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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뇌하는 평화주의자 요한 바오로 2세 평전 - 카롤 보이티야의 비밀
안드레아스 엥글리슈 지음, 손주희 옮김 / 영언문화사 / 2005년 2월
평점 :
절판
교황이란 내게 어떤 존재였던가? 가끔 TV 뉴스에 비틀비틀하며 등장하는 교황은 내겐 ‘어? 아직 살아계셨나?’ 하는 정도의 무관심의 대상, 또는 중세시대에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며 수많은 악을 행했으나 점점 세력이 약화되다 못해 이제는 조그만 바티칸 공국이라는 영토 안에 옹송그리고 앉아서, 눈이 휙휙 돌아갈 정도로 변화하는 이 세상에 적응 못하고 있는 카톨릭 교회의 노쇠한 수장으로 여겨질 뿐이었다.
그런데 성당에 다니는 언니가 이 책을 우리 집에 놓고 갔다. ‘영성’, ‘기도’, ‘신학’ 등등의 용어로 들어찬 교황에 대한 용비어천가일 거라고 막연히 짐작했는데, 뜻밖에 이 책을 쓴 사람은 교황을 취재 대상으로 여기는 독일인 해외특파원이었다. 앞 몇 페이지를 읽으니 그는 ‘예수는 평생을 맨발로 걸어 다녔는데, 어부의 후계자라고 자부하는 교황은 어떻게 금란이 수놓인 옷을 입고 호화궁전에서 살 수’ 있는지 갸우뚱하는, 말하자면 비판의식이 먼저 앞서는 사람이었다. 그 시각이 마음에 들어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사실 교황보다는 그 기자의 취재 환경 내지는 언저리뉴스가 흥미를 끌었다. 하우스메이트인 동성애자 수사, 교황전용기 안에서 컴퓨터를 충전하기 위해 화장실 콘센트를 차지하려고 애쓰는 기자들, 카메라 받침대와 기자들에 의해 마구 짓밟히는 정성들여 가꾼 화단, 비행장에서의 의식에 소음이 끼어들지 못하게 모터를 작동시키지 않아 찜통같이 뜨거운 비행기, 저널리즘이 아니라 센세이셔날리즘을 추구하는 각 언론의 편집국장 내지는 데스크들, 하늘 높이 날고 있는 헬리콥터에서 줄곧 공구상자를 들고 뭔가 고치러 돌아다니는 부조종사를 보며 불안해하는 기자들, 대중 미사 때 모여들어 환호하는 어마어마한 인파를 뚫고 통로를 만드는 방법 등은 매우 매력적인 이야깃거리였다.
그러나 책장을 넘길수록 나는, 늘 비틀거리며 어눌한 목소리로 뭔가 낭독하는 역할 외엔 역사에서 주어진 게 없다고 생각했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평화’라는 일관된 메시지를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에 대해 조금씩 마음을 열어갔다. 그 수많은 군중과 카메라들 틈에서도 묵상을 할 수 있는 그의 내면, 이슬람과의 포옹, 통곡의 벽 앞에 서의 기도, 그를 이용하려는 각국의 정치가들과의 밀고 당김..... (헤게모니를 보여주기 위해 그 노인을 비행장에서 끝도 없이 걷게 했던 클린턴은 정말 야비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이제까지 생명과 평화의 메시지, 용서와 화합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어려운 걸음걸음을 떼어 놓았다. 나는 무엇보다도 교황이 다른 종교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부분에 감동했다. '내 탓이오' 라는 성명이 나오기가 참으로 힘이 들었구나....
그러나 카톨릭에서 여성 사제는 아직도 인정되지 않는다. (얼마 전, 우리나라에서의 YMCA 에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여성들이여, 일을 하라, 그러나 그대들의 참정권은 인정되지 않는다. 그대에게는 봉사의 책임과 의무만이 있을 뿐이다!) 이 문제에 대한 교황의 태도는 너무 나이브하다. 사제의 지위를 맡지 않는다는 것 (실은 맡지 못한다는 것)이 여성의 지위를 깎아내리지도, 차별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라니...... 눈보라 속에서 길을 걷는 것과 창 밖에 치는 눈보라를 보며 커피를 마시는 것이 천양지차이듯 차별받는 당사자의 괴로움과 수치심을 차별하는 사람들은 모른다.
끝없이 분쟁만 일어나는 이 세상에서 카톨릭은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이기심에 사로 잡혀 영성과는 상관없는 ‘종교생활’만 하는 신자들, 부패와 성추행의 악령에 사로잡힌 성직자 사회..... 그런 의미에서 나는 감기로 입원했다는 교황이 하루 빨리 낫기를 기원한다. 그는 이 세상에서 아직 할 일이 많은 것 같다. 이 책은 그에 대한 나의 기대치를 높여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