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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천국 노회찬 - 맛집에서 나눈 ‘노회찬의 삶과 꿈’
이인우 지음 / 일빛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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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저는 노회찬의 고등학교 동기입니다. 저희 학교 교훈은 '자유인, 문화인, 평화인'입니다. 저희 동기들에게 전한 독후감을 여기도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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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애들은 게임을 열심히 한다. 엄마들의 신념에 찬 방해에도 아이들이 줄기차게 게임을 하는 이유는 게임이 재미있어서이다. 음식천국을 읽으며 문득 노회찬이 인생을 참 재미있게 살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거의 같은 시기에 살아왔던 우리 72회 동기들이 한번 이 책을 읽고 과연 나는 인생을 얼마나 재미있게 살았는지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다.


소위 ‘게임학(ludology)’에서 게임이 재미있는 이유는 크게 3가지 이유라고 한다. 첫째는 자기주도성(self-determination)이고, 둘째는 실현가능한 목표(achievable goals)이고, 셋째는 가장 중요한 건데 ... 천천히 얘기하자.


먼저 자기주도성에 대해서 얘기하면, ‘음식천국’은 음식점을 선택하고, 음식을 선택하는 것에 대한 얘기이다. 자기 인생 진로 선택에 있어서 우리 동기중에 노회찬만한 자기주도성을 발휘한 친구가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노회찬은 사회주의자가 되기로 결심했고, 일생을 통해 그것을 실천하였다. 사회주의의 가치에 대해서는 우리 동기들중에 반대하는 친구들이 더 많으므로 여기선 얘기하지 않기로 한다.  그러나, 자기주도적으로 선택한 그 목표를 ‘결벽주의’라 할만큼 일생동안 견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고, 그만큼 고통이 크지만, 기쁨도 크다. 나는 선봐서 결혼했고, 경기 들어가고, 대학 학과 택하고, 학위를 받고, 이후 직장 가지게 된 것 모두 내가 치열하게 고민해서 결정한 거라기보다는 여러 가지 상황을 거스리지 않고 휩쓸려간 것으로 생각된다. 그만큼 기쁨과 재미도 덜하다.


어떤 행위의 동기는 외적동기와 내적동기로 구분된다. 외적 동기란 돈, 지위, 명예 등 상대적인 가치의 보상을 기대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대부분 외적 동기에 의해 무엇을 선택한다. 그 선택은 행복 탄력성(happiness resilience)이 낮다. 즉, 점점 더 높은 강도를 요구한다. 내적 동기는 왠지 모르지만 좋아서 하는 것을 말한다. 내적 동기에 의한 것은 보상이 아니라 그 행위 자체가 행복을 주므로 행복 탄력성이 유지된다.


노회찬이 내적동기에 이끌려 살아왔듯이, ‘음식천국’ 음식점의 주인들은 내적 동기를 가지고 행복탄력성이 우수한 음식을 만든다. 그들은 ‘조금 더, 한번 더, 몇 분 더 신경을’ 써서 만들어서, 그 음식을 생각하면 절로 침이 고이는... 그런 음식점은 ‘동네 뒷골목에 수줍은 듯 숨어있’고, 노회찬은 그런 음식을 찾아 즐기는 ‘방랑 식객’이었다. 평소 ‘먹기 위해서 산다’고 했다고 한다. 사회주의자가 음식을 얘기한다는 것이 언뜻 이해가 가지 않을지 모르지만, 영국 노동당에도 ‘크리스마스에는 빵보다 포도주를’ 말이 있다고 한다.


게임학에서 재미의 두 번째 요소는 실현가능한 목표이다. 게임에서 등급이 하나하나 올라갈 때, 새로운 실현가능한 목표가 생기고, 심지어는 실패해도 ‘즐거운 실패’가 가능하다. 노회찬 일생을 볼 때, 이 부분에서는 나는 낮은 점수를 줄 수 밖에 없다. 그의 목표는 사회주의자로서 사회주의적 가치를 우리나라에서 실현하는 것이었다. 즉, ‘진보의 세속화’였다. ‘토지를 많이 소유하는 것보다 토지(박경리)를 많이 읽은 것이 부자’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30만원 안팎의 월급을 받으며, 사회에 투입되던 80년대 초반에, 그는 용접을 배워서, 위장취업하였다. 사회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니가 625를 알어’로 시작하는 레드 컴프렉스로 가득찬 대한민국에서 ‘실현가능한 목표’가 아니었다. (독일에서는 사민당 (Sozialdemokratische Partei Deutschlands)이 1969년에 집권하였고, 영국에서는 1881년 설립한 사회민주동맹(Social Democratic Alliance)에서 출발한 노동당이 1929년에 집권하였다지만...)


