸맞지 않는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평가를 미리 내리기 전에 노벨상이라는 일종의 ‘구속’을 벗어나 다시 곰곰이 생각하고 이 소설을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는 14편 각각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아 책을 읽는 이의 재미를 반감시키기는 것을 지양하고, 되도록 전체적인 조망을 하면서 책을 읽는 이의 이해를 돕고자 한다.

 

   『디어 라이프』 : 역사와 일상

 

   『디어 라이프』에 실린 단편은 모두 14편으로, 이중 10편은 소설이고, 마지막 4편은 작가의 말에 따르면 ‘소설이라고는 할 수 없’(p.331)는 자전적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이 14편의 모든 작품들이 대부분 비슷한 캐나다의 시골이나 중소 도시에서의 삶을 그리고 있고, 비슷한 분위기가 느껴지며, 대부분 인간관계의 미시적이며 섬세한 감정을 포착하고 있다는 점에 동의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모두가 단편이기 때문에 역사적 흐름을 관통하는 대서사시 같은 장대하고 웅장한 작품에 비할 바가 못 된다고.

 

   생각해 보자. 우리 중에 누구든 우여곡절을 겪지 않은 사람이 없고, 누구의 삶이든 나름대로 사연이 없는 삶이 없을 것이지만, 그것이 반드시 격동적인 역사의 흐름 속에서만 의미를 가진다거나 서사시적으로 표현되어야만 진실이 드러난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대부분 그동안 거시적으로 포착되었던 역사상의 대사건들과 직접적으로 관계있는 사람들도 아니고, 역사상 유명한 인물도 아닐 것이다. 사실, 역사상의 대사건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정하는 것도 다분히 주관적일 수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영웅과 지배자로 가득 찬 위로부터의 역사가 아니었나? 민중과 일상의 역사도 마찬가지로 동등한 발언권이 있는 것이다. 현대의 아날학파가 제기한 역사학상의 문제도 근본적으로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일상과 대다수 사람들의 삶이 훌륭한 예술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하면 그것이 오히려 더 이상할 것이다. 예술 내지 좁게는 소설에서 그리는 진실은 어느 우리와 동떨어진 역사의 진실이라기보다 근본적으로 가장 내밀한 인간의 진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의 진실’이라는 점에 집중한다는 것에서 앨리스 먼로의 소설은 가장 인간적인 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제기될 수 있는 의문은 그녀의 소설이 소소한 것에 매달려서 어떤 ‘위대한’ 성취를 보이고 있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것이 될 것이다.

 

   『디어 라이프』 : 거대담론과 소박한 일상

 

   앨리스 먼로가 어떤 형이상학적인 고민이나 이념을 제시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독자는 그녀의 작품을 그저 소박하기만 한 작품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디어 라이프』가 그저 소박하기만 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소박한 것이 중요하지 않아야만 하는 이유도 찾기 어렵다.

   이 소설집은 어떤 철학적인 문제를 제시하거나 해결하려는 의도로 창작된 것은 분명 아니다. 이를테면 사르트르나 카뮈의 작품들과는 분명 다르다. 그렇다고 이 작품이 의도적으로 거대담론을 무시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동시에, 거대 담론의 지배에 대해 대항하는 의식을 가지고 쓰여진 것도 아니다.

  즉,『디어 라이프』는 전체로서의 작품이 거대 담론에 종속되지도 않았지만, 이것을 의식적으로 거부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작품들의 초점은 전체적으로 일상적인 삶의 모습들에 맞추어져 있다. 그래서 우리는 간혹 이 소설이 내면적인 감수성에만 호소한다고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우리가 모두 역사적 상황이나 사회에서 분리되지 않는 것처럼, 이 소설에서 그리는 삶의 모습도 사회의 사정과 역사적 사건들, 시대적 경험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 예컨대, 「일본에 가 닿기를」에서 피터의 어머니는 소비에트 연방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서유럽으로 탈출하며, 「자존심」에서 그려진 2차 대전 당시의 사회상이나 「기차」의 퇴역군인 잭슨의 모습과 종전 후의 사회에서 전쟁의 경험을 엿볼 수 있다. 즉, 일상은 개인의 다양성을 반영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시대의 모습과 결합되어 있다.

   앨리스 먼로가 초점을 맞추는 것은 이런 상황에서의 인간간의 관계와 삶의 모습들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의식적으로 형이상학적 이념을 적극 주장하거나 애써 무시하지도 않는다. 중요한 것은 섬세하게 포착했을 때 드러나는 또다른 인간의 진실인 것이었다. 그녀는 인간이 가지는 여러 가지 성찰과 그로 인하여 드러나는 문제들을 ‘피하려 하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서서 다음에 다가올 일을 기다렸다.’(「일본에 가 닿기를」p.41)

 

   소박함?

