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성혜영 지음 / 휴머니스트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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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에 있는 유명한 미술관에서 모네의 그림을 여러 점 만났을 때 나는 당황했다. 예전에 화집을 보았을 때 느꼈던 즐거움 혹은 감동의 끄트머리라도 잡아보려고 했는데, 주먹 쥔 내 손에서는 공기만 덧없이 새나가고 있었으니까. 그때 생각했다. 아, 그림도 감수성 예민한 어린 시절에 화집으로 보는 게 낫지, 무뎌진 신경으로는 진품을 봐도 이발소 그림처럼 느껴지는구나.  

 

그런데 세월이 또 십여 년 흘렀다. 루브르에서 사람 파도에 밀려다니면서 모나리자를 지나치고, 비너스 앞에서 서성이다가 문득 뒤로 돌아가 뒷모습을 보게 되었다. 황금비를 자랑하는 완벽하고 자신 있는 몸매가, 뒤에서 보니 그렇게 쓸쓸해 보일 수가 없었다. 여기저기 떨어져 나간 흔적이 있는 등을 보니 그래, 너 참 슬프게 살았구나, 하는 탄식이 절로 나왔다. ...... 

 

내가 별로 아는 것이 없으니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갈 때마다 공연히 주눅이 들어야 할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도 않다. 적어도 내 맘대로 느끼고, 내 맘대로 작품과 대화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이런 면에서 이 책의 저자 역시 나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작품의 시대적 배경도 중요하지만, 그 작품이 통째로 나의 삶 속에 들어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읽었으니까 말이다.   

 

역사학과 미술사를 두루 공부한 저자는 유명 박물관의 이름난 작품에 대한 지식을 번화하게 늘어놓는 대신, 우선 박물관의 역사적 의미 변화에 따른 진화 과정을 설명해주며, 여러 가지로 폐쇄적인 선입견을 주는 ‘박물관’이란 이름 대신 지역주민의 적극적인 참여를 바탕으로 한 ‘문화유산센터’로 이름이 바뀌고 있다고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요즘 나는 ‘도서관’이라는 이름을 ‘미디어 센터’ 혹은 ‘정보 센터’로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내 생각과 약간 통하는 듯해서 마음에 든다.)  

 

또한 저자는 작은 도서관, 알려지지 않은 도서관에 마음을 쓴다. 내가 가장 관심 있게 읽었던 부분은 가짜만 모아놓은 블레더의 가짜 박물관과, 초창기 미국 이민자를 심사했던 뉴욕 엘리스 섬에 자리 잡고 있는 이민사 박물관이었다. 짝퉁도 ‘짝퉁의 진품’으로 자리잡을 수 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고, 우리 민족 또한 하와이에 사탕수수 노동력을 보낸 전력이 있으므로 이민사 박물관 이야기에 유달리 애착이 갔다.  

 

책을 읽을 때 나는 저자의 개인적인 삶을 통해서 가치관이 묻어나는 것을 좋아하는 편인데, 저자는 그런 면에서 되도록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려 애쓴 듯 하다. 그 점이 매우 아쉽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왜 그리 슬펐을까? 아마도 제 갈길 바쁜 연구자 남편을 둔 저자가 동동거리면서 산 삶의 흔적이 여기저기 배어나오는 것이 느껴져서 그랬으리라. 아줌마인 나는 같은 아줌마인 저자의 책을 읽으며 비너스의 뒷모습을 본다. 나중에 나도 박물관에서 누추한 뒷모습을 보이며 서 있으면 누군가가 내게 말을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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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기요시코 카르페디엠 11
시게마츠 기요시 지음, 오유리 옮김 / 양철북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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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치대에 다니던 교회 선배가 덧니가 드러나는 내게 말했다.
'너는 이 때문에 고민스럽겠구나.'
'....? 아니요.'
'....? 그럼 넌 그 열등감을 어떻게 극복했니?'
그 질문에 나는 너무도 황당했다. 그리고 상처를 받았다. 뿌리가 튼튼해서 언제나 단단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 같은 내 덧니가 이 사람에게는 내가 '열등감'을 가져야 할 이유로 보이는구나. '어떻게 극복' 했냐니...?