노회찬의 이 목표를 우리 72회식으로 풀어보면, ‘모든 시민이 자유인, 문화인, 평화인 되게 하기’라고 생각한다. 노회찬 자신이 자유인, 문화인, 평화인인 것은 많은 친구들이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노회찬의 진짜 목표는 모든 시민이 그렇게 되는 것이었다. 누구나 악기하나쯤은 다룰 수 있는 나라. 새벽에 6411 첫 차를 타는 분들이 더 이상 투명인간이 아닌 나라.


삶의 모든 면에서 민초들이 자유인, 문화인, 평화인이 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음식을 즐기는 것에 있어서는 ‘자유인’ ‘문화인’ ‘평화인’이 비교적 되기 쉽다고 생각한다. 음식은 우릴 자유인이 되게 한다. 누구나 짜장면이 좋은가, 짬뽕이 좋은가 선택할 자유가 있고,(심지어는 짬짜면까지) 밥을 먹고나면 ‘배고픔에서부터의 자유’를 얻게 된다. ‘김밥천국’이 아니고, ‘음식천국’을 즐긴다면 그는 문화인이다. ‘김밥천국’이 빨리빨리를 상징한다면, ‘음식천국’의 음식들은 대부분 ‘느림의 미학’을 지향한다고 볼 수 있다. 주인들은 2대, 3대째 세습(^^)하고 있다. 이들에게 직접 쑨 메주를 5년이상 묵혀서 사용한다는 정도는 흔하다. 문화는 인류의 행위가 켜켜히 쌓인 것이다. 노회찬의 문화사랑, 음식사랑도 함경도에서 월남한 부모님의 영향이 크다. 아들이 노동운동을 시작하자, 어머니는 노동운동 신문기사들을 스크랩하셨다고 한다. 음식을 ‘밥 먹을 때는 개도 안건드린다’라는 말이 있듯이, 식사를 하는 시간에는 평화롭고 숭고한 ‘평화인’이 된다. 우린 상대와 평화로운 관계를 가지고 싶을 때, ‘밥 한번 먹자’고 한다.


게임학에서 재미의 3요소중 마지막 요소는 함께하기(relatedness)이다. 초기의 컴퓨터 게임이 주로 혼자하는 게임이었던 것은 그때 같이 할 수 있게 하는 기술이 없어서이고, 요즘 대부분 인기 게임은 멀티플레이어 게임이다. 요즘은 혼밥, 혼술이라는 말이 등장하였지만, 음식은 원래 같이하는 것이다.


‘음식천국’은 음식점과 음식을 선택하는 것에 대한 얘기이기 이전에, 노회찬에 대해 진한 추억을 가진 이들이 함께 식사하는, 21개의 옴니버스식 이야기이다. 노회찬에 있어서 함께하기 총량불변의 법칙은 통하지 않은 것 같다. 그와 같이 한 사람들의 폭은 태평양이고, 그 깊이는 마리아나 해구이다. 보수와 진보가 모두 좋아하는 정치인이었다. ‘그의 심장은 왼쪽에 있었지만, 두 눈은 세상 전체를 바라보았다.’ 그가 좋아한 말. ‘무감어수감어인(無監於水監於人), 물에 자신을 비추지 말고, 사람들 안에 자신을 바라보라.’


그가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음식점 주인들의 얘기로도 짐작할 수 있다. “안쪽자리보다는 문간 자리를 차지하셨어요.” “시시콜콜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어요.” 도올 김용옥이 ‘사람 예수’라고 한 모습은 곳곳에서 확인된다. 강서에서 출마할 때 시민들에게 ‘야생화 씨앗 봉투’를 나누어 주었다. 국회에서 여성의 날 장미 청소노동자 아주머니들에게 장미를 선물했다. (그의 영결식날 국회 청소 노동자들이 정렬해서 가는 길을 전송했다.)


노회찬 재단 고문단은 권영길, 천영세, 단병호, 이수호 등 강철같은 인생을 산 7학년 노장들이다. 고급 한정식집 호정에서 만났다. 전노협, 인민노련 등 우리가 젊을 때, 가까이 하기 두려웠던 일을 도모하던 이들이다. 그들은 노회찬을 남을 존중할 줄 아는 사람으로 기억한다. 노회찬의 2주기 추도사에서 권영길이 “노회찬, 노회찬, ...” 이름만 세 번씩 모두 아홉 번 불렀다는 얘기가 우리를 먹먹하게 한다.


서초동 법조타운 ‘이남정’에서는 삼성X파일 소송에 같이 했던 법조인들이 만났다. 2004년 새벽 2시까지 나도 보았지만, 10선이 되는 김종필을 밀어내고, 민주 노동당 비례대표 8번으로 노회찬이 국회의원이 된 것은 큰 사건이었다. 이렇게 단 국회의원 뱃지를 7개월만에 떼게 했던 삼성X파일 관련 소송을 그들은 ‘도둑이야!라고 외친 사람을 처벌하는’ 사건으로 기억한다.


