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보자를 위한 살인 가이드
로절린드 스톱스 지음, 류기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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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포주의)

삶의 모든 면을 통제하던 남편 헨리가 죽고도 그에게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조용하고 심약한 메그, 화려한 패션감각의 소유자이자 남모를 비밀을 갖고 있는 대프니, 호탕한 웃음소리과 당당한 태도를 보이지만 자메이카에 두고온 딸과 교사 시절 만난 학생과 관련한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그레이스. 그동안의 인생에 접점이 없어 보이던 일흔이 넓은 세 여자. 그저 필라테스 강좌를 함께 듣는 사이였던 이들은 카페에 모여 있다가 니나라는 아이를 만난다.

한눈에 니나를 구해야 한다는 걸 알아본 세 사람. 아이가 숨자마자 카페로 들어와 '딸'을 찾던 험악한 남자로부터 할머니들은 거짓말로 니나를 지켜낸다. 그리고 가까운 메그네 집에서 아이를 보살피려고 한다. 니나를 보호하려는 마음 하나로 움직이지만, 니나는 이 험악한 남자 '두꺼비'에게 다시 잡혀가고 말고, 이 온순한 세 할머니는 니나를 구하기로 결심한다. 그러기 위해선, 두꺼비를 죽여야한다. 살인에는 초보지만, 인생에선 초보가 아닌 할머니들의 대담한 선택이다.

니나를 구하는 여정에서, 네그와 그레이스, 대프니는 자연스럽게 서로를 이해하고 연대하게 된다. 일흔이 넘은 여자들이 겪는 공감대부터 각자가 갖고 있는 트라우마까지. 스스로의 속도로 말하고 또는 기다려주며 발을 맞춰나간다. 그 과정에서 그레그, 수재나, 데스 등이 합류하며 "늙은 흑인 여자 두 명, 노숙인 두 명, 전과자 한 명"은 제각각의 형태로 용기를 보여준다. 아주 작고 사소한 용기라도 낼 줄 알아야 하는 법이다.

후반부에 메그가 납치됐을 때는 살짝 늘어지는 감이 들긴 했다. 이미 두번이나 니나를 구하기 위해 시도했고, 마무리되려던 찰나 굳이 메그가 그곳에 잡혀가서 나오는게 필요했을까? 싶었던...그냥 안전한 곳에서 네 사람의 대화도 보고 많이 보고 싶었는데. 물론, 말이 아니라도 설명되는 무언가가 있긴 하지만. 마치 드라마처럼 세사람, 그리고 니나까지 과거와 트라우마가 반복되어 조금씩 나오기 때문에 한번씩 곱씹어야 온전히 이해가 가능할 때도 있다. 개인적으로 '호'라고 느낀 것은 이들이 겪은 일들을 말할 때 직접적인 묘사를 최대한 자제한다는 점(그래서 말이 길어질수도 있다). +나무를 보고 추리하는 부분이 특히 좋아서, 더 부각되지 않은게 아쉬울 정도.



그래서 나는 우리의 대화를 들으며 삐끗하는 음이 들리는지,
누가 해선 안 될 말을 꺼내는지, 이탈하는 음은 없는지를 귀기울여 들었다.
그런 음은 들리지 않았다.
셋이 모두 동의했고 그건 좋은 일이었다.
사소한 내 불안은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었다.
내가 아는 한 우리는 모두 준법적인 사람들이었다.
다들 일흔이 넘었지만 선량한 시민이었고, 분리수거도 잘하고,
임산부에게 버스 좌석도 양보하는 사람들이었다. - P15

아니, 그렇지 않아.
우리 늙은이들은 그렇게 말할 것이다.
아니, 그렇지 않아. 모든 건 변한단다.
하지만 그렇게 말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들은 우리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
그건 크리스마스의 산타클로스를 믿는 것 같은 일이니까.
자기는 다를 거라 믿는 젊은이들을 우리는 내버려둔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는 분명 다를 거라고 생각했던 옛날이 떠오르므로. - P84

니나는 처음부터 특별했다.
사랑 같은 건 없어, 그건 그냥 사회적 구조야.
헨리는 말하곤 했다.
나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몰랐고, 생각하면 할수록
헨리 역시 모르긴 마찬가지라는 확신이 들었다.
주간지 어디서 주워들은 소리겠지.
나는 사랑이란 게 있다고 생각한다.
늘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니나를 거의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사랑했다.
···세상엔 온갖 종류의 사람이 있는 법이니까요.
니나는 그렇게 말한다.
나를 진지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그렇게나 확신에 차서 말을 한다.
나는 니나의 말을 듣는 게 좋다. - P146

사건의 냄새 때문에 나는 코가 간지러웠고 절망적인 기분이 들었지만,
이 문제를 모두 함께한다는 게 진정 도움이 되었다.
진부한 표현이 아니었다.
함께할수록 강해진다.
우리가 아무리 다른 사람들이더라도, 상황이 아무리 심각하더라도
우리는 함께할 때 강해진다.
나이도 많고 배짱도 많구나, 나는 생각했다.
나이와 배짱. 이상한 날에 하는 이상한 생각이었다.
우리가 누군가를 죽이기로 서약했다는 사실이 새삼 다시 떠올랐다.
예전에는 왜 이런 해결책을 생각하지 못했는지 자못 이상했다.
주님은 아신다. 내 인생에는 죽이지 못한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 P167

각자의 사연을 서로에게 짐 지우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이건 여성들이 짐을 이는 방법일 것이다.
우리는 사연의 무게를 함께 견딘다.
"이번엔 제대로 할 수 있을 거야." 내가 말했다.
"우리는 승리할 거야." - P278

대부분의 사람들은 물론 "그냥 가지 왜 안 갔어요?"라고 물을 것이다.
당신들은 헨리 같은 사람과 살아본 적이 없잖아요.
그게 내가 말할 수 있는 전부였다.
나처럼 결과를 감당할 게 아니라면, 누군가를 굳이 화나게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지푸라기 한 올이 낙타의 등을 부러뜨린다고 한다.
별생각 없이 쓰는 표현이지만 그건 정말 존재하는 일이며 바로 그날 일어난 일이었다.
그가 그렇게 야유하며 말하는 바람에 내 마음은 산산조각이 났다. - P360

"어떤 일들은 할 만한 가치가 있지." 그레이스가 말했다.
대프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이 일을 넘어섰으면 좋겠어.
그 사건의 어떤 부분에도 머물지 말고.
그 일들은 나를 정의하지 못해. 두려움과 경험에 질식당해선 안 돼." - P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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