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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불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3
피에르 드리외라로셸 지음, 이재룡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5월
평점 :
소설은 픽션, 즉 근본적으로 허구를 다루는 것이다. 그러나 그 허구는 현실과 전혀 유리된 것이 아니라 현실과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므로, 소설 속에서 허구로 만들어진 사건은 현실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견주어서 그 의미가 평가되기도 한다. 그런데 소설은 동시에 그 자체가 예술의 한 형식이라는 점에서 독자적인 예술적 가치를 가지며, 소설적 허구는 현실에 존재하는 독자적인 존재자(Seindes)다. 예컨대, 살인이나 전쟁은 분명 현실에서는 없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살인자를 다루는 소설이나 전쟁의 잔인한 모습을 그리고 있는 소설은 인간본성의 한 측면을 탐구하는 것으로 그 작품성을 인정할 수 있다.
그런데, 소설은 독자적인 존재이면서 동시에 현실 안에 존재하는 존재자이므로, 소설 자체의 가치와 사회적인 가치가 이따금 충돌하며 갈등을 일으키는 것이다. 명백히 사악한 범죄행위를 찬양한다거나 극단적인 폭력과 도착적인 행위를 그리는 것은 때때로 사회적 이슈가 되기도 한다.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킬 정도가 아니더라도 종종 소설은 민감할 수 있는 소재를 다루고, 일반적인 가치와는 다른 판단과 행동을 하는 인물을 그린다. 이러한 소재들 중에 ‘자살’을 대표적인 것으로 들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자살이라는 논란의 소지가 있는 소재를 다룬 소설을 볼 때에는 작가가 가진 강한 문제의식을 이해해야 하고, 그로부터 작품을 평가해야 한다.
수없이 많은 소설 속에서 수많은 인물들이 자살을 시도하고, 사망에 이른다. 그러나 그 자살의 모습은 가지각색이다. 어쩔 수 없이 강제로 자살을 하게 되는 사람부터, 자살을 찬미하는 이, 혹은 이를 권장하고 최고의 가치로 보는 이에 이르기까지 양상은 참으로 다양하다. 또한 소설에서는 문맥 속에서 자살의 의미를 파악해야지, 특정한 부분만 떼어볼 수는 없으므로 간단히 일률적으로 말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피에르 드리외라로셸의 「도깨비불」도 간단히 말하자면, 알랭이라는 청년이 자살을 감행하기까지 그의 생애 마지막 나날들을 그리고 있는 소설이다. 즉, 젊은 사람이 자살을 하게 되었으니 대단히 극적인 사건이고 그런 결정을 내리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가 궁금해진다. 나아가 이런 자살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를 이해하는 것이 소설을 이해하는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그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설 전체를 보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소설은 알랭과 리디아라는 여성이 정사를 나누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리디아는 그에게 결혼하자고 말한다. 그들은 사랑하는 사이로 보인다. 그러나 사실 리디아는 6개월 전 그와 결혼약속을 한뒤 사흘후에 생면부지의 남자와 결혼하고 곧 헤어져버렸다. 리디아는 알랭을 파리에 남기고 뉴욕으로 떠나는 길에도 결혼하자고 말한다. 그렇지만 그 말들은 ‘체념 어린 냉정함과 가장된 평온’이다. 서로 키스하고 일생의 중대사인 결혼에 대해 말하나 그것은 의미없는 말이고 삶을 더 무겁게 만들 뿐이다. 그녀의 노골적 노출은 관능적이지 않고, ‘그에게 아무런 감흥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17쪽) 알랭은 마약중독자인데, 리디아를 비롯한 친구들에게서 받거나 빌린 돈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그는 돈을 아끼지 않고 금새 다 써버리곤 한다. 현실은 한없이 거추장스럽다. 알랭 자신과 그 주위의 인물들을 설명하는 말들은 악덕의 총화처럼 보인다. 노골적 추파, 녹색 치아, 뱀 가죽처럼 늘어진 긴 젖가슴, 부러움과 경악, 증오, 요란한 퇴물로 변한 가치들. 이런 모습이 일반화된 알랭의 세계는 도덕이나 건실한 삶의 세계와 너무도 동떨어진 환멸의 세계다.