그가 처음 ‘사용자’로서 가장 애정을 쏟았다는 매노(매일노동뉴스)에서 노사구분없이 같이 일했던 ‘노동자’들은 홍대앞 ‘불이야’에서 만났다. 그들은 사장님을 ‘씨를 뿌리는 사람’ ‘꿈과 희망을 주는 사람’으로 기억한다. 이종걸이 다방면으로 도와주었지만, 항상 월급날이 다가오면, 정리해고가 없는 회사를 유지하기 위해 사방으로 뛰어다녀야 했다고 한다. 1000호 기념회엔 민주노총 위원장은 물론이고, 진념 노동부 장관, 경총 부회장도 참석했다고 한다.


‘50년 불판을 갈자’는 말이 생겨난 영등포 길풍식당에는 노회찬이 국회의원이던 시절에 보좌관들이 모였다. 노회찬과 같이 할 때처럼 빈 멍게껍질에 소주를 담아 마실 때, 아련히 소주에 스며드는 바다향을 느끼며 노회찬을 추억하였다. ‘국회에서 가장 일을 많이 하는 의원실’으로 선정되었을 때 마냥 좋아하던 노의원을 눈을 흘기며 바라보았던 이들이다. 3번 국회의원이 되었지만, 너무 일을 많이 해서, 한번도 임기를 끝내지 못했다.


이건 음식점 얘긴 아니지만 요구르트 막걸리 얘기를 빼고 갈 수는 없다. 34살부터 3년간 있었던 청주교도소에서 식빵에 요구르트 부어서 막걸리를 만들어 먹었다고 한다. 의무실에 가서 갑자기 기력이 없다며 원기소를 구해 넣어 알코올 도수를 2도는 높였고, 면회온 사람들에게 요구르트 200병 넣어 달라고 했다고 한다. 이렇게 사귄 대도 신창원이 영치금을 모아 의원 후원금을 보냈다고 한다.


효자동에 있지만 지번으로 찾을 수 없는, 즉, ‘번지없는 주막’인 ‘쉼’에서는 조선일보 기자를 포함한 기자들이 만났다. 이곳은 둘이 가면 어깨가 부딪칠 것 같은 좁은 입구를 10미터 넘게 들어가서 만날 수 있는 동굴속 느낌의 공간이 나온다. 만섭이가 노친네(노회찬의 친구들)이라고 부르는 72회 친구들과 나도 가본 곳이다. 장석의 숨굴을 만날 수 있다. 나는 언젠가 그곳에서 기타 싱얼롱을 하면서 밤을 새울 생각이다.


이 책의 후반부에는 우리 친구들 얘기가 나온다. 통인감자탕은 김창희가 쓴 ‘오래된 서울’에 나오는 집으로 ‘72회 노친네’들이 ‘쉼’으로 가기 전에 1차로 들리는 집이다. 여기서는 노회찬이 감자탕의 ‘감자’는 식물 감자가 아니고, 돼지 등골의 어떤 부위라고 했다는 얘기를 꼭 한번 해야 한다. 숨굴을 제공하는 넉넉한 장석과, 그와 함께 이우중고등학교를 만들어서 교육의 대안을 제시했던 정광필,(기억할랑가 모르겠는데, 72회 회갑잔치에서 춤판을 벌렸던 나의 두 아들 모두 이우출신), 만연체의 최만섭, 만섭이가 ‘독일 병정’이라고 부르는 쁘띠 72회 이성우(이 책의 발행인)가 그들이 오래전 만나던 자신들의 사상적 고향 향린교회를 추억한다. 그러다가, ‘온화한 품격이 온몸에서 굴 향기처럼 풍기는 백미(白眉)의 신사’가 에어콘을 붙들고 난리부르스를 쳤다는 신촌의 ‘올드락’으로 넘어가기도 한단다.


정말 맛집이 많은 내 고향 통영 얘기는 이 글에서 밀렸다. 거제도를 포함해서, 통영의 맛집은 두 말 하면 잔소리이지 않은가? 장석이 과거 통영의 변방이던 거제도에서 오랫동안 싱싱 숨굴을 제공하고 있고, 김창희가 ‘아버지를 찾아서 – 통영으로 떠나는 시간 여정’을 썼고, 이 책에서도 노회찬이 사랑한 ‘마음의 고향’으로 소개하고 있다는 정도로만 얘기한다.