나와는 경우가 약간 다르겠지만, 때때로 '정상인'을 자부하는 사람들이 '배려하는' 질문이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는 수도 있다. 이 책의 주인공 소년 역시 그렇다. 어린 시절, 이유도 모르고 할아버지 댁에 맡겨졌다가 말을 더듬는 증상을 보이고 아빠의 전근으로 인한 여러 번의 이사와 전학 때문에 그 증상이 점점 심해지는 소년은 방학 동안 말더듬는 아이들을 위한 교정 프로그램에 보내진다. 아이들은 그곳에서 별로 증상이 호전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른바 '정상'인 어른들이 하는 말에 상처받는다. 어른들은 말이 좀 막힌다고 해서 너무 신경쓰지 말라고 '너무 쉽게', '술술술' 이야기를 한다 '말을 더듬는 건 창피한 일이 아니에요.' '말을 더듬는다고 웃는 친구들은 똑같이 비웃어 주면 돼요.'라고 청산유수로 말하는 세미나 담당 선생님에게 신음소리를 내고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치며 격렬하게 반응하는 참가 아이들. 그 애들은 자기가 더듬게 되는 단어를 피해가면서 말하려고 속으로 엄청난 갈등을 하고 힘들어하는데, 저렇게 물흐르듯이 '괜찮아, 괜찮아, 아무 것도 아니야' 라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쓰라린 상처를 받는구나. 어..... '미안해.' 이런 말을 술술술 해서 정말 미안해.

이 책에서 심리 묘사가 가장 뛰어난 부분이 여기일 듯 싶은데, 그건 아마도 작가 자신의 어린 시절을 덤썩 집어와서 썼기 때문이리라. 언젠가는 써야지, 써야지, 생각만 하고 마음 속 깊이 감춰두었던 정말 개인적인 이야기를 가느디 가는 줄로 뽑아 아슬아슬하게 빛 속으로 꺼내온 듯한 느낌이 든다. 그만큼 주인공의 심리 묘사가 빼어난 글이다.

거침없이 휙휙 말하는 것 같으면서도 속이 깊은 친구 게루마가 공고에 진학해 껄렁한 아이들 틈에서 생존해나가려고 빌붙어 있는 모습이나 사정상 전근을 다녀야 하는 아버지가 승진을 미루면서까지 아들의 정착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 아픈 딸아이를 둔 선생님이 연극 대본을 쓰라고 아이에게 말할 때 반 아이들 모두가 등장하고, 모두 대사가 있어야 하며, 모두 이름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모습은 눈물겹다.

성장소설이 이렇게 가슴 저미게 읽힐 줄은 몰랐다. 잔잔하면서도 애절한 글. 참, 연파랑 표지가 무척 마음에 든다. 파릇파릇한 새싹의 시기 - 하지만 야구모자를 꾹 눌러 쓴 아이는 현실과 별로 대면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왜 입가가 쳐져 있는지는 책을 읽으면서 깨닫게 될 것이다. 최근 본 책 표지 중에서 내용을 가장 잘 드러내는 표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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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와 피어싱 - 조희진의 우리옷 문화읽기
조희진 지음 / 동아시아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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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옷장수 아주머니가 동네 집 안방에 펼쳐 놓은 물건들을 구경한 적이 있었다. 늘 커다란 흰색 팬티만 사던 어머니가 웬일인지 진한 자주색 팬티를 구경했고, 옷장수 아주머니는 그 신제품 팬티 안쪽 바닥에 고무줄끈이 두 개 달려 있다고 자랑을 했다. 옆에서 보던 어느 할머니가 참견을 했다. “이런데다 월경대를 끼울 수 있으니 세상 참 좋아졌네. 나도 밑에를 쭉 찢어서라도 피를 내 이런 거 한번 입어봤으면 좋겠다.”

