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2
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김춘미 옮김 / 비채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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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란 참 이상하다. 목적도 마음도 그대로 드러난다.
유키코의 온갖 것이 목소리에 깃들어 있는 것 같고 그 모든 것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알 수 없지만,
그 목소리는 사람을 잘 설득한다.
귀에 쉽게 들어오고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하나도 없는데,
그래도 여전히 설명으로는 다 할 수 없는 부분이 조금 남는다.
그 조금 남아 있는 것이 사람을 매료시킨다.
말의 의미 그 자체보다도 소리로서의 목소리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게 아닌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지, 유키코의 목소리가 들리면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유키코의 목소리를 모아두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62p)


"간단하고 간결하다는 것은 사람을 가리지 않지.
어떤 구조로 되어 있는가 설명하지 않아도 어떻게 사용하는지 저절로 알 수 있느니까 말이야.
건축에서 사소한 장치를 생각할 때도 사는 사람과 쓰는 사람이 그 장치를 스스로
발견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이상적인 거야.
취급 설명서 따위 붙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 훨씬 더 우위라고." (134p)


생각보다 결코 가볍게 읽히지 않는 소설이다. 유독 띄엄띄엄 읽어서 그런지 꼬박 일주일도 넘게 걸려 읽었다. 아무래도 건축과 일본 문화에 대한 생소한 용어들과 건축을 주제로 삼고 있는만큼 공간을 설명하고 또 그것을 이해하는데 부딪히는 한계가 있어서 아쉬웠다. 처음에는 인물들의 이름을 (자리 배치대로) 적어가면서 보기도 하고 묘사되는 집들을 그려보기도 했지만 실력의 한계가 있어 그림(도면)이나 에니메이션으로 등장해도 좋을 듯 싶다. 



아르바이트를 막 시작했을 때 1센티미터 폭 안에 2밀리미터 간격으로 선을 긋는 연습을 했다.
음표 없는 긴 오선보가 완성되어갔다.
보통 선, 흐리고 가는 선, 짙은 선. 세 종류의 오선보다.
우치다 씨한테 점검받아 트레이싱페이퍼에 닿는 연필심의 각도와 팔의 움직임을 조정한다.
그것만 가지고도 선의 굵기와 농담 차가 깨끗이 정돈된다.
미끄러지듯이 움직이는 우치다 씨의 손을 보고 있어도, 어디에 어떻게 힘을 넣는지 알 수 없다.
팽팽하게 긴장된 선, 가볍고, 딱딱하고, 부드럽고, 아무하고도 비슷하지 않은 소리가 난다. (146p)


잘 다루지 못하는 새 노를 손에 들고, 구명조끼도 입지 않은 채, 나는 작은 보트를 젓기 시작하고 있었다.
곁눈질하다가는 금방 밸런스를 잃고 말 것이다.
보트는 어느 틈엔지 온화한 만을 빠져나가 망망한 큰 바다의 일렁임 속에서
어설프게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고 있었다. (215p)


 그러나 분명 소설에 가득한 여름기운은 독자의 마음을 맑게 만들고 건축에 대한 관심과 경외를 갖게 하기에 충분하다. 가루이자와 여름 별장에서의 몇달일 뿐이지만 그 역사는 '나'뿐만 아니라 읽는 모든이의 뇌리에 강렬하게 남을만큼 푸르고 또 푸르다. 아오쿠리 마을의 매미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듯 하다.  노장의 건축에 대한 철학과 열정, 다양한 방면에 대한 설계실 사람들의 세세한 묘사들은 비단 건축이라는 분야를 떠나서 새롭고 흥미를 자아낸다.



일흔이 지나서 선생님은 왜 이때까지 하지 않았던 새로운 형태를 이 세상에 내보내려고 하는 것일까?
새삼스럽게 이상하게 느껴졌지만, 선생님 속에도 그 이유를 설명할 말이 없는지 모른다.
자연의 형태나 색채가 합리적인 이유만으로 태어났다면 예컨대
꽃에게, 새에게, 나무에게 이다지도 많은 종류와 변호가 초래되었겠는가. 
박새의 가슴께에 흑백으로 그려진 무늬는 왜 그렇게 새겼는지, 각각의 개체로는 알 수 없을 것이다.
형태나 색은 그것을 지니는 자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먼 옛날부터 시간을 들여 찾아왔고, 그냥 계승되어가는 것이다.(328p)


- 그런 일을 되풀이하고 있는 동안에 자기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하고 싶지 않은지, 점차 모르게 돼. 알겠나?
- 네.
- 말도 안 되는 것에 밀릴 때도 있겠지. 상대방이 있는 일이니까.
다만 마지막에는 밀린다 해도 자기 생각은 말로 최선을 다해 전달해야 하는 거야.
그렇지 않으면 자기가 생각하는 건축이 아무 데에도 없게 돼.
자기 생각을 자기 자신조차 더듬어갈 수 없게 된다고.(353p)


 스톡홀름 시립도서관과 그 곳의 건축가 군나르 아스플룬드 등 실제의 건축물, 건축가들이 언급되는 만큼 어디까지가 가상의 소설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에서 차용한 예시들인지 잘 확신이 서지 않는다. 저자가 얼마나 건축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평소에 (굳이 조사할 필요가 없었다고 하니) 공부해왔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역자의 말이 이렇게 고마울 데가 없다. 실제로 '선생님'의 모델이 된 건축가 요시무라 준조에 대한 언급부터 일본에만 존재하는 용어인 '시니세'와 그로 인해 '나'가 마리코와의 사이에서 느꼈던 위화감을 설명하는 등 굉장히 유용했다.


  우리는 때때로, 꽤 자주, 아니 거의 모든 순간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에 무관심하다. 시간을 보내는 만큼 조금의 애정과 주의를 기울여 살펴봐야 겠다고 또 한번 부질없이 마음을 먹어본다. 관심과 시간이 재능과 타고난 감각을 뛰어넘는 때가 나타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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