‘기백만큼은 충천한 젊은 예술가들’은 노회찬을 ‘성북동 막걸리집’에서 그를 기억한다. 그들은 2021년 4월 29일 ~ 5월 8일에 전주에서 열리는 전주영화제에서, 노회찬 도큐멘타리를 기획하고 있다. ‘노회찬 6411’ 등 4편의 노회찬 특집 다큐멘타리 영화가 소개된다고 한다. 우리 한번 전주에서 5월초 조금은 쌀쌀한 밤에 푸른 잔디밭에 텐트치고, 노회찬의 발명품인 소폭을 나눠 마시며, 밤새 노회찬을 만나러 달려가 볼까나? 노회찬이 얘기하던 夜深星逾輝(야심성유휘, 밤이 깊을수록 별은 더욱 빛난다.)를 확인하러...


2021. 4. 16 서덕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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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의 귀환 - 누구나 아는, 그러나 아무도 모르는
제이슨 바커 지음, 이지원 옮김 / 경희대학교출판문화원(경희대학교출판부)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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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0년대 말 런던의 값싼 술집들은 대륙에서 쫒겨온 이상주의적 망명자들이 각자의 꿈을 나누는 곳이다. 그 술집의 테이블 하나하나는 세계 혁명의 소우주이다. 러시아 출신 아나키즘의 아버지이자 대책없는 허풍쟁이 바쿠닌, 강남좌파이자 강남스타일 오빠인 엥겔스와 같은 공산주의자들은 모든 나라에서 박멸하려고하는 위험분자였다. (마르크스가 자본을 쓰기 전에 공산주의자들이 존재했다.) 프랑스 혁명은 왕정에 대한 부르주아의 혁명이었을뿐, 프로레탈리아의 시대는 아직 열리지 않은 것이다.

이 책은 3부로 나누어지는데 1, 2부는 1840년대 말이고, 3부는 1870년대 초가 배경이다. 1, 2부는 자본을 쓰는 과정에서 숱한 찌질한 어려움을 그려내며, 그 과정에서 독자들이 답답함을 같이 느끼게 한다. 가정경제를 유지하기 위해 전당포를 수시로 드나들고, 밀린 방세와 온갖 외상값 독촉에 시달리고, 심지어는 항문근처에 난 종기로 인한 고통이 그를 괴롭힌다. 프로이센에서 파견된 비밀경찰의 감시에 대한 두려움이 갑갑함을 더한다. (이것은 정신병적 망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갑갑함은 초기 자본주의 시대의 무분별한 개발로 인한 공해와 비위생적인 배경과 저자의 현란하고 현학적인 영국식 아이러니와 완곡어법 문체와 함께 섞어찌개의 진한 국물 맛을 낸다. 여러 나라의 언어도 마구 섞인다. 부인 예니와 아이들의 독어와 프랑스어, 바쿠닌의 러시아어, 그리고, 마사지 방의 중국어까지...

이에 비해 3부의 분위기는 런던에 밝은 햇빛이 비치는 분위기이다. 1871년에 깨어보니, 마르크스의 집도 넓어졌고, ‘자본은 출판되었고, 무상교육이 실시되고 있고, 여권(女權)은 신장되었고, 뒷골목은 정화되었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꿈꾸는 프롤레타리아의 시대는 오지 않았고, 자본주의 사회를 부르조아들이 개량한 형태였다. 프롤레타리아에겐 낫과 망치밖에 없었지만, 속물인 부르조아들은 총을 가졌으므로 권력의 이동은 쉽지 않았던 거 같다. 파리 코뮌이 3일 천하이었듯이 공산주의 연맹은 항상 쫒겨다니고, 내부 반목도 있어서, 마르크스와 같은 수석이론가의 머리에서 나온 이상을 현실화할 힘이 없는 배회하는 유령이었다. 그에 비하면 자본주의는 리바이어단이 아니라 비시스템이며, 우연의 힘으로 움직이지만, 자정작용이 작동하였다. 마르크스가 노동자들을 위해 책을 쓰지만, 그들과 상종하기는 싫어하였다고 한다. 그것은 현실에 닿지 않는, 또는 공감이 배제된 이상론적인 추구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마르크스는 부인 예니와 가정부 헬레네, 세 자녀와 함께 프로이센에서 파리를 거쳐 런던에 정착하였다. ‘뭐가 맨달 닥쳐온다는 거야하는 예니는 허영끼가 있지만 매력적이다. 그녀는 귀족 집안과 결별하면서 사랑(부르조아 유대인 가정의 마르크스)을 택하고, 아이와 함께 대위를 만나서 남작의 미망인 행세를 하며 불륜을 저지르는 대담함을 가졌다. 극우성향이며 귀족주의에 물든 장교 애인 앞에선 좌파 이론을 역설한다. 런던의 쇼핑가에서 아이쇼핑을 즐기기도 한다. ‘맨날 자본이 이러니 저러니 떠들지만 말고 이제 자본을 좀 벌어보는 것은 어때요?’라고 하는 헬레네는 예니의 체스상대이자, 가정을 정상 가정(정상 식사, 청소 등)으로 돌아가게 하는 역할을 한다. 아이들은 계급투쟁놀이를 하며 자란다. 한 아들은 유아 사망, 또 한 아들은 가난으로 사망한다. 아들의 장례식에서 신부는 ‘... 종교는 (전도된 세계인식으로 이끌므로) 인민의 아편이다라는 설교를 한다. 실제로 딸 엘레아노르(1855~1898)는 후에 사회주의운동가로서 상당한 활동을 하였다. 마르크스는 다음 세대, 즉 딸의 세대를 위하여 자본을 저술하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책에 나오는 얘기는 아니지만 딸 엘레아노르는 40대 초반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이 책에서 나오는 여러 꿈에 빠져드는 과정은 현실과 연결이 느슨하다. 그러나, 깨어날 때는 현실과 분명하게 구별된다. 주로 달리는 기차가 허공에 던져지는 꿈이다. 이것은 맹목적인 발전하고 있는 자본주의 국가에 얹혀서 살아가고 있는 아찔함을 표현하면서, 마르케스의 마술적 사실주의적인 느낌을 갖게 한다.

