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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卍).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 (양장)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7
다니자키 준이치로 지음, 김춘미.이호철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9월
평점 :
절판
우리가 ‘예술은 무엇을 추구하는가?’ 혹은 좀 좁게는 예술의 한 부분으로서 ‘문학은 무엇을 추구하는가?’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무엇이라 대답할 것인가. 아마도 우리는 보통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문학(혹은 예술)은 아름다움(美)을 추구한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럼 그 ‘아름다움’이란 것은 무엇일까? 물론 아름다움이란 것은 한마디로 정의 내려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특정한 종류의 것만을 아름답다고 할 수도 없다. 미의 기준은 상대적인 것이고, 어떤 부류만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도록 강제하는 것은 일종의 폭력일 수도 있는 것이므로. 그러나 우리는 대체로 기존의 미적 기준에 맞추어 아름다움을 정의하려는 경향이 있으며, 따라서 우리는 이따금 다른 종류의 미적 감각에 대하여 거부감을 느끼기도 하고, 혹은 색다른 일탈의 매력에 사로잡히기도 하는 것이다.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작품에 접할 때 느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거부감과 동시에 우리를 사로잡는 일탈과도 같은 관능의 매력일 것이다.「만·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의 저자인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평생동안 자신만의 독특한 미적인 세계를 탐구하였는데, 그가 그토록 집착한 주제는 성(性), 특히 여성과 관련된 성적인 아름다움의 세계였다. 그의 작품으로 문학동네에서 출간된 「만·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는 이런 다니자키의 면면과 그의 미적 세계의 진수를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여기서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진수라고 한 관능과 여성의 아름다움, 그리고 이를 통한 예술적 완성의 추구는 그의 작품의 한 소재라거나 작품 중에서 부분적으로 등장하는 양념으로 잘 기능하는 데 머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 자체가 최고의 목적이자 지상(至上)의 가치로 여겨지는 데에 이르고, 이 책의 역자가 밝힌 것과 같이 다니자키는 그의 삶 자체로서도 이러한 여성에 대한 숭배와 관능에 대한 찬양을 실천했다. 이것은 저자 자신이 밝힌 말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내 삶의 보람은 예술을 뜨겁게 사랑하는 것이다……나는 어디까지나 나를, 나만을 소중히 여기는 에고이스트다.」고 그는 말하며, 이 에고이즘이 파괴되면 예술도 파괴될 것을 염려하였다. 그는 심지어 예술에 대한 열정이 자신의 아이를 사링하는 마음 때문에 약해질까봐 아이를 낙태시키기까지 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니자키가 추구한 미학과 「만·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의 세계에 묘사된 것이 극도로 아름다우면서도 사회적인 가치나 통념과 어긋나는 사뭇 위험하기조차 한 탐미의 세계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으리라. 그리하여 우리는 그의 작품을 읽을 때 마치 위험한 게임에 참가하는 듯한 긴장과 흥분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일탈의 기분은 「만·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에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이 책에 수록된 첫 번째 작품인 ‘卍’은 제목만 보아선 종교적인 인상을 받을 수도 있지만, 사실 이 제목은 한자 ‘卍’이 가진 시각적 모양이 네 사람 간에 얽힌 관계를 상징적으로 구상화 시켜주고 있다는 이유로 붙여진 것이 분명하다. 이 ‘卍’에 나오는 중심인물은 모두 네 명이다. 소노코와 그녀의 남편, 그리고 미혼의 미쓰코와 그녀와 일종의 애인 사이에 있는 남자 와타누키. 소노코와 미쓰코는 여자기예학교에서 미술을 공부하다가 서로 알게 되는데, 둘 사이는 점차 동성간의 사랑으로 발전한다. 그 사랑의 표현은 거칠고 위험하기까지한데, 예를 들면 소노코는 미쓰코가 벌거벗은 채 침대 시트를 두르고 있는 것을 보고 아름답다며 눈물을 흘리다가 이내 충동적으로 시트를 찢고 ‘차라리 죽여버리고 싶어.’라고 말하며, 미쓰코도 ‘죽여줘’하며 눈물을 흘린다.(32-36 페이지) 두 사람은 서로의 관계가 소노코의 남편에 들키지 않게 조심하는데, 어느 날 미쓰코의 애인이라는 와타누키라는 남자가 등장하여 소노코를 괴롭히고 소노코의 남편을 협박하기도 한다. 그러다 소노코와 미쓰코는 위장으로 자살시도를 하고 둘 다 다행히 약을 먹은 후 깨어난다. 그러나 소노코의 남편과 미쓰코는 이 사건을 계기로 서로 정을 통하고, 이 세 사람은 결국 모두 약을 먹고 자살시도를 하는데 소노코만은 이후 깨어나서 살아남는다.