 

   앨리스 먼로는 실험적이거나 특별한 소설적 기법에 집착하지 않고 인간의 모습―인간의 외적 경험과 내면의 사유에서 찾을 수 있는 본질을 그리는 데 열중한다. 이것을 기법상의 소박함이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보기보다 개인적으로 먼로의 문체는 매우 정제되어 있으며, 절제된 기법을 사용했다고 하는 것이 올바른 평가일 것이라 생각한다.

   소재와 배경들, 계속 등장하는 비슷한 느낌의 시골마을과 토론토, 밴쿠버 같은 일부 대도시들은 이 작품집 『디어 라이프』가 무언가 제한되어 있다는 느낌을 줄 수도 있고, 이런 점을 또다른 소박함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이 작품을 내적으로, 근본적으로 제약하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소녀나 여성의 관점에서 주위를 바라보는 작품이 대부분이라고 해서 이것이 특별히 작품에 제약이 된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작품을 바라보는 화자 자체에 의해 본질적인 내용이 정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디어 라이프』의 1인칭 시점이나 3인칭 시점의 작품 모두에서 우리는 이 작품들이 인간의 보편성에 접근하고 있음을 본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경험할만한 사건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인데, 이는 곧 우리가 이 작품에 더욱 공감할 수 있고, 보편적인 인간의 진실에 더 쉽게 다가갈 수 있음을 의미한다.

 

   잃는 것과 얻는 것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앨리스 먼로의 작품인『디어 라이프』를 관통하는 한가지 키워드를 포착한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 물론 여러 가지의 말들이 가능하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잃음’과 ‘얻음’내지는 ‘상실’과 ‘획득’이라는 어구를 들고 싶다.

   잃는 것이 있으면 언제나 얻는 것도 있다. 그것은『디어 라이프』의 인물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기차」에서 퇴역군인인 잭슨은 ‘기차에서 뛰어내리는 것’으로 ‘무언가를 취소하는’(p.232)데, 이것은 벨과의 삶으로 이어지며, 벨이 사망하자(상실) 모종의 해방(획득)을 얻는다. 「호수가 보이는 풍경」에서 낸시는 꿈에서 깨어나지만(상실), 현실을―그녀에게 ‘쌩쌩하다’고(p.301) 말하는 현실로 되돌아간다.(획득)

   이 『디어 라이프』에 수록된 작품 전반에 걸쳐 등장인물이 잃는 것과 얻는 것은 거의 동시에 나타난다. 이 작품집을 잃는 것과 얻는 것의 연속으로 짜여진 우리의 삶 이야기라고 간단히 요약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요소는 앨리스 먼로가 의도적으로 사용했다기보다 그녀의 작품에서 삶의 진실이 자연히 드러난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사실 「메이벌리를 떠나며」에 나오는 다음의 부분은 앨리스 먼로 자신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상실 전문가. 그녀를 그렇게 불러도 좋으리라.(p.118)

 

   이러한 ‘잃음’과 ‘얻음’의 과정은 이 책을 읽은 독자들에게도 똑같이 나타날 것이다. 우리는 지루하거나 의미없는 일상에서 벗어나 여운이 가득한 감동을 얻을 것이다. 우리의 일상이 무의미하고 권태로운 것만이 아니라, 각기 독특한 의미와 가치가 있다는 것을 배울 것이다. 재미있게도 이러한 과정은 아이러니하다. 먼로가 그리고 있는 『디어 라이프』의 인물들과 같은 일상의 모습들로부터 시작하여 우리는 일상을 벗어난 그 무엇에 도달하는 것이다. 일상에서 시작하되 일상에 머물지 않는 . 이것이 『디어 라이프』의 세계가 단순히 소박하고 소소한 것에 머물기만 하는 것이 아니란 것을 말해주는 가장 큰 증거이다.

   우리는 소설이 끝나고 책을 덮는 순간 새로운 일상을 얻으며, 그 새로움은 동시에 훌륭한 소설의 주제가 될 수 있다. 책을 덮고 느끼는 그 깊은 여운은 우리가 우리의 삶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 각자의 삶이라는 붓으로 또다른 소설이 시작되리란 것을 믿는다. 그것이 바로 인생일 것이다.

   우리의 인생. 바로 그것을 바라보며 각자가 또 하나의 언로가 되어 일상이라는 언어로 소설을 써보는 거다. 마치 처음 말을 건낼 때처럼 두려움을 가지고. 그것 중의 하나는 아마도 이렇게 인생에게 말하는 것으로 시작하지 않을까?

 

   친애하는 인생이여. (Dear Life)

  (*‘디어 라이프’는 리뷰의 대상이 된 도서의 역자 말에 따르면 ‘for dear life'라는 형태로 글 속에 단 한번 등장하는데 이것은 ’죽기 살기로‘의 뜻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dear 라는 말을 편지 등을 보낼 때 수신인에게 쓰는 관용적 문구로 바꾸어 생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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