엥겔스는 진화론은 과거에 대한 얘기이고, 자본론은 미래에 대한 얘기라고 하였다. 그런데, 헤겔이 말했듯이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깃들 무렵에야 비로소 날개를 펴고 날아오른다.’ (철학은 앞날을 미리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역사적 조건이 지나간 이후에야 그 뜻이 분명해진다.) 헤겔의 정반합으로 바라보면, 자본주의의 자정작용은 공산주의자들의 위협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해진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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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튜 아놀드와 19c 영국 비국교도의 교양문제 - 중간계급의 속물성과 자유개념을 중심으로
오형국 지음 / 독타피에타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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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선진국에서 국민 총생산(GDP)은 20세기 초반을 지나면서 급격히 올라간다.(100년 동안 거의 2천배 상승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럽이나 미국이 그전에 어땠을까? 19세기 중반에 프랑스의 유아 사망율은 30%이상이었고, 70%가 넘는 사람들이 평생 반경 10Km를 벗어나지 않았다면, 믿어지는가? 우리가 알고 있는 유럽이나 미국의 역사는 거의 상위 10%이내의 상류층의 역사이다.

매튜 아놀드는 1822년 나고 1888년에 죽었다. 그러니까, 10% 상류층에서 역사의 중심이 그 하위로 이동하기 시작할 때의 일이다. 오목사의 책은 산업혁명 후 부를 축적한 영국의 중간계급의 얘기이다. 재력으로만 계층을 나눈다면 충분히 상류였지만 그들이 가진 종교로 해서 정치적으로 중요한 직책을 맡지 못 하였다. 영국 국교를 믿는 자만 귀족이 될 수 있었다. 중간계급은 국교를 거부한 비국교도, 프로테스탄트(protestants, 저항하는 사람들)였다. 아예 메이플라워를 타고 미국으로 떠난 사람들은 그들만의 나라를 건설하였지만, 영국에 남은 이들은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의 윤리와 자본주의의 정신’으로 새로운 시대의 주역이 되어 가고있었다. 신일용의 만화책에서 나오는 파리 코뮨(1871)에서 보듯 역사의 중심이 더 하층부로 내려갈 수 있었던 것은 19세기 중반에 아놀드와 같은 이들의 투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번도 새로운 질서에 대한 꿈이 없던 시절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앞서 산업혁명을 얘기했듯 경제적인 부가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하는 19세기 중반부터 꿈과 그 꿈의 현실화의 시간 간격은 점점 짧아지고 있다. 오목사의 관심은 이때 신앙과 문화의 관련성에 관한 것이다. 오목사는 그의 그전 저서들의 제목이 의미하듯이 종교와 문화의 분리, 나아가서는 종교와 세속사회의 분리를 안타까워 하고 있다. 이는 우리 집에서 아내의 문화생활이라고 하는 것이 거의 교회와 관련되는 것을 내가 안타까워 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종교와 문화, 또는 종교와 정치가 엮이게 되면 항상 갈등을 빚어왔다. 그러나, 갈등을 손쉽게 봉합하여 후세에 종교가 욕을 먹게 되는 사건은 무수히 많았다. 우리나라에서는 신사참배를 받아들인 개신교회가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실제 생활에 적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것은 종교개혁의 중요한 모티브이기도 하다. 종교개혁 이전의 중세시대 말기에 종교에서 믿음은 없어지고, 종교의 조직만이 남아서 당시의 제사장이던 ‘교황과 신부’에 권력이 집중되었다. 종교개혁은 ‘만인 제사장’이라 하여, 이 권력을 일반 신도들에게 나눠주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종교개혁으로 일반 성도도 제사장이 되었고, 여기에 부를 가지게 된 영국 비국교도들의 종교적, 세계사적 책무는 컸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이 오목사가 이 책에서 설명하는 ‘교양’을 가졌다면, 인류는 더욱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갔을 것이다. 불행히도 그들은 정치에 참여할 수 없었으므로, 사회적인 책임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고, 성서읽기와 돈벌이에만 빠져 있었다. (우리나라 개신교도들에게 일반화된 모습이다.) 동시에, 그들의 신앙은 종의 기원(1859) 등 새로운 과학에 의해 공격받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오목사는 성서읽기에만 몰두하면 건강한 인지구조를 가지지 못 할 위험이 있다고 개신교도들에게 경고한다. ‘유연한 지성과 심미적인 경험 부족’으로 지성구조가 왜곡된다. 내가 생각하건데 최근에 비슷한 예로는 기독교인들중에 극우성을 띄게 되는 이들이 이에 해당되는 거 같다. 그런데, 비국교도들의 정치적인 관심은 ‘자유’였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자유’에 대한 논란이 많이 되고 있지만, 그들이 주장하는 자유는 귀족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서 마음대로 생산을 하고, 상거래를 하는 자유를 말한다. 민주주의 근간이 자유와 평등이라면, 그들은 그중 자유에 더 방점을 두었다. 마르크스(1848 공산당 선언)는 자유만 주장하는 이들 자본가들의 위험에 대해서 평등의 관점에서 얘기했다고 할 수 있다.

