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번 날게 하소서 - 이어령의 서원시
이어령 지음 / 성안당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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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시'라는 표지에 쓰인 말 때문에 생전에 이어령이 쓴 시들을 묶었겠거니, 했다. 진지하고, 어려운 글이 아닐까 걱정했지만 이어령의 글은 역시나 간결하고, 군더더기 없다. 그의 글은 내 무지를 깨닫게 하는 동시에, 생각을 하게 만든다.


실수에서 비롯됐지만 고전(?)이 된 뽀빠이와 낙타, 지하실과 개구멍으로 보는 동양과 서양의 차이, 거북선의 승리를 관계론적 사고 덕분이라고 보는 것. 그가 말한대로 머리로 생각한 것을 얘기하는 '온리원의 사고'를 실현한 사람이 바로 이어령이 아닐까. 장의 구분을 두지 않고 이어지는 이야기는 자연스럽고, 기존에 알던 이야기도 그가 하면 새롭고 재밌다. 무엇보다 '국물문화'와 '게구멍'을 어떻게 한국적인 것으로 치환시킬 수 있는지 말이다. 성이 아니라 길이 필요하다는 그의 마지막 말은 현 시점에서 곱씹어볼만하다.



빨강색 연필로 토끼를 그린 톨스토이의 그림을 보고 어른들이 놀렸다.
"얘야, 세상에 빨간 토끼가 어디 있니?"
그러자 톨스토이는 이렇게 답했다.
"세상에는 없지만 그림 속에는 있어요."
세상에는 없지만 그림 속에는 존재하는 것.
그것이 이어령이 발견한 문학예술의 창조적 세계다. - P17

한마디로 건물이나 교량 같은 목표물을 파괴하는 정보기술은 상상을 초월한 만큼 발전한 데 비해
모슬렘 문화에 대한 정보는 거의 백지나 다름없었다.
후세인을 체포하는 데 실패한 이라크전에서도
사람을 잡는 데 정밀하다는 유도탄이 무용지물이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정보기술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유도탄같이 기계를 다루는 하드웨어의 정보기술이요,
또 하나는 상대방의 문화나 인간의 마음을 읽는 소프트 콘텐츠에 관한 것이다.
전자를 기계 기술, 후자를 지식 기술이라고 구별하기도 한다. - P40

인간은 벽을 만들었다.
허허벌판에서는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벽 속에서는, 감옥이나 동굴에서처럼 살아갈 수 없다.
벽에 의지하고 벽에 반발하는 앰비버런스ambivalence(모순)에서 회화가 생겨난다.
그림은 벽에 뚫어놓은 마음의 창이기 때문이다.
창을 벽의 상처라고 말하듯, 그림 또한 피가 흐르는 벽의 상처인 것이다. - P69

아이들은 자기 발에 안 맞는 어른 신발을 왜 굳이 신고 다니려고 하는 것일까.
잘못하면 걸려 넘어질 수도 있고, 걷기에도 거북한 신발을 질질 끌면서 왜 그렇게 흡족한 웃음을 지었던 것일까.
미키마우스의 커다란 신발에는 자신의 작은 발로는 결코 다 채울 수 없는 헐렁한 공백이 있다.

이 공백이야말로 땅의 현실로는 다 채울 수 없는 하늘의 공간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신발을 잃어버린 가위눌림 같은 그런 악몽이 아니다.
미키마우스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만들어내는 꿈과 창조적 사고를 그 공백 속에 숨겨두고 있다. - P106

···우리만 빼고 닫는 서랍의 쌍방향성, 그래서 ‘빼닫이‘라고 한다.
그런데 어쩌다 우리는 학교를 ‘배움집‘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말이요
순수한 우리 생각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여기게 되었는가.
거북선을 가르치고 배우면서도 그와 싸운 일본 배에 대해서는 가르치고 배우려 하지 않는가.
실체론에서 관계론으로 다시 생각을 바꿔야 하는 시대가 우리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 P127

도시의 경우, 서양은 체계화된 바둑판처럼 되어 있지만,
동양의 도시는 인간들을 싼다고 생각한다.
도시가 보자기처럼 사람들을 싼다.
그래서 거기에 집이 먼저 있고, 그리고 길이 생기게 된다.
서양은 길이 있은 다음 길거리에 집을 넣는다.
넣느냐 또는 싸느냐의 관계에서 볼 때, 서양은 넣는 문화고 우리는 싸는 문화라고 할 수 있다.
- P154

반찬은 밥의 텅 빈 맛 때문에, 그리고 밥은 반찬의 맵고 짠 자극적인 맛 때문에 싱싱하게 살아난다.
···밥 없이 김치만 먹어보면 그 사실을 금세 알 수 있다.
너무 짜고 매워서 어떤 음식이 들어와도 입안이 얼얼하고 감각이 마비되고 만다.
시詩를 아는 사람만이 반복되는 운율의 맛-동질성 안에 있는 차이의 맛을 알 듯이,
밥을 아는 사람만이 김치 맛의 절묘한 운율을 듣고 맛볼 수 있다. - P186

한마디로 기계를 움직이는 기술보다 그 기계를 어디에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사용하여야 하는가 하는 문제,
그리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문화에 더 많은 힘이 실려 있다. - P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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