알랭은 마약을 다시 시작하고 주위의 아는 친구들을 찾아다니며 술과 마약을 하며, 식어버린 열정들을 추억한다. 알랭과 주위의 ‘마약중독자들은 세상에 영혼을 불어넣고 세상을 상징적 의미로 승화할 힘이 더 이상 없기 때문에 세상 속에 있는 허무의 씨앗에 도달할 때까지 세상을 축소하고 닳아빠지게 하고 갉아먹’는다. (82쪽) 이런 상황은 가치판단능력을 마비시키고 자기파괴적인 길로 그들을 몰아넣는다. 일반적인 도덕적 가치가 주변환경에 전제되고 당사자들이 이 가치를 의식하고 있으며, 거기에 대해 일탈했다거나 죄의식을 느끼는 상황이 아니다. 이들은 이런 기준점에 대한 인식 자체가 없다. 일탈이라는 단어 자체가 의미 없어지고 단지 욕망과 퇴폐적인 생활을 합리화하거나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수준의 언어구사가 있을 뿐이다. 드리외라로셸은 이런 상황을 환각제의 연기가 끼어 몽환적으로 보이는 나른한 분위기 속에서 서술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무언가 지향하는 것이 있다면 강한 남성다움, 억세고 투박하며 거친 것이다. 즉, ‘매독으로 납빛이 된 혈색에 몇 차례의 사고로 부러진 이빨. 살인과 도둑질을 한 남자’인 브랑시옹을 사람들은 대단한 존경심을 갖고 바라보았다.(131쪽) 알랭도 자신을 무시하고 거들떠보지도 않는 브랑시옹의 환심을 사기 위해 수차례 시도한다. 이것이 진정한 아름다움의 기준이 되고 이러한 것을 추구하는 미학이 분위기를 지배한다. 이러한 남성미를 추구하는 것에는 작가 개인의 이력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드리외라로셸은 어린 시절부터 영웅숭배 사상을 주입받았고, 주위학생에게 열등감을 느끼면서 남성적 힘을 추구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사회주의 미학이나 파시즘이 찬양하는 미적 가치를 구현하는 활동에 참여하기도 하였고, 이후 실제로 나치에 복무하고 자신을 파시스트라 선언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그리하여 건장한 남성들로 이루어진 군대의 사열, 발달된 근육과 강하고 거친 남성미를 보이는 병사들, 비장하게 싸우다 영예롭게 죽는 전쟁 같은 것을 아름답게 생각하는 파시즘 미학을 그는 추구하게 된다. 알랭이 동경하는 것도 바로 작가 자신이 가진 것과 같은 (파시즘 미학에서 추구하는) 가치들과 부합한다.
이러한 맥락을 볼 때 알랭이 이제 추구하는 것은 브랑시옹 같은 사람이 되는 것, 혹은 남성적이고 투박한 것을 지향하는 것이리라. 그런데‘브랑시옹, 포샤르. 이들이 진짜 남자다. 그런 남자들의 세계는 내게 닫혀 있다.’(150쪽) 따라서 그는 이제 자살을 하게 되는데, ‘자살, 그것은 행동, 다른 행동을 실천하지 못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행동’(151쪽)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자살은 알랭이 자신의 상황을 절망하고 마지막으로 선택하는 극단적인 선택이라기 보다는 좀 더 적극적인 의미를 가진 것으로 묘사된다. 자살을 선택하기까지 과정이 번민에 가득찬 것으로 나타나지 않고, 그는 자살을 결심하고 바에서 마약을 맞고나서, 또 다른 바에 가서 친구와 술을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까지 한다. 그리고 자고 일어난 아침에는 ‘구원이라는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확실하게 죽음에 영역에 들어서 있었다.’(161쪽) 즉 자살은 일종의 구원같은 것이고, 마지막으로 권총을 잡는 순간에도 극도의 흥분과 고통, 회한이 있지 않다. 오히려 다소 무감각하고, 약간이나마 권태로운 일처럼 느껴지기까지 하는 것이다. 죽음을 단순히 괴로움에 가득찬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로 여기는 것이라거나, 괴로움을 이길 수 없어서 자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살은 일종의 열정의 표현인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이 소설에서 자살하는 알랭의 실제 모델이 되었던 자크 리고라는 사람의 사망소식을 듣고 피에르 드리외라로셸이 그를 추모하며 쓴 글인 ‘잘 가라, 공자그’라는 글에서도 짐작해 볼 수 있다. 드리외라로셸은 말한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단 하나밖에 없는데 그것은 열정이며, 그것은 오로지 타인이나 자기 자신을 살해함으로써만 표현될 수 있다.’(171쪽) 알랭의 죽음을 통해서 이런 생각이 구현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즉, 자살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자살이라는 것, (문맥을 바꾸면) 죽을 것을 알면서도 전투에서 용맹히 싸우다 죽는 군인과 같은 남성적이고 열정적인 것을 아름답게 보는 파시즘적인 미학의 입장이 개입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미학은 주의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단순히 도덕적인가 아닌가의 문제나, 종교적인 자살관의 문제를 언급하려는 것은 아니다. 드리외라로셸의 생각에는 죽음에 대한 열정이 삶을 잠식하고, 삶은 자살을 위한 수단처럼 여겨지고 있다. 삶을 진지하게 고려한 결과 어떤 존엄함을 지키기 위해서 자살을 선택한다는 관념 같은 것이 들어설 자리가 없는 것이다.
결국 알랭이 죽는 것처럼 작가 자신도 자살로서 생을 마치게 된다. 이러한 결과가 그의 신념을 실현하고 자신을 작품과 일치시키는 ‘일종의 작품의 완성’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작가는 나치에 협조한 죄목으로 체포되게 되자 자살을 선택하였고, 열정의 표현을 위해 죽은 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완성된 작품은 반짝 빛나는 것이 아니라 퇴색된 빛만을 보이고 있으며, 암울하고 허무한 청춘의 모습으로 쓸쓸히 남았을 따름이다. 도깨비불이라고 번역된 원제 ‘Le feu follet'에는 ‘덧없이 사라지는 것’이라는 뜻도 있거니와 알랭과 자크 리고, 그리고 작가 자신의 최후는 결국, 덧없이 사라진 청춘, 잠시 동안 약하게 타오르다가 꺼진 불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 불꽃은 우리 자신으로 하여금 삶에 대해 잠시 생각에 잠기게 하기에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