‘유연한 지성과 심미적인 경험’이 무엇을 말하는가? 이 책에서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는다, 인격과 문화적 감수성, sweetness and light라고 표현하는데 내겐 좀 애매모호했다. 인류가 만들어낸 위대한 문학 작품과 예술 작품을 즐길 수 있으며, 철학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고 느꼈다. 全人性이라고 할까? 이것은 미국인에 대해서 유럽인들이 느끼는 우월감과 비슷한 맥락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이 책에서는 우매한 대중이 있음을 받아들인다. 아놀드는 귀족(야만인), 노동자(우중), 중간계급(속물 philistinism(블레셋))로 나누었고, 우중은 몰려다니기, 때려부수기와 맥주를 좋아하는 계층으로 표현한다. 찰스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에서 잘 묘사되는 계층이다. 21세기에는 전세계 90%이상이 초등교육을 받으므로 우중의 수준은 이보다는 많이 올라갔을 것이다. 당시에 중간계급인 비국교인들은 이들 우중을 계몽화(en-light-ment)할 의무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18세기에 시작된 존 웨슬리의 감리교는 19세기에 성결운동을 통해 사회개혁을 시도하기도 했다.

초기 기독교에서도 히브리의 종교성과 헬라의 이성적 문명간에 갈등이 있었다. 예루살렘을 거점으로 예수의 동생 야고보가 이끌던 히브리파와 헬라 문명의 적통인 바울이 이끌던 헬라파간에도 당시 정치적 상황을 대하던 태도가 달랐다고 할 수 있다. 히브리파가 형이상학에 더 가깝고, 헬라파는 현실주의적이었다고나 할까? 헬라파는 정치(민주주의)/경제적(자본주의) 시대변화에 적응하는 대안을 제시하기 좋은 태도를 가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적응을 한 후 ‘경건의 힘’이 사라지지 않도록 영성을 유지해야 하여야 한다는 것이 항상 어렵다. 오목사는 이것을 조화롭게 하는 힘으로 인문학이 주는 교양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것은 내 삶에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어떻게 하면 주중에 죄를 짓고 주일 예배에서 회개하는 교인에서 벗어나, 나의 삶 자체가 예배이고, 세상을 창조하기 전에 하나님이 계획하신 소명(calling)을 실천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오목사는 성경도 읽지만, 세익스피어도 읽으라고 한다. 예배에도 참석하지만, BTS 공연도 즐기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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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시대, 라 벨르 에뽀끄 3 - 만화로 떠나는 벨에포크 시대 세계 근대사 여행 아름다운 시대, 라 벨르 에뽀끄 3
신일용 지음 / 밥북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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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부터 3편까지를 기승전결로 나누면, 3편에 결에 해당한다. ‘라 벨르 에뽀끄라는 제목이 아름다우니 비극으로 맺어지는 것이 더 극적이다. 3권에 제국주의적 침략과 당시 최고의 문명국간의 전쟁을 배치한 것은 참 잘한 선택인 것 같다. 그러나, 이 책은 픽션이 아닌 다큐멘타리이므로,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려죽은 수많은 희생자들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르네상스 이후의 인문학과 과학의 발전과 산업혁명은 인류에게 위대한 약속을 하는 듯 했다. 야만의 시대를 벗어나서 이성의 시대가 되었으니, 자연을 정복하여 모든 이들에게 무한한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다는 약속이다. 그 약속의 실현에 대한 희망을 상당히 접게 한 것이 제1차 세계대전이다. 인간은 이성적이지 않았는데, 파괴력은 엄청나게 커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라 벨르 에뽀끄는 그 사실을 확인하기 전에 한껏 부풀었던 희망의 시대였다.