몇 년 후에 이 실물을 직접 쓰게 되었던 나는 그 할머니는 그럼 옛날에 도대체 어떻게 월경대를 고정시킬 수 있었는지 너무나 궁금했다. 그런데 이 책의 첫 번째 이야기부터 개짐의 생김새와 고정방법이 자세한 그림으로 나온다. 할매들의 경험담을 일일이 채록하고, 문화사적으로 저자의 의견을 다부지게 제시한 글을 읽으면서, 아, 이 사람이 보통 꼼꼼하고 단단한 사람이 아니구나, 하며 감탄했다.

이야기는 저고리, 허리띠, 빨래, 길쌈 등으로 계속 이어진다. 흰색 입기를 여러 차례 금지했던 옛 왕조 이야기나 비녀 이야기, 고구려 벽화에도 나왔던 남자들의 귀거리 이야기는 재미있었고, 여인네들의 끝없는 노동인 길쌈과 바느질 이야기를 읽으면서는 그들의 생활이 얼마나 힘들었나를 생각하며 가슴이 싸해지기도 했다. 한 편, 한 편이 옛 자료를 깊게 읽고, 아직 살아계신 어르신들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현대 사회와 문화에서 어떤 식으로 의미가 이어지고 혹은 변화하는지를 생각해서 정리한 귀한 글이다. 저자의 다음 책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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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진 저 나무 푸르기도 하여라
유경 지음 / 서해문집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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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을 갓 졸업하고 회사를 다닐 때 10년 위의 선배가 빨간 투피스를 입고 나타났다. 신기했다. 어떻게 저 나이에 빨간색을 입을 수 있지? 그때 그 선배는 불과 서른 두 셋. 친언니가 서른 살이 되던 해. 그 나이가 문득 징그러워 보였다. 언니에게 한 마디, “어떻게 인간이 서른 살이 될 수가 있어?” 그런 말을 하는 나는 언니와 겨우 두 살 차이였다.

그러던 내가 이제 마흔 두 살. 이십대와 삼십대의 격렬하고 어지럽고 뾰족하던 시기를 지나 점점 모서리가 둥글어지는 (둥글어진다고 착각하고 있는) 요즈음, 노년에 관한 생각을 담은 이 책, <꽃진 저 나무 푸르기도 하여라>를 읽게 되었다. 만약 이 책이 노인학에 대한 이론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았다면 나는 책을 덮었을 것이다. 나도 요만큼이나마 나이를 먹으니까 ‘이론’이라는 게 참으로 부질없는 것임을 깨닫고 있으니까. 하지만 이 책은 다르다.

흔히 ‘노인’하면 ‘궁상맞다’는 느낌이 먼저 들지만, '토토로'의 넉넉한 할머니, '봄날은 간다'에서 치매에 걸렸지만 손자의 아픔을 위로해주는 할머니, 내가 정말 좋아하는 박완서의 단편 '마른 꽃'과 '그리움을 위하여'에 나오는 ‘늙은이’들, 어린이 책과 만화책에서 엿볼 수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들, 노년이 되어서 자원봉사를 하며 기쁨과 보람을 찾는 분들, 노인복지 쪽으로 일하는 저자의 주변 이야기들이 널어도널어도 끝없는 빨래처럼 계속 이어진다. 그런데 그 빨래들은 햇빛을 받으며 환하게 펄럭이고 있다.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현실 속의 주변 노인들이 떠오른다. 툇마루에 앉아 계신 조용한 할머니. (당뇨인 할머니가 오줌을 지리면 개미들이 모여 들었다.) 며느리 요강까지 부셔주기로 소문난 친척 할머니. (그러나 아들네 식구는 이민가고, 할머니는 요강 부셔준 보람(?)이 없었다.) 늙어서도 ‘연애질’한다고 친척들 간에 따돌림 받는 ‘노는’ 할아버지. (아직 안노인이 살아계셔 다행이다.)

얼마 안 되는 돈 -하지만 자기의 전 재산인-을 가지고 자식들의 효심을 저울질하는 할아버지. 바쁜 자식들에게 혹시라도 방해가 될까봐 조심조심 살아가는 할아버지, 할머니. 노름하며 큰 소리 탕탕 치고, 집 날려 먹고 며느리 월급까지 차압당하게 만드는 할아버지. 높은 지위에 있는 아들들 관계치 않고, 폐휴지 모으는 고물장사 하며 활발하게 사는 할아버지.

