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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진 저 나무 푸르기도 하여라
유경 지음 / 서해문집 / 2003년 5월
평점 :
품절
대학을 갓 졸업하고 회사를 다닐 때 10년 위의 선배가 빨간 투피스를 입고 나타났다. 신기했다. 어떻게 저 나이에 빨간색을 입을 수 있지? 그때 그 선배는 불과 서른 두 셋. 친언니가 서른 살이 되던 해. 그 나이가 문득 징그러워 보였다. 언니에게 한 마디, “어떻게 인간이 서른 살이 될 수가 있어?” 그런 말을 하는 나는 언니와 겨우 두 살 차이였다.
그러던 내가 이제 마흔 두 살. 이십대와 삼십대의 격렬하고 어지럽고 뾰족하던 시기를 지나 점점 모서리가 둥글어지는 (둥글어진다고 착각하고 있는) 요즈음, 노년에 관한 생각을 담은 이 책, <꽃진 저 나무 푸르기도 하여라>를 읽게 되었다. 만약 이 책이 노인학에 대한 이론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았다면 나는 책을 덮었을 것이다. 나도 요만큼이나마 나이를 먹으니까 ‘이론’이라는 게 참으로 부질없는 것임을 깨닫고 있으니까. 하지만 이 책은 다르다.
흔히 ‘노인’하면 ‘궁상맞다’는 느낌이 먼저 들지만, '토토로'의 넉넉한 할머니, '봄날은 간다'에서 치매에 걸렸지만 손자의 아픔을 위로해주는 할머니, 내가 정말 좋아하는 박완서의 단편 '마른 꽃'과 '그리움을 위하여'에 나오는 ‘늙은이’들, 어린이 책과 만화책에서 엿볼 수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들, 노년이 되어서 자원봉사를 하며 기쁨과 보람을 찾는 분들, 노인복지 쪽으로 일하는 저자의 주변 이야기들이 널어도널어도 끝없는 빨래처럼 계속 이어진다. 그런데 그 빨래들은 햇빛을 받으며 환하게 펄럭이고 있다.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현실 속의 주변 노인들이 떠오른다. 툇마루에 앉아 계신 조용한 할머니. (당뇨인 할머니가 오줌을 지리면 개미들이 모여 들었다.) 며느리 요강까지 부셔주기로 소문난 친척 할머니. (그러나 아들네 식구는 이민가고, 할머니는 요강 부셔준 보람(?)이 없었다.) 늙어서도 ‘연애질’한다고 친척들 간에 따돌림 받는 ‘노는’ 할아버지. (아직 안노인이 살아계셔 다행이다.)
얼마 안 되는 돈 -하지만 자기의 전 재산인-을 가지고 자식들의 효심을 저울질하는 할아버지. 바쁜 자식들에게 혹시라도 방해가 될까봐 조심조심 살아가는 할아버지, 할머니. 노름하며 큰 소리 탕탕 치고, 집 날려 먹고 며느리 월급까지 차압당하게 만드는 할아버지. 높은 지위에 있는 아들들 관계치 않고, 폐휴지 모으는 고물장사 하며 활발하게 사는 할아버지.
책에서 말해주는 다양한 노년과 현실에서 보이는 여러 가지 노년을 떠올리면서 기특하게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도 해 본다. 나는 어떻게 늙을 것인가? 노년이란...... 연습할 수는 없지만, 준비할 수는 있지 않을까? 치. 매. 그것은 하늘에 맡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