유럽에서의 풍요로운 라 벨르 에뽀끄를 위해 제국주의의 수탈이 있었고, 기독교 문화권이 아니면, ‘타자로 보고, 전혀 논리도 없이, 무절제한 욕망에서 비이성적인 침략을 하였다. 성경의 구약에서 보면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할 때, 이교도의 도시에 살아있는 모든 것을 죽이는 장면이 나온다. 대포와 함께 선교사들이 도착해서 전도하고, 전도가 되지 않는 이들은 구약의 가르침대로 마음대로 살상하고 약탈하는데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중국을 나누어 먹는데 협력하던 제국주의 국가들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서로 맞붙게 되는 것이 흥미롭다. 3권에서 나오는 2차 아편전쟁, 노일전쟁, 1차 세계대전에서 각국 플레이어들에 빙의하여, 전쟁 이야기를 맛깔나게 이끌어 가는 작가의 능력이 대단하다. 컴퓨터 게임에서처럼 죽어도 다시 리셋하면 살아나는 것이라면 전쟁은 매우 흥미진진한 게임인 것이다. 작가는 모든 플레이어들이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정도의 심리하에 흥미진진한 게임을 벌렸던 것을 보여준다. 그것을 위해 잘 발굴되어 서로서로 잘 짜여진 디테일을 준비하고, 작가의 상상력으로 버무려서 맛을 더한다. 하나의 예로 연합군의 틈바구니에서 뉴 플레이어 일본이 우습게 보이면 안된다라고 다짐을 하는 장면이 재미있다.

 

전쟁이 없는 기간이 오래되면, 남자들의 권력이 하락한다고 한다. 매우 가부장적인 말이다. 전쟁 이야기가 대부분인 3권은 그런 면에서 힘이 곧 정의인 가부장적 사고에서 작가는 이야기를 끌고 간다. 따라서, 패배자인 중국과 조선은 조롱의 대상이 된다. 마찬가지로 그 시대에 민초들의 저항이었던 의화단 운동도 희화적으로 그려진다. 그 민중의 저항은 아마도 마우저뚱의 대장정으로 연결되어 오늘의 중국을 이루어낸 힘일 수도 있는데 말이다. 작가가 1권에서 파리코뮌을 다루었던 것에 비하면 의화단에 대한 평가는 의외로 인색하다. 마찬가지로 조선을 다루는데도 제국주의적 사고에 근거한 식민사관적인 면이 엿보인다. 명성황후로 부르지 않겠다는 것은 나라를 지키지 못한 조정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을 읽을 수 있지만, 그렇다면, 어떤 나라는 제국이고, 어떤 나라는 왕국인가를 나누는 기준이 무엇일까 생각하게 한다. 반인류적이고, 비이성적이라도 다른 나라를 넘어뜨릴 수 있는 힘이 있으면 제국이 되는 걸까?

 

미국의 통킹만 사건은 양차대전이후에도 인류의 반성은 철저하지 못하여, 가부장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철학을 버리지 않고 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겠다. 그것은 또한 미국에서 군산복합체(military industrial complex)가 아직 기승을 부릴 수 있는 토양을 제공한다. 군국주의 프러시아에서 군대가 국가를 가지고 있다고 얘기하듯 군산복합체가 국가간의 긴장을 고조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 음모론만으로 치부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한다.

 

다큐멘타리에서 작가의 철학을 읽으려고 하는 것은 옳은가? 그가 제공하는 것은 피카소가 몽마르뜨에 계속 머무르지 않고, 끌리쉬의 큰 저택으로 이사간 것처럼 팩트일 뿐인데... 더구나, 가 피카소의 창작의욕을 약화시키지 않은 것도 팩트이다. 그러나, 팩트의 선택과 배치, 좀더 들어가서는 설명에서 사용하는 용어가 작가의 철학을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 철학의 후로꾸(fluke)로 멘쉐비키와 볼쉐비키를 설명하는 것이 재미있다. 이것은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과 중국이 세워지는 것으로 연결된다. 영국과 러시아가 유럽과 극동 아시아간에 해상무역로와 육상무역로를 놓고 경쟁하는 것은 최근의 남북통일과도 관련되는 대목이라 관심이 갔다.