책에서 말해주는 다양한 노년과 현실에서 보이는 여러 가지 노년을 떠올리면서 기특하게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도 해 본다. 나는 어떻게 늙을 것인가? 노년이란...... 연습할 수는 없지만, 준비할 수는 있지 않을까? 치. 매. 그것은 하늘에 맡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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닮은꼴 영혼 - 사람과 동물 간의 사랑, 기적같은 치유이야기
앨런 쇼엔 지음, 이충호 옮김, 남치주 감수 / 에피소드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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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팬지의 습성을 연구하며 영혼의 이야기까지 돌아보는 『희망의 이유』의 저자 제인 구달은 우리나라에서 강연할 때 ‘우, 우, 후, 후후후휴’하며 침팬지식의 인사를 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한 인디언 추장으로부터 ‘당신은 굉장히 늙은 영혼을 지니고 있다. 그만큼 다른 이를 배려한다.’는 말을 듣고 영혼에 대한 진정한 무게를 느꼈다고 하는데, 이 책, 『닮은꼴 영혼』을 읽으면서 저자인 앨렌 쇼엔 역시 여러 생을 거듭해서 살면서 성장한 늙은 (오래된) 영혼일 거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는 골든 레트리버 종의 개인 미건을 자기의 스승이자 동반자로 여길 정도로 동물과 깊은 교감을 나누는 수의사입니다. 서양의학체계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침술, 한약뿐 아니라 약초의학, 향기 요법, 척추 지압 요법 등 여러 대체의학을 동물 치료에 꾸준히 이용한, 남다른 생각을 하는 의사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그가 주목하는 부분은 ‘치료 treatment’가 아니라 ‘치유 healing’이며, 그것도 동물과 인간 상호간의 치유입니다.

그에 따르면 치유는 ‘살아있는 존재들의 관계에 대한 문제’이죠. 이 책에 나오는 숱한 임상의 실제 경우를 읽으면서 저는 사람과 동물이 서로 치유하며 함께 성장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스트레스에 찌든 변호사 엘리자가 한때 경주마로 학대받던 말 베시에게 관심을 갖게 되면서 서로 긍정적으로 변화되고, 버림받은 아동들을 도와주는 단체에서 봉사하게 되는 모습은 아름답습니다. 그녀는 베시와의 관계 덕분에 ‘일하는 사람 (human doing)’에서 ‘존재하는 사람 (human being)으로 변했으니까요.

저자가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인간의 치유, 동물의 치유, 그리고 환경의 치유입니다. 갈라파고스제도에서 바다사자와의 체험담은 인간이 환경 문제를 근본적으로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도를 통한 원격 치료, 기의 수련 등에 관한 이야기도 눈여겨볼만한 부분입니다.

책을 읽으면서 실은 전에 일주일도 못 키우고 돌려보낸 강아지 생각이 머리에서 윙윙거렸습니다. 어떻게 하면 변을 묽지 않게, 조금만 싸도록 할 것인가, 하는 제 이기심 때문에 그 작은 강아지는 신선한 자연식은커녕 사료 회사의 사료도 마음껏 먹어보지 못했지요. 지금껏 그때의 죄책감이 저를 괴롭히는 걸 보니, 그때 그 경험을 통해서 저도 뭔가 조금은 배웠나 봅니다.

며칠 전에 언니네 개가 새로 낳은 강아지들 이름을 지어달라는 부탁을 받고 콩돌이, 팥돌이, 완두 공주라고 붙여주었는데, 이런 작은 일로 벌써 마음이 두근대며, 이 시점에서 이 책을 읽게 된 것이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들과의 유대를 통해서 서로 영혼이 자랄 수 있기를......

** 참, 이 책의 표지와 한지 비슷한 느낌이 나는 종이, 그리고 색깔이 정말 마음에 듭니다! 과학 전문 번역가 이충호님의 번역이 매우 깔끔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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