이 ‘卍’은 이런 전 과정을 소노코가 어떤 작가나 의사 정도로 추정되는 ‘선생님’에게 말로 들려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작품에서 청자인 ‘선생님’은 끝까지 등장하지 않지만, 이런 작품의 형식상의 특성은 소노코가 자신의 극히 사적인 이야기까지 고백하는 노출증적인 증상을 드러내고, 청자의 일종의 관음증적인 욕망을 만족시키고 있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독자는 이중의 일탈적인 상황을 경험하게 되고 다니자키가 보여주는 관능과 치명적인 아름다움의 효과는 배가된다.
이 책에 수록된 두 번째 소설 ‘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는 ‘만’보다는 성적인 것 자체가 주제로서 덜 부각되고, 격조있고 서정적인 문체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는 20대 초의 젊은 여자였으나 여든 살 남짓한 남편을 두고 있다. 그녀의 남편은 반강제로 그녀를 높은 대신인 시헤이에게 바치고 그녀를 그리워하며 살아간다. 시게모토는 이후 40여년간 어머니와 단절되었다가 극적으로 어머니와 해후하며 뜨거운 눈물을 쏟는다. 이 작품에서는 다니자키의 원숙한 경지를 느낄 수 있다. 특히, 늙은 남편이 떠나간 아내를 잊기 위해 시신 옆에서 부정관(不淨觀)을 행하는 장면이라든지, 마지막 부분에 시게모토가 어머니가 계시는 곳에 이르렀을 때, 자연에 대한 묘사는 탐미적인 묘사의 극치를 보여준다.
작품 전체에서 나타나는 에로티즘은 에로티즘 자체의 성질 또한 보여준다. 에로티즘에 대해 천착한 프랑스 학자 죠르쥬 바따이유는 그의 저서 「에로티즘」에서 ‘……두 연인의 결합은 열정의 결과라고는 하지만, 그 열정은 죽음을 부르고, 살해욕망, 자살에의 충동을 부를 수도 있다는 것이다.’(에로티즘, 죠르쥬 바따이유, 조한경 옮김, 민음사, 1996, 21페이지)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다니자키가 소설 ‘卍’에서 그대로 보여주는 바이다. 또한 ‘에로티즘의 본질은 이러한 상호성에 있는 듯하다……결혼이 에로티즘에서 멀어지면, 거기에는 물질적 가치만이 두드러진다.’는 구절(같은 책, 239페이지)은 시게모토 소장의 늙은 아버지가 젊은 아내를 시헤이에게 선물로 바친 것의 사정과도 잘 대응하고 있는 것이다.
‘예술이 무엇인가? 혹은 문학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여자 없이는 내 시도 예술도 없다’고 말했고, 여성에 대한 이러한 신념만을 평생 고집해오고 다른 시도는 철저하리만치 하지 않았다. 그를 두고 사회적 문제 의식이 없다든가, 외설적인 것에 집착한다고 비난할 수도 있고, 이런 비난은 상당히 타당한 것이리라. 그러나,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자신이 추구한 아름다움이 가장 고결하다든가 도덕적이라는 식으로 포장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말하는 것의 본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으며, 단지 자신의 신념을 평생 추구해 간 것이다. 그로써 그의 작품은 독자적인 탐미의 세계를 창조하였고, 여성의 성에 대한 매우 깊은 시각을 열어주었다. 이러한 사실 만으로도 그의 작품은 계속 읽히고 음미될 자격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