아비뇽의 여인들(1907)을 현대 미술의 시작으로 보는 것은 표현 기법과 주제면에서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피카소는 주로 파리에서 살았지만, 미술의 새로운 시대를 열면서 주인공을 고향의 여인들로 삼은 것이 재미있다. 예수가 막달라 마리아에게 랍비가 되면서 신약의 시대가 열린 것처럼... 예술은 라 벨르 에뽀끄를 지나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고 있었다. 옛 것은 사라진다. 때로는 말없이, 때로는 러시아의 마지막 짜르처럼 화약냄새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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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시대, 라 벨르 에뽀끄 2 - 만화로 떠나는 벨에뽀끄 시대 세계 근대사 여행 아름다운 시대, 라 벨르 에뽀끄 2
신일용 지음 / 밥북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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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유적의 안내문이나, 비문의 약력을 꼼꼼이 읽어보았을 걸거고,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면 구글링을 하고, 관계되는 서적을 찾았을 것이다. 그 관계되는 서적은 아마존에서 세계에 몇 권 없는 그런 책일 수 있다. 판매부수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 영국 귀족이 쓴 책일 수도 있다. 그런 것이 하나의 점이 되었고, 그러한 점들이 연결되어 선이 되고 면이 되는 것과 같이, 점점이 알게 되었고 그것에 대해 생각해본 수많은 것들이 수십년 쌓여서 오늘 라 벨르 에뽀끄가 나왔을 것이다.

 

주관적으로 감지되는 욕망과 객관적으로 통용되는 욕망이 있다.(‘소유냐, 존재냐에리히 프롬 1976) 주관적 욕망은 무엇이든 남에게서 노획하려는 소유형 인간의 욕망이며, 그들은 단순히 소유할 뿐이므로, 그것에 대한 새로운 사상이나 새로운 관념에 맞닥뜨리면 불안해한다고 한다. 저자는 객관적인 욕망이 강한 존재형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내가 어떤 것을 안다(지식을 소유한다)’에 만족하지 않고, 그것이 소화하여 그것이 나에게는 무엇인가? 그리고, 다른 것과는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를 탐구하는 것을 즐기는 것 같다. 그의 뇌구조는 고구마 뿌리를 닮았다고 생각한다. 하나를 잡고 당기면 여러 가지가 끌려나오는.,.. 그의 뇌는 지식의 저장 창고가 아니고, 지식들이 서로 화학적 반응을 계속 일으키는 공장이랄 수 있겠다.

보통 책은 일직선으로 전개되어 선형적(linear)으로 쓰이지만, 그의 책은 하이퍼 텍스트적이다. ‘잠깐 옆으로 샜다라는 말이 자주 나오는 것은 그것을 의미한다. 몇 사람이 떠들며 얘기하는 술좌석을 닮았다. 어떤 사람(또는 사건이나 사물)을 볼 때, 그것과 연관된 많은 것들이 동시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라 벨르 에뽀끄는 그가 통감각적으로 빨아들인 경험들이 당신에게는 무엇인가를 묻고 있다.

 

작가란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는 이들이다. 이 책은 소유형 인간이 가지는 익숙함으로 시작해서, 자연스럽게 존재형 인간들이 느끼는 낯설음의 세계로 끌고 간다. 그는 쉽게 결론을 내지 않는다. 영국은 플라톤의 철인정치를 본딴 귀족정치이고, 프랑스는 피의 혁명을 받아들이는 똘레랑스적 민중정치이다라고 하면서 끝내지 않고, 마르크스가 왜 영국에서 자본론을 썼는지를 물으면서 당신의 생각을 한번더 뒤집는다. 드레퓌스 얘기도 에밀 졸라를 비롯한 진보의 선의에 의해 보수의 악의에서 구출되었다고 끝내지 않고, 드레퓌스와 뒤빠띠(수사를 조작한 장교)의 자손들의 얘기를 덧붙인다.

 

우리는 자동차를 타면서부터, 걸으면 볼 수 있는 것을 많이 놓치고 산다. 몽마르뜨, 런던, 로마에서의 시간은 사진으로만 남는다. “라 벨르 에뽀끄는 광장을 스쳐지나가지 않고, 뒷골목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싸구려 카페에서 그 거리의 술꾼과 대화한다. 몽마르뜨는 단순히 집시들에게 지갑을 털릴뻔한 장소로만 남지 않고, 파리코뮌의 피의 항쟁으로, 또한 사제무기를 품은 아나키스트들을 품었던 곳으로, 쉬잔 발라둥의 야생성이 자라난 곳으로,.. 다가와 우리에게 더욱 진한 감회를 일으킨다.

 

효율성에 목매는 자본주의는 모든 것들을 줄 세우고, 앞선 것들은 사다리를 걷어차고 있다. 그러나, 하나하나의 뒷골목이, 또한 어느 때 어느 한 곳에서 일어난 것들이 모두 의미를 가진다면, 그 사다리를 굳이 올라갈 필요가 없다는 배짱을 가질 수 있지 않겠는가? 고호의 그림이 생전에는 하나밖에 팔리지 않았는데 최근 경매장에서 수백만불에 팔린다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고호는 라 벨르 에뽀끄2”에서 보듯 진한 삶을 살았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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