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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튜 아놀드와 19c 영국 비국교도의 교양문제 - 중간계급의 속물성과 자유개념을 중심으로
오형국 지음 / 독타피에타스 / 2020년 4월
평점 :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국민 총생산(GDP)은 20세기 초반을 지나면서 급격히 올라간다.(100년 동안 거의 2천배 상승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럽이나 미국이 그전에 어땠을까? 19세기 중반에 프랑스의 유아 사망율은 30%이상이었고, 70%가 넘는 사람들이 평생 반경 10Km를 벗어나지 않았다면, 믿어지는가? 우리가 알고 있는 유럽이나 미국의 역사는 거의 상위 10%이내의 상류층의 역사이다.
매튜 아놀드는 1822년 나고 1888년에 죽었다. 그러니까, 10% 상류층에서 역사의 중심이 그 하위로 이동하기 시작할 때의 일이다. 오목사의 책은 산업혁명 후 부를 축적한 영국의 중간계급의 얘기이다. 재력으로만 계층을 나눈다면 충분히 상류였지만 그들이 가진 종교로 해서 정치적으로 중요한 직책을 맡지 못 하였다. 영국 국교를 믿는 자만 귀족이 될 수 있었다. 중간계급은 국교를 거부한 비국교도, 프로테스탄트(protestants, 저항하는 사람들)였다. 아예 메이플라워를 타고 미국으로 떠난 사람들은 그들만의 나라를 건설하였지만, 영국에 남은 이들은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의 윤리와 자본주의의 정신’으로 새로운 시대의 주역이 되어 가고있었다. 신일용의 만화책에서 나오는 파리 코뮨(1871)에서 보듯 역사의 중심이 더 하층부로 내려갈 수 있었던 것은 19세기 중반에 아놀드와 같은 이들의 투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번도 새로운 질서에 대한 꿈이 없던 시절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앞서 산업혁명을 얘기했듯 경제적인 부가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하는 19세기 중반부터 꿈과 그 꿈의 현실화의 시간 간격은 점점 짧아지고 있다. 오목사의 관심은 이때 신앙과 문화의 관련성에 관한 것이다. 오목사는 그의 그전 저서들의 제목이 의미하듯이 종교와 문화의 분리, 나아가서는 종교와 세속사회의 분리를 안타까워 하고 있다. 이는 우리 집에서 아내의 문화생활이라고 하는 것이 거의 교회와 관련되는 것을 내가 안타까워 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종교와 문화, 또는 종교와 정치가 엮이게 되면 항상 갈등을 빚어왔다. 그러나, 갈등을 손쉽게 봉합하여 후세에 종교가 욕을 먹게 되는 사건은 무수히 많았다. 우리나라에서는 신사참배를 받아들인 개신교회가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실제 생활에 적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것은 종교개혁의 중요한 모티브이기도 하다. 종교개혁 이전의 중세시대 말기에 종교에서 믿음은 없어지고, 종교의 조직만이 남아서 당시의 제사장이던 ‘교황과 신부’에 권력이 집중되었다. 종교개혁은 ‘만인 제사장’이라 하여, 이 권력을 일반 신도들에게 나눠주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종교개혁으로 일반 성도도 제사장이 되었고, 여기에 부를 가지게 된 영국 비국교도들의 종교적, 세계사적 책무는 컸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이 오목사가 이 책에서 설명하는 ‘교양’을 가졌다면, 인류는 더욱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갔을 것이다. 불행히도 그들은 정치에 참여할 수 없었으므로, 사회적인 책임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고, 성서읽기와 돈벌이에만 빠져 있었다. (우리나라 개신교도들에게 일반화된 모습이다.) 동시에, 그들의 신앙은 종의 기원(1859) 등 새로운 과학에 의해 공격받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오목사는 성서읽기에만 몰두하면 건강한 인지구조를 가지지 못 할 위험이 있다고 개신교도들에게 경고한다. ‘유연한 지성과 심미적인 경험 부족’으로 지성구조가 왜곡된다. 내가 생각하건데 최근에 비슷한 예로는 기독교인들중에 극우성을 띄게 되는 이들이 이에 해당되는 거 같다. 그런데, 비국교도들의 정치적인 관심은 ‘자유’였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자유’에 대한 논란이 많이 되고 있지만, 그들이 주장하는 자유는 귀족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서 마음대로 생산을 하고, 상거래를 하는 자유를 말한다. 민주주의 근간이 자유와 평등이라면, 그들은 그중 자유에 더 방점을 두었다. 마르크스(1848 공산당 선언)는 자유만 주장하는 이들 자본가들의 위험에 대해서 평등의 관점에서 얘기했다고 할 수 있다.
‘유연한 지성과 심미적인 경험’이 무엇을 말하는가? 이 책에서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는다, 인격과 문화적 감수성, sweetness and light라고 표현하는데 내겐 좀 애매모호했다. 인류가 만들어낸 위대한 문학 작품과 예술 작품을 즐길 수 있으며, 철학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고 느꼈다. 全人性이라고 할까? 이것은 미국인에 대해서 유럽인들이 느끼는 우월감과 비슷한 맥락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이 책에서는 우매한 대중이 있음을 받아들인다. 아놀드는 귀족(야만인), 노동자(우중), 중간계급(속물 philistinism(블레셋))로 나누었고, 우중은 몰려다니기, 때려부수기와 맥주를 좋아하는 계층으로 표현한다. 찰스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에서 잘 묘사되는 계층이다. 21세기에는 전세계 90%이상이 초등교육을 받으므로 우중의 수준은 이보다는 많이 올라갔을 것이다. 당시에 중간계급인 비국교인들은 이들 우중을 계몽화(en-light-ment)할 의무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18세기에 시작된 존 웨슬리의 감리교는 19세기에 성결운동을 통해 사회개혁을 시도하기도 했다.
초기 기독교에서도 히브리의 종교성과 헬라의 이성적 문명간에 갈등이 있었다. 예루살렘을 거점으로 예수의 동생 야고보가 이끌던 히브리파와 헬라 문명의 적통인 바울이 이끌던 헬라파간에도 당시 정치적 상황을 대하던 태도가 달랐다고 할 수 있다. 히브리파가 형이상학에 더 가깝고, 헬라파는 현실주의적이었다고나 할까? 헬라파는 정치(민주주의)/경제적(자본주의) 시대변화에 적응하는 대안을 제시하기 좋은 태도를 가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적응을 한 후 ‘경건의 힘’이 사라지지 않도록 영성을 유지해야 하여야 한다는 것이 항상 어렵다. 오목사는 이것을 조화롭게 하는 힘으로 인문학이 주는 교양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것은 내 삶에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어떻게 하면 주중에 죄를 짓고 주일 예배에서 회개하는 교인에서 벗어나, 나의 삶 자체가 예배이고, 세상을 창조하기 전에 하나님이 계획하신 소명(calling)을 실천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오목사는 성경도 읽지만, 세익스피어도 읽으라고 한다. 예배에도 참석하지만, BTS 공연도 즐기라고 한다.