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곽 -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의 상실 혹은 단절 윤곽 3부작
레이첼 커스크 지음, 김현우 옮김 / 한길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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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의 상실 혹은 단절"

영국의 소설가인 책의 주인공이 글쓰기 강좌를 위해 몇 주간 아테네로 떠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아테네라는 배경 외에 그 이전과 이후에 속한 주인공의 이야기는 거의 없다. 놀랄만큼 화자는, 이야기 내내 별말이 없다. 때때로 화자의 반박이, 현실이 잠시 치고 들어오지만 이내 타자의 이야기로 되돌아간다. 첫인상과 다르게 눈살 찌푸려졌던 비행기 옆자리 남자로 시작해 동료, 편집자, 수강생 등 그들의 이야기에 그저 귀기울일 뿐이다.

중반부쯤 책을 읽었을 때의 인상은 어쨌거나 내 취향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는 것이었다. 장르는 소설 (그것도 장편)이나 묘사가 뛰어나게 아름답거나 매력적인 서사로 몰입도를 높이지는 않는다. 중심이 없거나 현실감 없는 이야기에 별로 끌리지 않는 나로서는 그저 주인공의 시선을 따라 지나칠 수 밖에 없는 로드무비 같았다. 말하는 이들의 감정이 드라마틱하게 전달되는 부분이 적고 독백같기도 해 오히려 서늘하기까지 하다.

후반부까지 일관되게 지속되는 이러한 흐름을 찬찬히 따라가다 보면 마치 화자가 된 것 처럼 그들의 두서없는 이야기를 그저 듣게 (아니 읽게) 된다. 어디서 태어났으며 직업은 무엇이고 현재 나이가 어느 정도인지도 정확히 파악되지 않는 상대의 상당히 부분적인 이야기는 상상력을 자극하기도 한다. 뚜렷한 답이 없는 자신만의 윤곽을 완성하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그와 아내는 10대 때 만나서 약혼했다.
한 번도 말다툼을 하지 않았지만, 딱 한 번 말다툼을 했을 때 둘 사이의 모든 것이 깨지고 말았다.
아이는 둘이었고 부부는 함께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
아테네 근교에 저택을 마련했고, 런던에 아파트가 있고, 제네바에도 집이 한 채 있었다.
말을 샀고, 스키 여행을 다녔으며, 에게해에 정박해둔 약 12미터짜리 요트도 있었다.
두 사람은 아직 젊었고, 덕분에 재산이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거라고,
삶이란 그렇게 확장되는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삶이 더 커질 때마다 그것을 담기 위해 이전의 그릇들을 하나씩 깨나갔다. - P17

그 만남은 어떤 의미에서는, 비물질적인, 지상을 벗어난 곳에서 이루어진 것이어서, 물건들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고 우리 두 사람의 차이도 드러나지 않았다. 옆자리 남자의 물질적인 실체, 하늘 위에서는 그렇게 가벼워 보였던 그 실체가 지상에서는 구체화되어 있었고, 그 결과 그가 더 낯설어 보였다. 마치 그를 만나는 상황 자체가 일종의 구속이 되는 것처럼. - P71

가끔은 제가 베를린에서 돌아와 느꼈던 피로감이 사실은, 그 여성들 모두가 느끼고 있던 집단적 피로감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그 여자들 본인은 피로감을 느끼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저한테 떠넘긴 게 아닐까 하고요.
···신호등 같은 데 걸려서 달리기를 멈춰야 할 때면, 새하얗고 커다란 운동화를 신은 채 제자리에서 계속 뛰다가, 신호가 바뀌면 다시 앞으로 나아가는 거예요. 달리기를 하지 않을 때면 고무 밑창을 댄 굽 없는 신발을 신었는데, 아주 실용적이면서 아주 못생긴 신발이었죠.그 여자들 몸에서 제일 덜 우아한 게 바로 그 신발이었어요. - P135

사람들이 본인들이라면 절대 꿈도 꾸지 않을 일들을 다른 사람에게 열심히 권하는 것이 재미있었다.사람들은 열성적으로 그를 파멸로 몰아넣었다. 심지어 가장 친절한 사람들,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들도그의 관심사를 진심으로 생각해주지 않았다. 그들은 훨씬 더 안전하고, 훨씬 더 속박이 심한 곳, 탈출이란 것이 현실이 아니라 그저 가끔씩 꿈꿔보는 그런 것에 불과한 자리에서 그에게 조언하고 있었던 것이다. - P188

그녀 본인으로 말하자면, 바로 그런 식으로 솔직한 태도를 취함으로써 남자들에 대한 환상을 깨고 바닥을 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녀를 죽을 만큼 사랑한다고 말했던 남자들이 바로 다음 순간 대놓고 그녀를 모욕하곤 했는데, 어떤 의미에서는, 바로 그렇게 서로 솔직해지는 순간이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이 실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 수 있는 순간이었다. 그녀가 견딜 수 없는 것은 어떤 종류의 가식, 마치 실제로는 단지 그 순간에 그녀를 이용하고 싶을 뿐인 어떤 남자가, 마치 그녀를 온전히 원하는 것처럼 행동하는 거라고 했다. 그녀 본인도 기꺼이 다른 사람을 이용하려 할 때가 있지만, 서로 그런 의도를 인정한 후에만 그렇게 한다고 그녀는 말했다. - P218

하지만 스타브로 씨의 어미 개, 덩치카 크고 비호감인 그 개에 대한 거부감이 더 컸어요. 그래서 ‘안 되겠어요. 저희는 개를 키울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죠. 아무튼 개를 보여준 건 감사하다고 말했고, 그는 그대로 돌아갔어요. 아이들은 아주 실망했죠. ‘엄마는 늘 일을 망치기만해‘라고 아들이 말하더군요. 바로 그 순간, 강아지가 아이들에게 부렸던 마법이 완전히 풀렸을 때 저도 이성을 되찾았고, 그와 함께 현실 감각도 되돌아왔어요. 그 느낌이 어찌나 냉혹하고 강력하던지 우리가 서 있는 집의 지붕이 날아가버린 것 같은 느낌이더라고요. - P251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어느새 다른 작가들의 작품에 대해서도 똑같은 작업을 하고 있었고, 심지어 대가들의 작품, 언제나 존경해 마지않았던 작가들의 작품도 대부분 요약이 가능했다. 심지어 그녀가 신처럼 모시는 베케트의 작품들도 의미 없음이라는 단어로 무너뜨릴 수 있었다.···본인도 그것이 일종의 문화병임을 알고 있었지만, 어느새 그 병은 자신의 내면을 장악해 심지어 스스로에 대해서도 요약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어차피 앤의 삶이라는 표현으로 다 정리가 될 텐데, 하루하루의 구체적인 실존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 P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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